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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날아라! 정대세 원문보기 글쓴이: 뽀로로
韓国大統領父娘を襲ったトランプ&ニクソン・ショック
米軍撤退と核武装…父・朴正煕氏と同じ危機に槿恵氏は?
2016.11.21 野口裕之
한국 대통령 아버지와 딸을 덮친 트럼프 & 닉슨 쇼크
미군 철수와 핵무장... 아버지 박정희 씨와 같은 위기에 박근혜 씨는?
2016.11.21 野口裕之 번역 오마니나
아버지가 딸을 걱정하는 것은 일반적인 일이지만, "친구"라고 믿었던 한국의 여자 실업가· 최순실 씨(직권남용의 공범혐의 등으로 11월 3일에 체포)의 국정개입 혐의로 정치생명이 끊길 지도 모르는 18대 대통령 박근혜 씨를, 아버지로 5~9대 대통령을 지낸 박정희 씨(1917~79년)는 황천에서 필시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지켜보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박정희 전 대통령은 딸인 박근혜 대통령의 정치 생명의 죽음과는 비교가 되지않는, 국가의 명운을 결정하는 현재의 "강대국 외교(동맹보다 이익을 우선하는)"를 원망스럽게 노려보고 있을 것이다. 미국의 차기 대통령으로 선출된 도널드 트럼프 씨는 대선을 통해 "주한미군 철수"를 "제안"하고 "주한미군 주둔 경비부담의 증가"를 요구해왔다.
북한의 핵 · 미사일 개발의 급속한 진화로 위기감이 고조되고 있던 와중에 "트럼프 쇼크"가 더해져, 한국내에서는 "자주국방 강화"는 물론이고 "핵무장"마저 주장되고있다. 트럼프가 대선에 승리하자 "한국을 지키기 위해, 미국은 견고하고 강력한 방어체제를 유지한다"고 궤도를 수정했지만, 예단은 허락하지 않는다.
박정희 씨도 현직에 있던 시절, "닉슨 쇼크"로 발단된 "강대국 외교"에 벼랑 끝으로 내몰려, "자주국방 강화"와 "핵무장"에 나섰던 정치적 경험이 있다. 트럼프는 3월에 미국 신문에 "미국은 세계의 경찰역을 맡지 않는다"고 강조했는데,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1913~94년)도 대선 전에 발표한 논문에서 "미국이 수행해 온 전세계에 대한 경찰역은 향후, 제한된 형태가 된다는 현실을, 다른 나라들은 인식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둘 다 대통령 취임 이전에 "동맹국이여, 미국에게 의존하지 마라. 자주국방을 강화하라!"고 경고한 것이었다. 향후, 궤도수정이 도모될 수있는 현재의 정세의 추이도, 닉슨 정권과 "트럼프 정권"은 공통적인 부분을 내포하고 있는 것 같다.
사전협의없이 주한미군 2만명 철수선언
이러한 자국 우선의 "강대국 외교"는, 아버지와 딸인 2대 대통령을 괴롭히고 있는데, 결코 우연이 아니다. 중국, 러시아, 북한과 미국 사이에서 살아가는 반도국가인 한국에게 놓여진 숙명인 것이다. 물론, 트럼프는 한국과 유사한 요구를 일본에 대해서도 한때 경고했으며, 우리나라에게도 강 건너 불구경으로 끝나지 않는다. "트럼프 정권"의 탄생은, 일본이 일미 군사동맹과 미국의 "핵우산"에 지나치게 기대는 것이 아닌 지, 한국의 안전보장의 슬픈 역사를 통해 주권국가로서의 본연의 자세를 점검하고 반성하는 좋은 기회도 될 것이다.
박정희 씨가 대통령이던 시절의 국내외를 둘러싼 안전보장 환경은, 현재의 동아시아의 혼미에 비해서도 훨씬 복잡하고 괴기했었다. 주한미군 철수는 "제안이나 협의" 따위가 아니라, 주한미군의 일익을 담당했던 1개 사단(2만명)이 실제로 철수했다. 게다가, 주한 미국대사는 1970년 3월, 한국과의 사전협의도 없이 갑자기 미국정부의 철수방침 결정을 한국정부에 전달했다. 그것도 70년 7월에는 미 국무장관이 정식으로 통보하는 외교상으로 무례한 형태로 취해졌다.
한국은 주한미군을 붙들어 맬 목적도 있어, 베트남 전쟁에 파병(역사적 문헌에 따르면 한국의 파병은 미국의 요구가 아님). 한국군이 그 땅에서 사투를 전개하고 있는 동안, 주한미군의 대부대는 철수했다. 한국군은 5만명을 베트남에 파병해, 최종적으로 5천명의 희생을 치렀다. 10% 전사라는 대가가, 주한미군 2만명의 철수였다.
철수에 대한 복선은 1969년 7월 25일, 닉슨 미국 대통령이 나섰던 비공식 기자회견에서 나타났다. 닉슨 씨는 다음 날~ 8월 2일의 아시아 6개국 순방을 앞두고 "아시아의 안전보장은 역내 당사국이 일차적 책임을 지고, 미국은 원칙적으로 분쟁에 개입하지 않는다"는, 후에 "닉슨 독트린"으로 불리는 기본전략을 밝혔다. 베트남 전쟁(1960~75년)이 수렁화하는 가운데, 남 베트남 자신의 자국방위도 촉구하는 내용이었다.
때 마침 제 1차 전략무기 제한협상이 1969년에 시작되어, 미소간의 긴장완화(데탕트)가 진행되고 있었다. 이 해에, 북한 근해에서 미 해군 정찰기가 격추되어 31명의 미군이 전사했다. 보복을 위해, 닉슨 정권에서는 전술 핵무기로 북한의 조선 인민군 기지에 대한 공격도 검토되었지만, 닉슨 씨는 보복을 명하지 않았다. 북한 김일성 정권의 대남 공격=소련에 의한 대미공격으로 간주한다,는 과거의 구도가 전환된 순간이었다. 반면, 한반도에서는 남북의 군사대립은 전혀 완화되지 않아, "미소 대리전쟁"은 "남북 직접전쟁"의 성격을 강화해 간다.
초대형 강진에 흔들린 한국은, 안전보장 정책을 경화시킬 것인지, 미국을 따라 연화시킬 것인지, 진퇴양난에 빠졌다.
박정희 씨는 참지못하고, 한미 정상회담을 제안하고, 샌프란시스코로 날아가 1969년 8월 22일, 닉슨 씨와 회담한다. 주목할 만한 것은 회담 이후, 박정희 씨의 대미요구가 주한미군의 증강보다 한국군의 현대화 + 군수산업 육성을 지렛대로 삼은 한국군의 전력강화로 변화한 점이다. 닉슨 독트린은 아시아 전체의 미군철수를 강조한 것이어서, 박정희 씨는 자주국방이 아닌 국가생존의 길은 없다고 재차 확신한 것이다. 이후 한국의 군수산업 육성을 일본과 미국이 지원했다.
미중 국교 정상화의 전제가 된 닉슨 씨의 전격적인 첫 방중 공표(1971년 7월)등을 일본에서는 "닉슨 쇼크"라고 부르지만, 한국에서는 방중 공표 이전에 나온 닉슨 독트린과 독트린에 따른 주한미군의 대철수도 "닉슨 쇼크"라고 표현하는 안보 관계자가 적지않다.
주한미군 중, 1개 사단(2만명)철수라는 갑작스런 정식통보(1970년 7월)를 받아, 박정희 씨는 핵개발을 생각하기 시작한다. 미군철수에 맞춰 미군의 핵전력도 빼버릴 것이라는 불안이 극에 달했기 때문이었다.
극비의 핵개발, 완성 목전에 암살
미국은 1974년 5월에 인도가 핵실험에 성공하자, 개발 도상국의 핵개발 착수를 경계해 첩보활동을 비약적으로 강화했다. 그 결과 "한국은 10년 이내에 한정적이지만 핵미사일을 개발할 것"이라고 결론을 지었다. 실제로 프랑스와는 1972년에 재처리 시설의 도입 협상을 개시하고, 73년에는 플라토늄 추출이 비교적 용이하다는 가압 중수원자로의 도입을 캐나다에게 제안하고 있었다. 이 모두 미국의 압력으로 포기한다.
그러나, 박정희 씨는 1975년 8월, 설득하러 내한한 미국 국방장관과의 회담 후에 "핵포기" 각서를 건네기 전까지 "핵무장"을 내외에 마구 공언했다. 미국은 아마도, 박정희 씨의 "속내"를 다음과 같이 파악했을 것이다.
"미국정부의 개입압력이 강해지는 상황하에서, 핵개발은 어렵다. 프랑스 제 재처리시설 도입 등으로 양보하는 반면, 주한미군의 지속적인 주둔과 핵우산 보장을 요구하고있다"
이렇게 분석한 미국은 국방장관에 기자회견을 열게해, 한국 내의 전술 핵무기 배치를 처음으로 언급하고, 유사 시에 실제 투입하는 가능성도 언급했다.
이러한 결과는 박정희 씨의 탁월한 안전보장 관을 말해준다. 그렇지만, 박정희 씨에게는, 미국도 한때 간과했던 "진짜 속내"가 있었다. 분명히, 극비의 핵개발을 계속했던 것 같다.
1978년 9월에, 프랑스의 기술지원을 받아, 지대지 유도탄(사정거리 180킬로미터) 발사실험에 성공하는데, 극비 핵개발의 방증으로 여겨지게된다. 1981년 내에 핵개발 완료가 시야에 들어와 있었다고 하는 측근의 증언도 있지만, 1979년 10월, 박정희 씨는 암살되고 만다. 후임인 전두환 대통령은 "미 핵우산"의 지속과 F-16 전투기 등 군사및 경제원조에 대한 대가로 핵개발 계획을 포기했다.
박정희 씨가 극비리에 핵개발을 추진한 배경에는, 지미 카터 대통령의 존재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닉슨 씨가 워터 게이트 사건으로 사임했어도, 여전히 한국의 비극은 이어졌던 것이다.
닉슨 씨의 후계인 제럴드 포드 부통령(1913~2006년)이 단기간 대통령직에 취임했지만, 닉슨 씨의 차기 대통령인 카터 씨는 "주한미군의 전면철수"를 선거공약으로 내세우고 당선한다. 카터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할 때까지, 한국은 "강대국의 외교"의 정체를, 신물나게 맛보았다.
미국은 북베트남과 1973년 1월, 전쟁종결을 약속한 평화협정을 맺고, 이미 3월에는 남 베트남에서 미군을 완전히 철수시켰다. 그리하여, 남 베트남의 수도인 사이공(현 호치민)이 1975년 4월에 함락한다. 따라서 카터 씨가 "주한미군의 전면철수"라는 공약을 내건 것은, 사이공 함락이라는 "미국이 '남쪽'을 저버렸던"사실이, 역사가 아니라 현실이라는 충격으로, 한국 측의 머리에도 마음 속에도 선명하게 각인시켰던 시기였다.
카터의 "주한미군 전면철수"구상은 좌절했지만, 악몽은 계속된다. 닉슨 씨의 방중으로 이미 기반을 완성되었지만, 한국전쟁(1950~53년 휴전)에서 최대의 적이었던 중국과, 최대의 아군이었던 미국이 카터 정권 하에서 정식으로 국교를 체결(1979년 1월)한 것이다.
"중국에게 경제를, 미국에게 국방을 의존하는 비참한 나라"는?
미국에 대해 철저한 의심을 품은 박정희 씨에게 핵개발 포기는 용인할 수 없었다. 경제발전은 어중간하고, 국제사회에서의 외교적 지위가 낮았던 약소국 한국의 국가 지도자인 박정희 씨는 "강대국 외교" 싸우며, 역대 정권 중에서, 가장 격동치는 시대를 극복했다.
다만, 지금도 한국은, 미국이 북한을 "핵보유국"으로 인정할 지도 모르는 악몽에 시달리고 있고, 미국은 북한의 핵공격의 위험을 무릅써야 할 정도라면, 한국을 방어하지 않을 것이라고, 의심한다. 미국은 친중사대주의인 한국에게 좌익정권이 다시 수립되어, 중국의 백업으로 북한 주도의 통일 핵무장 국가가 성립할 지도 모르는 동아시아의 지각변동을 경계한다.
한미관계는 기본적으로 냉전시대의 미국에 대한 의심이 줄곧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미국이 한국방위를 완수하지 않는다면, 한국은 핵무장하는 길뿐.하지만 그것은 일본의 핵무장을 유발하게 되는데, 좋은 일일까?"
무엇보다, "중국에게 경제를, 미국에 국방을 의존하는 비참한 나라"등으로 한국을 조롱하지말라. 군사동맹을 조금이라도 대등하게 만들려고 하면, 집단적 자위권 행사를 제한하면서도 가능하도록 하는 법률을 "전쟁법"등으로 비난하는 한편으로, 중국의 군사팽창에는 눈을 감는 어리석은 백성을 안고있는 나라(일본)는, 중국에게 협박을 받으면서도 집단적 자위권을 이론적으로 완전히 행사할 수있는 한국보다, "비참한 국가" 라고도 할 수있는 것이 아닌가.
http://www.sankei.com/premium/news/161121/prm1611210002-n1.html
일반적인 인식과 달리 박근혜 정권은, 당선자 시절부터 미국과의 기존 라인을 변경하는 외교책(리미근중)을 내세웠다. 하지만, 미국과 거리를 두는 정책의 어려움은 그것을 표면적으로 내세울 수 없어 국내의 지지를 얻어낼 수 없는 단점이 있었다. 그 점이 정권에 대한 좌우파의 지지를 상실하는 현실로 이어졌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동안의 외교와 대북정책에서의 성과를 무효로 돌릴 수는 없다. 최씨 사태의 본질을, 청와대 NSC를 주력으로 하는 세력과 좌우를 막론한 반통세력과의 마지막 결전으로 보고있는 나로서는, 위의 산케이 기사를 보니, 박정희시대와 현재의 국제정세가 반복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 점에서, 집권초기에 박대통령이 집요하게 추진했던, 핵무장과 관련한 미국과의 한미원자력협정을 둘러싼 공방을 다룬 글 두개를 재차 올려본다. 개성공단 폐쇄와 사드배치결정이라는 초강수를 통해, 북핵문제 해결의 출구전략을 남북 비핵화 회담으로 끌어내려는 박대통령은, 차기 미 정부의 대북정책이 어떻게 변할 지와 관계없이, 그것을 관철하려고 할 것이다. 그 최후의 카드는 "핵무장 선언"이 될 것이다.
*위 원문 중에서 최씨와 관련된 내용 중, 사실이 아닌 부분은 삭제하였다.
청와대에 어른거리는 유신독재의 핵그림자
2013. 3. 4.
외교관례 깨질 만큼 악화된 한미관계
2013년 2월 25일에 진행된 박근혜 대통령 취임식에 외국 경축사절들이 참석하였는데, 꼭 참석했어야 할 한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미국의 경축사절로 참석했어야 할 국무장관이 보이지 않은 것이다. 그 날 취임식장에 나타난 미국의 경축사절은 존 케리(John F. Kerry) 국무장관이 아니라 톰 도닐런(Thomas E. Donilon)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 이었다. 서울에서 대통령 취임식이 진행된 시각, 존 케리 국무장관은 전용기를 타고 영국 런던으로 날아가고 있었다.
다른 나라 국가수반 취임식에 어떤 급의 미국 정부관리를 경축사절로 보내느냐 하는 문제는 백악관 국가안보회의에서 결정하는 외교사안이므로, 경축사절 파견은 미국이 경축사절을 보내는 나라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객관적 지표들 가운데 하나다. 이런 맥락을 생각하면, 미국이 박근혜 대통령 취임식에 국무장관을 경축사절로 보내지 않고 그 보다 한 급 낮은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을 보낸 것은, 미국이 박근혜 대통령에 대해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 보인 현상이었다.
박근혜 대통령은 취임식 직후 청와대에서 각국 경축사절들을 연이어 접견하였는데, 태국 총리, 일본 부총리, 중국 국무위원, 칠레 전 대통령, 러시아 극동개발부 장관, 싱가포르 전 총리 순으로 만났다. 그 날, 미국의 경축사절 도닐런의 모습은 청와대에서 보이지 않았다. 박근혜 대통령의 경축사절 접견은 이튿날 계속되었는데, 호주 총독, 미국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 인도네시아 부통령, 페루 부통령 순으로 만났다. 박근혜 대통령이 접견일정 둘째 날에 가서야 호주 총독의 뒤를 이어 미국의 경축사절을 만나준 것은, 국무장관보다 한 급 낮은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을 경축사절로 보낸 미국에게 불만을 표시한 것으로 보인다.
누구나 직감할 수 있는 것처럼, 집권 2기에 들어선 오바마 정부와 갓 출범한 박근혜 정부는 눈에 보이지 않는 갈등을 빚고 있는 것이 분명해 보인다. 지금 한미관계가 갈등을 겪고 있다는 판단은 비단 경축사절 문제만 보고 확대해석한 것이 아니다. 취임식 전부터 한미관계에 아래와 같은 갈등현상이 나타나고 있었음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특사 방미 요청을 거절한 미국
2013년 2월 6일 이한구 새누리당 원내대표가 워싱턴 디씨를 방문하였다. 그는 박근혜 당시 당선인이 미국에 보낸 정책협의대표단을 이끄는 단장 자격으로 방미한 것이다. 원래 남측 대통령 당선인은 취임 전에 주한미국군사령부를 굴욕적으로 방문한 뒤에 특사부터 워싱턴에 보내는 것이 한미관계에 정착된 관례인데, 이상하게도 박근혜 당시 당선인은 특사단이 아니라 정책협의대표단을 워싱턴에 보냈다. 아직도 그렇지만, 대통령직인수위원회가 활동하던 지난 2월 초에는 무슨 정책이 아직 나올 만한 상황이 아니었는데, 특사단을 보내는 외교관례를 벗어나 생뚱맞게 정책협의대표단을 보냈으니, 누가 봐도 한미관계에 뭔가 심각한 일이 생겼음을 직감할 수 있다.
원래 대통령 당선인의 방미특사는 외교관례에 따라 당선인 친서를 미국 대통령에게 전하는 임무는 수행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한구 정책협의대표단 단장은 특사가 아닌데도 박근혜 당시 당선인의 친서를 가지고 워싱턴에 갔다. 박근혜 당시 당선인이 특사를 통해 보냈어야 할 친서를 특사가 아닌 사람을 통해 미국 대통령에게 전한 것은, 박근혜 당시 당선인이 특사를 워싱턴에 보내려고 했으나 미국이 거절하는 바람에 특사를 보내지 못하였음을 말해준다.
이한구 새누리당 원내대표가 미국의 거절로 특사 자격을 갖지 못한 채 워싱턴에 나타났으니, 미국 정부의 고위관리들이 그런 그를 만나줄 리 없었다. 미국의 관심 밖으로 밀려난 정책협의대표단은 워싱턴에 도착한 날, 6.25전쟁 참전 기념비 또는 조선왕조 말기 공사관 건물 같은 곳이나 한가하게 둘러보면서 방미 첫날을 보내는 수밖에 없었다. 정책협의대표단을 만나준 미국 정부 관리들은 국무부 부장관, 국무부 정무차관, 국방부 부장관,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 등 차관급이었다.
어떤 나라가 워싱턴에 특사를 보내는 경우, 미국의 특사 접견 일정은 방미 전에 외교통로를 통해 미리 확정되는 법이다. 그런 외교관례에 따라, 박근혜 당시 당선인도 정책협의대표단을 워싱턴에 보내기 전에 미국 국무장관의 정책협의대표단 접견을 요청하였으나 미국은 그 요청마저 거절하였다. 이처럼 특사 방미 요청을 거절당하고, 국무장관 접견 요청마저 거절당했다는 충격적인 사실을 숨긴 채 워싱턴에 나타난 정책협의대표단은 워싱턴 주재 남측 언론사 특파원들에게 마치 국무장관 접견일정을 현지에서 조절하고 있는 것처럼 말했으나, 그것은 자기들의 체면치레를 위한 촌극이었다.
이제껏 남측 역대 대통령들이 공식출범을 앞두고 한미관계에서 시행한 외교관례는, 취임 전에 특사단을 워싱턴에 보내 친서를 미국 대통령에게 전하고, 미국 대통령은 국무장관을 대통령 취임식 경축사절로 서울에 보내 남측 대통령에게 친서를 전하는 것이었다. 이런 외교관례를 돌아보면, 2008년 1월 23일 이명박 당시 대통령 당선인이 워싱턴에 보낸, 정몽준 국회의원을 단장으로 한 특사단은 백악관에 들어가서 조지 부쉬(George W. Bush) 당시 미국 대통령에게 친서를 전하였고, 부쉬는 정몽준 단장과 악수하며 기념사진까지 찍었다. 미국은 2008년 이명박 대통령 취임식에 콘돌리자 라이스(Condoleezza Rice) 국무장관을 경축사절로 보냈고, 그보다 앞서 2003년에 있었던 노무현 대통령 취임식에는 콜린 파월(Colin L. Powell) 국무장관을 경축사절로 보낸 바 있다. 그런데 박근혜 대통령이 취임하기 전부터 한미관계에서 생겨난 갈등으로 이번에 그런 외교관례가 깨져버렸다.
박근혜 당시 당선인은 미국이 거절하는 바람에 특사를 워싱턴에 보내지 못하고 베이징에만 보낼 수 있었다. 2013년 1월 21일 김무성 새누리당 전 선거대책위원회 총괄본부장을 단장으로 하는 특사단이 베이징에 가서, 양제츠(楊潔篪) 중국 외교부장을 면담했고, 전인대 부위원장, 외교담당 국무위원, 당대외연락부장, 외교부 상무부부장을 두루 만났고, 1월 23일에는 인민대회당에서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의 접견을 받고 친서를 전달했다.
특사를 맞아들인 중국의 태도와 특사를 거절한 미국의 태도는 너무도 대조적으로 보인다. 지금 친미수구언론들은 갈등현상을 은폐하고 있지만, 한미관계는 외교관례가 깨질 만큼 심한 갈등을 겪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한미원자력협정 개정 협상과 함께 줄줄이 터진 핵악재들
박근혜 정부가 공식 출범하기 전부터 한미관계가 심한 갈등을 겪게 된 까닭은 무엇일까? 이 문제를 파악하려면, 2013년 1월 중에 박근혜 당시 당선인의 공식활동을 추적해볼 필요가 있다. 그녀의 1월 중 공식활동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정부조직 개편안을 발표한 것이라고 볼 수 있는데, 심각한 사태는 2013년 1월 15일에 일어났다.
그 날 대통령직인수위원회는 새 정부의 조직개편안을 발표하는 자리에서 원자력안전위원회를 폐지하고, 그 위원회의 권한과 업무를 새로 설치하려는 미래창조과학부로 넘기겠노라고 밝혔다. 원래 원자력안전위원회는 2011년 3월 11일에 대통령 직속 독립기구로 출범하였는데, 당선인 시절의 박근혜 대통령은 그 위원회를 폐지하고 미래창조과학부에게 그 위원회의 권한과 업무를 넘긴다는 결정을 내린 것이다. (*참고로, 동 시기에 친미파의 총본산인 외교통상부를 해체한 사실도 있다)
박근혜 당시 당선인이 원자력안전위원회를 폐지하였다는 소식을 들은 백악관 국가안보회의 고위관리들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원자력안전위원회 존폐문제는 박근혜 정부의 핵정책에 직결되는 매우 중대한 사안이기 때문이다.
주목하는 것은, 박근혜 대통령의 원자력안전위원회 폐지결정이 현재 진행 중인 한미원자력협정 개정 협상과 맞물리면서 한미관계에 커다란 파문을 일으켰다는 점이다. 이에 관련하여 아래의 정보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첫째, 2013년 1월 하순 박노벽 외교통상부 한미원자력협정 협상전담대사가 워싱턴에 가서 로벗 아인혼(Robert J. Einhorn) 미국 국무부 비확산 및 군축 담당 특별보좌관과 만나 한미원자력협정을 개정하기 위한 협상을 벌였다. 거의 같은 때에 김건 한미원자력협정 실무단장도 워싱턴에 가서 리처드 스트랫퍼드(Richard J. K. Stratford) 미국 국무부 원자력안전안보과장과 만나 한미원자력협정을 개정하기 위한 별도의 협상을 벌였다.
한미원자력협정을 개정하기 위한 쌍방의 협상은 조용하게 진행되고 있는 것 같지만, 그 협상에 내장된 ‘폭발력’은 상상을 초월할 만큼 강력하고 위험한 것이다. 왜냐하면, 당선인 시절부터 박근혜 대통령은 남측 각지에 산재한 23개소의 원자력발전소들에서 나온 사용후 핵연료(spent fuel)를 처리하는 핵재처리 권한을 미국으로부터 얻어내려 애쓰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박근혜 정부가 사용후 핵연료를 재처리하는 건식처리공법(pyro-reprocessing)을 협정 개정을 통해 보장받으려는 것은 무기급 핵물질을 추출하겠다는 소리이며, 핵무기를 개발하려는 게 아니냐 하는 의심을 받을 만한 행동이므로, 핵재처리 문제는 한미관계에 갈등의 파문을 일으킬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핵무기를 보유하지 않고 원자력발전소만 가동하는 전 세계 비핵국가들 가운데 미국이 핵재처리권을 허락한 나라는 일본밖에 없다. 그 밖의 다른 비핵국가들은 원전을 가동하고 있으면서도 핵재처리를 금지당하고 있으며, 그런 나라들의 핵활동은 미국의 상시적인 감시를 받고 있다. 그런데 박근혜 대통령이 한미원자력협정을 개정하는 협상에서 핵재처리권을 미국에게 요구하고 나섰으니, 미국의 심기가 매우 불편해질 수밖에 없었으며, 따라서 한미관계가 심한 갈등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에 더하여 무슨 운명의 장난인지는 알 수 없으나, 박근혜 대통령에게 핵악재가 줄줄이 터졌다.
첫째, 남측의 핵재처리를 금지한 한미원자력협정은 1974년에 체결되었는데, 그 협정의 시효는 2014년 3월에 만료된다. 그래서 남측과 미국은 그 협정을 개정하기 위한 협상을 진행하는 중이다.
그런데 남측 국회와 미국 연방의회가 각각 협정안을 비준하는 데 걸리는 시간까지 산정하면 한미원자력협정 개정 협상을 끝내야 하는 시기는 2013년 상반기로 당겨진다. 핵재처리권이라는 ‘시한폭탄’을 안고 있는 한미원자력협정 개정문제를 2013년 상반기에 처리해야 하는 급박한 일정이 박근혜 대통령에게 들이닥친 첫 번째 핵악재다.
둘째, 2013년 2월 12일 북이 실시한 제3차 핵실험은 미국의 세계 핵통제체제를 무너뜨리고 북미관계를 뒤집어버린 제6핵강국이 등장하였음을 알린 엄청난 사변이었다. 그 엄청난 사변은 당시 공식취임을 앞두고 있었던 박근혜 대통령에게 정치적 치명상을 입혔다. 북미관계를 뒤집어버리며 핵강국으로 등장한 북을 상대할 아무런 방책도 그녀의 시야에 보이지 않을 터이니, 북의 제3차 핵실험은 그녀에게 들이닥친 두 번째 핵악재다.(참고. 그러나 박정부는 3차 핵실험에 대한 미국의 추가제재를 거부하였고, 한 달 후에 대북지원을 실행, 북측도 받아들인 사실이 있다)
셋째, 북의 제3차 핵실험으로 속이 뒤집힌 새누리당에서 충격적인 핵개발론이 거론되었다. 이를테면, 북이 제3차 핵실험을 실시한 날, 정몽준 새누리당 전 대표는 보도자료에서 “우리 스스로의 핵억제력을 갖추는 수밖에 없다”고 하면서 핵개발 불가피론을 주장하였고, 이튿날 서울 여의도 당사에서 열린 새누리당 최고중진연석회의에서는 핵개발 당위론이 난무하였다.
그들의 핵개발론은 원자력안전위원회를 폐지하기로 결정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가뜩이나 날카로워진 미국의 신경을 한층 더 자극하였다. 새누리당 지도부가 핵개발론을 들고 나와 한미관계 갈등을 더 격화시킨 것은 그녀에게 들이닥친 세 번째 핵악재다.
핵재처리권 확보를 향한 그녀의 강한 집념
<연합뉴스> 2013년 2월 4일 보도에 따르면, 2013년 1월 하순 워싱턴에서 진행된, 한미원자력협정 개정 협상에서 미국은 협정을 개정한다 해도 사용후 핵연료를 재처리하는 권한을 허락할 수 없다는 금지선을 그었다고 한다.
또한 남측 정부 고위관계자의 말을 인용한 <KBS> 2013년 2월 5일 보도에 따르면, 미국은 한미원자력협정 개정 협상을 2년 연기하자고 제의하였다고 한다. 이처럼 한미협상이 핵재처리권을 놓고 난항과 긴장을 겪고 있던 민감한 시기에 박근혜 당시 당선인이 미국에게 보여준 태도는 불에 기름을 끼얹는 격이 되고 말았는데, 그 사연은 이렇다.
2013년 1월 16일 박근혜 당시 당선인은 서울을 방문한 커트 캠벨(Kurt Cambell) 당시 미국 국무부 동아시아태평양 담당 차관보를 비롯한 미국 정부대표단을 만난 자리에서 “우리의 안정적인 에너지 공급과 핵폐기물 처리 문제가 대선 공약으로 국민들께 말씀드렸던 중요하고 절실한 문제인 만큼 이러한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미국은 국제사회가 신뢰할 수 있는 좋은 대안을 제안하고 논의해주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또한 박근혜 당시 당선인은 2013년 2월 1일 서울을 방문한 에드워드 로이스(Edward Royce) 미국 연방하원 외교위원장을 만난 자리에서도 “미래지향적인 방향으로 원자력협정이 개정되도록 관심을 갖고 협조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녀의 이런 발언들은 핵재처리권을 허락해달라는 강한 메시지를 미국에 보낸 것이다.
주미한국대사관 관계자의 말을 인용한 <연합뉴스> 2013년 2월 9일 보도에 따르면, 박근혜 당시 당선인이 미국에 보낸 정책협의대표단은 웬디 셔먼(Wendy R. Sherman) 미국 국무부 정무차관을 만난 자리에서 “한미원자력협정 개정에 대한 박 당선인의 입장과 의지를 전달했다”고 한다. 특사 방미 요청을 미국에게 거절당하고 정책협의대표단을 워싱턴에 보냈으면, 그들이 워싱턴에 가서 민감한 현안에 관한 발언을 자제했어야 하는데, 박근혜 대통령은 핵재처리권을 확보하려는 자신의 의사를 미국 국무부 고위관리에게 정책협의대표단을 통해 공식적으로 전달함으로써 미국을 계속 자극하였다.(참고, 이것이 기존 한미관계를 깨뜨리려는 의지를 보여준 것)
위와 같은 사실을 보면, 어떻게 해서든지 핵재처리권을 확보하려는 박근혜 대통령의 집념이 얼마나 강한지를 알 수 있다. 자신을 싸늘하게 바라보는 미국의 시선을 아랑곳하지 않는 박근혜 대통령은 결국 ‘마지막 으뜸패(matador)’를 미국에게 꺼내놓고 말았으니, 새로 설치하려는 미래창조과학부장관에 전혀 예상 밖의 인물을 내정한 것이 그것이었다. 2013년 2월 17일 박근혜 당시 당선인은 미국 중앙정보국(CIA)과 밀접한 관계를 맺은 미국 국적자(당시) 김종훈 벨연구소 사장을 미래창조과학부장관에 내정하였다고 발표하였다.
남측 핵활동을 감시하는 임무는 미국 중앙정보국이 수행하고 있는데, 박근혜 대통령이 바로 그 감시기관과 밀접한 관계를 맺은 인물을 핵활동부서의 총책임자로 내정한 것은, 미국이 절대적으로 신임하는 인물을 핵활동부서의 총책임자로 내세웠으니 미국은 더 이상 반대하지 말고 핵재처리권을 허락해달라는 뜻으로 해석된다.
또한 박근혜 대통령은 취임식 연설에서 “새 정부의 미래창조과학부가 창조경제를 선도적으로 이끌 것”이라고 지적하면서 정부부처들 가운데서 유일하게 미래창조과학부만 언급하였는데, 이것은 그녀가 미래창조과학부에 얼마나 큰 기대를 걸고 있는지를 잘 말해준다.
박근혜 대통령은 백악관의 의중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채 미국을 자극하는 행동만 계속하고 있고, 미국은 박근혜 대통령의 핵재처리권 요청을 들을 때마다 1979년의 악몽이 기억 속에 떠오르는 것을 어쩌지 못하고 있다. 그 악몽은 미국의 비확산정책을 거역하고 핵재처리 강행으로 핵무기를 기어이 만들려는 야망과 집착에 사로잡힌 유신독재자를 제거하기 위해 10.26 사태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해야 하였던 미국의 과거경험이 불러내는 악몽인 것이다.
미국의 비확산정책을 거역한 유신독재자가 결국 자기 심복의 손에 비참하게 최후를 마쳤던 때로부터 34년이 지난 오늘 바로 그 유신독재자의 딸이 청와대에 들어가서 핵재처리권 확보에 그토록 집착하고 있으니, 미국이 그녀에 대해 어찌 섬뜩한 느낌을 갖지 않을 수 있겠는가.
누구나 알 수 있듯이, 박근혜 대통령이 핵재처리권 확보에 그토록 집착하는 것은, 1970년대에 그녀의 아버지가 미국의 비확산정책을 거역하며 핵무기 개발에 집착하였던 전철을 밟아가는 행동이다. 한미관계가 심한 갈등을 겪게 된 까닭이 바로 거기에 있다.(참고, 친북인사인 한호석씨는 이런 박 대통령을 고무찬양해야 할 것이지만)
유신독재의 핵그림자 바라보는 미국의 살벌한 시선
서울 외교가의 소식통이 전한 말을 인용한 <스카이데일리> 2012년 12월 19일 보도기사를 다시 읽어볼 필요가 있다. 그 보도기사에 따르면, 미국 중앙정보국 한국지부는 당시 대통령 선거에서 문재인 후보가 당선될 것으로 본다는 내용의 비밀전문을 백악관에 보냈다고 한다. 미국이 남측의 대선마다 개입공작을 벌여 선거판세를 좌우해왔다는 사실은 ‘위킬릭스’가 폭로한 주한미국대사관 비밀전문들에서도 드러난 바 있는 공공연한 비밀인데, 위의 보도기사가 말해주는 것처럼 지난 대선에서 미국 중앙정보국 한국지부가 문재인 후보의 당선 가능성을 백악관에 보고하였다면, 그것은 미국의 대선개입공작이 문재인 후보를 당선시키는 방향으로 추진되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이에 관해서는 2012년 12월 15일 <자주민보>에 발표한 나의 글 ‘독재자의 딸에 대한 백악관의 불편한 시선’에서 자세히 논한 바 있으므로, 여기서 재론하지 않는다.
그런데 미국의 2012년 대선개입공작은 실패하였고, 미국의 기대는 꺾이고 말았다. 미국의 2012년 대선개입공작이 왜 실패하였는지 구체적으로 알 수 없지만, 미국이 왜 생각을 바꿔 문재인 후보를 당선시키려고 했는지에 대해서는 짐작할 수 있다. 만일 유신독재자의 딸이 대권을 잡을 경우, 1970년대에 미국의 비확산정책을 거역하며 핵무기 개발을 강행하였던 유신독재의 핵그림자가 청와대에서 또 다시 어른거리게 될 것을 우려한 미국은 그런 과거사와 무관한 문재인 후보를 당선시키는 쪽으로 공작방향을 전환하였을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박근혜 후보가 당선됨으로써 미국의 그런 우려는 피할 수 없는 현실로 되었다.
누구나 알 수 있는 것처럼, 미국이 박근혜 정부에게 핵재처리권을 허락하는 ‘특혜’는 미국이 자기의 핵확산정책을 폐기하지 않는 한 불가능하다. 핵확산을 막으려는 미국의 비확산정책은 미국이 절대로 양보할 수 없는 ‘미국의 국익들’ 가운데서도 최상위 ‘국익’이다. 그러므로 미국이 자기의 최상위 ‘국익’을 훼손시키면서 박근혜 정부에게 핵재처리권을 허락하는 것은 상상하기 힘든 일이다.
핵재처리권 확보를 향한 박근혜 대통령의 강한 집념을 여러 경로를 통해 확인한 백악관 국가안보회의는 살벌한 시선으로 청와대를 바라보고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박근혜 대통령 취임식에 나타나지 않았던 존 케리 국무장관이 3월 중에 서울을 방문하게 될 것이라는 최근 언론보도를 보면, 청와대를 바라보는 백악관 국가안보회의의 심사가 얼마나 뒤틀렸는지 짐작할 수 있다. 3월 중에 열릴 박근혜-케리 회담에서도 핵재처리권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한미관계에 일어난 갈등은 걷잡을 수 없을 만큼 파경에 이르게 될 것이다.
핵문제와 관련하여 박근혜 대통령과 그녀의 아버지 사이에 좀 다른 점이 있다면, 1970년대에 그녀의 아버지는 군사정권 독재자답게 미국의 핵확산정책을 거역하면서 ‘비합법적인 핵개발’에 집착하였던 반면, 오늘 박근혜 대통령은 한미원자력협정을 개정하여 핵재처리권을 확보하는 식으로 ‘합법적인 핵개발’에 집착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렇지만, ‘합법적인 핵개발’ 요구가 미국의 강제로 가로막혔을 때, 박근혜 정부가 ‘비합법적인 핵개발’로 은밀히 돌아설 ‘배반의 기회’가 있을 수 있다는 불길한 예감이 오늘 미국을 끝없이 괴롭히는 큰 우환거리다. 미국의 시각에서 바라보면, 박근혜 대통령이 핵재처리권 확보에 집착하는 행동은 미국의 비확산정책에 대한 무모한 도전이다. 청와대에 어른거리는 유신독재의 핵그림자를 미국은 어떻게 걷어낼 것인가? <한호석의 진보담론 (250)>
박근혜 대통령은 한미원자력협정을 개정하여 핵재처리권을 확보하는 식으로 ‘합법적인 핵개발’에 집착하고 있다는 점이다.
친북인사인 한호석씨는 미국의 핵확산 정책에 공개적으로 들이댄 박대통령을 고무찬양해야 마땅하지만, 그러한 사실을 언급하는 논조는, 미국이 박대통령을 제거하기를 바라는 듯한 느낌이다. 이것은, 진보세력들이 한국의 핵무장을 반대하는 것과 본질적으로 통한다고 하지않을 수 없다. 노무현 대통령이 강조했던 자주국방은 전작권 환수와 관련한 미국의 공백을 메꾸기 위한 것으로서 진보세력들은 물론, 보수에게도 지지를 받았다. 그런데, 자주국방의 끝판왕인 "핵무장"을 내세우는 박대통령의 의도는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는 진보에게도 보수에게도 웃기는 일로 취급된다. 그렇게 거꾸로 오해되는 사실과 거짓이, 현 최씨 사태의 발발과 전개에서도 반복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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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역시 박통의 핵무장과 관련한 행보를 일본 분석가가 쓴 글이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박통의 대북정책과 안보관에 대해 미국 의회는 완전히 다른 시각을 보였다는 점이 핵심이다. 박통의 대북정책은 미국의 강경책을 추종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 실상은 다르다. 이런 점이 국내에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것도, 현 정권의 대북정책을 오해하게 만든 원이이 되었지만, 북측의 대응은 기존의 어느 한국 정권보다 긍정적이었다는 것을, 나는 지적해왔다.
「독재자의 딸」을 맞는 미국의 눈길은 따뜻하지만은 않았다
2013.5.12 鈴置 高史 번역 오마니나
「박(근혜)은, 1961년에 군사 쿠데타로 권력을 잡고, 1979년까지 한국을 지배한 박정희의 딸이다」
이것은, 미 의회 조사국(CRS)이 2013년 4월 26일에 발표한「한미 관계」라는 제목을 붙인 39 페이지짜리 보고서의 1절이다. 이 보고서는, 미 행정부의 환영 일색과는 다른, 현 한국에 대한 미국의 우려를 솔직하게 쓰고있다. 집필진은 아시아와 핵비확산, 그리고 통상 전문가 5인 이다.
이 보고서에서, 분명하게 그리고 주저함이 없이 표명된, 한국에 대한 미국의 우려는, 크게 나누어 아래의 3가지다.
【1】 북핵해결보다 남북관계를 우선하는 것이 아닌가
박 대통령은, 일종의 대북 융화책인「한반도 신뢰 양성 프로세스」를 공약으로 내걸었다. 그러나, 취임 직전인, 2013년 2월에 북한이 핵실험을 실시했고, 국제사회가 실험이 성공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예상되었음에도, 박근혜 정권은 그 공약을 취소하지 않았다. 미국의 우려는 거기에서부터 발생하였다. (참고, 앞서도 말했지만, 3차 핵실험에 대한 미국의 추가 대북제제에 한국은 참가하지 않은 사실이 있다)
보고서는「미국의 제1 관심사인 비핵화와 한국의 대북 접근법(한반도 신뢰 프로세스)을, 박 정권이 어떻게 조절할지가 기본적으로 불명확하다」(3 페이지) 는 의문 등을 반복적으로 표명했다
【2】핵무장으로 나아가는 것은 아닌가
보고서에서는 명확하게 서술하지는 않았으나,「2013년 북의 핵실험은, 한국이 독자력에 의한 핵억제력 보유와 유지에 대한 희구를 불러 일으켰다」(3 페이지)고 지적했다. 게다가 한미 원자력 협정에 대해 4 페이지도 넘는 설명을 할애했다. 한국은, 핵보유로 나아갈 수있는 우라늄 농축 권리 등을 요구해, 동 협정의 개정을 강력하게 요구하고 있다. 보고서는 「많은 한국의 관료와 정치가들이, 민간부문의 핵활동조차 미국의 허가를 필요로 하는 것은, 미국에 의해 한국의 주권이 제한되고 있다고 보고 있다」(28 페이지)고도 썼다. 보고서를 읽게 된다면, 한국의 핵무장에 대한 여망에는, 뿌리 깊은 근원이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3】 리미종중(離米従中)으로 움직이는 것은 아닌가
「많은 한국인들이, 미국에게 지나치게 간섭받는다고 느끼며, 미국의 영향에 대해 불만이 더해가고 있다. 한국인은, 중국을 적대시하는 미국의 정책에 휘말리게 될지 모른다고 우려하기 시작했다」(9 페이지).「한국은, 대외 외교 정책에 대해, 여론을 더욱 더 중요하게 여기게 되었다」(7 페이지)
세가지 지적 모두, 한국의 입장에서는 오히려 미국에게 반론하고 싶은 것들이다.
【1】항의 「비핵화보다 남북관계 개선」에 관해서는, 한국인이라면「미국이야말로, 그렇지 않은가」라고 반문할 것이다.
2003년부터 시작된, 북한의 핵문제를 논의하는 6자 회담에서도, 미국은 강하게 나가야 할 경우에도, 대단히 소극적이 되었다. 따라서「미국을 적대시하는 국가나 테러리스트에게 북이 핵을 건네주지만 않으면, 미국은 북한의 핵보유를 인정하는 것은 아닌가」라는 의혹을, 한국이 가지기 시작했다
게다가, 미국은 한국의 중개없이, 직접 북쪽과 타협하기도 했다. 한국 미디어는, 2012년 2월 29일의 북미합의에 대해, 한국 정부(동맹국인데도 불구하고)가 제대로 설명받지 못했다고 시사한 바 있다. 따라서, 미국을 쫒아, 한국이 대북 강경책을 취한다 해도, 어느 순간에 미국에게 떨려나게 될 지 모른다는 공포를, 한국은 가지게 되었다.
【2】항의「한국자체 핵무장」에 대한 우려도, 한국인들은 반론 할 것이다. 앙케이트 조사에서, 2013년 2월에 일어난, 북한의 3번 째 핵실험 직후, 한국인의 3분의 2가 핵무장에 찬성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결론들은「미국이 본심을 가지고, 북의 핵무장을 저지하지 않았던 것이 원인」이라고 한국인이 생각하는 이상은, 미국에게 그런 지적을 듣는다는 것은, 오히려 적반하장일 것이다. 덧붙여서, 미국이 핵우산을 보장한다고는 하지만, 미 패권의 퇴조를 고려하면 사실, 기대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3】항의「리미 종중(離美從中)」현상도,북이 가속화시킨 핵무장의 영향이다.「이제,북의 비핵화를 미국에게 기대하는 것은 현실적이지 않다. 미국에게 그런 영향력은 더 이상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국제사회에서 영향력을 확장하고 있으며, 가장 북에게 영향력을 가진 중국에게 기댈 수 밖에 없다. 이제, 중국의 패권을 거스를 수 없다 」고 한국인은 생각하기 시작했다.
한국인은 이 보고서를 상당한 위화감을 가지고 읽을 것 같다. 특히, 한미 양 대통령의「관계」에 의문이 던져진 점이 그렇다.
보고서는 1 페이지에서「오바마 대통령과 이명박 전 대통령과의 양호한 개인적 관련에 의해, 한미는 예외적으로 강력한 관계에 있었다」고 서술한 후,「박근혜 대통령도 한미 양국이, 이익과 정책의 우선 순위를 공유한다고 해서, 개인적인 관계도 좋을 지는 지켜볼 필요가 있다」고 쓰고 있다.
중앙일보의 기사「박근혜・오바마의 평양을 보는 시선, 워싱턴에서 조절 기대」(5월 3일자)는 이러한, 박과 오바마의「북을 바라보는 시선」의 차이에 주목한 뒤, 주미 한국 대사관 관계자의 「정상회담을 계기로 오해를 불식하고, 관계를 개선할 것을 기대한다」는 담화를 소개했다(주 2).
어째서, 미 의회 보고서는 이렇게까지「양 정상의 관계」에 신경을 쓰고 있는 것인가. 한국 언론이야 자국의 대통령을 배려한 것이겠지만, 미 의회 보고서는 일체 언급도 하지 않았지만, 미국은 틀림없이, 박 근혜 대통령에게서「박 정희의 그림자」를 보고 있는 것임에 틀림없다.
박정희 소장이 쿠데타로 정권을 탈취했을 때부터 암살될 때까지의 18년 간, 미국에게 있어서 그는 고민거리였다.「미국이라는 자유주의 진영속에서, 북한과 대치하고 있다는 이유로, 언론의 자유를 제한하고, 부당 체포와 고문을 반복하는 박정희를 도와서는 안된다」는 국내외로부터의 강한 비난을, 미국의 역대 정권은 계속해서 받아왔던 불쾌한 기억때문이다.
미 의회의 보고서에서도 그 기억을, 명확하게 언급하고 있다.「박근혜의 아버지, 박정희의 시대는 평가가 어렵다. 하나는 세계의 최빈국을 공업국가로 바꾸었다는 측면. 또 하나는 무소불위의 철권으로 지배했다는 측면이다. 그는 반대자 혹은 그렇게 생각되는 사람들--야당 정치가, 노조 활동가, 시민운동 리더를 탄압했다. 예를 들면, 1970년대 초기에 한국의 정보 기관은, 두 차례에 걸쳐 야당 지도자, 김대중을 살해하려고 했다. 2번 째 암살기도는, 미국의 개입에 의해 중지되었다. 박정권 하에서 시작된, 보수와 진보의 분열은 오늘날에도 계속되고 있다. 한국의 보수파는 그가 완수한 경제발전을 강조하는 한편, 진보파는 그의 인권침해를 문제삼고 있다」(31페이지).
쿠데타로 독재 정권을 쌓아 올린 부친과 선거에 의해 대통령이 된 딸을 미국이 동일시 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딸의 완고하고 용이하게 타협하지 않는 성격은, 아버지를 닮았을 것이라고 말한다. 더구나 무엇보다도, 미국은 변화되고 있는 한반도 주변 정세와 더불어, 박 정희시대의 기분나쁜 기시감을 박 근혜 대통령에게서 느끼기 시작하고 있는 시기라는 것이다.
1970년 대, 박정희 정권은 비밀리에 핵과 미사일 개발에 매진했다. 그것이 폐기된 것은, 1979년 10월에 박 대통령이 중앙 정보부(KCIA)의 김재규 부장에게 암살되고, 권력을 이어 받은 전두환 대통령에게 미국이 강한 압력을 가한 것에 기인한다.
그리고 지금, 딸인 박근혜 대통령은「우라늄 농축을 한국에게도 인정해야 한다」며, 담판을 시작했다. 그것만이 아니다. 국제사회가 이미 북한은 핵보유를 한 것으로 여겨지는데도, 그녀는 아직도 대화우선의 정책을 고집하고 있다.
남북 공동으로 운영하는 개성 공업단지에 대해서 국제적으로도 비판이 높아졌다.「북한의 독재 정권으로 외화를 넘기는 파이프」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박근혜 대통령의 방미 직전까지도, 한국은 공단의 조업을 계속하려고 시도했다. (참조, 미 공화당은 개성공단 자체에 완전히 반대하는 입장이다. 따라서, 북측이 남측과 합의한 13년 7월의 남북합의의 내용에, 그 이전에는 불가능했던 개성공단의 남북 정부당국의 공동운영이 명시된 것은, 미 공화당 세력의 의도와는 완전히 반대방향이다)
마찬가지로 부친은 1972년, 심하게 대립하고 있던 북한의 김일성 주석과 돌연스럽게「7.4 성명」이라고 하는 화해 선언을 발표했었다. 자체 핵무장 시도처럼, 이것도 미국에게 버림받을 것이라는 위기감이 깊어진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당시, 미국은 미 중 관계의 개선도 염두해 두면서, 주한미군의 삭감을 추진하고 있었다. 다른 한편, 김일성도 미중 접근이라는 국제 환경의 격변에 의해, 국제적, 국내적으로도 자국의 입지가 좁아지는 것을 우려해 숙적과의 대화에 응했다고 여겨진다.
현재, 중국도 드디어 북의 핵문제에 직접적으로 신경을 쏟기 시작했다. 따라서, 한반도의 핵문제에 한정하지 않고, 미국과 중국이 한반도의 미래상을 결정해 나갈 가능성이 높아지게 되었다.
2개의 대국이, 핵문제를 해결해 준다면 한국에게는 참으로 다행일 것이다. 그러나, 노련한 중국이 공짜로 땀을 흘릴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미국에게 북쪽의 실효 지배를 인정하라고 하던가, 주한미군 철수를 주장하기 시작할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미국은, 그런 사실을 감추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한국의 대통령으로서는, 이제야말로 같은 민족인 남북이 의사소통을 도모해, 주변 대국에게 스스로의 운명을 맡기지 않겠다는 결의를 보여야 할 때일 것이다. 그리고 대국사이에 놓여진 조그만 나라가 그 결의를 실현시키려면 핵무기라는 것이 있다. 적어도 41년 전, 박근혜 대통령의 부친은 그렇게 생각했던 것이다.
결론적으로, 미 의회위원회 조사국의 보고서는, 미 정계를 향해, 박 근혜 대통령은,「북한 문제에 관해, 미국과 모든 의견을 함께 한」(9페이지) 이명박 전 대통령과는 다르며, 그녀의 아버지처럼, 하나의 길만 따라서 가지는 않을 것이라는 경고를 발하는 것이다.
한국에 대해서 미국은「한국을 지켜주고 있는 것은 미국이며, 한국이 미 중 사이에서 등거리외교를 하려고는 생각지 않는다」,「북쪽은 핵무기를 보유한 적국인데, 북쪽이 형제라서 손을 잡겠다는 몽상을 해서는 안될 것」이라고 압박할 생각일 것이다.
미 전략 국제 문제 연구소(CSIS)의 마이클・그린 선임 부소장이 중앙 일보에 기고한 기사(4월 20 일자)는, 확실히 한국에 대한 미국의 요구, 그 자체다. 그린 선임 부소장은 「한미가 북한 핵의 위협에 확실히 대처하려면」이라는 타이틀의 기사에서, 아래의 4가지를 한국에게 요구했다.
(1) 미국이 주도하는 미사일 방위(MD) 시스템에 참가
(2) 미일한 군사 체제 확립을 위한 일본과의 군사 협정 체결
(3) 제5세대 전투기 등 최신예 무기 도입
(4) 전시 작전 통제권이 미국에서 한국으로 이관되는 것을 보완하기 위한, 한미간 새로운 지휘 체계의 확립
(1) 과 (2)는 이전부터 주장해 온, 미국의 요구다. 그러나, 중국에게「대 중국 포위망에 참가하지 말라」고, 위협받은 한국은, 반일 감정 등을 이유로 그러한 요구를 회피하고 있다. 미국은, 한국이 북의 핵보유를 두려워하고 있는 이 시기에, 그것들을 단번에 불식시키면서, 완전히 미국 측으로 끌어들여 버리려는 목적이 있음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세계 최고의 무기 체계를 과시하면서 말이다.
이러한 미국의 움직임에 대해, 중국 측도 전면적인 반격을 가하고 있다. 한국지에는 중국 전문가들의 의견이 그야말로 산처럼 실리고 있다. 단독 인터뷰거나, 심포지엄에서의 발언이긴 하지만, 박근혜 방미 직전이 되자, 한국의 뜻을 지지하는데 힘을 쏟고 있다.
북경 대학・국제 관계 학원의 가경국 부원장은 중앙일보의 취재에 대해 「중국의 의견도 듣지 않고, 몇 차례에 걸쳐서 도발한 북한은 중국의(자산은 아니라) 짐」이라고 명확하게, 북쪽을 비난 했다(주 4).
「그렇다면, 중국은 북한을 버리는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해서는 「중국의 소유물이 아니기 때문에, 버릴 것인지 아닌지하는 문제는 아니다」라고 하면서도 「전투기나 미사일이 없는 시대는, 외국 세력이 중국을 침략하려고 하면 북한을 통과해야 했으므로, 중립 지대라는 전략적 가치가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시대가 바뀌었다. 그러므로, 과거에는 북한을 특수한 국가로서 대우했지만, 지금은 보통의 국가 관계에 있다」라고 대답했다.
이것은, 사실상의 절교 선언이다. 그러나, 본심은 한미일을 상대로 도발하고 있는 북한에 대한 경고라기 보다,「핵문제의 해결은, 미국은 아니라 중국에게 맡기라」라는, 한국에 대한 유혹이다.
지금까지 「중국은 북한을 곤혹스럽게 생각하지만, 결코 배반하지 않는다」가 정설이었다. 미국의 입장을 강변하는 그린 선임 부소장도 중앙 일보에 그렇게 주장하며 「중국은 결코 의지가 될 수 없다 」며, 한국인에게 메세지를 보내고 있다. 중국의 주장은, 확실히 그러한 미국의 언론 플레이에 대한 재반격이다.
5월 6일자의 조선일보는, 중국・대련시에서 열린 제4회 중한 안보 대화에서 중국 측 참가자한 발언을 상세하게 전했다. 이러한 언론 플레이는 전부, 중국이 북한을 냉정하게 떨쳐내는 것처럼 만들어, 한국을 중국 쪽으로 끌어들이려는 목적이다.
칭화 대학 국제 관계 전략 발전 연구소의 초수용 부소장은「 아직 주류적인 의사는 되지 않았지만, 중국의 정부, 학계 등 의사결정 집단에서는 북한의 붕괴가 논의되고 있다. 동독과 같이 평화적으로 붕괴된다면 중국은, 이를 반대할 이유는 없다」고 말했다.
중국의 책임 있는 고관이 공식석상에서 북의 붕괴를 언급하며, 그것을 반대하지 않는다, 라고 발언하는 하는 것은, 전대미문의 사태다. 「북쪽이 평화적으로 무너지고, 남쪽이 통일을 주도한다면, 아무쪼록 자유롭게」라며, 한국의 대 중국방향전환의 움직임을 한층 지지하는 메세지다.
중국 현대 국제 관계 연구원・미국 연구소의 달위 소장은 「미국이 체제를 보장하는 형태로, 북한이 연착륙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라고 말했다. 이것은 한국인들에 대해「미국에게 의지하는 한 평화적인 해결은 바랄 수 없다」고 통고한 것과 마찬가지다.
현재 미 중의 언론전쟁은, 중국에게 승산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양으로 압도하기 시작한 뒤, 설득력에서도 우수하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북한 문제 해결에 돌진하려는 의욕도 능력도 부족한 미국이, 중국으로 기울고 있는 한국을 끌어당기려면, 결국은 군사력(첨단 무기등의 제공)을 미끼로 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것은 한국인들에게, 전쟁의 냄새를 느끼게 만들어 버린다.
나아가 중국은, 북한 수뇌부 교체설과 같은 음모설까지 만들 수 있다. 북한에게 있어서는 불쾌한 제안이겠지만, 한국에게 있어서는, 어쨌든 "평화적인 해결 방법" 인 만큼, 치명적인 유혹이다.
5월 7일(현지시간), 백악관에서 박근혜 대통령은 오바마 대통령과 회담하고, 한미 동맹 60주년을 기념하는 공동선언을 했다. 북한의 핵위협을 계기로 삼아, 미국은 한미 동맹의 필요성을 한국에 확인시켰던 것이다. 물론, 단기적으로는 한국도 이 동맹관계가 필수적이다.
그러나, 박근혜 대통령은 다음 달, 중국을 방문하고, 시진핑 국가 주석과 회담하게 될 것이다. 그 때, 시진핑은, 한국에게 통일 후나 그 이전에, 한국의 중립화를 담보로 요구하고, 평화적인 해결책을 제시할 것임에 틀림없다.
강대국 사이를 헤엄쳐 건너려는 박근혜 대통령의 여정은, 이제 막 시작되었다.
미국과 중국의 요구를 절충시키지 않고서는 평화적인 남북통일은 어렵다. 남과 북이 먼저 손을 잡지 않고 이루어지는 북미평화협정은, 중국이 대두해버린 현재의 달라진 동북아 정세에서 중국이 냉큼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
현 정세의 복잡성은, 바로 그러한 점에서 나타나고 있는 것이 본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