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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피소드 Ⅱ-2 ( 바벨탑 !!! 무너지다!!! )
전후 유럽의 모든 것은 파괴되고 궁핍해진 것과는 반대로 미국의 경제는 매우 전도가 유망했다. 그리고 미국에서는 증권 투자를 부추기는 사회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1920년대의 주식시장은 직물, 석탄, 철도산업 업종은 침체하였지만, 자동차, 라디오, 가전제품 등은 폭발적으로 성장하여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었으며 이들 업종의 주식가격은 폭등에 폭등을 거듭하고 있었다. 1924년 연준의 신용완화정책은 미국 국내의 유동성 증가에 따른 수요의 증가에 따른 요구에 시의 적절하게 잘 들어맞았다. 다우지수는 1921년 여름 67의 저점을 찍고 나서 1925년까지 150을 돌파했다. 게다가 1925년 8월에 연준이 기준금리를 인하하자 주식시장은 날개를 달아 년 말에 다우지수는 20%이상 상승하여 200을 돌파하였다. 이러한 분위기에 힘입어 은행들은 대출을 확대하기 시작하였다. 은행이 주식중개인에게 제공하는 대출금의 일종인 Broker’s Loan은 주식중개인이 대출금을 이용하여 자신의 주식매입자금으로 이용하거나, 고객들에게 신용 거래를 제공했는데 총량은 1920년대 초 10억 달러수준에서 1928년에는 브로커 론이 44억 달러로 증가하였다.
1925년 미국의 기업실적은 1913년 수준의 2배가 되었다. 1925년부터의 주가 가 지속적으로 상승했던 시기를 당시 대통령의 이름을 본 따 일명 “쿨리지 상승장”이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미국을 대표하는 기업 제너럴모터스(GM)는 1908년 듀랜트에 의해 설립되어 뷰익모터컴퍼니, 올즈모빌, 캐딜락, 폰티악을 차례로 인수한 후 회사를 키워 나갔다. 1910년 사업의 과도한 확장으로 빚에 허덕이던 설립자인 듀랜트는 회사 경영권을 빼앗겼다. 이후 자동차 레이서 였던 루이 시보레와 새로운 자동차회사를 만든 뒤 1915년에 듀렌트는 공개매수의 방법을 통해 GM을 다시 되찾았지만, 1920년에 뒤퐁에게 다시 빼앗기고 말았다. 이때 GM은 년 25만 대의 자동차 생산을 하면서 년 3,000만 달러의 이익을 달성했다. 1925년에는 한 해 전국에서 판매되는 자동차의 25%에 해당하는 약 80여만 대를 생산하였다. 주가는 25달러에서 100달러로 상승했으며, 회사 가치는 2억 달러를 상회했다. GM은 계속되는 사세 확장과 이에 따른 영업이익이 급증하였으며, 1927년에는 1년에 당기 순이익이 2억5,000만 달러에 달했으며, 주가는 4배나 다시 올랐으며 회사의 가치는 20억 달러에 달해 미국 최대의 기업으로 부상했다. 또한 광풍에 가까운 주식시장의 상승에 힘입어 플로리다에서는 부동산 열기가 살아나 가격이 폭등하기 시작했다. 1차 대전 후 플로리다 인구가 2배로 급격히 증가하면서 25만 달러하던 마이애미의 땅은 500만 달러를 넘어섰다. 광란의 투기파티가 발생했던 것이다. 이에 에돌프 밀러는 “유럽통화의 가치를 뒷받침하기위해 실시한 저금리 정책이 버블을 조장하였으며, 특히 영국의 파운드화 가치를 지지하기 위해 미국에서 인위적으로 금리를 인하함으로써 연준은 주식시장의 거품을 키웠고, 그 결과 2년 뒤 대공황이 일어났다”고 주장했다.
1920년대 후반 미국에서는 거품과 투기열풍을 우려하는 소리가 미약하게나마 나오기 시작하였다. 1926년 말부터 부각되기 시작한 미국과 서유럽의 대표적인 문제점은 첫째. 미국 주식시장의 비이성적 과열에 의한 거품, 둘째. 독일의 과도한 외국차입금문제에 따른 전쟁배상금 지급의 모라토리움 선언에 대한 우려와 이에 따른 유럽각국의 갈등재현 우려, 셋째. 금본위제의 기능장애 이었는데, 이로 인해 1920년대 말 대격변이 초래 되었던 것이다. 1927년 다우지수는 168을 기록했다. 어찌 보면 1920년대 미국에서 6년 이상 발생했던 주식거품은 미국경제의 괄목할 만한 발전에 따른 것이었다. 급격하게 신장한 할부 금융으로 인한 수요의 폭발적 증가로 인해 자동차 생산이 급증하였고, 전국에 전력이 공급되어 관련 가전제품 소비 증가에 따른 제조업의 급성장, 게다가 경제상황에 대한 낙관론이 사회 전반에 팽배해 있었다. 1920년대의 라디오를 생산하는 대표적인 회사인 RCA의 주가는 1925년 과 1929년 사이에 939%나 올랐다. 예일대학의 경제학과 교수인 어빙피셔는 “미국이 전례 없을 정도로 과학과 발명품을 산업에 응용하고 있으므로 기대소득이 더 커질 것이다” 라고 예측했다. 또한 피셔교수는 “미국의 주식가격이 영원히 하락하지 않는 고원에 도달했다”고 주장했다. 결과적으로 피셔교수의 예측은 어처구니없게도 빗나가고 말았다. 주식시장이 정점에 가까워지면서 투기에 대한 강박 관념과 경제활동의 감퇴가 나타났고 거래 중개인에 대한 은행 대출 및 개인의 대출의 증감에 따라 주가가 상승하고 하락하는 현상이 발생하고 있었다. 1929년 10월 29일 대폭락이후 주가는 지속적으로 하락하기 시작했으며 이후 3년 동안 89%나 하락하여 1932년 7월에 최저점에 도달하였다. 이렇게 폭락한 주가지수는 세계경제의 성장 둔화를 촉발했고 대다수나라들이 수출 감소와 자국통화에 대한 투기 압력으로 인해 통화의 금 태환을 정지시켰다. 이후 늪에 빠진 미국경제는 조기에 회복하지 못한 상태로 1954년까지 대공황이전의 최고점에 도달하지 못하였다. 더욱 더 불행했던 것은 자산디플레이션이 역대 최악의 불황과 맞물려서 발생했다는 것이었다.
1929년이 되자 연준은 기준금리를 6%로 인상하였고, 뉴욕 연준은 증권거래업자에 대한 금리를 5%에서 20%로 인상하는 조치를 단행하였다. 자금조달에 난관에 부딪친 주식 중개인 및 투기자들의 증시탈출을 위한 투매로 인해 주식시장의 상황은 급전직하로 추락하였다. 그해 10월과 11월 두 달 동안 제2차 세계대전동안 미국이 생산한 물자의 총량과 맞먹는 1,600억 달러의 재산이 연기처럼 사라져 버렸다. 년 초에 66만 대를 생산하던 자동차 생산은 년 말에는 9만 2,500대로 감소하고 말았다. 이때 골드만삭스가 설립한 투자회사인 ‘골드만삭스트레이딩컴퍼니’는 한 주당 326달러까지 치솟았던 주가가 순식간에 주당 1.75달러까지 폭락하면서, 20세기 최고의 폭락사건으로 기록되면서 과도한 레버리지에 의한 투자가 최악의 시점을 만나 치명적인 결과를 만들어내는 과정에서 골드만삭스가 불명예를 안았다. 만약에 골드만삭스가 이 회사를 별도의 법인으로 설립하여 운영하지 않았다면 연이은 붕괴로 골드만삭스가 오늘날 존재할 수가 없었을 런지 모를 일이었다. 이런 상황을 지켜보던 통화주의학파인 밀턴 프리드만과 안나 슈워츠는 “1929년 10월의 주식시장의 붕괴는 생산량 감소의 강도와 거의, 혹은 전혀 관계가 없다는 점과 대공황은 미국 국내 정책의 결과이며 국제적 자본이동이나 환율, 또는 해외의 디플레이션과는 단지 간접적인 관련만 있을 뿐이다” 라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대공황에 대한 통화주의적 시각은 오랜 기간 동안 미국에 영향을 끼쳤다.
1929년 당시 미국은 무역과 재정부문에서 흑자를 어느 정도 유지하였지만, 결국에는 미국 건국 이후 경제적으로 최고의 번영기를 구가한 1920년대가 혼란 속에서 처참하게 저물어가고 있다는 것을 어느 정도 인식하고 있었지만 막을 방법을 찾지 못한 채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결국 1929년 9월 3일 이후에 미국의 다우지수는 381을 정점으로 기록한 후 더 이상 주가는 오르지 않았다. 1932년 중반 증권시장은 1929년 최고점을 견주어 10분의 1수준으로 폭락하고 말았다. 상품시장도 지속적으로 하락하고 있었다. 1928년 4월 국제 상품시장 카르텔의 붕괴로 고무가격이 40%나 하락하였다. 또한 주식시장의 거품을 억제하기 위한 미국 연준의 신용긴축정책으로 1928년 말부터는 시장의 흐름이 경기침체와 디플레이션, 그리고 금 부족으로 인한 각 국의 중앙은행이 수렁에 빠지기 시작했다. 독일은 채무불이행직전 상황에서 금 부족으로 곤란을 겪고 있는 와중에 상품가격은 지속적으로 하락했고, 미국주식시장은 미친 듯이 날뛰면서 돈이 홍수처럼 쏟아져 들어갔지만 연방준비제도는 제대로 작동되지 않았으며 뉴욕의 금리는 20%에 육박하고 있었다. 이렇듯 미국에서 금리가 오르자 프랑스를 제외한 유럽각국은 금이 대서양을 넘어 미국으로 가는 것을 막기 위해 안간힘을 썼으며, 대응책으로 금리를 인상하는 것으로 맞설 수밖에 없었다. 연방준비제도의 폴 와그너는 “고통스럽게 반복되는 역사 속에서 우리에게 과도한 투기적 팽창이 예외 없이 과도한 수축과 고난으로 끝난다”는 것을 지적해 주었다. 또한 그는 “방탕과 무절제 그리고 고삐풀린 투기의 파티가 계속될 경우 주식시장의 궁극적인 붕괴가 전국에 광범위한 불황을 가져올 것”이라고 경고하기도 했다. 그러자 즉시 그에게 미국의 번영을 짓밟으려고 한다는 비난이 쏟아지기도 했다. 1929년 쿨리지에 이어 백악관에 입성한 후버대통령에게 주어진 가장 중요한 과제는 어떻게 해서 합리적으로 주식시장의 거품을 없애면서 경제를 연착륙시켜야하는가 하는 것이었다. 벤자민 스트롱의 후임으로 뉴욕 연준의 총재가 된 사람은 조지 L. 해리슨이었다. 이때 연방준비제도 이사회 의장은 로이 영이었다. 1929년 초가 되면서 미국 주식시장의 버블이 연준 뿐 만 아니라 거의 모든 유럽 중앙은행들의 문제가 되었다. 뉴욕주식시장이 해외의 자본들을 모두 빨아들이는 블랙홀이 되어 있었다. 1929년 2월 11일 뉴욕 연준은 금리를 1% 올려 6%로 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연방준비제도 이사회는 거품을 꺼트리기 위해서는 직접적인 조치인 브릿지론을 축소해야한다고 주장하면서 금리인상 을 허가하지 않는 등 문제 해결에 대한 시각차가 있어 골이 깊어져만 가고 있었다. 이렇게 연준 내부에서 서로 다투는 동안에 투기는 점점 더 과열되어 갔고, 결국에는 연준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게다가 미국 정부는 주식폭락과 함께 폭락한 실물 경제로 인해 파산위기에 처한 제조업자를 보호한다는 이유로 관세를 인상하는 「홀리-스무트관세법」의 시행으로 일부수입품의 가격이 50%나 인상되었다. 이로 인해 각 나라는 보복적인 관세장벽과 수입할당제를 내세우면서 국제교역량은 3분의 2수준으로 줄어들었다. 또한 1930년 중반 연준이사회가 신용공급을 확대하는 금융 정책을 중단하고 통화긴축을 함으로써 증권시장은 다시 요동을 치기 시작하였다. 위기는 점차로 금융권으로 확대되어 1930년 12월 11일에 미국 역사상 가장 큰 은행의 파산인 뉴욕 4대 은행 중 하나인 U.S.은행의 파산으로 이어지면서 예금자의 패닉심리에 불을 댕겨 뱅크 런이 본격화되면서 1931년은 미국 금융 역사상 최악의 해로 기록되었다. 연이은 은행파산으로 상품가격의 하락, 기업 파산, 은행파산의 연쇄작용으로 부채 디플레이션 과정이 확산되어만 갔으며, 국제금융제도는 채무불이행과 자본통제, 통화가치 하락이라는 혼돈 속에서 산산 조각나고 말았다.
미국 최대의 투자분석 및 경기 예측업체인 밥슨통계기구의 대표인 로저 밥슨은 “공장은 문을 닫을 것이며, 실업이 증가할 것이며, 경기침체가 올 것이다”라고 예측하여 「손실의 예언자」라는 별명을 얻기도 하였다. 월스트리트의 제시 리버모어는 “주식을 이길 수는 있지만, 주식시장을 이길 수는 없다”라고 말하였다. 어떤 특정한 주식의 가격 상승이나 하락을 야기하는 요인들은 예측할 수 있지만, 전체시장의 등락을 결정하는 요인을 판단하는 것은 대부분의 사람들로서는 어렵다는 의미였다. 1928년 미국에서 발생한 ‘구두닦이 소년들의 주식얘기’는 그 시기의 과열된 분위기를 말해주는 재미있는 일화인데, 하나를 소개하자면 한 신사가 구두를 닦으면서 구두닦이 소년들이 주식에 대해 얘기하는 것을 들은 후에 구두닦이 때문에 주식을 모두 처분하고 시장에서 완전히 떠나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고 했다. 왜냐하면 구두닦이 소년이 주식시장에 대해 나만큼 많이 아는 때가 왔다면 내가 손을 떼야할 시점이 왔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1929년 9월 19일 금요일에는 미국주식에 투자한 영국의 투자자들이 자본을 빼내기 시작했으며 매물부담에 시달린 주식시장은 50%이상 하락했다. 그리고 10월 23일 수요일이후부터 시장에서는 패닉이 발생하였고, 설상가상으로 전국에 폭풍우가 강타하여 통신이 두절되고 전화선이 끊겨 혼란을 더욱 가중시켰다. 월가의 금융인들은 자기기만과 위장술로 상황을 호도하면서 주식투자자들에게 상황이 나아질 가능성이 있다고 말하면서 은밀하게 조성된 은행공동자금을 쏟아 부어 주가하락을 막기 위한 완충적 매수를 준비하고 실행하였다. 드디어 검은 월요일 1929년 10월 28일의 아침이 밝아왔다. 다우지수는14%인 40포인트가 하락했고, 140억 달러에 달하는 미국 주식가치가 증발했다. 이러한 주식시장의 붕괴는 늘 은행위기와 관련되어 있었다. 문제는 시장의 하락과 함께 대출금을 갚기 위해 안달이 난 중개인들이 담보로 보유하고 있던 주식들을 투매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주가가 자유 낙하하는 상황에서 브로커 론 시장에 쏟아 부은 외국계 자금들이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1929년 10월의 붕괴는 1869년의 검은 금요일이후 주식시장에 몰아닥친 11번째 공황이었으며, 가장 가혹한 공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처음에는 대형 은행이나 기업의 파산 없이 일어난 최초의 공황이기도 했다. 대붕괴는 GNP의 50%에 상당하는 금액인 500억 달러가 주식시장에서 증발해버렸으며, 300만 명으로 실업자가 증가하였고, 자동차 판매는 25%가 줄고 . 라디오 판매도 절반으로 줄었는데도 아이러니 하게 사회적 분위기는 지나치게 낙관적이었다. 그리고 위기 상황은 통제 불능이었다. 주식 시장의 문제가 은행의 위기로 확산 되었고, 결국 대공황으로 결론지어 졌다. 만약 연준이 미국 국내 경제를 희생하면서까지 금본위제를 고수하지만 않았더라면, 당시 미국 대통령인 후버가 경기침체라는 현실 앞에서 균형예산에 집착하지만 않았더라면, 정부가 파산위험에 빠진 은행들에게 신속히 자금을 지원했더라면 그렇게 해서 1930∼1931년에 걸쳐 진행된 금융 공황을 진정시켰더라면 1929년에 발생했던 주식시장의 붕괴는 흔해 빠진 일시적 침체만을 야기했을 것이고 곧 잊혀 졌을 것이라고 후대의 많은 경제학자들이 이야기를 한다고 한다.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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