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태어난 집은
 
우리 6남매가 태어난 곳은 일제시대에 지어진 적산가옥이었다. 2층집이었는데 철근 콘크리트는 아니었지만 철거할 때 애를 먹을 정도로 단단하고 잘 지은 집이었다. 1층은 가정집으로, 그리고 2층은 사진관으로 썼는데 1층과 2층은 나무 계단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어린 시절 사진을 보면 곱슬머리 꼬마애가 계단에 앉아 웃고 있는데 그게 바로 나였다. 이 계단은 경사가 급해 자칫하면 구를 수 있으므로 늘 조심조심 내려오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아버지 말씀에 따르면 1935년경에 이 집이 지어졌다고 하니 그대로 보존되었다면 90살이 되었을 것이다. 1층의 안방은 우리 6남매의 공간이었는데, 우리는 이곳에서 함께 자고, 먹고, 놀았다. 안방은 일본식 다다미방이 아니고 온돌방으로 개조해서 늘 따뜻했다. 그리고 사진관에서 일하는 기사들이 안방에서 식사를 했는데 한참 젊은 나이라 장난이 심했다. 하루는 어머니가 반주로 포도주를 내오셨는데 기사 중 한 명이 밥뚜껑에 술을 따라 내게 주었다. 그때 내 나이 5세 정도였을 것이다.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도 분간 못하고 꿀꺽 꿀꺽 마셔 버렸다. 마시고 10분 정도 되었을까, 갑자기 얼굴이 붉어지고, 어지럽고, 비틀거리자 기사들은 박장대소를 하고 웃어댔다. 나는 그대로 방에 누워 잠들고 말았는데 아마도 최연소 음주가가 아니었을까? 그 여파로 18세 때까지는 일체 술을 입에 대지 않았다. 
 
아버지는 젊은 나이에 만주에 가셔서 토목과 사진을 업으로 하셨는데 해방이 되어 돌아오셔서는 사진에만 전념하셨다. 길가 쪽으로 난 우리 집 사진진열장에는 사진틀이 6개가 있었는데 그 당시 일류 배우들과 함께 나도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맨 왼쪽에 있는 내 사진은 초등학교 1학년 때 양복을 입고 볼펜을 쥐고 찍은 것이다. 6남매 중 유독 내 사진만 진열한 까닭은 딸 셋을 낳은 후에 나은 장남이라 아버지가 특별히 걸어주신 것 같다. 지금은 아들, 딸 구별이 거의 없어졌지만 그 당시에는 차별이 심해서 딸들은 거의 대접을 받지 못했다. 오죽했으면 셋째 딸을 낳을 때는 아버지가 쳐다보지도 않고 외출을 하셔버렸을까. 그리고 이 진열장 밑은 사람이 들어가 숨을 수 있을 정도로 넓은 공간이 있어 우리들의 숨바꼭질 놀이터가 되기도 했다. 술래는 의례히 한 번은 이곳을 살펴보는데 비단 우리 형제 들 뿐만 아니라 동네 친구들도 얼마든지 숨을 수 있는 개방된 공간이기도 했다.
 
집 뒤에 있는 뜰인 뒤꼍에는 장독대와 작은 마당이 있었다. 어머니는 날마다이른 새벽에 정안수를 떠다 놓고 가족들 무탈하기를 기원하셨다. 이곳이 바로 어머니의 기도처인 셈이다. 학교에 안갈 때면 우리 형제들은 뒤꼍에서 땅따먹기 놀이를 하였다. 그리고 그 때는 아버지가 건강을 위해 국궁을 쏘실 때라 못 쓰는 화살을 아버지께 얻어서 나무 벽에 과녁을 붙이고 쏘곤 했다. 
 
뒤꼍은 우리 집 옆의 호텔건물과 맞닿아 있었는데 가끔씩 분쟁이 일어나곤 했다. 왜냐하면 호텔 투숙객이 음료수를 먹고 우리 쪽으로 캔을 던져버리기 때문이었다. 어린 마음에도 우리 형제들은 우리가 자라면 호텔 보다 더 큰 집을 지어 우리가 호텔에 오물을 버리자고 했다. 뒷날 이 맹세는 부모님이 이루어주셨는데 두 분이 호텔을 매입하여 그 자리에 예식장을 지으셨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1층의 문간방에서 지내셨는데, 이 방 안쪽에는 사진을 현상, 인화하는 암실이 있었다. 하루의 일과가 끝나고 아버지와 기사가 암실에 들어가
현상작업을 하고나면 어머니는 커다란 대야에 물을 받아 사진을 세척하신다. 수도를 밤새 틀어놓아 사진에 남아있을지 모를 현상액을 말끔히 씻어 내시는데 매일 이 작업을 하시니 어머니의 손은 습진에서 자유로울 날이 없을 지경이었다.
 
내 나이 14살 때 드디어 대공사가 시작되었다. 빚에 빚을 내어 어머니가 예식장 건물을 지으신 것이다. 처음부터 아버지는 반대하셨지만 어머니의 끈질긴 설득으로 착공하게 된 것이다. 공사는 처음서부터 끝까지 힘이 들었다. 옛 호텔 건물을 헐어내야 했고, 이웃 상인들과의 마찰도 끝임이 없었다. 공사 도중에는 철근이 품귀가 되어 통나무를 심으로 넣기도 했다. 우여곡절 끝에 준공이 되었고 영업이 시작되었다. 돈은 적지 않게 들어왔으나 원리금을 갚느라 다 나가버렸다. 어머니는 우리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넉넉잡고 5년만 버티자. 그 고비만 넘기면 저축하면서 살 수 있으니.”
옛집은 비록 사라지고 없지만 그 터전 위에 어머니의 집념이 더해져 우리는 4년 여 만에 빚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 후 이번에는 아버지가 증축공사를 진두지휘하신 끝에 예식장으로서 제법 틀을 갖추게 되었다,
 
부모님 두 분이 다 돌아가시고 빈 건물은 맡을 자식이 없어 결국 처분하고 말았다. 그리고 우리가 태어났던 옛집의 모습은 이제 사진으로만 남아 그 모습을 전해주고 있다. (끝)
	 					
	
	 
첫댓글 당시 기준으로는 집안이 풍족했던 것 같네요.
저희들이 부모님복이 있어 조금 여유로운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오래전 유년시절의 기억은 평생 가는 듯합니다.
저도 산골에서 살던 유년시절의 기억이 가장 또렷하게 남아 있습니다.
편안한 일요일 되시기 바랍니다.
건강이 좋지 않아 출판기념회에 가지 못해 미안합니다.
건강한 주일 되시기 바랍니다.
댁이 어디었다고 하면 저도 알 것 같은 곳이네요.
그래도 비교적 유복하셨던 어린 시절이 행복한 추억으로 기억날 것 같습니다.
환절기 건강 유의하고 잘 지내세요.
늘 건강하고 다복하시기를 빌게요.
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