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낳아준 집
그 죽음을 떠나 벌써 학교 생활 서른아홉 해
해도 해도 공부는 끝없고
새 과목 늘어가기만 한다
점수 나아지는 기색도 없어
흥미 잃을 때 많다
집에 대한 그리움 남아 있을 때
집에 대한 기다림 남아 있을 때
이젠 됐으니 그만 돌아와도 좋다
연락 왔음 좋겠다
모두 동댕이치고 보내온 사람 따라가겠다
집에서는 언제나 연락이 오려나
사실 집은 학교에 들여보낸 후 냉담하기만 했다
공부 힘들고 병나 몸 아프면 언제라도 돌아오거라
다정한 목소리 보내준 일 없다
환상과 환청이 와서 집쪽을 보여주곤 했다
집이 어떤 기슭 아래서 너울거렸다
문이 천천히 열리고 창의 커튼이 밖으로 흘렀다
어머닐까. 어머니 같은 여자 웃는 듯 손짓이
아버질까. 아버지 같은 남자 어스름히 이쪽을
그 먼 거리를 순식간에 달려온 어떤 소리가 귓가에 닿았다
정녕 그냥 돌아오겠느냐
데려올 사람에게 채비를 시키겠다
그렇게 환상과 환청이 깊게 오고 나면
돌아갈 날짜를 꼽다가 꼽은 숫자를 자꾸 놓친다
지친다. 집에 대한 그리움도 기다림도 흐려진다
아주 가끔 지루한 학교 생활 속에 비상이 울린다
지난봄 소풍 땐 어지럼증이 있었던 소년 하나가
뱅뱅 나비를 잡다가 쓰러졌다
집이 가만히 다가와
늘어뜨린 팔소매로 소년을 안고 사라졌다
반란과 거역의 아름다움을 이루려는 젊은이 하나는
주머니칼로 제 성기를 잘라 집을 향해 먹였다
그럴 때면 그들의 친한 이웃 몇몇은
아련해하고 안타까워하다가 말수가 줄었다
이웃들의 마음속엔 어쩜
십 년짜리 공부 마치고
집에 돌아갈 날짜를 세어본다는 일은 부질없다
집이 나를 꼭 부를 것이고
집으로 내가 태어난 죽음으로
왜 내가 가지 않겠는가 왜 우리가.
첫댓글 이 시는 곽노순 교수 명상집 <큰 사람ㅡ 그대 삶의 먼동이 트는 날>(다산글방, 1990) 중 "빈 주머니여서 큰 웃음이 나도록 살아가라"라는 제목의 짧은 글에서 모티브를 얻었다. 그리고 두어 말 인용했다. 전문을 옮긴다.
죽음이 나를 털려할 때 빈 주머니여서 큰 웃음이 나도록 살아가라.
우리가 생겨날 적의 상태로 돌아가는 것을 빈 주머니라 한다.
그리로 가까이 갈수록 긴 여정의 피곤이 가셔진다.
그리고 여정이 끝나는 날 대문을 밀고 들어가
"학교 다녀왔습니다"라고
하는 학생의 기쁨을 얻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