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드윅> 속 삶과 사랑
2022101234 고아람
영화 <헤드윅>은 1998년 제작된 뮤지컬 <헤드윅>을 모태로 하고 있으며 뮤지컬 <헤드윅>의 제작자이기도 한 존 카메론 미첼이 감독과 주연을 맡았다.
<헤드윅>은 지극히 개인의 이야기라 할 수 있다. 평생을 경계에 걸쳐진 삶, 이민자로서의 디아스포라, 잃어버린 반쪽을 찾기 위해 부르는 노래들. 주인공인 헤드윅은 본인의 밴드인 ‘앵그리 인치’와 함께 자신의 이야기를 노래로써 전하며 살아간다.
나는 헤드윅을 구성하는 수많은 곡 중 “The Origin of Love”를 소개해보고자 한다.
The Origin of Love는 이름처럼 사랑의 기원을 노래하는 곡이다. 헤드윅은 사랑의 기원을 이렇게 설명한다.
“아직 지구가 평평하고, 불로 이루어진 구름이 떠다니는 정립이 되지 않았던 시대에 사람들은 지구 이곳저곳을 떠돌았다. 그들은 두 쌍의 팔과 두 쌍의 다리, 두 개의 얼굴을 가지고 있었으며, 양쪽 세상도 다 볼 수 있고, 읽으면서 동시에 말을 할 수도 있었다. 이들은 ‘사랑’이란 단어조차 알지 못했고, 이는 바로 사랑이 시작되기 전의 이야기이다.
그곳에는 3개의 성이 있었다. 하나는 두 남자의 등이 붙은 해의 아이들, 두 여자아이의 등이 붙어 하나로 된 땅의 아이들, 마지막으로 한쪽은 해 한쪽은 땅인 달의 아이들. 신들은 우리의 반항을 두려워했고, 제우스는 번개 가위로 고래의 다리를 자르고, 공룡을 도마뱀으로 만들었듯 이들의 가운데를 정확히 반으로 갈랐다. 해의 아이들, 달의 아이들, 땅의 아이들 차례로. 어떤 인도 신은 배 둘레를 꿰매 배꼽을 만들어 우리 죄를 상기시켰고, 오시리스와 나일의 신들은 거대한 폭풍우로 우리를 흩어지게 했다. 내가 널 마지막으로 본 것은, 우리가 막 잘려진 바로 그때였다. 너에게 친근한 느낌이 들었으나, 난 알아볼 수 없었다. 너의 얼굴엔 피가 흐르고 있었고, 나 또한 마찬가지였으니. 하지만 너의 표정을 보고, 너의 영혼 깊은 곳의 상처는 내 영혼 깊은 곳의 상처와 같은 것이란 걸 확실할 수 있었다. 그게 그 상처고, 우린 이를 사랑이라 부르기로 했다. 아주 오래전, 춥고 어두운 저녁 전지전능한 신의 손에 의해 일어난, 우리가 어떻게 외로운 두발짐승이 되었는지 말해주는 슬픈 이야기. 이것이 사랑의 기원이다.”
헤드윅이 말하는 사랑의 기원을 들으며 우리는 이런 생각들을 해볼 수 있다. ‘우리’가 갈라져 ‘내’가 되었는데 어떻게 우리는 다시 ‘우리’가 될 수 있을까. 어떻게 사랑을 모르던 사랑이란 단어조차 없던 시절로 돌아갈 수 있을까.
최근 들어 사회는 더욱 양극화되고, 혐오와 타자화가 팽배해지고 있다. 장애인의 권리를 외치며 시위하는 이에게 “불법시위”란 명목으로 의견을 묵살해버리고, 청소 노동자의 처우와 임금 협상을 위해 교내 시위를 지속하니 청소 노동자 시위 반대 대자보가 곳곳에 붙고, 남성과 여성으로 갈라진 채 서로 대화 하지 않고, 그 속에서 성소수자, 이민자, 노인, 아이들을 향한 혐오와 차별은 커지기만 한다. 이제는 이를 넘어설 때가 되지 않았을까. 서로가 서로를 타자화하는 것이 아닌 사랑의 기원처럼 우리가 ‘우리’였던 그때처럼 우리는 타자를 자기 반영해야 한다. 그렇게 ‘내’가 아닌 ‘우리’가 될 때 그때야말로 우리는 사랑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참고문헌
영화 <헤드윅> 中 “The Origin of Love”
늘보토끼의 봄, <헤드윅 - The Origin of Love 원곡>, https://url.kr/6xptck
첫댓글 그래서 "에로스"라는 말은 "육체적 사랑"이 아니라 "결핍하고 있는 것에 대한 갈망"이랍니다. 본래는 하나였지만, 둘로 나눠져서 상실한 반쪽을 바라는 것이 결국은 "육체적 사랑"을 의미하게 된 것이지요. 태양족, 지구족, 월족을 각각 구분한 것도 참신하기는 합니다만, 남자와 남자, 곧 사람과 사람의 사랑을 비교 우위에 놓는 것은 고대적 사유의 한계이겠지요. 혐오와 타자화는 주류계층이 비주류의 목소리를 억압하는 또다른 폭력에 지나지 않습니다. 청소노동자, 성수자, 이민자, 노인, 아이들이 우리사회의 비주류로서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이들이라 시위와 같은 극단적인 방식이 동원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주류들은 거꾸로 포장하지요. 여기에 속지 않아야 하는 것도 지식인의 당연한 의무이자 권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