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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스 다윈 Charles Robert Darwin 개정만 5차 --- 총 6차 출판
생애 [편집] 유년기 영국 슈루즈버리(Shrewsbury)에서 의사인 로버트 워링 다윈의 2남 4녀 중 다섯째 아이이자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할아버지 에라스무스 다윈은 노예제도에 반대하는 진보적 지식인이었다. 다윈과 그의 여자형제들은 어머니와 사별했고, 아버지는 아이들이 혹시 비뚤어질까봐서 심하게 꾸짖거나 하지는 않았다. 이러한 집안의 가풍은 다윈이 어진 성품과 당시로선 자유로운 성공회믿음을 가지게 하였다.
학창시절
1817년-1825년 초중등 교육을 받았는데, 초등학교 시절 다윈은 학생들의 재능과 개성을 살리지 못하는 암기위주 교육때문에 수업에 집중하지 못했다. 그래서, 교사에게서 심한 욕을 듣기도 했다.
1825년 자유로운 분위기의 에든버러 대학 의학과에 입학해
1827년까지 다니다가 중퇴했다. 그 이유는 아직 마취학이 등장하기 전이라 엄청난 고통을 겪는 환자들의 모습을 보고 의사가 될 생각을 접었기 때문이다. 1827년
아들이 성공회 신부가 되기 바라는 아버지 뜻 따라, 케임브리지대학교 신학과에 입학해
1831년에 졸업했다.
하지만 다윈 본인은 성공회 교회에서 목회보다는 생물학에 관심이 많아서,
같은 해 12월 27일 비글이라는 이름의 탐험선 타고 약 5년(1836년 2월 10일까지) 동안 탐사 여행을 했다.
당시 그는 생물학자로서 승선한게 아니라, 지식인들과의 교류를 원하는 선장의 지적 욕심에 따라 승선한 것이었다.
진화론의 역사 1 (20 세기 이전) (History of Evolutionary Theory 1)
진화론의 역사는 거짓과 사기극과 절망의 이야기이다.
이것은 탁상공론이요,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 같은 동화이다.
또한 이것은 공산주의와 나치즘의 여행 동료였다.
진화론의 역사 1. 20세기 이전 : 오히려 일관되고 훌륭한 과학자들은 이 이론을 거부했다.
진화론의 역사 2. 1900 ~ 1950년 : 이 이론을 구조하려는 절망적인 노력
진화론의 역사 3. 1950 ~ 현재 : 위스타(Wistar)나 다른 회의들은 그것이 발생할 수도 있다는 마지막 희망을 무너뜨렸다.
진화론의 역사 1 (History of Evolutionary Theory 1)
시종일관 진화론의 기초를 만들어 낸 사람들은 과학적 능력이 부족한 사람들이었다. 오늘날 우리는 그들이 꿈꾸었던 탁상공론에 올라 앉아있다. 1장에서는 20세기 이전에 이루어진 진화론의 역사에 관한 것이다. 이것은 과학 대 진화이다. Creation-Evolution Encyclopedia은 당신에게 창조과학의 진실을 알려줄 것이다. * 표를 한 사람들은 비창조론자들이다.
진화론의 역사 2 (1900 ~ 1950 년대) (History of Evolutionary Theory 2)
여기에 한 세기를 지나서 1950년대까지 놀라운 역사가 있다.
진화론이 신화라는 것은 분명하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 증거를 발견하려고 노력했지만 할 수 없었다.
이것은 과학 대 진화이다. * 표를 한 사람들은 비창조론자들이다.
진화론의 역사 3 (1950 ~ 현재) (History of Evolutionary Theory 3)
20세기 후반에 들어서서 진화론은 완전히 실마리가 풀렸다. 모든 면에서 어떠한 간단한 증거도 발견되지 않음이 명백해졌다. 그러나 진화론자들은 아직도 그들의 이론이 과학적 사실이라고 공공연히 나팔을 불고 있다. 이것은 part 3 에서 결론이 내려졌다. 진화론은 신화이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창조했다. 수많은 증거들이 그것을 가리키고 있다. 산처럼 많은 증거들을 그들은 설명할 수 없다. 이것은 과학 대 진화이다. * 표를 한 사람들은 비창조론자들이다.
1950년부터 현재까지,
*Julian Huxley(1887∼1975)는 20세기 중반무렵에 진화론의 선두주자였다. 다윈의 파트너로서 '다윈의 불독'이라 불리던 토마스 헉슬리(Thomas Huxley)의 손자로서, 줄리안 헉슬리는 진화론을 고수하며 심혈을 기울인 노력으로 미국에서 중요한 위치까지 올라갔다.
*Immanuel Velikovsky는 진화론의 세력에 반대를 표명하는 또 한명의 반란자였다. 그는 저서에서 달과 지구가 과거에 충돌하였으며, 그 결과 대격변이 지구상에 있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사실이 아니었지만, 그의 책은 사람들에게 지구역사 초기에 대홍수와 같은 대격변이 일어났음을 말해주는 충분한 증거들을 더 가까이서 볼 수 있게 해주었다.
Darwinian centennial celebration(다윈설의 100주년 기념). 다윈의 종의 기원 100주년을 기념하여, 1959년 11월 시카고 대학에서 일주일동안 모임이 열린 적이 있었다. 토마스 헉슬리(Thomas Huxley)의 손자인 줄리안 헉슬리(Julian Huxley)는 하나님에 대한 총체적인 거부에 초점을 맞춘 글들을 남겼다.
다윈의 유언 - 하나님만이 진리이시고 진실하신분입니다.
진화론의 창시자인 찰스 다윈은 인생의 말년을 매우 우울하게 보냈다.
다윈이 운명하기 몇 달 전, 호프 부인이 병실에 누워 있는 그를 방문했다. 성경을 펼쳐 들고 있던 다윈에게
호프 부인이 물었다. “지금 무엇을 읽고 계신가요?” -
다윈은 쓸쓸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성경입니다. 아주 고귀한 생명의 책이지요.”
호프 부인은 창세기를 펼쳐 보이며 다윈이 주장한 진화론의 허구를 설명했다. - 그러자
다윈의 얼굴이 심하게 일그러지며 놀라운 고백을 했다. “나는 참 미숙한 젊은이였습니다.
나는 모든 사물과 현상에 대해 의심을 품고 접근했습니다.
진화론도 그 중의 하나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진화론을 학문이 아닌
창조론과 적대되는 종교처럼 신봉하게 되었지요.
제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위대한 창조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은혜를 증거해 주시오.”
진리는 죽음 앞에서 진위가 가려진다. 다윈은 죽음을 앞 두고 창조론을 진리로 고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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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를 속인 200가지 비밀과 거짓말>이라는 책을 보면
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에서 나온 내용이 의도적으로 '신봉'되고있는 듯한 내용 나옵니다.
그 책에서는 대략 아래와 유사한 내용을 언급 하고있습니다.
"보수 과학계는 찰스다윈에 이의 제기하려는 논문은 어떤 이유에서든 무시하고 짓밟는다.
한 과학자가 찰스다윈의 진화론의 맹점을 비판하는 논문을 발표하려고 하자,
보수 과학자들은 그 과학자의 논문을 무시해버렸다.
그 과학자의 비판은 과학적인 근거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이것을 보면 느껴지는 점...
역사가 힘있는자들에 의해 쓰여지듯이, 과학도 힘있는자들의 합의물에 불과한것인가?
실제로 말입니다.
<종의 기원>에서는 '~라고 가정하자', '~일 것이다.'와 같은
구조도 많이 보인다고 합니다.
뉴턴의 이론도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이 등장하면서 반론이 제기되었고
수학에서도 복잡한 영역이 개척되면서 고대부터 절대시 되어오던 수학공식이 뒤바뀌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왜 보수과학계는 <종의 기원>에 대한 모든 비판을 짓밟는 것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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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아’ 다원으로부터 수많은 학문종이 진화했다
사냥질, 개 쥐잡기에만 관심있던 다원 사실 진화론은 당시에 새로운 게 아니었다
다원의 독창성은 그 진화가 자연 선택에 의해 진행된다고 주장한 데 있다
150년이 지난 지금 진화라는 이름은 단 다양한 학문들이 등장하고 있다
•“자연선택은 좋은 것만 보존하고 추가한다”
다원 ‘종의 기원’
“인류 역사상 최고의 아이디어를 낸 사람은 누굴까? 딱 한 사람만 골라야 한다면 나는 주저없이 그를 택하겠다.” 철학자 데넷은 그를 감히 뉴턴이나 아인슈타인보다 더 위대한 사상가라고 치켜세운다. “자연선택이라는 과정을 도입해 의미와 목적이 없는 물질 영역과 의미, 목적, 그리고 설계가 있는 생명 영역을 통합시켰기 때문”이란다.
하지만 에든버러대학에서 의학 공부를 채 2년도 못 채우고 낙향한 18살 청년을 그 누가 인류 역사상 최고의 아이디어를 낼만한 인물이라고 기대했겠는가? 오히려 그는 “사냥질, 개, 쥐잡기에나 관심이 있는 너는 가족과 네 자신에게 부끄러운 존재가 될 거다”라는 아버지의 폭언을 눈물로 삼켜야 했다.
1827년 다윈은 케임브리지대학으로 꾸역꾸역 신학을 공부하러 간다. 하지만 이번에도 마음은 콩밭에 가 있었다. ‘어떻게 해야 영국을 떠나 생명이 우글대는 열대림을 탐험할 수 있을까?’ 인류에게 ‘적응’이라는 화두를 처음으로 던진 그였지만 정작 그 자신은 주변 환경에 적응하는 데 계속해서 실패해 온 셈이다. 하지만 환경도 언젠가는 변하는 법. 다윈은 우여곡절 끝에 비글호에 승선하고 꿈에 그리던 남아메리카로 향한다.
만일 다윈이 비글호를 타지 못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5년 동안(1831~1836) 배멀미와 온갖 풍토병으로 고생할 일은 없었겠지만 ‘다윈’이라는 이름이 지금처럼 생존·번영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비글호 탐험을 끝으로 다시는 영국 밖을 나가 보지 못했을 만큼 다윈에게 그것은 매우 특별한 경험이었다.
길이가 26m밖에 안되는 비글호의 좁은 선실에서 그는 자신의 우상 라이엘이 쓴 <지질학 원리>를 탐독했고 정박지에서는 열대림과 해안의 온갖 동식물을 관찰·채집했다.
갈라파고스 군도 탐험은 비글호 항해 절정. 다윈은 섬마다 등껍질의 형태가 다른 덩치 큰 거북이에 신기해했고 부리 모양이 조금씩 다른 새들이 섬 주위에 흩어져 있다는 사실에 다소 의아해했다. 하지만 새를 표본으로 만들면서도 어디서 어떻게 채집했는지조차 기록하지 않았을 정도로 그곳의 생태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당시에는 알아채지 못했다.
영국에 돌아와 전문가의 조언을 들은 뒤에야 부리가 뭉뚝한 새와 뾰족한 집게 모양의 새가 서로 다른 핀치 종임을 알게 된다. 핀치들이 현재와 같은 모습으로 독립적으로 창조된 것이 아니라 대륙의 공통조상으로부터 갈라져 나왔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싹트게 된 것도 이때부터인 것 같다. 1837년 다윈의 비밀 노트에는 한 종이 새로운 종으로 가지치기를 해나가는 계통도가 처음으로 그려져 있다.
꿈에 그리던 갈라파고스 군도 탐험
이듬해 다윈은 맬서스의 <인구론>(1798)을 정독하며 생존경쟁 개념의 중요성 깨닫는다.
1859년 11월, 우여곡절 끝에 <종의 기원> 흔히 알려진
1권 - <자연선택에 의한 종의 기원에 관하여> 초판 출간.
왜 여기에‘우여곡절’이라는 단어를 쓸 수밖에 없는지에 대해서는 설명이 필요하다.
1844년 자연선택에 대한 생각을 잠시 접은 다윈은 무려
8년간이나 따개비 연구에 몰두해 1천 쪽에 달하는 연구서를 출판(1851)했고 그로 인해 자연사학자로도 권위를 얻게 됐다.
이에 자신감을 얻은 그는 1854년부터 자연선택 연구를 재개한다.
그러던 중 1858년 6월, 말레이 군도를 탐험하고 있던 젊은 자연사학자 월리스로부터 한 통의 편지를 받는다.
편지를 읽고 있는 다윈의 표정은 점점 굳어져갔다. 어쩌면 조용히 자기 방으로 들어가 문을 잠그고 대성통곡을 했는지도 모른다. 그 편지에는 다윈이 20년씩이나 공들여온 생각이 너무도 간결하게 요약된 한 편의 논문이 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다윈은 그동안의 연구를 모두 불태우는 한이 있더라도 월리스의 생각을 훔쳤다는 말은 듣고 싶지 않았다. 낙담한 다윈에게 라이엘과 후커가 흥미로운 제안을 한다. 자연선택에 관해 월리스와 공동으로 논문을 발표하라는 것. 놀랍게도 이 혁명적 이론의 발표는 조용하게 끝이 났다. 더욱 놀랍게도 발표가 끝난 뒤에야 이 소식을 듣게 된 월리스도 이 일을 불쾌해하지 않았다. 월리스를 끝까지 챙긴 다윈과 그런 다윈을 일평생 선생으로 받들었던 월리스의 특별한 우정 때문이었으리라. 이후 다윈은 몇 달을 달라붙어
2권 ----- <종의 기원>을 집필하게 된다.
1판 <자연선택에 의한 종의 기원에 관하여>1250부 하룻만에 매진.
2판 <종의 기원>은 인공 교배로 생긴 변이들에 대한 논의부터 시작한다.
이 논의를 위해 다윈은 비둘기 교배 전문가들과 실제로 많은 시간을 함께 했다. 그는 인공 선택에 의해 새로운 품종이 나올 수 있다면 자연 선택에 의해서는 새로운 종이 나올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자연 변이들은 제한된 환경에서 다 살아남을 수 없기 때문에 생존 경쟁이 불가피하다. 자연선택은 바로 이 과정에서 일어난다. 그것은 조금이라도 생존에 유리한 형질이 살아남아 자손을 퍼뜨리는 과정이다. 물론 부모 형질이 자식에게 대물림되는 과정도 필요하다. 이 모든 문제를 다룬 후에 특이하게도 다윈은 예상 반론을 정리하고 그것을 조목조목 검토하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종의 기원>은 매우 방어적인 책이며 다윈도 고백하듯 ‘하나의 긴 논증’이다.
생명이 진화한다는 주장 자체는 그 당시만 해도 새로운 것은 아니었다. 프랑스의 라마르크도 있었고 심지어 다윈의 할아버지 에라스무스 다윈도 비슷한 주장을 했었다.
<종의 기원>의 독창성은 그 진화가 자연 선택에 의해서 진행되며 그 결과 생명이 마치 나뭇가지가 뻗어나가듯 진화한다는 사실을 밝혀준 데 있다. 위대하면서도 이해하기 쉬운 과학이론은 드물지만 자연선택론은 초등학생에게도 통하는 간단한 논리구조로 돼 있다. 그러니 헉슬리의 30자 평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이 쉬운 자연선택을 생각해내지 못했다니, 이런 바보 같으니!”
<종의 기원>에 대한 다른 독자들의 반응은 어땠을까? 초판 1250부가 하루 만에 매진됐다. 하지만 학자들의 평가는 훨씬 더 조심스러웠다. 다윈은 당대 학자들의 비판에 대응하기 위해
3판부터 내용을 대폭 손질하는 등 1859~1872년까지 무려 <다섯 차례 개정판>을 냈다.
용어 사용과 관련해서도 흥미로운 변화가 있었다. 오늘날 진화론이라 하면 대개 적자생존부터 떠올리는데 이는 당대 철학자 스펜서의 영향 때문이다. 다윈 자신도 그 영향으로
5판부터 ‘적자생존’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더 놀라운 사실은 ‘진화’라는 용어 자체도 원래 다윈 것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그는 줄곧 ‘변형을 동반한 계통’이라는 용어를 써오다가
6판 가서야 ‘진화’로 대체한다.
동상이몽인가? 스펜서는 적자생존 개념을 인간사회에 적용하여 ‘사회 다윈주의’라는 정치 이념을 창안했으며 훗날 인종주의와 우생학의 원흉으로 몰리기도 한다.
다윈의 자연선택론은 19세기 후반부터 1910년대까지 잠시 암흑기를 맞다가 집단유전학이라는 구원 투수를 만나 극적으로 회생한다. 그리고 1940년대에는 이른바 ‘근대적 종합’으로 완성된다.
<종의 기원>이 탄생한 지 150년 쯤 지난 지금,
다윈의 자연선택론은 적어도 생물학 영역에서 만큼은 강력한 패러다임으로 자리 잡았다. “심리학은 새로운 토대 위 세워질 것”이라는 다윈의 예견대로 최근에는 진화심리학이라는 학문이 등장하여 학계에 주목 받고 있으며 ‘다윈 의학’ ‘진화 철학’ ‘진화 경제학’ 등 앞에 ‘다윈’ 혹은 ‘진화’라는 단어가 붙은 학문들이 가지를 치고 있다. 마치<종의기원>이라는 공통 조상에서 갈라져 나온 새로운 학문 종들의 진화를 보는 듯하다.
▲ 장대익/ 한국과학기술원 강사·과학철학
하지만 이런 왕성한 생명력에도 불구하고 한 쪽에서는 ‘창조론’이라는 이름으로 진화론의 과학성 자체를 의심하는 흐름 또한 소수로서 존재한다. 다윈의 진화론은 인간이 생명의 최고 위치를 점하고 있으며 다른 동물들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뿌리깊은 인간중심주의를 배격한다. 창조론은 진화론의 인문사회학적 함의를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사람들만의 것인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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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화론의 역사 3 (1950 ~ 현재) (History of Evolutionary Theory 3)
20세기 후반에 들어서서 진화론은 완전히 실마리가 풀렸다. 모든 면에서 어떠한 간단한 증거도 발견되지 않음이 명백해졌다. 그러나 진화론자들은 아직도 그들의 이론이 과학적 사실이라고 공공연히 나팔을 불고 있다. 이것은 part 3 에서 결론이 내려졌다. 진화론은 신화이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창조했다. 수많은 증거들이 그것을 가리키고 있다. 산처럼 많은 증거들을 그들은 설명할 수 없다. 이것은 과학 대 진화이다. * 표를 한 사람들은 비창조론자들이다.
1950년부터 현재까지 *Julian Huxley(1887∼1975)는 20세기 중반무렵에 진화론의 선두주자였다. 다윈의 파트너로서 '다윈의 불독'이라 불리던 토마스 헉슬리(Thomas Huxley)의 손자로서, 줄리안 헉슬리는 진화론을 고수하며 심혈을 기울인 노력으로 미국에서 중요한 위치까지 올라갔다.
*Immanuel Velikovsky는 진화론의 세력에 반대를 표명하는 또 한명의 반란자였다. 그는 저서에서 달과 지구가 과거에 충돌하였으며, 그 결과 대격변이 지구상에 있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사실이 아니었지만, 그의 책은 사람들에게 지구역사 초기에 대홍수와 같은 대격변이 일어났음을 말해주는 충분한 증거들을 더 가까이서 볼 수 있게 해주었다.
Darwinian centennial celebration(다윈설의 100주년 기념). 다윈의 종의 기원 100주년을 기념하여, 1959년 11월 시카고 대학에서 일주일동안 모임이 열린 적이 있었다. 토마스 헉슬리(Thomas Huxley)의 손자인 줄리안 헉슬리(Julian Huxley)는 하나님에 대한 총체적인 거부에 초점을 맞춘 글들을 남겼다.
Biological sciences curriculum study(생물과학 커리큘럼 연구). 동일한 시기에 BSCS 가 미국 생물과학자 위원회에 의해서 만들어졌다. 그 목적은 학교교육을 통해 생물학 자체 뿐 아니라, 유기진화, 성교육, 인구조절 등을 함께 가르치겠다는 것과, 교과서에 이러한 문제들을 다루겠다는 것이었다.
프랑스에서의 반항. 1960년대초, 프랑스의 과학자들 다수가 진화론에 반대하여 일어섰고, 진화론은 사실들을 설명할 수 없는 희망이 없고 불가능한 이론임을 선언했다.
어린이 책들. 새로운 유아책들이 발간되기 시작했다. 하나는 '놀라운 알(The wonderful egg)'이라는 제목으로 엄마 공룡이 알을 낳았는데, 어린 새로 부화되었고, 이 새가 세계 최초로의 새가 되었다는 것이다. (짝(mate)은 어떻게 생겨났는지 언급이 없다)
DNA. 1950년대 DNA의 발견은 진화론의 기초를 흔들어놓았다. DNA 코드에 대한 진실은 종이 변하여 진화할 수 없다는 화석의 증거들을 지지하기 때문이었다.
Creation Research Society (CRS). 1963년에 설립된 창조론자들의 이 조직체는 정기간행물을 만들고 진화론에 대한 토픽들을 토론하는 모임이었다.
Institute for Creation Research (ICR). George M. Price가 20세기 전반기에 걸쳐 수행해온 일들을 ICR이 이어서 맡았다. 1963년에 설립되었고, 70여권의 책과, 대학과 세계 여러곳에서 이루어진 200여편의 창조론대 진화론의 논박자료 등을 정리하였다.
기독교인들의 타협이 깊어짐. 1941에 창조론자들의 조직이 결성되면서, American Science Affiliation(미국 과학 동맹)은, 진화론과 타협을 하고싶어하는 자유주의 크리스찬들을 받아들였다. 이와 유사한 타협들이 Inter-Varsity Christian Fellowship, 많은 기독교인들의 모임, 학교, 교회 등에서 이루어졌다. 그 가르침은 일반적으로 태초에 하나님이 창조하셨다는 것의 변형이었다. 창조후 식물, 동물, 유인원이 등장하기까지 수억 수천만년의 시간이 경과하였고, 최근에 아담과 이브가 창조되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아담과 이브의 범죄전까지, 죄와 죽음이 없었다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롬5:12), 이런 자유주의 신학은 아담의 창조이전에 죄와 죽음이 수억 수천만년을 지속되어 왔다는 것을 말하고 있었다. 유전학, 생물학, 화석들이 종을 뛰어넘는 변화의 가능성은 없음을 강력히 나타내고 있었지만, 이러한 타협의 자세는 그것들을 완전히 인정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크리스찬들에 의한 진화론의 사실적 수용이었다.
다른 종류의 타협들은 하나님이 빅뱅의 방법으로 창조를 시작하셨다는 것이었다. 빅뱅후 행성과 별들이 진화되어 태어났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형태로 거의 모든 분야에서 진화론의 가르침이 허락되어졌던 것이다.
*Stephen Jay Gould는 10년 넘게 진화론에 있어서 가장 뛰어난 지도자로 있었다.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하버드 대학의 고생물학자(화석 전문가들)들은 Goldschmidt가 주장한 '희망적 괴물(hopeful monsters) 이론'을 받아들였고, Gould는 이것을 자신의 이론으로 만들어 버린다. 그는 50,000년마다 단지 한 번 정도 진화가 일어난다고 선언하였다. 물고기가 알을 낳은후, 부드러운 털로 덮인 생물체가 갑자기 부화된다는 것이었다. 결국 그것은 50,000년 마다 일어나는 '대량적 돌연변이(massive mutational changes)' 이상의 아무 것도 아니었다
(그는 이것을 '단속평형(punctuated equilibrium)'이라 불렀다). 이것은 물고기 알에서 나온 새로운 동물은 번식을 위해 자기 짝(mate)을 만날려면 50,000년을 기다려야 한다는 이론이었다. 그러나 다음에 태어난 새로운 종은 자기와는 전혀 다른 개구리나 벌레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또한 돌연변이는 전혀 이로운 방향으로 일어나지 않고, 항상 약해지거나, 기형적이거나, 치명적인 방향으로 일어난다. Gould의 수백 수천만년의 시간은 아무런 가치있는 것을 이루지 못한다는 것은 자명하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논점(issue)이었다. 왜냐하면 Gould가 그의 방향으로 많은 진화론자들을 몰아갔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정상적인 진화론으로는 어떠한 것도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서로간에 깨달았던 것이었다.
(이 주제에 대해 더 알기를 원한다면 'Mutation'을 보시오.)
*Steven Stanley는 고생물학의 또 다른 선두주자로서 희망적인 괴물이론을 받아들인 인물이다. 그는 이것을 'quantum speciation'이라 명명하였는데, 개체가 결점을 수정해 나가기 위해 작은 변화들을 덧붙여 나간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렇게 하는 것은 상황을 더욱 악화시켰을 뿐이었다.
Stanley는 50,000년마다 알에서 깨고 나오는 백만개의 긍정적 돌연변이 개체 대신에, 동시에 수마일 안에 떨어져 있는 서로 다른 알들이 몇 개가 각각 새로운 종으로 부화하여 나온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각각의 새로운 괴물들은 이상하게도 똑같은 종의 똑같은 형으로 태어난다는 것이었다.
이것 모두는 우연히 발생하며, 번식이 일어나는 것도 우연히 일어났다는 것이다. 그러한 일이 발생한다는 생각하는 것은, 내일 오후에 돌이 달에서부터 날아와 한 시간 뒤에 당신의 머리를 때릴 것이라고 예언하는 것과 비슷한 소리이다.
특별한 모임들. 진화론자들에 의한 진화론 전체에 대한 공격은 1960년대까지 이루어지지 않았다. 아주 중요한 과학적 모임이었던 Wistar Institute는 1966년 필라델피아에서 소집되었다. 과학자들은 자기들 분야에서 진화가 일어날 수 없다는 이유들을 제시하였고, 토론하기 시작했다. 수학자들은 진화가 수학적으로 불가능함을 설명하는 식이었다. (이것에 대한 정보를 더 얻고 싶으면 Wistar Destroys Evolution을 참조할 것.)
당신은 아직까지 진화론이 모든 곳에서 가르쳐지는지를 궁금히 여겨야할 것이다. 거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1) 먼저 진화론이 틀린다면 유일한 선택은 창조론인데, 많은 이들은 이것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그들은 폐기되어야할 이론은 없애버리지 못하고 남겨두는 것이다.
(2) 조직적인 진화론적 세력, 과학 기초분야 조정자들, 교육위원회, 학교 인정기관, 기타 모든 세력들이 그들의 소중한 이론을 철저하게 붙들고 있는 것이다.
진화론의 대안적 선택은 그들에게 전혀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기에, 그들은 이 이론만이 그들의 가진 전부라는 것을 깨닫고 있었던 것이었다.
추가 모임이 1969년, 1980년, 1981년, 그리고 1984년에 열렸다. 진화론은 단지 비난을 더 받을 뿐이었고, 그들에게서 더 이상 나올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진화론은 여전히 가장 최상의 이론으로 자리잡고 있었다.
Panspermia(포자이론). 이것은 다른 이상한 이론과 마찬가지로 독특한 이론으로서, DNA의 구조를 발견한 *Francis Crick에 의해 고안된 이론이다. Crick에 따르면 다른 행성의 외계인들이 그들의 행성에 있는 생명체들을 퍼트리기 위해, 로켓으로 실어서 쏘았는데 우리의 지구에 떨어졌다는 것이다. 이것을 그는 '지시된 포자(directed panspermia)'라 불렀다. 진화의 성공적인 방법을 찾기위한 피나는 노력들은 이러한 엉뚱한 생각까지 낳게 되었던 것이다. (더 알기 위해서는 Panspermia를 보시오)
포자이론의 변형들도 있다('cosmozia' 라고도 불림). 다른 행성에서 떨어져 나온 암석에 생명체들이 묻어와 전해졌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생명체들은 우주의 거의 절대온도에 가까운 극저온의 온도에서 알 수 없는 기간동안 견뎌야하며, 공기가 없는 환경에서도, 그리고 유성으로되어 대기권을 통과할 때 엄청난 고열의 불꽃속에서도, 땅위의 지면에 부딪치는 충격속에서도 살아남아 지구에 전해졌다는 것이다. 그리고 한 생명체로부터 오늘날 존재하는 동물과 식물들로 변화되었다는 것이다.
소송. 진화론의 성공가도에는 위협적인 소송들이 같이 있어왔다. ACLU는 진화론에 대한 가르침과 그밖의 것들을 독점적으로 시행하기 위해 미정부를 협박했다. 미국의 각 주정부들도 하나씩 이러한 공격에 무너지고 말았다.
진화론은 모든 것이 무(無)에서부터 나왔다고 가르치고 있다. 또한 이것은 도마뱀이 어느날 알을 낳았는데 새가 갑자기 부화되어 나왔다고 가르치는 있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들은 진실이 아니고, 과학적인 사실과 일치하지도 않는다. 이러한 것들 때문에 진화론자들은 과학연구 분야와 학교교육에서 많은 어려움을 겪어왔다. 그러나 그들은 정당치 못한 방법을 사용해서 어쨌거나 여러 일들을 시행하여 왔다.
결론. 과거의 세기로 돌아가보면, 가장 유능한 유럽의 과학자들은 모두 창조론자들이었다. 자연의 명확한 증거들이 보여주는 것은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창조하셨고, 각각의 모든 다른 종들을 만들어 내셨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특별히 19세기에 접어들면서, 과학분야를 지배하고 싶어하는 무신론자들이 등장했다. 과학자가 아니면서, 약간의 돈과 시간을 가지고 있던 한 사람이, 모든 것은 무에서부터 스스로 생겨났다는 생각을 관철시키고자 하였다. 그의 이름은 찰스 다윈(Charles Darwin)이었다. 얼마 후에 그에게 동조하며 하나님 존재 부정하는 사람 많아지게 되었다.
영국에서는 과학적 사실들을 믿으며, 모래와 바닷물에서 스스로 생명체가 생길 수 없고, 한 종이 다른 종으로 결코 변화될 수 없다는 생각을 가진 과학자들을 비웃기 위한 회합이 개최되기도 하였다. 독일에서는 *헥켈(Ernst Haeckel)이란 사람이 사실이 아닌 도표를 만들었다. 그 역시 사람은 동물로부터 진화되어 나왔다는 것 모든 사람에게 알리려고 했다.
그러나 신중한 연구를 수행하는 양심적인 과학자들도 있었다. 그들은 진화가 사실일 수 없다는 새로운 증거들을 찾아내곤 하였다. 유럽의 멘델(Mendel)은 유전의 법칙을 발견하였는데, 모든 생명체는 태어날때 부모의 형질을 물려받는다는 사실이었다. 예를 들어 모르모트는 피부가 거칠거나, 부드럽거나, 하얗거나, 검거나 어떻든지 그 조상의 피부색을 물려받게 된다는 것이었다. 모르모트는 언제나 모르모트인 것이다. 그것은 까마귀도 도마뱀도 파인애플 나무나무도 아닌 것이다.
후에 미국에서 과학자들은 유전자(genes)를 발견하게 된다. 모르모트가 부드러운 털을 갖게될지, 거친 털을 갖게될지는 유전자에 의해 미리 결정된다는 것이었다. 연구자들 역시 20세기 거의 모든 기간동안 초파리와 나방을 가지고, 그들이 새로운 종으로 변화는지를 보기위해 실험을 하여 왔었다. X-ray는 돌연변이를 크게 증가시키기 위해 사용되었다. 그러나 돌연변이는 오직 약해지거나, 기형을 일으키거나, 죽음을 초래할 뿐이라는 것을 발견하였던 것이다. 이와같이 오늘날 진화(한 종이 다른 종으로 바뀌어 가는 것)가 발생할 수 있는 방법으로 밝혀진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덧붙여 다른 과학자들은 땅속의 암석지층들을 연구하였는데, 모든 화석들은 분명한 한 종으로만 발견되었다. 한 종에서 다른 종으로 변화해가는 것을 보여주는 중간단계의 종들은 없었던 것이다
진화론의 역사 3 (1950 ~ 현재) (History of Evolutionary Theory 3)
20세기 후반에 들어서서 진화론은 완전히 실마리가 풀렸다. 모든 면에서 어떠한 간단한 증거도 발견되지 않음이 명백해졌다. 그러나 진화론자들은 아직도 그들의 이론이 과학적 사실이라고 공공연히 나팔을 불고 있다. 이것은 part 3 에서 결론이 내려졌다. 진화론은 신화이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창조했다. 수많은 증거들이 그것을 가리키고 있다. 산처럼 많은 증거들을 그들은 설명할 수 없다. 이것은 과학 대 진화이다. * 표를 한 사람들은 비창조론자들이다.
1950년부터 현재까지 *Julian Huxley(1887∼1975)는 20세기 중반무렵에 진화론의 선두주자였다. 다윈의 파트너로서 '다윈의 불독'이라 불리던 토마스 헉슬리(Thomas Huxley)의 손자로서, 줄리안 헉슬리는 진화론을 고수하며 심혈을 기울인 노력으로 미국에서 중요한 위치까지 올라갔다.
*Immanuel Velikovsky는 진화론의 세력에 반대를 표명하는 또 한명의 반란자였다. 그는 저서에서 달과 지구가 과거에 충돌하였으며, 그 결과 대격변이 지구상에 있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사실이 아니었지만, 그의 책은 사람들에게 지구역사 초기에 대홍수와 같은 대격변이 일어났음을 말해주는 충분한 증거들을 더 가까이서 볼 수 있게 해주었다.
Darwinian centennial celebration(다윈설의 100주년 기념). 다윈의 종의 기원 100주년을 기념하여, 1959년 11월 시카고 대학에서 일주일동안 모임이 열린 적이 있었다. 토마스 헉슬리(Thomas Huxley)의 손자인 줄리안 헉슬리(Julian Huxley)는 하나님에 대한 총체적인 거부에 초점을 맞춘 글들을 남겼다.
Biological sciences curriculum study(생물과학 커리큘럼 연구). 동일한 시기에 BSCS 가 미국 생물과학자 위원회에 의해서 만들어졌다. 그 목적은 학교교육을 통해 생물학 자체 뿐 아니라, 유기진화, 성교육, 인구조절 등을 함께 가르치겠다는 것과, 교과서에 이러한 문제들을 다루겠다는 것이었다.
프랑스에서의 반항. 1960년대초, 프랑스의 과학자들 다수가 진화론에 반대하여 일어섰고, 진화론은 사실들을 설명할 수 없는 희망이 없고 불가능한 이론임을 선언했다.
어린이 책들. 새로운 유아책들이 발간되기 시작했다. 하나는 '놀라운 알(The wonderful egg)'이라는 제목으로 엄마 공룡이 알을 낳았는데, 어린 새로 부화되었고, 이 새가 세계 최초로의 새가 되었다는 것이다. (짝(mate)은 어떻게 생겨났는지 언급이 없다)
DNA. 1950년대 DNA의 발견은 진화론의 기초를 흔들어놓았다. DNA 코드에 대한 진실은 종이 변하여 진화할 수 없다는 화석의 증거들을 지지하기 때문이었다.
Creation Research Society (CRS). 1963년에 설립된 창조론자들의 이 조직체는 정기간행물을 만들고 진화론에 대한 토픽들을 토론하는 모임이었다.
Institute for Creation Research (ICR). George M. Price가 20세기 전반기에 걸쳐 수행해온 일들을 ICR이 이어서 맡았다. 1963년에 설립되었고, 70여권의 책과, 대학과 세계 여러곳에서 이루어진 200여편의 창조론대 진화론의 논박자료 등을 정리하였다.
기독교인들의 타협이 깊어짐. 1941에 창조론자들의 조직이 결성되면서, American Science Affiliation(미국 과학 동맹)은, 진화론과 타협을 하고싶어하는 자유주의 크리스찬들을 받아들였다. 이와 유사한 타협들이 Inter-Varsity Christian Fellowship, 많은 기독교인들의 모임, 학교, 교회 등에서 이루어졌다. 그 가르침은 일반적으로 태초에 하나님이 창조하셨다는 것의 변형이었다. 창조후 식물, 동물, 유인원이 등장하기까지 수억 수천만년의 시간이 경과하였고, 최근에 아담과 이브가 창조되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아담과 이브의 범죄전까지, 죄와 죽음이 없었다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롬5:12), 이런 자유주의 신학은 아담의 창조이전에 죄와 죽음이 수억 수천만년을 지속되어 왔다는 것을 말하고 있었다. 유전학, 생물학, 화석들이 종을 뛰어넘는 변화의 가능성은 없음을 강력히 나타내고 있었지만, 이러한 타협의 자세는 그것들을 완전히 인정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크리스찬들에 의한 진화론의 사실적 수용이었다.
다른 종류의 타협들은 하나님이 빅뱅의 방법으로 창조를 시작하셨다는 것이었다. 빅뱅후 행성과 별들이 진화되어 태어났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형태로 거의 모든 분야에서 진화론의 가르침이 허락되어졌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