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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세의 일생
출 5: 1-9,19-23
'포즈베리 엉덩방아'라는 스포츠 용어가 있습니다. 높이뛰기를 할 때 1미터98센티 이상 넘어 가지 못한 때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포즈베리 라는 사람이 높이뛰기를 해보니까 아무리 연습을 해도 2미터를 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전에는 앞으로 뛰었는데 포즈베리가 뒤로 뛰어보니까 2미터를 훌쩍 뛰어 넘게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높이뛰기 선수들이 전부 뒤로 넘는 연습을 했고 2미터를 훌쩍 넘어서 이제는 3미터까지도 뛸 수 있지 않을까 라는 가상을 하게 되었습니다. 자세를 바꾸어 뒤어 떨어질 때 한 바퀴 돌아서 엉덩방아 찧는 것을 포즈베리 엉덩방아 라고 합니다.
우리에게 있어 고정관념은 장애물을 뛰어넘지 못하게 하는 악으로 우리 안에 머물러 있을 때가 많습니다. 앞으로 넘는 것을 뒤로 한번 넘어보니까 그런 기록이 나는 포즈베리 엉덩방아처럼 오늘 우리가 사는 자세를 한번만 바꾸어 보면 도저히 해답이 안나오던 우리의 삶 속에 아름다운 답이 나올 줄로 믿습니다. 그와 같은 삶의 축복이 충만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두 가지 저항앞에 선 모세
우리에게 있어서 고정관념은 많이 있습니다. 본문에 나타나는 모세는 드디어 바로왕 앞에 섰습니다. 그토록 가기 싫어했던 애굽에 와서 그토록 두려워했던 바로왕을 만났습니다. 모세가 애굽을 떠난 지 사십년 만의 일입니다. 모세는 바로왕 앞에 서서 이스라엘 여호와의 백성을 보내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때에 바로왕은 강한 저항을 합니다.
본문 2절에 "바로가 가로되 여호와가 누구관대 내가 그 말을 듣고 이스라엘을 보내겠느냐. 나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니 이스라엘도 보내지 아니하리라" 이 사람아, 자네가 말하는 여호와를 나는 알지 못하네, 네가 말하는 하나님, 나는 모르는 신이야.
여러분, 상대방이 이렇게 나올 때에 얼마나 난감하겠습니까? 실컷 설명을 했는데 난 당신이 하는 그 말을 모르겠다는 반응이 나오면 길이 없습니다. 모세가 그토록 하나님의 말씀을 무게 있게 전했습니다.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보내라고 하는데도 바로는 여호와가 누구냐 나는 그를 알지 못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4절에 "애굽 왕이 그들에게 이르되 모세와 아론아 너희가 어찌하여 백성으로 역사를 쉬게 하느냐. 가서 너희의 역사나 하라." 이 사람아, 나한테 와서 이런 엉뚱한 소리하지 말고 자네들 할 일이나 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9절에 "그 사람들의 고역을 무겁게 함으로 수고롭게 하여 그들로 거짓말을 듣지 않게 하라." 모세가 와서 하는 말을 거짓말이라고 규정을 합니다. 이 친구가 하는 말은 거짓말이니까 백성들로 듣지 않게 하라는 것입니다.
모세에게 이런 바로의 저항이 왔습니다. 모세는 지금 난감합니다. 일을 시작을 할 때 잘 되어 가다가도 상황이 어려워지는 경우가 대단히 많습니다. 모세는 애굽까지는 잘 왔습니다. 바로왕 앞에 섰습니다. 그런데 바로 앞에 서고 난 이후부터 모세는 난감한 처지에 이릅니다. 바로가 완강하게 거부합니다. 그런데 모세가 바로 앞에 나타난 그 이후부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더 무거운 핍박이 가해졌습니다. 전에는 짚을 주면서 벽돌을 만들라 했는데 이제는 짚도 주지 아니하고 벽돌을 만들라고 합니다. 더 큰 핍박과 고난을 당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를 원망하는 반응이 일어나게 됩니다. 모세는 이 두 가지 저항 앞에 부딪힙니다. 바로의 저항과 이스라엘 백성들의 저항 앞에서 모세는 위기에 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싫어하는 기도
여러분, 모세가 이 때 어떻게 합니까? 모세의 기도를 한 마디 봅시다.
22절 "모세가 여호와께 돌아와서 고하되 주여 어찌하여 이 백성으로 학대를 당케 하셨나이까 어찌하여 나를 보내셨나이까." 모세는 지금 절망의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막상 바로왕 앞에 왔는데 너무나 상황이 곤란한 자리에 빠졌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탄원의 기도를 합니다. 모세는 '어찌하여 나를 보내셨나이까'라는 기도를 합니다. 여러분, 우리도 살다가 상황이 어려워지는 경우를 많이 만납니다. 시작할 때는 좋았는데 가다가 보니 상황이 어려워집니다. 이 세상이 내 뜻대로 살게 하지 않습니다. 주변의 사람들이 내 뜻대로 응답해주지 않습니다. 그럴 때 우리도 모세처럼 이런 탄식의 기도를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모세와 같은 이런 기도를 우리는 다시 되풀이하지 말기를 바랍니다.
모세의 기도 중에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보냈습니까'라는 기도는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는 기도입니다. 하나님은 이 기도를 그냥 묵과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제일 섭섭해하는 기도입니다. 그런데 모세가 지금 그 기도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아무리 어려워도 이런 기도를 하면 안됩니다. '하나님, 왜 날 예수 믿게 했습니까?' 이것은 범죄입니다. '하나님, 왜 나를 이 교회에 보냈습니까? 왜 나를 집사 되게 했습니까? 왜 나를 장로 되게 했습니까?' 이런 부질없는 기도를 결코 되풀이하지 말기 바랍니다.
모세가 왜 나를 보냈습니까 라고 해도 돌아갈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원대한 목적과 의도를 가지고 보냈는데 이런 불신앙의 기도가 모세의 입에서 터져 나옵니다. 모세는 지금 상황도 악화되고 영적인 위기를 맞고 있습니다. 모세는 바로왕에게 한번 부딪혀 보고 이렇게 주저앉을 수 없습니다. 그는 바로와 부딪혀야 합니다. 모든 장애물을 없앤 다음에 하나님이 모세를 애굽에 보낸 게 아닙니다. 애굽에는 모세가 넘어서야 할 장애물이 가득 있습니다. 바로왕이 마음을 열어놓고 모세를 기다리고 있는 게 아닙니다. 마음이 강퍅해져 바로의 마음은 열리지 않고 무서운 권력자로 모세를 향하여 공격을 해오고 있는 그 상황에 하나님이 모세를 보냈습니다.
암초는 누구에게나 있다
여러분, 우리도 살다가 왜 이런 일을 당하는가 라고 할 때 하나님은 결코 그런 일을 다 해결해놓고 우리에게 가라고 하시지 않습니다. 내가 살아가는 인생 길에 암초가 있고 장애물이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라는 것이지 하나님이 다 채워놓고 가라고 하신 적은 한번도 없다는 것입니다.
어떤 성도가 조상의 제사문제로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시댁에 가보니 완강한 유교 전통의 집안인데다가 예수 믿는다고 하는 식구들도 신앙이 분명하지 않았습니다. 제사 지내는 문제로 너무 고민스러운 것입니다. 제가 이렇게 상담을 했습니다. 그렇게 고민하지 말고 시부모님 앞에 가서 담판을 하라고 했습니다, 자신의 신앙고백을 분명히 하고 한계를 말씀 드리라, 그리고 음식을 장만하는 것까지는 거부하지 말아라. 음식 장만하는 것은 우상숭배라고 볼 수는 없다. 제사를 직접 지낸다든지 절을 하는 행위는 결코 할 수 없지만 음식을 장만하는 것을 거부하면 가정에 화합도 깨어지고 다른 문제가 발생하니까 음식 장만은 해라. 제사 음식을 장만한다고 해서 모두다 제사상에 올라가는 건 아니다, 또 내가 나물을 묻혔다 해서 내가 묻힌 나물이 다 올라가는 것도 아니니까 거기에 너무 예민하지 말아라. 그러나 분명하게 내가 그리스도인으로서 할 수 없는 것은 시부모님한테 분명히 말씀을 드리라는 지도를 했습니다.
여러분 현실은 부딪혀야 됩니다. 암초를 만났을 때 부딪혀야 됩니다. 장애물과 부딪혀야 됩니다. 그런데 모세가 바로왕을 만난 이후 이스라엘 백성들의 원망 앞에 모세는 그만 절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찌하여 나를 여기 보내셨나이까' 이것은 절대로 회복될 수 없는 기도이며 여호와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는 기도입니다.
한 때 「랜섬」이라는 아주 좋은 영화가 상영되었습니다. 멜 깁슨이라는 배우가 주연을 했는데 그는 항공사 사장으로 억만 장자입니다. 그에게 아홉살 짜리 아들이 하나 있는데 유괴범들이 아이를 납치하고는 아버지에게 그 아이의 몸값으로 이백만불을 요구합니다. 랜섬이라는 말이 몸값이라는 뜻입니다. 거기에 대해서 사장은 방송국에서 기자회견을 자청합니다. 방송에서 그는 아주 청천벽력 같은 선전포고를 합니다. 내 아들의 유괴범을 잡거나 제보를 해주는 사람에게 오히려 현상금 이백만불을 주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기자들이 난리가 났습니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아내는 저 아버지가 아들을 완전히 죽인다면서 울며 불고 왜 저런 말을 하는가 아무도 사장의 말에 동의를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광경을 보고 있던 유괴범들이 자기들끼리 좌중지란이 일어났습니다. 이제 우리 몸값 받기는 틀렸으니 아예 포기하고 애를 돌려보내자는 의견이 나왔고 한편에서는 우리가 위장 제보를 하여 현상금만 챙기고 도주하면 되지 않느냐 라고 자기들끼리 의견의 일치가 안됩니다. 그렇게 영화가 진행이 되면서 결국은 아들이 살아서 돌아온다는 스토리입니다. 저는 이 영화에서 강렬한 어떤 의미를 발견했습니다. 주인공이 유괴범과 맞부딪히는 용기를 보면서 신앙생활은 저렇게 해야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마귀는 달래면 안됩니다. 맞부딪혀야 됩니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주께서 도우시리라."
우리의 영전은 현실과 맞부딪혀야 하는 것입니다. 도피하거나 위축되면 안됩니다. 물러가면 안됩니다. 맞부딪쳐야 됩니다. 멜 깁슨이라는 배우가 미남이지만 특히 그 친구에게 반한 것은 그의 눈빛입니다. 그 눈이 아주 강렬합니다. 그 강렬한 눈빛으로 유괴범과 대항하여 선전포고를 하는 주인공의 용기가 스크린을 압도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그런 모습으로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타협하지 않는 모세
지금 모세는 중대한 고비 앞에 있습니다. 바로가 모세를 저항할 뿐 아니라 모세 앞에 유혹을 하게 됩니다. 저항도 힘드는 일이지만 유혹은 더 무섭습니다. 바로는 사십년 전에 애굽 왕궁에서 자랐던 모세의 배경과 그의 위대성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놈을 자기편으로 만들어야 되겠다는 바로의 속셈이 드러나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는 모세를 강렬하게 유혹합니다. 그 과정에서 모세는 이제 정신을 차리게 됩니다.
바로가 자신의 말을 듣지 않고 저항했을 때와 이스라엘이 저항할 때는 모세가 좌절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세를 버리지 않았습니다. 더 큰 유혹이 올 때 하나님은 모세를 깨웠습니다. 모세를 붙잡아 주셨습니다. 우리에게도 이 은혜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절망하며 주저앉아 여호와여 어찌하여 나를 여기 보냈습니까 라고 할 때 하나님이 우리를 버리지 않아야 됩니다. 하나님이 다시 우리를 잡아 주셔야 됩니다. 그래야 그 다음 유혹을 이길 수 있는 것입니다. 바로가 모세에게 이런 말합니다.
8장 25절에 "바로가 모세와 아론을 불러 가로되 너희는 가서 이 땅에서 너희 하나님께 희생을 드리라." 우리가 예배를 드리도록 이스라엘 백성을 보내달라고 할 때 바로가 제안한 것입니다. 내가 너희들에게 예배할 자유를 주마. 애굽을 떠나지 말고 우리 땅에서 예배를 드리라. 이렇게 제안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8장 28절에 "바로가 가로되 내가 너희를 보내리니 너희가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광야에서 희생을 드릴 것이나 너무 멀리는 가지 말라. 그런즉 너희는 나를 위하여 기도하라." 너무 멀리가지 말고 우리 안에서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10장 11절에 "너희 남정만 가서 여호와를 섬기라."
10장 24절에 "바로가 모세를 불러 이르되 너희는 가서 여호와를 섬기되 너희 양과 소는 머물러두고 너희 어린 것은 너희와 함께 갈지니라." 바로는 모세와 이스라엘을 잡아두기 위해서 멀리 가지 말고 남자만 가되 양들은 두고 가라며 온갖 획책과 타협을 해 오지만 모세는 그 유혹을 이겨냅니다. 여기서 이제 모세다움이 형성됩니다.
점점 강해져 가는 모세
출애굽의 역사를 보면 하나님이 사람을 다루시는 놀라운 방법을 보게 됩니다. 모세는 바로에게 간 처음부터 강한 지도자의 모습이 아닙니다. 모세가 바로왕 앞에 가서 제일 먼저 보인 모습은 절망하는 지도자입니다.
'여호와여 어찌하여 나를 여기 보냈습니까.' 내 백성 이스라엘도 내 말을 안 듣는데 바로가 어떻게 내 말을 듣습니까? 모세의 입에서 나오는 말마다 절망의 말 밖에는 없었습니다. 모세의 처음 모습은 절망의 사람입니다. 그런데 바로를 한번 만나고 두번 만나고 열 번을 더 만났습니다. 바로를 만나면 만날수록 바로는 점점 더 약해갔고 모세는 점점 더 강해져 갔습니다. 해답은 이것입니다. 장애물은 하나씩 뛰어넘을 때 우리는 강해져 간다는 것입니다. 역경을 하나씩 뛰어넘어 갈수록 성도는 강해져 가는 것입니다. 이 은총과 축복이 2002년도에 우리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테니스에 엘보 현상이 있습니다. 손목 떨림입니다. 라켓을 잘못 잡고 치면 손목이 울려 큰 부상을 입습니다. 야구도 그렇다고 합니다. 배팅을 할 때 배트를 바로잡고 자세가 바라야 되지 무작정 치다가는 손목에 떨림이 오고 팔에 부상이 온답니다. 어중간하게 잡았기 때문입니다. 라켓을 바로 잡아야 됩니다. 규칙대로 바로 잡아야 합니다. 그리고 공을 바로 쳐야 되지 무작정 치다가 엘보 현상을 당합니다.
여러분, 성경은 엘보 현상을 경고합니다. 차든지 덥든지 해야지 미지근하지 말라고 합니다. 바알이냐 여호와 하나님이냐 머뭇거리지 말라고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 앞에 우리는 확고하게 서는 자세가 있어야 합니다. 모세는 바로를 만날수록 점점 여호와 하나님 편에 섰습니다. 바로가 점점 모세를 강하게 유혹하면 할수록 바로가 국력을 가지고 모세를 자기편으로 만들려고 할수록 모세는 점점 여호와의 편에 확고하게 섰던 것입니다. 그래야만 영적인 엘보를 막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중간하게 살면 마귀는 마음대로 우리를 악용합니다.
크로닌 이란 분은 「성채」라는 소설을 써서 세계적인 작가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크로닌은 그 당대에 병원을 운영하며 의술로써 세계적인 명사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에게 질병이 찾아왔습니다. 도저히 의사 일을 더 할 수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당신은 병을 이기고 의사로 살아야 된다고 했지만 그의 병세는 점점 악해져 갔습니다. 결국 그는 의사의 길을 버리고 시골 한적한 곳에 가서 투병생활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거기서 그는 틈틈이 글을 쓰기 시작했는데 그것이 유명한 「성채」라는 소설입니다. 그는 의사보다도 작가로서 더 명성을 얻었고 더 부귀 영광을 얻었던 사람이었습니다.
맺는 말
인간에게 하나의 위기는 얼마든지 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위기는 뛰어 넘어야 합니다. 위기가 있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위기를 넘지 못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 위기를 극복만 하면 하나님이 의도하시는 축복이 기다리고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금년에 우리에게 장애물이 있었습니다. 상황이 더 안좋아진 것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낙심하지 마십시오. 그것을 뛰어 넘으시면 하나님의 축복의 미래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모세는 바로를 넘어섰습니다. 바로는 우리가 넘어서야 될 존재입니다. 바로 앞에 넘어지면 안됩니다. 바로 앞에 유혹을 당하면 안됩니다. 바로와 타협을 하면 안됩니다. 바로는 반드시 넘어서야 될 대상입니다. 모세는 바로를 넘어서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었습니다. 기어코 그는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출애굽을 하는 위대한 대업을 이루게 됩니다. 이것은 우리 앞에 펼쳐져 있는 삶의 원리와도 같습니다. 하나님은 한 길이 막힐 때 또 다른 길을 열어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을 의지하고 미지의 2002년도를 힘있게 전진하기를 바랍니다.
실패를 만났을 때
출 5: 1-9, 22-23
미국의 16대 대통령 링컨은 성공보다는 실패가 많았던 인물입니다. 사업을 하였으나 두 번 실패하였고,각종 선거에 출마했으나 고배를 많이 마셨습니다. 그러다가 1860년 미합중국의 대통령으로 당선되었습니다. 물론 그의 생애에 실패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성공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성공보다는 실패가 더 많았습니다. 그의 성공은 이러한 실패를 딛고 일어난 후에 일구어낸 것이었습니다. 아마도 그는 실패를 성공을 위한 발판으로 삼았던 것 같습니다.
실패를 경험해 보셨습니까? 어떻게 실패를 처리하고 계십니까?
■ 바로 앞에 섰으나...
모세는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애굽으로 갔습니다. 하나님이 그가 애굽에 도착할 즈음에 아론을 대기시켰습니다. 모세는 아론의 인도에 따라 이스라엘 자손의 원로들을 만났습니다. 모세의 말을 듣고난 후에 이스라엘 자손의 원로들은“이제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신다”고 말하며 크게 기뻐했습니다. 모세의 길이 어렵지 않게 풀렸습니다.
일이 쉽게 플리게 되면 착각에 빠지기 쉽니다. 자신의 능력으로 잘된 것처럼 착각하기 쉽습니다. 웃시야가 그랬습니다. 비록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지만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려 듣고 늘 기도하기를 힘썼습니다. 하나님이 그의 기도를 들어주셔서 나라가 부강하게 되었습니다. 그랬더니 자기 능력으로 잘된 줄로 착각하여 교만하게 행동하다가 불행을 맞이 하였습니다.하나님이 교만한 웃시야 왕을 버리셨습니다. 일이 쉽게 풀릴찌라도 착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 없이 어찌 살 수 있단 말입니까?
모세는 보무 당당하게 바로 앞에 나아갔습니다. 당시 애굽의 임금 바로는 아멘호텝 2세였습니다. 족보를 따지자면 모세의 조카였습니다. 당시 바로는 모세의 양어머니인 바로 공주와 결혼한 투트모세 2세가 궁녀 사이에서 낳은 투트모세 3세의 아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18세 어린 나이에 왕위를 계승받고 24년간 강력한 통치력을 발휘하였습니다.
모세는 바로에게 하나님의 명령을 전했습니다. 그는 목숨을 걸어야 했습니다. 절대 군주에게 노예를 해방하라는 명령은 죽음을 초래하기에 충분했습니다. 하지만 그가 담대했던 이유는 하나님이 함께 하실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담대히 외쳤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함께 하실 것을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바로의 반응은 냉담하기 이를 데가 없었습니다. 바로는 두려워 하거나 떨지 않았습니다. “바로가 가로되 여호와가 누구관대 내가 그 말을 듣고 이스라엘을 보내겠느냐 나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니 이스라엘도 보내지 아니하리라”(2절). 바로는 모세에게 사람들을 선동하지 말라고 나무랬습니다. 그리고 가서 일하라고 호통을 치며 내쫓았습니다. 모세와 아론은 당당히 들어 갔다가 망신 당하고 초라하게 쫓겨났습니다. 거기에 이스라엘 자손들의 원망을 들어야 했습니다. 그 이유는 모세와 아론으로 인해 이스라엘 자손의 노동이 더욱 극심해졌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모세처럼 망신 당할 때가 있습니다. 교회에서 일하다가 망신 당할 때가 있습니다. 사회생활하다가 망신 당할 때가 있습니다. 제가 어릴 적에 다녔던 교회에서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수요일 저녁예배에 대표기도를 맡은 분이 아무 연락없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예배를 인도하시던 목사님이 두리번 거리며 기도할 사람을 찾았습니다. 열심있는 교우에게 기도를 부탁했는데 이것이 화근이 되었습니다. 갑자기 기도 부탁을 받은 분은 너무 당황해서 도망을 쳤습니다. 모두 눈을 감고 있을 때에 살짝 빠져 나왔습니다. 그리고 그 교회를 영영 떠나고 말았습니다.
■ 실패를 처리하는 방법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실패할 수 있고 망신 당할 수가 있습니다. 실패를 처리하는 방식에 따라 사람은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변할 수 있습니다. 실패를 처리하는 방식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습니다.
자기비하형. 자기를 낮추고 깎아내립니다. “그럴 줄 알았어! 나 같은게 뭘..나는 안돼!” 이런 식으로 문제를 처리하다 보면 결국 소극적인 사람이 되고 맙니다. 소극적인 사람의 특징은 자신이 하는 일에 별로 기대를 걸지 않습니다. 그래서 소극적으로 행동하는 것입니다.
자학형. 문제가 생기면 늘 자기 탓으로 돌립니다. 양심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자신을 학대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유의 사람들 중에 여자들은 화장도 하지않고 꾸미지도 않습니다. 남자의 경우 술로 몸을 버립니다. 어떤 그리스도인은 지나치게 많은 금식을 합니다. 조금만 잘못을 해도 회개의 차원에서 금식을 합니다. 이것은 경건이 아닙니다. 자기 학대입니다. 복음을 믿지만 양심의 노예가 되어 살아가기에 인생이 고되고 행복함이 없습니다.
망각형. 실패했을 때에 처음엔 괴로워 하지만 차츰 잊여 버립니다.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여기까진 좋습니다. 낙천적인 성격은 유익한 점이 많습니다. 그러나 실패를 개선하지 않고 문제만 덮어버리기 때문에 발전이 없습니다.
책임전가형. 이 유형의 사람은 가장 피곤한 유형의 사람입니다. 문제의 원인을 주변 환경이나 사람들에게서 찾으려 합니다. 그래서 자기 안에 있는 문제는 발견하지 못하고 많은 사람들에게 상처를 입힙니다. 책임전가형의 대표적인 사례는 아담과 하와입니다. 그들은 책임을 전가했고 형벌을 받았습니다. 책임전가는 문제의 실마리를 풀지 못할 뿐 아니라 상처만 남깁니다.
그렇다면 모세는 어떤 유형의 사람입니까? “모세가 여호와께 돌아와서 고하되 주여 어찌하여 이 백성으로 학대를 당케 하셨나이까 어찌하여 나를 보내셨나이까 내가 바로에게 와서 주의 이름으로 말함으로부터 그가 이 백성을 더 학대하며 주께서도 주의 백성을 구원치 아니하시나이다”(22,23절). 그는 문제 앞에서 기도했습니다. 기도함으로 하나님께 맡겼습니다. 즉 그는 의탁형이었습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그가 기도하기 위해 갈등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그는 즉시 하나님께로 돌아와 기도하였습니다. 대부분의 신자들은 기도해야 함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기도하기 까지는 많은 진통을 겪습니다. 어떤 사람은 기도해야 함을 알지만 기도하기를 실패합니다. 적어도 모세는 기도의 무릎을 드림에 있어서 갈등이 없었습니다. 그 만큼 훈련되었다는 증거입니다.
특히 그의 기도를 묘사할 때에..“여호와께 돌아와서 고하되”라고 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로 돌아왔습니다. 하나님과의 간격을 좁혔습니다. 실패를 통하여 하나님과의 관계가 더욱 밀착되었습니다. 의탁형의 사람은 영적 유익을 얻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실패를 경험했을 때에 하나님께로 나아가기 때문입니다.
관객수 8백만을 돌파한 친구라는 영화에 네 친구가 등장합니다. 준석,동수,상택,중수... 조직의 내분으로 준석과 동수는 세력다툼에 휘말리는데 급기야 동수가 기습을 받아 죽습니다. 준석은 누명을 씌고 형장으로 끌려가면서 어릴 적 부산 앞 바다에서 튜브를 타고 놀던 때에 동수가 했던 말을 생각합니다. “클났다. 너무 멀리 왔다. 그만 돌아가자!” 하나님과 너무 멀어지면 곤란합니다. 시험의 파도가 밀려오기 전에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합니다. 실패를 통해 하나님에게서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가를 점검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바짝 다가가야 합니다.
첫 번째 대결
출5:1-9, 22 - 6: 1
지난 주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과 첫 대면을 하는 과정에서 하나님과 모세, 그리고 이스라엘 민족을 애굽의 바로 왕으로부터 자유인으로 세우시려하는 의미를, 성경이 그렇게도 집요하게 추적하는 우리 내면의 자아와 본능으로부터 정신의 지배, 곧 죄로부터 자유케하는 과정임을 살펴본 적이 있습니다. 우리가 참으로 행복한 인생으로 그리고 한 사람의 본명한 인격자로 세워지기 위해서는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이 아니라 나를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의 통제와 조절, 오늘 우리의 자유와 행복한 삶을 위해 우리에게 분명하게 제시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말씀에 순종해야 한다는 사실 또한 알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보내신 모세가 하나님의 부르실 때 얼마나 꽁무니를 빼면서 망설였는지, 그러나 하나님은 바로 그 모세를 보내시고야 만다는 것과 더욱이 보냄 받은 모세가 특별히 그 어느 누구보다 잘난 사람이 아니라 우리와 마찬가지로 그저 그런 사람이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저 옛날 억울하게 고통받는 사람들을 위하여 모세를 보내셨듯이, 오늘 이 시대에는 우리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으시고 우리를 모세처럼 들어 쓰시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을 살펴본 바가 있습니다. 본문을 해석하기에 앞서 여러분에게 미리 양해를 구하고 싶은 것은 우리말 성경에 하나님의 이름으로 지칭되는 여호와를 당분간 야훼라는 이름을 사용하겠다는 것입니다. 왜 굳이 야훼라는 이름을 쓰느냐에 대해서는 다음 주일에 비교적 소상히 말씀드리겠지만, 우선 간략하게 설명하면 히브리 원문에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나오는 히브리어 단어 그대로를 옮기면 야훼로 읽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읽은 본문 앞서 4장 30-31절에 보면, 모세와 함께 한 아론이 백성들 앞에서 무슨 이적을 행했더니,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서 자기들을 돌보시기 위해 모세와 아론을 보낸 줄 믿고, 하나님께 머리를 숙이고 경배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모세와 아론을 하나님이 보내신 자기들의 지도자인 것을 믿어주자, 이에 힘을 얻은 모세와 아론이 당대의 최고 권력자인 바로 왕을 찾아가서 다음과 같은 대담한 요구를 합니다. "왕이시여! 이스라엘의 하나님 야훼께서 '내 백성을 내어보내어 빈들에서 나를 위하여 절기(곧, 큰 잔치)를 벌이도록 하여라'고 말씀 하셨나이다(1절)."
모세와 아론은 애굽 왕 바로가 이스라엘의 하나님 야훼의 명령을 따라 이스라엘 사람들을 애굽에서 내어보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애굽 왕이 코웃음을 치며 "뭣이라고? 이스라엘 백성을 내보내라고 야훼가 말씀하셨다고? 야훼가 도대체 누구길레 내가 그 말을 듣고 이스라엘을 내 보내겠느냐? 나는 야훼라는 신을 모르니 이스라엘도 내보낼 수 없노라(2절)"고 말합니다.
당시 애굽 사람들은 여러 가지 종류의 신들을 섬기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섬기던 신들 가운데 야훼라는 이름의 신은 없었습니다. 그러니 바로 왕이 나는 너희들이 섬기는 야훼를 모른다고 말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다시 말해서 이스라엘의 신이라고 부르는 야훼가 뭐라고 하든, 애굽 왕 바로로서는 알 바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모세와 아론이 다시 말합니다. "왕이시여! 히브리 사람들의 하나님께서 저희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우리가 한 사흘길쯤 가서 다다를 광야(빈들)에서 우리 하나님 야훼께 희생(제사)을 드리고자 합니다. 야훼께서 칼이나 질병(온역)으로 우리들 치실까 두렵습니다(3절)
그런데 본문에서 우리에게 한 가지 이상하게 여겨지는 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애굽의 이스라엘을 이끌어내면서 데리고 가실 곳으로 저 엣날 이스라엘 조상인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던 가나안 땅을 말씀하셨는데, 여기서는 그냥 광야, 곧 애굽에서 사흘 정도 걸어가면 다달을 빈들이라고 하시니 이상하게 생각됩니다.
원래 이스라엘이 정착해야 할 목적지가 가나안 땅이 명백한데도 오늘 본문의 경우에는 광야에서 희생제사를 드리고 큰 잔치를 벌이는 것으로 말씀하시니 다소 어리둥절해 집니다. 그러나 이를 조금만 더 깊이 생각해보면 이상할 것이 하나도 없다는 점을 알게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가나안 땅으로 바로 데려가시는 것이 아니라, 다소 느린 것 같지만 한 걸음씩 한 걸음씩 이끌어 나가시려 하신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사실 당시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이스라엘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광야로 나간다는 것 자체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을 것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그 지긋지긋한 강제 노역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만 해도 여간 기쁜 일이 아닐 수 없었을 터입니다. 다른 사람들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는 번들에서 그동안 함께 고통 당하며 살아온 같은 동포들끼리만 모여서 자기들의 하나님께 제사도 드리고 그 하나님과 어울려 마음껏 잔치를 벌일 수 있다면 얼마나 신나는 일이겠습니까? 그래서 모세와 아론은 이 일을 할 수 있도록 이스라엘을 빈들로 내보내라고 전한 것입니다.
또 한 가지 모세와 아론의 말 가운데 주의 깊게 볼 것은 애굽 왕 바로에게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소개하면서 히브리 사람들의 하나님이라고도 말하고 있다는 점인데,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백성을 가리킬 때, 흔히 이스라엘 사람들이라고 하는 데 본문에서는 굳이 히브리 사람들이라 지칭하고 있습니다. 본문에서 말하는 히브리 사람이란 당시 그들이 애굽 사회의 밑바닥에서 천하고 힘든 일을 하며 살던 사람들이었음을 의미합니다. 특히 이스라엘 사람들의 근원이라 할 수 있는 히브리라는 단어는 부랑민, 천민, 난민, 또는 하류층에 속한 땅의 사람들을 뜻하는 단어로서, 우리나라로 말하면 양반에 대칭되는 상놈에 속하는 좋지 못한 뉘앙스를 풍기는 단어입니다. 그러므로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당대의 최고 권력자이자이자 사회적으로 최상류층에 속하는 애굽왕 바로 앞에서 굳이 자신을 히브리 사람들의 하나님란 말로 표헌한 데는 하나님 자신이 어떤 분인가를 드러내고자 하는 분명한 목적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본문을 읽을 때 히브리라고 하는 말은 어떤 혈통을 따른 것이라기보다는 사회적인 지위를 가리키는 말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고 생각한다면, 오늘 읽은 본문 3절에서 히브리 사람들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사람들에 나타나셨다(3절)는 말씀이 주는 의미가 얼마나 크고 놀라운 것인지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다시 새겨보자면, 하나님은 당시 애굽에서 천덕꾸러기로 고생하던 이스라엘 사람들, 그 사회에서 기를 펴지 못하던 여러 종류의 사람들을 지키시고 도우시려고 찾아오셨다는 것입니다. 모세를 통해서 자신을 소개한 하나님은 이 세상의 권력자에 대해서 상대적으로 약자인 히브린들의 하나님이 되신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와 아론은 바로 이 하나님을 내세우며 대담하게 애굽 왕에게 이스라엘 사람들이 빈들로 갈 수 있도록 허락해달라고 한 것입니다.
결국 모세와 바로의 첫 대면은 하나님을 배경으로 한 약자들과 이 세상의 최고 권력을 가진 사람을 배경으로 한, 소위 강자와 약자의 대결인 셈입니다. 오늘 읽은 본문은 강자인 바로와 약자를 도우시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나선 모세의 첫 번째 대결이 어떻게 되는지 보여주고 있습니다. 계속해서 이 첫 대결이 어떻게 진행되어 가는가를 살펴보겠습니다. 4절을 보십시다.
"모세야, 아론아, 그런 소리 집어치워라. 너희들은 어찌하여 이 백성들이 일하는 것을 소홀히 하도록 하려고 하느냐? 너희들은 너희 일이나 잘 해라!(4절)" 그런 다음 바로는 이스라엘 사람들을 이전 보다 더 심한 강제 노역을 시키면서, 그들을 감독하는 사람들에게 "너희들은 이 백성들에게 벽돌 만들 때 필요로 하는 짚을 그전처럼 주지말고 짚이 필요하면 그들 스스로 주워 오도록 하여라. 그렇다고 그들이 만들어야 할 벽돌 수를 줄여주면 안 된다. 얼마나 일이 쉬웠으면 그 녀석들이 '우리가 가서 우리 하나님께 제사 드리겠다'고 하느냐? 게으른 녀석들! 그들에게 일거리를 잔뜩 주어서 힘들게 만들어야 다시는 그런 엉뚱한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겠지(7-9절)"
모세와 아론이 하나님의 명을 받들어 히브리 사람들을 바로의 억압과 고역에서 풀어주려고 찾아갔다가 이스라엘 사람들의 형편이 오히려 그 전보다 더 어렵게 되었습니다. 벽돌 만드는 일만 해도 힘에 겨운데, 이제는 새벽같이 일어나 이리저리 다니며 지푸라기 줍는 일까지 해야했고, 게다가 현장 감독들이 그들을 그전보다 훨씬 혹독하게 대했습니다. 그리고 만일 짚을 구하는데 시간과 힘을 빼앗겨 정해진 수의 벽돌을 만들지 못 하면, 애굽 감독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이 게으른 녀석들!" 하며 채찍으로 때리며 무자비하게 굴었습니다.
그러면 바로 왕이 왜 이스라엘 사람들을 이전 보다 더 못살게 굴었을까요? 정말 모세와 아론이 히브리 사람들의 하나님 이름을 들먹이며 그들을 풀어달라고 했기 때문일까요 아닙님니다. 사실 바로가 실제적으로 두려워했던 것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함께 힘을 모아 자기에게 대드는 것 대문이었습니다. 지금까지는 죽은 듯이 시키는 대로만 일하던 그들이 어느 날 갑자기 모세와 아론을 앞세워 자기들을 내보내 달라고 요청해오자 바로는 속으로 더럭 겁이 난 것입니다 "저 많은 녀석들이 한데 힘을 모은다면 나와 나의 백성에게 무슨 짓인들 못하겠는가? 아예 그런 생각을 못하도록 이 백성들의 마음이 모세, 아론에게서 멀어지도록 해야지." 그래서 그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숨도 제대로 못 쉴 정도로 가혹하게 대한 것입니다.
과연 이 같은 바로의 속셈은 맞아떨어집니다. 힘들여 일해봤자 정해진 양의 벽돌은 만들어낼 수 없고, 또 애굽 감독으로부터 얻어맞기만 하게 된 히브리 사람들 가운데, 몇몇 사람들, 아마 요즘말로 하면 노동자들 가운데 조장 쯤 되는 위치에 있던 사람들인데 이들이 왕이 왜 자기들을 이전 보다 더 잔혹하게 대하는지, 또 일이 왜 이렇게 어렵게 꼬여가는지 그 원인을 확인하러 애굽왕 바로에게 찾아갔습니다. 16절입니다. "왕이시여! 어찌하여 저희들을 이리도 혹독하게 다루시나이까? 어찌하여 저희에게 짚도 주지 않으시면서 벽돌을 만들라 하시나이까? 저희가 이토록 얻어맞을 정도로 잘못하지는 않았나이다. 애굽 사람들(감독)이 뭔가 오해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16절)"
이에 바로가 대답합니다. "아니야, 내 백성들이 잘못한 것은 없노라. 너희들이 게으른 녀석들이 아니냐? 그래서 '우리가 가서 애훼께 제사드리고 싶다'라고 하지 않았느냐? 그러니 이젠 잔소리 말고 돌아가서 부지런히 일이나 하여라. 너희들에게 시간이 남아돌아 그따위 생각을 했으니, 내가 짚을 주지 않더라도 그전에 정한 수만큼의 벽돌을 만들어 내게 바쳐야만 한다(17-8절)." 바로왕의 이야기를 들은 그들은 바로가 애굽의 감독들을 동원해서 자기들을 전 보다 더 괴롭히게 된 원인이 모세와 아론 때문에 그렇게 된 줄 알고선 돌아와 모세와 아론에게 "모세야, 아론아, 우리가 바로의 눈에 밉상스럽게 보이게 된 것은 너희 때문이 아니냐? 너희들이 괜히 말을 잘못해서 그것을 빌미로 바로가 우리를 죽이려는 것이 아니냐? 야훼께서 너희하는 짓거리를 보시고 심판하시기를 바란다(21절)"고 하며 불평을 퍼붓기 시작합니다.
모세와 아론으로서는 억울하지만 아무런 할 말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기들은 하나님께서 시키신 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했을 뿐인데, 결과적으로는 그것이 동족을 더 괴롭힌 것이 되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여기까지 살펴 볼 때, 어찌보면 하나님의 심부름꾼 모세는 바로 왕과의 첫 번째 대결에서 패배한 것처럼 보입니다. 하나님께서 부르시고 맡기신 일이라서 거절하지 못하여 하나님 시키시는 대로 한 모세로서는 그 첫 시도부터 성공은 커녕 오히려 동포들에게 어려움만 더해 주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모세의 마음이 얼마나 참담했겠습니까! 그렇지만 그는 한숨만 쉬고 있지 않았습니다. 자기를 부르신 하나님께 이 답답한 사정에 대한 해명을 요구합니다. 23절을 보십시다. "주님, 이 어찌된 일입니까? 어찌하시려고 이 백성이 더 불행을 당하도록 하십니까? 어찌 하시려고 저를 보내셨습니까? 제가 바로에게 가서 주님의 이름으로 말씀을 전하자 바로가 이 백성을 더욱 더 괴롭히는데도 주님께서는 이 백성을 건져내지 아니 하시나이다(22-3절)"
그러자 하나님께서 답하십니다. "모세야, 낙심하지 말아라. 이제 내가 바로에게 하는 일을 네가 보게 될 것이다. 내가 힘센 손을 쓰면 바로가 이 백성을 내보낼 것이다. 내 힘센 손에 못 이겨 그가 그들을 그 땅에서 몰아낼 것이다. 두고 보아라(6:1-2)" 이렇게 해서 모세와 바로왕의 첫번째 대결 이야기가 끝납니다. 본문에서 하나님게서 두고 보아라고 하신 말씀에 줄을 그어시기 바랍니다.
성도여러분! 우리는 본문 속에서 참담함으로 주저앉아야할 모세가 주저하지 않고 다시금 하나님 앞에 나아가 자신의 형편을 아뢰고 있는 변화된 모세의 자세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전 같았으면 분명 백성들의 불평과 원망에 자기도 못해먹겠다고 돌아 서 버릴텐데, 이제 그는 하나님이 시키신 일이니 어찌하던 하나님이 진행시킬 것을 바라면서 하나님의 해명과 지혜를 원하는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뒤로부터 과연 하나님께서 어떻게 바로를 이기시는지는 이어집니다. 첫 번째 재앙으로부터 마지막 열 번째 재앙까지 강팍해질 대로 강팍해진 바로를 항복시켜가시는 이야기가 계속 전개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까지 본문의 이야기 속에서 우리는 아주 중요한 몇 가지 교훈을 발견합니다. 무엇보다 먼저, 하나님은 억울하게 고생하는 사람들의 하나님임을 스스로 드러내시고 그들을 이 세상의 권력자의 손에서 벗어나게 해 주시려고 모세를 보내셨다는 점입니다.
둘째,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한 걸음씩 한 걸음씩 이끌어가려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무리 능력 많으신 하나님이라 하더라도 한꺼번에 우리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시지는 않는다는 점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약간의 어려운 문제가 있다하더라도 그 모든 문제가 일시에 해결되기를 기대하다가 실망하기보다는 하나님이 반드시 그 문제들을 해결해주실 것을 바라며 인내하는 믿음이 우리들에게도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세 번째, 애굽의 권력자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알지 못하고 이스라엘 백성을 더욱 더 괴롭힌 것처럼, 오늘날 악의 세력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뉘우치기보다는 힘없는 사람들을 더욱더 괴롭힘으로써 그들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단결하는 것을 막으려 한다는 사실입니다. 이 세상의 잘못된 권력자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억눌린 사람들이 힘을 합하고 결속하여 사람다운 권리를 제대로 발휘하는 것입니다. 역사를 보면 지금까지 권력을 가진 사람들은 언제나 중우정치, 소위 우민화 정책 곧 백성을 어리석게 하는 정책을 펴왔습니다. 그래서 약한 사람들이 뿔뿔이 흩어져서 힘을 못쓰도록 같은 감언이설로 백성을 속이고 술책을 다 부려왔습니다. 그들은 불쌍하고 힘없는 사람들이 뭉치지 못하도록 서로 이간시키고 분열시키려 획책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으로, 히브리 사람들의 하나님은 종살이하는 이스라엘을 애굽의 억압에서 건져내시려는 계획을 결코 포기하지 않고 반드시 이루어 내시고야 마는 분이십니다. 바로 여기에 오늘 우리들의 희망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지금 하나님이 부르신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평소 여러분이 하고 있는 일들, 일상 속에서 하고 있는 사업, 직장의 일들, 학교에서 공부하는 일이나 삶의 현장에서 이러저러한 수많은 일들과 사람들과의 관계가 과연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들어 그 분의 의도대로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렇다면 참으로 잘 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일을 함에 있어서 여러분은 하나님으로부터 계속적인 격려와 위로를 받을 필요가 있고 도 도움을 얻을 것입니다. 여러분의 일상의 삶이 하나님의 부르심에 합당하도록 생각하고 그것에 미루어서 살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백성이 살아가야 할 삶의 원리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하나님의 의도대로 내게 주어진 삶을 진행시켜 나간다 해도 당장 성과를 거두거나 꼭 성공했다고 장담하지 못할 일들이 많을 겁니다. 그렇다고 해서 낙심하고 절망해야 하겠습니까?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희망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오늘 본문 마지막 부분에 하나님이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모세야 낙심하지 말아라! 두고 보아라! 그렇습니다. 두고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시키신 일은 하나님께서 반드시 책임지실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여러분의 선한 삶이 지금 당장은 실패한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으로만 하자면 당장에라도 주저앉아 버리고만 싶은 현실입니다. 그러나 그러지 않아야 합니다. 모세와 바로의 첫 번째 대결은 모세의 참패로 끝난 것이 아닙니다. 이는 오히려 마지막 승리를 향한 시작에 불과하다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부산진 가족 여러분! "첫번째 대결" - 비록 그것이 상황을 더 낫게 하지 못했다 할지라도 마지막 승리를 향한 첫걸음인 줄을 확실히 믿고 조금도 흔들리지 말고 여러분의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이 부르시는 부름에 합당한 삶을 살아가십시오! 당장 무슨 큰 영광이 없고, 하나님이 시킨대로 하다가 이스라엘백성처럼 오히려 더 큰 부담과 짐이 되어 괴롭긴 하지만, 그러나 하나님께서 두고 보아라 하시는 한 우리에게는 승리가 보장되어있습니다. 그러므로 상황이 어떻더라도 기죽지 말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가십시오. 그리하여 마침내 하나님의 자랑과 성공이 여러분의 자랑과 성공이 되는 그런 생애를 펼쳐가시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