물속의 세 여인/고윤자
낮 열두 시 경이 가장 한가한 시간이다.
이 시간엔 수영장에 거의 사람이 없다. 그런데 그 시간이라고 나 혼자만의 수영을 즐기도록 내버려 두지는 않았다. 나와 같은 생각을 가진 다른 두 사람이 더 있어서 그 시간대를 점유하는 세 사람이 되었다.
내가 있고, 다른 한 사람은 15도이고 다른 한 사람은 45도이다. 이 시간을 택한 이유는 그들도 나와 마찬가지로 남에게 숨기고 싶은, 구태여 펴 보이고 싶지 않은 무언가가 있어서 일 것이다.
두 여인 모두 소아마비로, 걸을 때마다 옆으로 기울어지는 각도를 보며 내 마음속으로 지어준 이름이다. 모두 인물이 보통 이상이었고 집안도 꽤 부유해 보였다. 처음 이 두 사람을 수영장에서 만났을 때는 난 제법 우월감을 느꼈었다. 예쁜 수영복을 자주 갈아입고 뽐내기도 했고, 나 혼자 정상인이라고 생각하며 수영장 물속으로 뛰어들곤 했다. 철이 없던 때이다.
철이 없는 사람을 철부지(철 不知)라고 쓴다. 농사를 짓는데, 봄, 여름, 가을, 겨울의 때를 모르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그 진단만 정확하면 그 사람 인생의 절반은 성공한 사람이리라.
벌써 수영을 시작한 지 이십 년 가까이 지났다. 무더운 여름에 물속에서 헤엄을 치고 있노라면, 이 더위에 테니스나 골프 치느라고 밖에서 고생하고 있을 다른 사람들을 생각하며, 야외에서 하는 운동처럼 춥거나 덥지 않아도 되어서 행복했다. 남이 가지지 못한 기회를 누리는 것이 그것이 곧 행복이라고 느끼던 때의 일이다. 눈을 뜨고 있어도 보이는 게 없고 눈을 감으면 천지가 다 내 것이던 시절이었다. 그때는 나에게 오늘과 같은 어려운 시간이 찾아올 줄은 몰랐다.
누가 물으면 내가 가장 잘할 수 있는 수영은 자유형이라고 말했다. 자유형은 엄지손가락을 고정하고 네 손가락으로 물을 내리면서 손목부터 전완근으로 물을 걸어서 미는 영법(泳法)이다. 자유형은 7할이 손, 3할이 발의 힘이다.
배영은 어떤가. 어머니 자궁 안 양수 속에서 노는 태아처럼, 편안함을 향유하며 떠다닐 수 있다고 장담하던 때도 있었다.
평영은 물 저항을 많이 받기 때문에 잠영으로 스타트해서 직선으로 쭉 나아가야 한다고 친구에게 도움말을 준 적도 있다. 접영은 발을 안짱다리로 하고 머리는 들지 않고 다리 무릎이 많이 굽혀지지 않게 짧게 차야 한다. 허리가 유연했던 나는, 제법 접영도 예쁘게 할 수 있었다.
그렇게 당당했던 나에게 어려운 시간이 찾아올 줄은 몰랐다. 디스크에 척추 협착증까지 겹쳐오면서 물에서 나의 몸은 자유롭지 않았다. 옛날엔 감기에 걸릴 정도로 몇 시간이고 수영을 즐겼던 때도 있었다. 아주 늙을 때까지 즐길 수 있는 운동은 수영밖에 없다고 역설한 적도 있었다. 지금의 나는 차가운 물에서 몇 미터도 못 가서 다리에 마비가 오곤 한다. 나는 같이 수영하는 다른 젊은이들에게는 되도록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쉽게 설명한다. 그들에게는 내가 준비운동을 안 해서 쥐가 났다고 설명한다. 척추 협착증으로 자주 일어나는 마비라고는 말하기가 싫었다. 수영 가이드들이 쫓아와 종아리 마사지를 해 주겠다고 하지만, 나는 그런 나 자신이 부끄러웠고 특히 내가 우월감을 가졌던 두 여인에게 더 부끄러웠다.
소아마비 환자들에게 우월감을 느꼈던 것은 나의 무지로부터 비롯됐다. 일단 수영장에 들어오면 그들은 자유자재이었다. 두 사람 모두 재력이 뒷받침되어서 특별한 강습을 받은 결과이겠지만, 불편한 한쪽 다리는 기억(ㄱ) 자로 그대로 물에 떠 있고 두 팔과 나머지 한쪽 다리로 유연하게 수영을 즐겼다. 내가 삼십 분이나 사십 분 겨우 채우고 나올 무렵에도 15도와 45도는 아직 수영장에서 그대로 자유롭게 떠다니고 있었다.
두손 두발이 자유로운 나는 항상 그들보다 먼저 퇴장해야만 했고, 먼저 걸어 나오는 내 기분은 항상 그들의 뒤로 밀리고 만다.
그들은 바이러스라는 어쩔 수 없는 적에 의해서 받게 되는 형벌이지만, 전혀 본인들의 책임은 물을 수 없는 일이다. 나는 내 발을, 내 다리와 허리를 혹사하고도 영원히 써먹을 수 있을 것이라는 무지한 자만심 때문에 받게 되는 가혹한 벌이다. 이제 늙어서, 아침에 일어나서 마주하는 배변 활동이, 무슨 대단한 어려운 수학 문제를 풀어낸 것처럼 희열을 느낄 나이가 되고서야, 허리와 다리를 오랜시간 마구 부리고 전혀 대우를 못 해 준 사실을 뼛속 깊이 후회한다.
그녀들은 소아마비이고 나는 어른이 되어 받게 된 노년 마비가 아닌가. 기댈 것이 없으면 혼자 오래 서 있지도 못하고 집에 불이 나도 달려가지도 못하는 장애인이다. 아직도 15도와 45도 에게 우월감을 느끼고 싶은 나는, 그들보다 더 불치의 정신적 장애를 갖고 있음이 틀림없다.
동료 의식을 갖기보다는 그들을 존경하는 마음으로 꼭 내 앞에 세워주고 싶었다. 사람들은 자기의 노력이 아닌, 우연히 부여받은 월등한 신체로 오만하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유대인의 속담 중에 “태양은 당신이 없어도 뜨고 진다” 는 말이 있다. 자기가 작고 미흡하다는 것을 알고 우선 고개를 숙일 줄 아는 것이, 사람다워지는 일의 첫걸음이다.
얼마나 오랜 세월을 이유 없이 우쭐대는 친구들과 내려다만 보려고 하는 세상의 눈을 견뎌내야만 했을까. 그녀들은 나보다 이 수도의 길을 먼저 걸어왔고 그들을 뒤쫓아 가고 있는 존재가 나이기 때문이다. 나는 15도와 45도 앞에 자랑스럽게 서 있는 나 자신을 억지로 끌어 잡아당겨서 그들의 뒤로 줄 세우기를 한다.
내 뒤에 아무도 서 있지 않은 맨 끄트머리에 나를 세워놓으니, 그제야 마음이 편해진다.
첫댓글 고윤자선생님께 허락을 받고 신작을 올립니다.
수필의 본질은 작가 개인의 정체성 탐구라고 했는데 수영이라는 하나의 소재로 자신을 깊이 들여다 보는 아름다운 글입니다.
수영이 취미라시더니 잠수함급 자아성찰을 보여주십니다. ^^
철 不知가 이런 뜻이었음을 배웁니다. 작가는 작품으로 말합니다. 훌륭한 작품입니다.
저는 운동중에 가장 잘하는 게 수영이었습니다.
두번째는 산행인데 수영도 산행도 벌써 나이를 실감합니다. 기운 딸리는 것은 당연하다지만 갑자기 예고도 없이 병이 찾아온다는 게 두렵네요. 좋은 작품 올려주셔서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