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6월 1일(수)
* 시작 기도
주님...
조국에서는 오늘 6.1 지방선거가 치러집니다.
이 또한 땅의 일이지만 주께서 세운 이 나라의 일꾼들을 세우는일이기에 주의 뜻을 이루는 귀한 일꾼들로 세움받기를 원합니다.
눈 앞에 보이는 작은 유익에 일희일비하는 자가 아니라 국민과 나라를 바르게 세울 수 있는 일꾼들을 잘 분별할 수 있는 눈을 주옵소서.
이 종에게도 은혜를 베푸시고 오늘 장로님 회사에서 심방예배를 드립니다.
사랑을 따라 주님이 주신 은혜로 주의 복음을 증거하는 귀한 시간이 되게 하시고 함께 일하는 모든 직원들에게도 닫혀진 마음이 활짝 열려 생명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기회가 되게 하소서.
새 영과 새 마음으로 빚어주시고 주의 영으로 조명하사 말씀의 빛을 비추소서.
나의 옛 사람은 십자가에 못 박습니다.
주의 보혈로 나를 씻어 죄의 시궁창에서 벗어나 정결한 주의 신부로 서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본문 / 고전 14:1-12
제목 : 사랑을 따라서 영적 은사를 사모하되 예언을 사모하라.
1 사랑을 추구하며 신령한 것들을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
2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듣는 자가 없고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라.
3 그러나 예언하는 자는 사람에게 말하여 덕을 세우며 권면하며 위로하는 것이요
4 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우고 예언하는 자는 교회의 덕을 세우나니
5 나는 너희가 다 방언 말하기를 원하나 특별히 예언하기를 원하노라. 만일 방언을 말하는 자가 통역하여 교회의 덕을 세우지 아니하면 예언하는 자만 못하니라.
6 그런즉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서 방언으로 말하고 계시나 지식이나 예언이나 가르치는 것으로 말하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무엇이 유익하리요?
7 혹 피리나 거문고와 같이 생명 없는 것이 소리를 낼 때에 그 음의 분별을 나타내지 아니하면 피리 부는 것인지 거문고 타는 것인지 어찌 알게 되리요?
8 만일 나팔이 분명하지 못한 소리를 내면 누가 전투를 준비하리요?
9 이와 같이 너희도 혀로써 알아듣기 쉬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 그 말하는 것을 어찌 알리요? 이는 허공에다 말하는 것이라.
10 이같이 세상에 소리의 종류가 많으나 뜻 없는 소리는 없나니
11 그러므로 내가 그 소리의 뜻을 알지 못하면 내가 말하는 자에게 외국인이 되고 말하는 자도 내게 외국인이 되리니
12 그러므로 너희도 영적인 것을 사모하는 자인즉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하여 그것이 풍성하기를 구하라.
* 나의 묵상
여러분은 사랑을 따라서 영적인 은사를 구하되 특히 예언을 사모하십시오.
방언은 영으로 비밀을 말하는 것으로서, 그 말하는 대상이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므로 사람이 알아듣지 못합니다.
반면에 예언은 사람에게 말하는 것이므로 덕을 세우고 격려와 위로를 줄 수 있습니다.
따라서 나는 여러분이 모두 방언으로 말하기를 원하지만 특별히 예언하기를 원합니다.
만약 방언을 통역하여 교회의 덕을 세우지 못하면 이는 예언하는 것보다 낫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형제 여러분, 내가 여러분에게 계속해서 방언으로만 말을 하고 계시나 지식이나 예언 그리고 가르침의 말씀을 전하지 않는다면 나의 말이 여러분에게 무슨 유익이 있겠습니까?
피리나 거문고와 같은 악기들이 소리를 낼 때 악보를 따라서 연주하지 않으면 이것이 무슨 노래인지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또한 나팔이 분명한 소리를 내지 않는다면 어떻게 그 소리를 듣고 전투 준비를 할 수 있겠습니까?
마찬가지로 여러분도 방언으로 알아듣지 못하는 말을 하면, 여러분이 말하는 것을 어떻게 알아들을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단지 허공에다 대고 말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이처럼 세상에는 많은 말이 있지만 의미가 없는 말은 없습니다.
따라서 내가 그 소리의 의미를 알지 못하면 나는 그 사람에게 외국인이 되고 그 사람도 내게 외국인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이 영적 은사를 사모하는 자로서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한 선물을 넘치게 받을 수 있도록 힘을 쓰십시오.
각종 은사는 성령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이다.
하지만 이런 은사가 자기를 드러내는 자기 의의 수단이 될 때 이는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것이 되고 만다.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라고 주신 은사를 가지고 자기의 영광을 나타내고자 하는 것은 곧 하나님을 이용하는 것이다.
따라서 성령 하나님이 주신 선물을 사용하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사용할 것이다.
오늘 본문에서는 특별히 방언과 예언에 대하여 권면하고 있다.
방언은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교제 속에서 하는 영적 대화이다.
사람에게 방언으로 말을 하면 말하는 자나 듣는 자가 모두 그 뜻을 알지 못하여 결국 외국인끼리 서로 다른 말을 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따라서 방언을 하지 못하도록 막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은밀한 교제 속에서의 방언은 영적인 깊이를 더해주기 때문에 바울 역시 모두가 방언을 하기를 원하지만, 이보다 더 예언으로 말하기를 권하는 것이다.
바울 당시 고린도교회 성도들 중에는 자기가 받은 은사를 드러내놓고 자랑하는 이들이 있었다.
그래서 그 은사를 은혜롭게 절제하면서 사용하기보다 자기를 높이고자 하는 수단으로 사용하면서 교회의 질서가 무너지게 된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이들에게 너희 각 사람은 한 몸을 이루는 지체라고 강조하였다.
눈이 발더러 너는 맨 끝에 있으니 우리 몸이 아니라 하여도 발이 없으면 사실 눈도 그 존재가치가 없어지고 마는 것이다.
따라서 약한 지체일수록 더 요긴한 존재일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고전 1:27-29)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여기서 바울이 강조한 것은 방언보다 예언을 더 하라고 하였다. 여기서 말하는 예언은 사람의 미래를 미리 알고 말해주는 것이나 점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예언하다의 헬라어 ‘프로페튜온’은 하나님의 계시로서의 말씀 곧 복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따라서 예언을 하는 것은 그 사람의 앞으로 닥칠 운명을 예고하거나 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서부터 누리며 살 수 있도록 계시의 말씀으로 가르치고 권면하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우리 예수님께서 가장 정확하고 분명하게 행하셨다.
예수님은 분명히 창세전에 말씀으로 그리고 하나님 아버지 품속에 계셨다(요 1:1, 18).
그런데 말씀으로 계시던 아들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셨다.
그 오신 목적은 다름 아니라 아담의 자손인 우리들에게 영생을 주시기 위함이다.
(요 6:38-40)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
이 일을 위하여 말씀이신 아들이 육신을 입고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무덤에 장사되셨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셨다.
그리고 이를 믿는 자들에게 영원한 생명 곧 영생을 주셨다.
(요 6:47)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
여기서 아들을 보고 믿는 것이란, 나 또한 아들의 메시야적 구속행위(십자가, 장사, 부활복음)에 함께 참여하는 것을 뜻한다.
물론 예수님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많은 경우 병자를 고치고 귀신들린 자의 귀신을 쫓아내셨으며 배고픈 자들에게 먹을 것을 주셨다.
하지만 이런 것은 다 쇠하고 사라질 것이다.
그렇기에 주님께서는 이런 썩을 양식을 구하지 말고 영생으로 인도하는 양식을 구하라고 하셨다.
(요 6:27)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인치신 자니라.
그 즉시 유대인들이 예수님께 어떤 하나님의 일들을 하여야 하느냐고 묻자, 예수님께서 이렇게 대답하신다.
(요 6:29)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일들(works of God) 곧 복수로 물었지만,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일(work of God) 곧 단수로 대답하신다.
하나님의 일이란 다름 아니라 하나님이 보내신 이 곧 아들을 믿는 것이다.
여기서 예수를 믿는 것은 예수님의 구속사역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예수를 믿는 것을 헬라어성경이나 영어성경에서는 항상 이렇게 표현을 한다.
(I believe in Jesus christ).
예수님을 믿는다는 believe를 사용할 때는 반드시 전치사 in이나 into가 사용된다.
이는 예수를 믿는 것이 곧 내가 예수님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며 더 정확하게는 예수님이 행하신 구속사건 안으로 들어가서 나도 함께 참여하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셨기에 나도 함께 십자가를 지고 죽으며, 예수님이 무덤에 장사되셨기에 나도 함께 무덤에 장사되는 것이다.
그 때 아들이신 주님께서 그 무덤에 먼저 오셔서 성소를 지으시고 나와 함께 말씀으로 교제하기를 기다리신다.
그 자리가 비록 상황적으로는 어렵고 힘들지만 가장 안전하고 평화로운 자리이다.
왜냐하면 이런 무덤의 심판을 통하여 하나님의 공의가 세워지기 때문이다.
(시 94:15) 심판이 의로 돌아가리니 마음이 정직한 자가 다 따르리로다.
(사 32:17) 공의의 열매는 화평이요 공의의 결과는 영원한 평안과 안전이라.
창세전 하늘로부터 오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께서는 원사도로서 그 무엇보다 이 땅에 있는 사람들로 하여금 아들을 믿어 영생을 얻게 하셨다.
이를 위하여 공생애 기간 동안 계속해서 하나님나라 복음을 전하신 것이다.
주님이 전하신 이 하나님나라 복음이 곧 예언이다.
(벧전 1:25)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
나는 방언을 무척이나 사모하였다.
그런데 방언의 은사는 받지 못하였다.
그러나 목사와 선교사가 되어 하나님께서 계시로 주신 예언의 말씀을 전할 수 있음이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물론 나 역시 이 예언을 오해하였던 자이다.
사람들의 미래를 알고 미리 말해주는 것으로 알았던 것이다.
그런데 복음을 알고 보니 그것이 예언이 아니라 오늘 본문처럼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을 바르게 전하고 가르치는 것, 이것이 바로 예언 아닌가?
그런데 지금도 이 예언을 오해하여 예수의 이름으로 무당 노릇을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그것은 결코 예언이 아니다.
그 사람이 부자가 될 것인지 아닌지, 병에 걸릴 것인지 아닌지, 하는 것은 이 땅에 속한 것 곧 썩을 것들에 지나지 않는다.
내가 살고 있는 지금 여기에서부터 아버지의 뜻인 영생을 누리면서 사는 것이야말로 최고의 선물이요 은사가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내가 예수를 믿어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가 되었다는 그 자격 앞에서 감격의 눈물이 흐른다.
자격 없는 나를 아들의 생명을 주셔서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시고 땅의 것이 아닌 영원한 것 곧 영생을 누리게 하심 앞에 감사와 감격이 넘친다.
* 묵상 후 기도
주님...
버림받아야 할 내가 아주 버림을 당하지 않고 창세전부터 하나님의 언약 안에서 이렇게 살 수 있게 하여 주심이 그저 감사요 감격입니다.
내가 어떻게 이리 생명으로 살게 되었는지요?
내가 나를 보면 마치 소리를 구별할 수 없이 그저 시끄러운 소리만 내는 꽹과리에 지나지 않는 자인데 이런 나를 택하셔서 복음을 전하는 주의 사명자로 삼으셨으니 이 어찌 감사하지 않을 수 있겠나이까?
어떤 상황이 닥칠지라도 예언을 하는 일 곧 주의 복음을 증거하는 일에 온전히 매진하기를 원하오니 결국 쇠락하고 말 땅의 것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게 하소서.
우리 주님께서 온전한 복음이시요, 그 복음을 전하셨기에 나도 주를 따라 하늘의 복음을 전하는 자로 서기 원하나이다.
날 구원하신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