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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05
#벨기에신앙고백서 12.#천지창조 (2)
He has given all creatures their being, form, and appearance, and their various functions for serving their Creator.
성부 하나님께서는 모든 피조물에게 창조주를 섬기기 위한 각자의 존재와 형태와 모양과 다양한 역할을 부여하셨습니다.
Even now he also sustains and governs them all, according to his eternal providence, and by his infinite power, that they may serve man, in order that man may serve God.
심지어 지금도 성부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자신의 영원한 섭리하심을 따라 만물을 지탱하시고 다스리시며, 당신의 영원하신 권능으로 만물이 인간을 섬기게 하셔서 인간이 하나님을 섬기도록 하십니다.
지금의 세계는 첫 사람 아담과 하와의 범죄로 인해 부패하고 타락한 상태이기 때문에 생물이나 물질들의 겉모습만으로는 그것들이 어떻게 하나님과 그리스도께 영광을 돌리고 그분을 섬기는지 알 수 없고 도리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뜻을 거스르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아담의 범죄 전 창조 세계는 하나님과 그리스도께서 보시기에 좋은 온전한 상태였기 때문에 비록 그 상태가 지금과는 어떻게 다른지 알 수는 없어도 생물은 생물대로, 무생물은 무생물대로 창조주이신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섬기며 그분께 영광을 돌렸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피조물들이 사람의 범죄로 인해 그 형질과 속성들이 부패하고 타락했다고 해서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더이상 섬기지 않는 것이 아니다. 피조물들은 주님의 섭리를 따라 살며 기동하고 있으며 악인은 악인대로 그 쓰임에 맞게, 의인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섬기고 그분께 영광을 돌리고 있다. 지금 피조물들의 극도로 제한되고 비천한 섬김은 주님의 재림과 성도들의 부활 승천과 이 땅의 심판과 불에 풀어짐이 끝난 후 하늘의 새 예루살렘에서 완전히 고귀하게 회복된다.
사람이신 그리스도께서는 우주만물 뿐만 아니라 나라와 권세와 족속과 문명과 질서와 제도까지 만드신 분이시기 때문에, 교회와 성도들은 피조물들이 사람을 섬기는 것과 같이 각각 속한 나라의 정부와 제도와 질서에 순종하고 다스리는 권세들을 섬겨야 할 의무가 있다. 마찬가지로 다스리는 권세를 가진 성도들은 사람이 그리스도의 뜻을 따라 피조물들을 다스리고 보살펴야 하는 것처럼 자신의 다스림을 받는 사람들을 부모와 같이 챙기고 보살펴야 한다. 반성경적이고 불의하고 무능한 정부와 국가지도자라 할지라도 물리적으로나 무력으로 그들을 대적할 권한은 교회와 성도들에게 주어지지 않았으며, 도리어 반성경적인 정책을 손해를 감수하면서 묵묵히 거부하는 권한만 우리에게 주어졌다. 불의하고 무능한 권세를 저주 비방 악담하는 권한도 우리에게는 없으며, 오로지 그들을 위해서 기도해야 하는 의무만 우리에게 주어졌다. 불의한 아내에 대해서는 선지자 호세아처럼, 불의한 남편에 대해서는 아비가일처럼, 불의한 자녀에 대해서는 탕자의 아비처럼, 불의한 부모에 대해서는 여로보암의 맏아들처럼, 불의한 사장한테는 야곱처럼, 불의한 직원한테는 빌레몬처럼 행해야 한다.
#20220105
#사사기 #Judges 6:1-24
사사 #기드온
1 이스라엘 자손이 또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칠 년 동안 그들을 미디안의 손에 넘겨 주시니
2 미디안의 손이 이스라엘을 이긴지라 이스라엘 자손이 미디안으로 말미암아 산에서 웅덩이와 굴과 산성을 자기들을 위하여 만들었으며
3 이스라엘이 파종한 때면 미디안과 아말렉과 동방 사람들이 치러 올라와서
4 진을 치고 가사에 이르도록 토지 소산을 멸하여 이스라엘 가운데에 먹을 것을 남겨 두지 아니하며 양이나 소나 나귀도 남기지 아니하니
5 이는 그들이 그들의 짐승과 장막을 가지고 올라와 메뚜기 떼 같이 많이 들어오니 그 사람과 낙타가 무수함이라 그들이 그 땅에 들어와 멸하려 하니
6 이스라엘이 미디안으로 말미암아 궁핍함이 심한지라 이에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라
이스라엘 자손들이 이런저런 핑계를 대면서 노동력으로 쓰려고 남겨두었던 가나안 족속이 이제는 범죄로 인해 나약해진 이스라엘이 노동으로 애써 일군 것을 착취해버리게 되는 아이러니가 발생하게 되었다. 사울 왕이 여호와 그리스도께 불순종함으로 그분을 멸시하자 여호와 그리스도께서는 성령을 거두시고 악령을 그에게 보내셨다. 사울 왕이 여호수아 시대에 화친 조약을 맺었던 기브온 족속을 까닭없이 학살하자 여호와 그리스도께서는 다윗 시대에 사울 왕의 일곱 자손을 그들에게 넘겨줘 학살 당하게 하셨다. 다윗이 간음과 살인과 배신을 저지르자 여호와 그리스도께서는 다윗의 딸이 자기 맏아들에게 강간을 당하게 하시고 그 맏아들이 다른 아들에게 살해 당하게 하시며 맏아들을 살해한 아들에게 반역을 당하게 하시고 그 아들이 자기의 후궁들과 집단 혼음을 벌이게 하셨다. 아합과 이세벨이 속임수로 경건한 나봇과 그의 아들들을 죽이고 그의 포도원을 강탈하자 여호와 그리스도께서는 아합의 선지자들에게 속이는 영을 보내셔서 거짓 예언을 따르게 하시고 그 전쟁터에서 일개 적군의 화살에 맞아 죽게 하시고 창녀들이 목욕하는 연못에서 피를 흘리게 하시고 그 피를 들개들이 핥아먹게 하셨으며 이세벨은 예후의 반역을 당하게 하시고 성의 높은 창문에서 떨어지게 하시고 그 살들을 들개들이 먹어치우게 하셨다. 무죄하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아죽인 유대인들은 그 피의 대가를 자기들과 자녀들의 머리위에 쏟으라고 저주한대로 40년 후에 로마군에 의해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지 않고 철저히 진멸 당하였고 그 자손들은 2천 년 가까이 모든 민족에게서 핍박을 받으며 정처없이 떠돌아다녔다.
7 이스라엘 자손이 미디안으로 말미암아 여호와께 부르짖었으므로
8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한 선지자를 보내시니 그가 그들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이스라엘의 하나님 내가 너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며 너희를 그 종 되었던 집에서 나오게 하여
9 애굽 사람의 손과 너희를 학대하는 모든 자의 손에서 너희를 건져내고 그들을 너희 앞에서 쫓아내고 그 땅을 너희에게 주었으며
10 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기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 너희가 거주하는 아모리 사람의 땅의 신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하였으나 너희가 내 목소리를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하셨다 하니라
이스라엘은 과거에 자기 선조들이 이방 족속들에게 괴로움을 당할 때마다 여호와께 부르짖어 여호와 그리스도께서 보내신 사사를 통해 구원을 얻었던 경험들을 떠올리고 이번에는 7년이라는 짧은 기간에 여호와 그리스도께 부르짖었다. 그러나 여호와 그리스도께서는 과거에 그들이 부르짖자마자 사사를 보내셨던 것과는 달리 이번에는 선지자를 먼저 보내셔서 그들의 배은망덕한 죄악을 꾸짖으신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그러한 여호와 그리스도의 선지자에게서 책망을 받은 것으로 끝날 뿐 그 말씀을 듣고서 누구 하나 통회하며 자복하였다는 이야기는 찾아볼 수 없다. 교회와 신자들이 심상찮은 재앙을 겪을 때에는 괴롭고 힘들다고 푸념하는 것보다 지난 날에 저질러놓고 청산하지 않은 죄악들이 무엇인지를 돌이키는 것이 우선이다. 3년 째 이어지는 코로나라는 질병에 교회와 신자들이 우선적으로 해야 할 것은 얼른 이 어려운 시기를 평안히 벗어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그리스도께 저질러 온 죄악들을 통회하고 자복하며 진정으로 회개하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교회와 신자들의 모습은 여호와 그리스도의 선지자의 책망을 받고도 회개하지 않은 이스라엘의 모습과 같다.
11 여호와의 사자가 아비에셀 사람 요아스에게 속한 오브라에 이르러 상수리나무 아래에 앉으니라 마침 요아스의 아들 기드온이 미디안 사람에게 알리지 아니하려 하여 밀을 포도주 틀에서 타작하더니
12 여호와의 사자가 기드온에게 나타나 이르되 큰 용사여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도다 하매
기드온에게 나타난 여호와의 사자는 평범한 인간인 선지자가 아니라 사람의 모습을 한 천상의 존재이다. 그가 오브라에 이르러 상수리나무 아래에 앉아있었다고 한 것은 천상의 신령한 존재로서의 영광을 가지고 하늘로부터 웅장하게 임한 것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처럼 아브라함에게 나타났던 소돔과 고모라로 향하던 세 명의 여호와의 사자들처럼 두 발로 걸어서 이동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호와의 사자가 상수리나무 아래에 앉아있었던 것은 육신의 피곤함 때문에 휴식을 취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여호와 그리스도께서 사사로 세우실 기드온을 기다리기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스라엘의 위대한 사사로 세움받을 기드온의 등장은 우리의 예상과 기대와는 달리 소심하고 유약한 겁쟁이의 모습이었다. 세상에서 천시를 받을 정도로 비천한 사람이나 남들보다 유별나게 심성이 유약한 사람들을 교회와 신자들이 함부로 대해서는 안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데, 하나님 그리스도께서 이들 중 누구를 당신의 큰 용사로 삼으실지 우리는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교회와 신앙에 무관한 사안들에 대해서는 소위 호구라고 불릴 정도로 유약한 성품을 가진 사람이 복음의 진리를 수호하는데 있어서만큼은 누구도 대적하여 쓰러뜨리지 못할 만큼 크고 강한 용사의 성품을 드러내기도 하는 법이다. 세상에서는 스스로 큰 용사임을 자처하면서 나서는 자들이 존귀와 영광을 얻지만 그리스도 하나님의 교회에서는 스스로 큰 위인임을 내세우는 자들치고 제대로 쓰임받는 사람이 없다.
13 기드온이 그에게 대답하되 오 나의 주여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면 어찌하여 이 모든 일이 우리에게 일어났나이까 또 우리 조상들이 일찍이 우리에게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를 애굽에서 올라오게 하신 것이 아니냐 한 그 모든 이적이 어디 있나이까 이제 여호와께서 우리를 버리사 미디안의 손에 우리를 넘겨 주셨나이다 하니
14 여호와께서 그를 향하여 이르시되 너는 가서 이 너의 힘으로 이스라엘을 미디안의 손에서 구원하라 내가 너를 보낸 것이 아니냐 하시니라
기드온은 여호와의 사자에게 나의 주라고 부르는데 이는 아마도 그에게서 어떤 범상치 않은 위엄을 느끼긴 했어도 설마 여호와 그리스도 본인이신줄은 전혀 생각할 수가 없어서 사람의 예대로 높여 존칭을 부른 것으로 보인다. 기드온은 자신을 여호와 그리스도의 큰 용사라며 말을 걸어온 여호와의 사자에게 마치 수가 성의 여인이 물 좀 달라 하시는 예수님께 이런저런 퉁명스런 대답을 했던 것처럼 과연 여호와 그리스도께서 이스라엘을 돌보시는 것이 맞냐고 항변을 한다. 기드온 또한 여느 이스라엘 사람들과 같이 자기들이나 자기들의 선조들이 여호와 그리스도께 저지른 죄악은 생각하지 않고 그저 울부짖고 탄원하면 다 되는 줄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자 여호와의 사자는 당신 자신이 여호와 그리스도이심을 드러내시며 그렇게 하소연하는 기드온에게 본격적으로 이스라엘의 사사가 되어 이스라엘을 미디안의 손에서 구원해 내라고 명령하신다. 교회가 진리에서 벗어나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는 것을 알게 된 신자들은 드러나지 않게 뒤에서 궁시렁궁시렁 대지 말고 그 자신이 그리스도 하나님께서 세우신 큰 용사임을 알고 그 잘못된 것을 바로잡아 교회를 구원하기 위해 공개적으로 전면에 나서야 한다.
15 그러나 기드온이 그에게 대답하되 오 주여 내가 무엇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리이까 보소서 나의 집은 므낫세 중에 극히 약하고 나는 내 아버지 집에서 가장 작은 자니이다 하니
16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하리니 네가 미디안 사람 치기를 한 사람을 치듯 하리라 하시니라
기드온은 자신더러 사사가 되어 이스라엘을 미디안에게서 구원하라는 여호와 그리스도의 말씀에 자신의 집안과 자신의 미천함을 고백하면서 도저히 가능하지 않을 것 같다고 발뺌을 하는데, 사실 모든 이야기를 알고 있는 우리로서는 그러한 기드온의 모습을 그저 믿음없는 행동이라고 정죄해서는 안되고 우리 자신 또한 기드온 같을 수 밖에 없다는 겸손한 고백을 하며 너그럽게 수용하여야 한다. 그러한 기드온의 고백은 한편으로는 연약한 믿음을 드러내는 것일수도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은 세상에서 아무것도 내세울 수 없는 가장 낮고 천한 사람임을 겸손하게 고백한 것이기도 하다. 여호와 그리스도께서는 그런 기드온의 반문에는 아랑곳하지 않으시고 그와 함께 하셔서 미디안을 무찌르게 하실 것을 약속하신다. 사도 바울이 기록한 바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믿음을 행하는 성도들은 그리스도 하나님께서 기드온처럼 세우신 큰 용사들이다.
17 기드온이 그에게 대답하되 만일 내가 주께 은혜를 얻었사오면 나와 말씀하신 이가 주 되시는 표징을 내게 보이소서
18 내가 예물을 가지고 다시 주께로 와서 그것을 주 앞에 드리기까지 이 곳을 떠나지 마시기를 원하나이다 하니 그가 이르되 내가 너 돌아올 때까지 머무르리라 하니라
그제서야 기드온은 자기와 이야기하는 여호와의 사자가 그저 어떤 위엄있는 사람의 하나가 아니라 어쩌면 신적인 인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기드온이 여호와의 사자에게 주 되시는 표징을 보여달라고 한 것은 사람으로서 기드온에게 미디안을 무찌르게 할 수 있는 군사력 같은 도움을 줄 수 있을만한 왕 같은 위인인지를 보여달라고 한 것일수도 있고 자기와 말씀하시는 이가 과연 여호와 그리스도 그분이신지를 보여달라고 한 것일수도 있다. 아마도 이 두가지 마음이 기드온에게 혼재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9 기드온이 가서 염소 새끼 하나를 준비하고 가루 한 에바로 무교병을 만들고 고기를 소쿠리에 담고 국을 양푼에 담아 상수리나무 아래 그에게로 가져다가 드리매
20 하나님의 사자가 그에게 이르되 고기와 무교병을 가져다가 이 바위 위에 놓고 국을 부으라 하니 기드온이 그대로 하니라
21 여호와의 사자가 손에 잡은 지팡이 끝을 내밀어 고기와 무교병에 대니 불이 바위에서 나와 고기와 무교병을 살랐고 여호와의 사자는 떠나서 보이지 아니한지라
22 기드온이 그가 여호와의 사자인 줄을 알고 이르되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내가 여호와의 사자를 대면하여 보았나이다 하니
23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너는 안심하라 두려워하지 말라 죽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24 기드온이 여호와를 위하여 거기서 제단을 쌓고 그것을 여호와 살롬이라 하였더라 그것이 오늘까지 아비에셀 사람에게 속한 오브라에 있더라
기드온이 여호와의 사자에게 드릴 예물을 준비하는 모습은 흡사 아브라함이 여호와와 두 천사들을 맞이하여 급하게 음식을 대접해 드린 것과 비슷하다. 아마도 기드온은 아브라함이 했던대로 여호와의 사자에게 음식을 대접해 드리려고 새끼 염소 고기와 국과 무교병을 준비했던 것 같다. 그가 무교병을 준비했던 것은 여호와의 사자를 여호와 그리스도로 알고 그랬다기보다는 미디안에게 극심하게 괴롭힘을 당하던 시기라서 입을 즐겁게 하는 유교병을 만들기가 여의치 않아서 그랬던 것 같다. 여호와의 사자는 기드온이 가져온 음식들을 아브라함이 접대한 세 천사들처럼 입으로 받아먹은 것이 아니라 바위 위에 올려놓고 국을 부으라고 지시한 후에 기드온이 그대로 하자 지팡이 끝으로 불을 내어 바위와 음식들을 살라버리고 홀연히 사라져버린다. 즉 기드온은 사실 제물을 바쳐 제사를 드릴 생각은 없었으나 여호와 그리스도께서 기드온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스스로 그것을 당신 자신을 위한 제물로 삼으시고 취하셨던 것이었다. 이는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바와 같이 과부가 헌금한 두 렙돈을 가장 귀한 예물로 받으시고 복음을 위해 수고하는 자들을 위해 냉수 한 잔을 주는 것도 하늘의 상급을 받을 것이라 여기시며 주님의 오른편에 분류된 양과 같은 성도들이 아무 보상도 바라지 않는 어쩌면 아주 하찮아 보이는 그런 선행들로도 구원을 비롯한 여러 상급으로 갚아주시는 것과도 같다. 기드온은 여호와의 사자가 예물을 불사르고 사라진 후에야 비로소 그가 바로 창세 전 영원 전부터 사람으로나 하나님으로나 성부 하나님께로부터 독생하신 여호와 그리스도이심을 깨닫고 감히 그분과 대면하여 보았다는 근원적인 두려움에 휩싸여 탄식하게 된다. 아브라함은 여호와 그리스도께서 흑암으로 임하실 때 크게 두려워하였고 모세는 율법을 받으러 흑운과 천둥과 번개가 치는 시내 산에 혼자 올라갈 때 몹시 두려워하였으며 선지자 이사야는 셋째 하늘에 들려 올라가서 보좌에 앉으신 여호와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고서 자기에게 화가 임하여 망하게 되었다고 탄식하였다. 여호와 그리스도께서는 그렇게 두렵고 떨림으로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어 고백하는 기드온에게 위로와 격려와 언약을 베푸신다. 기드온은 그렇게 여호와 그리스도께로부터 안위를 얻은 후에야 비로소 여호와 그리스도께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제단을 쌓고 제물을 드린다. 그런데 사사 시대에는 이미 오래전에 모세를 통해 제사 규례가 주어졌는데도 기드온은 마치 그런 제사법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율법이 주어지기 오래 전 족장들의 방식대로 스스로 제단을 쌓고 제사를 드리는데 이는 그만큼 그 당시 이스라엘에게는 율법 조차도 유명무실 해져서 족장들 시대만큼이나 퇴보해 있었다는 것을 암시한다. 교회의 역사가 수십년이나 되었는데도 여전히 교인들의 신앙수준이 단단한 말씀은 못먹고 젖이나 먹는 유치하기 짝이 없는 정도라면 율법이 무시되어 수백년이나 퇴보한 기드온 당시의 이스라엘과 별반 다를 것이 없다.
#20210105
#민수기 #Numbers 22:21-22
발람과 그 나귀
21 발람이 아침에 일어나서 자기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모압 고관들과 함께 가니
아마도 발람은 여호와께로부터 모압 고관들과 함께 가도 좋다는 허락을 받고서는 여호와께서 자기 소원을 들어주신 것으로 여겨 아침에 일찍 일어나 흥에 겨워 여장을 꾸리고 즐거운 마음으로 모압을 향해 나섰을 것이다. 어디 한 번 너 하고 싶은대로 해보라는, 지극히 반어법적인 허락을 마치 여호와께서 기뻐하시는 명령인줄 알고 자기 탐욕을 그럴듯하게 포장하는 것이다. 이러한 발람의 태도는 오늘날 교회에서 얼마나 비일비재하게 일어나는지 모른다. 더군다나 이러한 모습은 가시적으로 남들보다 탁월함을 가진 교회와 교인들에게서 쉽게 볼 수 있다. 사실, 오늘날 그리스도의 복음을 제대로 추구하려면 이 땅의 눈에 보이는 것들에 대해서는 적잖은 손해를 필수적으로 볼 수 밖에 없으므로 대규모의 무언가를 이룬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즉, 교회가 또는 교인이 복음대로 사역하고 살아간다 하면서 큰 부귀영화를 같이 가지고 있다는 것은, 거의 십중팔구는 세속적인 불법과 불의와 야합하고 타협했기 때문인 것이다. 그런데도 그런 교회들과 교인들은 자기들이 가지고 있는 세속적 부귀영화가 마치 하나님께서 부어주신 복인 양 그럴듯하게 치장하곤 한다. 그리고 그런 것들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저질러지는 온갖 불범적인 행위들도 하나님의 보호하심의 섭리로 포장한다. 그러면 우둔하고 우매한 다른 교인들은 똥인지 된장인지 구분도 못하고 그게 맞는건가보다 하고 열심히 할렐루야 아멘을 외치곤 한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교회와 성도들에게 원하시는 것은 비록 손해를 보더라도 성경에 기록된대로 순종하는 것이다. 아무리 내 마음이 교묘히 죄악을 원하더라도 성경에서 금하는 것은 미련이 남지 않도록 단호히 잘라내는 것이다. 설령 자기의 탐욕에 이끌려 가는데 하나님께서 제지하시기는 커녕 무슨 일인지 그 일이 그야말로 순적하게 탄탄대로를 가는 것처럼 보이더라도,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 일을 기뻐하시기 때문이 아니라, 어디 한 번 너 죄짓고 싶은대로 마음껏 지어봐라 하시면서 내버려두시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교회와 신자들에게는 주님의 책망과 징계보다 번영을 가장한 방임이 가장 크고 무서운 형벌임을 알아야 한다.
22 그가 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진노하시므로 여호와의 사자가 그를 막으려고 길에 서니라 발람은 자기 나귀를 탔고 그의 두 종은 그와 함께 있더니
많은 사람들이 혼란을 가지는 것이 왜 하나님께서는 발람더러 모압 고관들과 함께 가라고 하셨으면서 여기서는 진노하시느냐는 것이다. 이것만 본다면 하나님께서 일관성이 없으신 것 아니냐고 항변할 수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민수기 뿐만 아니라 베드로나 요한 등의 사도들이 발람에 대해 언급한 것을 종합적으로 판단해서 발람이 어떠했길래 하나님께서 진노하셨는지를 생각해보아야 한다. 사도 베드로는 발람을 탐욕에 눈이 먼 망령된 자라 하였고, 사도 요한은 당시 교회를 혼란하게 했던 니골라당을 일컬어 발람의 가르침을 전한다고 하였다. 이로 미루어봤을 때 앞서 언급했듯이 발람은 그저 단순히 중립적으로 여호와의 명을 지키다가 진노를 당한 것이 아니라, 여호와께로부터 신령하고 탁월한 은사를 받았으면서도 이에 만족하지 못하고 육체의 탐욕 때문에 여호와를 이용하려 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발람을 막아선 여호와의 사자는 하나님께서 부리시는 천사 중 하나라고 볼 수도 있고, 신성으로나 인성으로나 영원부터 영원까지 독생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라고 볼 수도 있다. 대체로 한글성경에서는 구약에서의 천사 또는 여호와의 사자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킬 때는 존칭을 쓰지만 이처럼 이중적으로 해석될만한 구절에서는 존칭을 사용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냥 여호와의 사자이겠거니 하고 넘겨들어도 무방하지만, 좀 더 호기심이 있어서 탐구해보고자 하면 전후 문맥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20180105
고린도후서 12장에서 바울사도께서는 자신이 셋째 하늘(=낙원)에 이끌려가서 형언할 수 없는 천상의 계시와 언어를 들었다고 고백하고 있다. 그러나 이 고백은 바울사도가 성도들 앞에서 자신의 우월함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 아님은 문맥을 보면 잘 드러나 있다.
‘무익하나마 내가 부득불 자랑하노니..’ 바울사도는 자신이 받은 환상과 천상의 계시를 고백하기 전에 이 고백이 무익하다고 전제하고 있다. 즉, 아무리 크고 신령한 환상과 계시를 체험하였다고 해서 이를 가지고 자랑하는 것은 전혀 교회에 유익하지 않음을 말씀하고 계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사도는 ‘부득불 자랑’한다고 하시는데, 이는 바울사도께서 받은 환상과 계시를 드러내지 않으면 안될 정도로 당시 고린도교회의 신앙수준이 심각한 상태에 있었음을 암시하는 대목이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깨닫고 삶으로 실천하는데서 오는 유익보다는, 다른 교인들과 차별화 되어보이는 이런 신령하고 신비한 체헙들을 가지고 자신들과 다른이의 신앙수준을 판단하는 분위기가 매우 심각했던 것 같다. 때문에 바울사도가 극약처방으로 자신의 신령한 체험을 밝힌 것이다.
제아무리 신령한 체헙을 했다고 하더라도 바울사도와 같이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간 사람이 있었겠는가. 또한 거기서 천상의 언어와 신비한 계시를 받은 교인이 과연 있었겠는가. 바울사도는 길게 얘기하고 싶지 않아서 그냥 한 방에 잠재워버릴 끝판왕 체험을 드러낸 것이다. 이로써 고린도 교인들은 바울사도 앞에서 감히 자신들이 받은 신령한 체험을 아무도 자랑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바울사도는 자신이 받은 환상과 계시와 더불어, 자신에게 임한 육체의 가시, 사탄의 사자를 언급한다. 자신이 받은 환상과 계시가 너무나 커서 교만해질까봐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보내신 연약함이라고 밝힌다. 굳이 자신의 연약함을 밝히지 않아도 되었을텐데, 왜 바울사도는 자신의 연약함을 드러내신 것인가?
첫째로는, 신령한 체험을 하는 자들은 자랑하면 안된다는 경고를 주기 위함일 것이다. 그러한 체험을 하게 되면 죄악된 본성으로 말미암아 쉽게 교만해지기 마련이다. 때문에 바울사도께서는 신령한 체험과 함께 육체의 가시를 언급하신 것이다.
둘째는, 특이한 신령한 체험을 소망하는 자들은 저러한 육체의 가시를 감당할 각오가 되어 있는지를 먼저 스스로 돌아보게 하기 위함일 것이다. 눈에 보이는 화려함 뿐만 아니라, 그 이면에 자신이 감당해야 할 고난과 역경을 각오하고 있느냐는 것이다. 그러한 각오없이 신령한 체험을 소망하고 가지게 된다면, 이는 자신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교회를 무너뜨리게 될 뿐이다.
셋째는, 그러한 육체의 가시마저도 온전히 기뻐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바울사도가 겪은 육체의 가시가 무엇인지는 모르겠으나(누군가는 눈의 질환이라고도 하고, 어떤이는 간질이라고도 한다.), 이것이 얼마나 심각했던지 바울사도는 세 번이나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였다. 그러나 그가 들은 응답은, 하나님의 은혜가 족하다는 것이었다. 얼마나 절망적이고 원망스러운 기도응답인가? 그러나 바울사도는 절망하지도, 원망하지도 않고 도리어 기뻐하며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다. 자신의 연약함으로 말미암아 온전히 그리스도께서 드러나실 수 있는 것으로 만족하였던 것이다. 기적을 체험하기를 바라거나 소유하고 있다는 자들은, 과연 이로 인해 더불어 받은 육체의 가시마저도 하나님께 감사드릴 수 있겠는가?
무언가 성령의 신령한 은사를 원하는 사람들은, 이를 원하는 것이 참으로 하나님의 영광과 그리스도의 교회를 위한 것인지, 아니면 남들과 달라보이고 자랑하고자 함인지 심사숙고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