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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 보인 요나의 표적
“그 때에 서기관과 바리새인 중 몇 사람이 말하되 선생님이여 우리에게 표적 보여주시기를 원하나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 요나가 밤낮 사흘 동안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 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 동안 땅 속에 있으리라. 심판 때에 니느웨 사람들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들이 요나의 전도를 듣고 회개하였음이거니와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으며 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가 솔로몬의 지혜로운 말을 들으려고 땅 끝에서 왔음이거니와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마 12:38-42)
요나의 표적은 ‘무의식의 세계’를 일깨우기 위한 예언서이기 때문에 이해하기가 여간 난해한 것이 아니다. ‘무의식의 세계’는 의식적으로 체험한 것이 하나의 기억으로 되살아, 그 내용이 머릿속에서 잠재적으로 작용하는 정신 활동의 범위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악독은 이 무의식 속에 예속되어 있다. 그래서 예수께서 행하신 표적들은 인간들이 무의식 속에 예속되어 있는 악독을 일깨우기 위해서 베풀어졌다. 물이 포도주로 변하는 가나안의 혼인잔치의 표적, 오병이어의 표적, 칠병이어의 표적, 병 고치는 표적 등 모두 우리들의 무의식 속에 감춰져 있는 악독을 고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요나의 표적을 통해서 예수께서 행하신 표적들을 이해하고자 한다.
여호와의 말씀이 아밋대의 아들 요나에게 임하였다.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향하여 외치라.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되었음이니라.”(욘 1:2) 하셨다. ‘아밋대’는 진리를, ‘요나’는 비둘기를 의미한다. 히브리인들의 이름은 한자와 같이 다분히 뜻글자다. ‘진리’의 아들 ‘비둘기’는 음미해 볼만한 이름이다. 신약 성경에도 비둘기 아들이 있으니 시몬 베드로다. 개역 성경 요한복음에는 ‘요한의 아들 시몬’으로 되어 있으나 어떤 사본에는 ‘요나의 아들 시몬’으로 되어 있는 곳도 있다. 그래서 성경 낱말사전에 ‘베드로’의 신분이 벳세대 사람 요나의 아들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어쨌든 비둘기 요나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였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귀를 가지고 있었다. 요나에게 들린 음성은 니느웨(합의)의 악독을 쳐서 외치라는 것이다. 하지만 요나는 한사코 하나님의 음성을 외면하고 니느웨로 향해야 할 발걸음을 돌려 은금이 풍부한 항구도시 다시스(예속)로 도망쳤다. ‘다시스’가 의미한 바와 같이 오늘날의 목회자들도 은금이 풍부한 다시스로 몰려간다. 마땅히 들려온 음성을 외면했던 요나의 행보가 순탄하였으면 대충 넘어갈 수도 있었을 터이나 우리가 잘 아는 대로 큰 광풍을 만나 풍랑 가운데 사면초가에 빠지게 되고 마침내 바다에 던져진다.
“요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매 바다가 뛰노는 것이 곧 그친지라.”(욘 1:15)
역천자(逆天者)는 망(亡)하고 순천자(順天者)는 흥(興)하는 법인가? 하나님의 음성을 거스르고 다시스로 가던 요나를 바다에 던지니 바다의 큰 광풍이 언제 그랬나싶게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조용해진다. 신약 성경에는 큰 놀이 일던 바다를 예수께서 꾸짖으시니 아주 잔잔하여졌다(마 8:26)는 기사가 나온다. 여기는 요나를 바다에 던지니 광풍이 잔잔하여졌다.
요나서 2장은 그 밤낮 사흘을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상세한 일이 요나의 기도문 형식으로 기록되었다. 사도 베드로가 그의 서신에서 “그가 또한 영으로 가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선포하시니라.”(벧전 3:19)고 기록하였듯이, 요나는 물고기 뱃속에서 그의 하나님께 기도하였는데 큰 물고기(스올)의 뱃속에서 무엇을 듣고 무엇을 보았을까? 아니, 무엇을 전해 들었을까?
기록되기를 “그가 또한 영으로 가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선포하시니라.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를 준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복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 명뿐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 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이는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하나님을 향한 선한 양심의 간구니라.”(벧전 3:19-21) 하였다.
사람들이 앞의 구절을 읽을 때 중요한 것을 놓친다. 노아의 이야기와 노아 때의 사람들에 대해서만 시선이 가 있지 베드로가 노아의 방주와 물에 대해 이야기하며 그것은 곧 구원의 표이고 세례라고 방주와 물 이야기를 새롭게 해석하고 있다는 점을 간과한다. 사도 바울이 이스마엘과 이삭을 두 언약으로 해석하듯이, 베드로는 지금 노아의 방주 사건과 물 이야기를 부활과 세례로 해석하고 있다는 이 놀라운 사실들에 대해서는 왜 주목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영으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한 것이 무엇인지는 단지 노아의 때 일부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는 점이 명백하지 아니한가? 노아의 때 사람들조차 비유의 한 대목이라는 점을 놓치고 엉뚱한 해설들이 난무하다.
따라서 이야기의 핵심은 결국 세례에 참여하는 이들에 대한 이야기 아니, 우리들의 이야기요, 거기 ‘나’에 대한 생생한 증언이 담겨 있다는 점이다. 함께 죽는 세례의 과정에서 겪게 되는, 무의식의 깊은 심연에 갇혀 있는 흑암과 깊은 어둠 속에서 듣게 되는 한줄기 구원의 빛에 대한 너와 내가 가는 길을 일컫는다는 사실을 왜 간과할까?
베드로전서 3장 19~21절은 다른 이의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 여기 우리들의 이야기요, 나에 관한 증언이다. 요나서가 이를 잘 드러내 주고 해석해 준다. 큰 물고기의 뱃속과 스올의 뱃속과 영들의 옥은 같은 말이다. 예수께서는 “요나가 밤낮 사흘을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 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을 땅 속에 있으리라.”는 말로 영들의 옥이 어디인지를 명확히 언급한다.
그렇다면 스올의 뱃속에서 요나가 깨닫고 듣게 되는 것이 옥에 있는 영들에게 선포하고 전한 내용이 아니겠는가? 너무도 자명한 이 이야기가 오늘날 사람들에게는 왜 수수께끼처럼 오리무중의 말씀으로 해석되고 있을까? 스올의 뱃속에서의 요나를 통해 세례가 무엇인지, 부활이 도대체 무엇인지도 선명해지리라.
요나가 밤낮 사흘 동안 스올의 뱃속에서 들은 것, 그것은 묵상을 통해서 들은 것도 아니요, 하나님의 선지자들을 통해서 들은 것도 아니요, 산상수훈의 주옥같은 설교를 통해서 들은 것도 아니요, 바울 신학의 진수를 통해서 들은 것도 아니다. 그는 이미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있었던 자였으나 이 스올의 깊음 속에서 새롭게 만나고 보는 것이 있었다.
요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그는 물고기 뱃속에서 부르짖어 기도하기를 “내가 주의 목전에서 쫓겨났을지라도 다시 주의 성전을 바라보겠나이다.”(욘 2:4)라고 고백한다. 하나님의 저주가 주의 성전을 다시 바라보게 하고 있다. 그의 기도문은 시편 중의 시편이다. 요나는 “물이 나를 둘렀사오며 깊음이 나를 에워싸고 바다풀이 내 머리를 감쌌나이다.”(욘 2:5)라고 고백한다.
그는 “내가 산의 뿌리까지 내려갔사오며 땅이 그 빗장으로 나를 오래도록 막았사오나 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내 생명을 구덩이에서 건지셨나이다.”(욘 2:6)라고 고백한다. 그가 본 것은 ‘산의 뿌리’였다. 땅의 빗장이 그를 오래도록 막았다는 사실을 비로소 스올의 뱃속에서 알게 된다.
그는 그가 땅의 빗장과 산의 뿌리를 보았을 때 비로소 구덩이에서 놓여나는 생명의 건지심을 경험한다. 내 영혼이 무엇 때문에 내 속에서 피곤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목도하게 된다. 거짓되고 헛된 것을 숭상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된다. 아밋대의 아들 요나는 스올의 깊음 가운데서 세밀하게 알게 되고 듣게 된다.
“내 영혼이 내 속에서 피곤할 때에 내가 여호와를 생각하였더니 내 기도가 주께 이르렀사오며 주의 성전에 미쳤나이다.”(욘 2:7)
우리는 흔히 우리의 영혼이 진리를 깨닫고 한걸음 더 나아가 비둘기 같은 성령의 임하심 가운데 은금의 풍요를 누리려 한다. 예수는 표적을 구하는 이들에게 요나의 표적 외에는 보일 표적이 없다고 하신다. 요나는 예수의 표적이요, 우리들의 표적이다. 구원의 서정을 알려주는 하나님의 나에 대한 스케줄이다.
우리의 의식은 대개 깨어서 나름대로 찾아 기나긴 여행을 한다. 영적 자각과 내가 누구인지에 대해 진지하게 묻고 답하기도 한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는 사실도 역설하며 진리가 무엇인지도 큰 소리로 논한다. 때로는 진리를 전하느라 분주하기도 하고 영혼이 피곤에 싸여 주저앉아 머뭇거리기도 한다.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 대한 깨달음과 논쟁들, 진리의 창칼이 서로를 겨누며 자신의 진리가 어떻게 해서 옳은지 논증하며 열변을 토하기도 한다. 어느 때나 세상은 진리와 진리가 서로 맞서 싸우는 전쟁터이다. 그러다가도 크고 작은 사건들을 통해서 새로운 회의, 역겨움과 구토, 의미와 무의미, 더 이상의 구토조차 필요 없는 허무주의도 경험한다. 우리는 우리 의식의 표층에서 해볼 수 있는 것은 모두 해본다. 의식에서는 진리와 자유와 생명의 모든 것들에 대해서 토론하고 포착하고 깨닫고 누리고 살려 한다. 그러고 있는 동안에도 우리의 의식과 인식은 여전히 구원은 하나님께로부터 말미암는다는 사실에 대해 앞장서서 고백한다.
이러한 모든 과정을 논의하고 토론하고 추론하는 곳, 이성의 풍요가 지배하는 곳, 그곳이 다름 아닌 저 큰 성읍 니느웨였으니 요나가 가서 그곳을 쳐서 외쳐야 할 곳이었다. 티그리스 강 동편 기슭에 자리 잡고 있는 이 고대 도시는 인간의 의식의 표층을 지배하는 인식의 영역, 합리적 사고의 세계를 상징하는 성읍이다.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보면 남쪽이 구스와 애굽이 자리 잡고 있다면 니느웨는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발상지인 해 뜨는 곳, 북동쪽에 위치하고 있다.
예루살렘 성전이 인간의 가장 깊은 내면에 자리 잡고 있는 숨겨진 성지라면, 해 뜨는 곳은 의식의 싹이 트는 곳이요, 의식의 빛이 처음 시작되는 곳이다. 따라서 니느웨는 거대도시 큰 성읍으로 상징되어 나타나는 것이 당연하다. 인생은 먼저 그 의식의 빛이 찾아오고 삶의 많은 부분을 의식권이 차지하고 지배하는 까닭이다. 어느덧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의 소우주 속에 큰 성읍이 형성되어 있는 것이다.
이곳에 요나(비둘기=성령)가 가야 한다. 요나는 저 큰 성읍 니느웨가 멸망하리라고, 무너지리라고 예언해야 한다. 비록 그 후에는 하나님이 어찌하시던지 그것은 요나의 영역이 아니다. 다만 요나는 가서 말해야 한다. 그것이 요나에게 들려진 하나님의 음성이었다.
허나 요나는 니느웨로 가는 일이 얼마나 무모하고 의미 없는 일인지 안다. 토론과 논쟁을 일삼는 이성의 영역, 진리를 먹이로 삼고 분석능력이 왕 노릇하는 곳, 지식이 판을 치며 문명의 큰 성벽을 쌓는 곳, 그곳에 가서 멸망을 예언하고 선포해본들 씨나 먹힐 것이며 눈이나 꿈쩍할까? 어찌 저들의 견고한 진지가 무너질 것이라고 믿고 쓸데없는 에너지를 낭비한단 말인가?
구원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이지, 내가 그곳에 간다고 될 일이겠는가! 차라리 다시스로 내려 가자. 거기 가서 은금을 가져다가 무역이나 하리라. 그저 대충 살자. 니느웨는 제 좋은 대로 그대로 있는 것이 멸망이지, 멸망하리라고 쳐서 외친다한들 새삼 무엇이 달라질 것인가?
아밋대의 아들 요나는 그가 비록 니느웨로 가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있었다 하더라도 동시에 자신의 무의식 속에 숨어 있는 또 다른 소리를 듣게 된다. 그 순간 그의 의식권에는 하나님의 소리와 동시에 무의식 속에서 자신에게 하는 소리가 이중으로 포착된다. 이때에 그는 무의식에 숨어 있는 소리에 더 귀를 기울이고 하나님의 음성보다는 그 자신의 음성에 자신을 내 맡긴다. 이것이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다시스로 도망하게 하는 원인이다. 그는 자신의 무의식 세계에 도사리고 있는 어둠의 소리를 듣는 순간 그것은 의식권에 포착되어 하나님의 낯을 피하게 되는 변명의 구실로 삼는다. 이것이 요나 자신에게도 이미 내재되어 있는 멸망 받아야 할, 그리고 구원 받아야 할 니느웨의 속성이다. 이때 구원은 하나님께로부터 말미암는다고 하는 것은 니느웨로 가지 않음이 왜 옳은지를 주장하기 위한 거짓 신앙고백이다.
구원은 하나님께로부터 말미암는 것이거늘 내가 다시스로 간다 해서 무슨 문제가 해결될 것인가? 그리고 내가 니느웨로 간다 해서 달라질 것이 있으리라고 믿는가? 이것이 요나의 어쩌면 지당한 생각이고 또한 우리들의 생각이다.
아, 하나님은 그러한 요나를 바다에 던져버린다. 큰 물고기 뱃속에 요나를 쳐 넣는다. 요나는 스올의 고통 속에서 산의 뿌리를 보게 된다. 성경에서 산은 자신의 ‘의(義)’를 의미한다. 바다 위에 솟은 산은 의식의 표층이다. 바다 아래에 숨어 있는 산은 의식의 저층 곧 무의식이다.
의식의 표층은 불교식으로 말하면 안(眼), 이(耳), 비(鼻), 설(舌), 신(身), 의(意)라는 육식(六識)에 의해서 형성된다. 즉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냄새 맡고, 혀로 맛보고, 몸의 촉감을 통해서 느끼고, 오감을 통해서 들어온 정보를 분석하고 통합하고 결론을 내리는 의식의 통각(統覺)을 통해서 형성되는 것이 의식 층이다. 대부분 경험의 세계이다. 무의식의 세계는 의식의 세계와 완전히 분리된 것은 아니지만, 유전적이거나 환경적인 요인을 포함해서 어느 정도의 경험적 요인들이 함께 작용해 형성된 의식의 저층을 말한다. 넓게는 수많은 형태의 집단 무의식이 그 뿌리를 자리 잡고 있다. 거기에는 자신의 경험을 넘어선 수천 년 동안 형성된 지정학적 요인이나 민족적 요소들을 포함한다. 예컨대,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영역에서 토론할 때에는 한국의 지역감정에 대해서 누구보다도 올바른 진단을 하고 해결책을 제시하는 사람도 선거 때만 되면 자신의 지역적 집단 무의식이 작용해서 투표의 결정권을 행사하는 경우를 보면 의식권에서 아무리 정의와 합리성을 주장한다 해도 그의 삶을 결정하는 권한 행사는 그의 무의식 속에 숨어 있는 의식의 뿌리가 행한다. 평소에는 합리적인 이성이 토론의 주도권을 쥐고 있지만, 삶의 전체를 결정하는 것은 또 다른 실체가 있어서 삶의 이중성, 정신의 분열 현상을 초래하는 이중구조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 처절한 현실을 어쩌랴.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명하다고 하는 이들조차 자신의 무의식을 의식으로는 분석하지만, 그 뿌리를 정확하게 보지 못한다. 따라서 인생은 땅의 빗장 속에 갇혀서 살게 되는 것이다. 자신의 무의식 속에 숨어 있는 욕심의 보따리와 이기심의 노예가 되어 허망한 데 굴복하며 인생을 소진하고 있다. 이것이 자신의 배만을 섬기며 거짓되고 헛된 것을 갈망하고 숭상하는 인생들의 수고이다.
요나가 니느웨로 가기 전에 다시스로 행할 수밖에 없었던 까닭도 그 같은 데에 있었다. 의식권에서는 잠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있었다 해도 그의 무의식에서는 아직도 도둑놈이 도사리고 있었다. 하나님의 성전을 보지 못하게 하는 어둠이 그의 무의식에 도사리고 있었다는 말이다. 무엇이 멸망당해야 하는가? 그는 일면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진리를 말하고 있지만, 그의 무의식의 깊은 곳에서는 자신의 배만을 위하고 있는 것, 처단되어야 할 악이 도사리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동일한 말이지만 니느웨의 합리적 이성이 늘 진리라고 주장하지만 관념과 이론에 머물러 자신을 지배하고 상대도 지배하려는 지식의 폭력성, 이 모든 것들은 철저히 도말되고 들춰져야 한다.
이것은 스올의 뱃속에 들어가기 전에는 볼 수가 없다. 예수는 영의 옥에서, 땅의 빗장 속에서 이 같은 진리를 전파하신다. 풍랑이란 무엇인가? 인생의 풍랑 없이는 자신을 알지 못한다. 잔잔한 물살 가운데서 자신이 보여 질 리 만무하다. 갈등 속에서 자신을 발견한다. 다툼이 있을 때 자신의 속을 조금이라도 들여다 볼 수 있다. 정신은 고난과 고통 속에서만 고양된다.
영은 죽음을 통해서만 다시 태어난다. 진정한 자신은 절대적 고난에서만 정면으로 만난다. 자신의 에고는 스올의 뱃속에서만 정면으로 직시된다. 에고는 둔갑술의 천재다. 에고는 뱀의 지혜를 지니고 있어서 그 실체를 정면으로 드러내지 않는다.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속는 것도 그 때문이다.
무의식 속에서 자신의 삶을 지배하고 조종하고 있는 욕심의 실체가 들춰지고 나서야 니느웨 해변에 토해내진 요나, 비로소 니느웨 성을 향하여 ‘무너지리라’고 외칠 수 있었다. 하나님의 성전을 바라보게 되고 나서야 그를 배후에서 조종하고 있던 세력보다 더 큰 생명의 실체에 의해 그는 니느웨 성에 하나님의 음성을 선포하였다. 아직 알 수는 없지만 이렇게 해서 의식의 세계와 무의식의 세계는 서로 하나님의 빛으로 통합되어 나간다.
처음에는 이 둘이 서로 정과 욕심으로 하나이다가 하나님의 빛이 비치어 갈대아(약탈) 우르(빛)를 떠나서 약속의 땅으로 여행을 떠나는 동안 하나는 둘이 된다. 둘이 되었다가는 하나가 되고 하나가 되었다가는 다시 둘이 되고 또 다시 풀무 불에 담금질 되어 하나 되고 하나 되었다가 둘이 되는 것을 반복하는 동안 점차 둘은 하나님의 생명으로 하나가 되어간다. 구원의 열매는 그렇게 익어가는 것이다.
요나가 니느웨 성읍에 이르러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선포한다. 니느웨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믿고 금식을 선포하고 높고 낮은 자를 막론하고 굵은 베옷을 입고는 왕과 함께 사람이든지 짐승이든지 여호와께 부르짖으며 악한 길과 손으로 행하던 강포에서 돌이키자, 하나님이 뜻을 돌이키시고 재앙을 내리지 않으시니 니느웨 성읍은 멸망을 면한다. 하나님은 회개하는 자를 멸망시키지 않는다. 이것이 본래 하나님의 뜻이었다.
요나는 그런 하나님을 이해할 수 없어서 몹시 심기가 불편하다. 인간들은 다 요나와 같이 죄인은 마땅히 심판을 받아 멸망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자신도 무의식에 예속되어 사명을 내팽개치고 다시스로 도망가 놓고 하나님이 죄인들에게 재앙을 내리지 않으신 것에 분개하여 하나님께 성을 낸다.
“요나가 매우 싫어하여 성내며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이러하겠다고 말씀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므로 내가 빨리 다시스로 도망하였사오니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음이니다. 여호와여 원하건대 이제 내 생명을 거두어 가소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음이니이다.”(욘 4:1-2)
요나가 다시 한 번 하나님을 이해할 수 없었으니 하나님은 분명히 니느웨가 멸망하리라 하였거늘, 하여 그렇게 선포하였거늘 이제 하나님이 뜻을 돌이키시다니 어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 요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요나는 생명의 원리에 대해 아직은 다 알지 못한다. 하나님은 도대체 어떤 분이시기에 이리도 변덕이 심하신가?
“하나님이 요나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 박 넝쿨로 말미암아 성내는 것이 어찌 옳으냐 하시니 그가 대답하되 내가 성내어 죽기까지 할지라도 옳으니이다 하니라.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가 수고도 아니 하였고 재배도 아니 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말라버린 이 박 넝쿨을 아꼈거든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요 가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욘 4:9-11)
요나는 박 넝쿨의 교훈을 통해서 자신의 성냄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지 다시 한 번 깨닫게 된다. 그렇다. 니느웨, 해 뜨는 동쪽에 형성된 나라, 의식이 깨어나서 이성의 빛이 작용하는 곳, 비록 그곳이 끝없는 정쟁(政爭)과 논리적 지혜, 뱀의 지혜가 판을 치고 있는 지겹고 지겨운 곳, 멸망 받아 마땅한 곳이었다 한들 어찌 돌이켜 구원 받아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깃들지 않을까? 자신의 이기적인 욕심을 위해 충실한 종이 되었던 이성적 능력은 비로소 자신을 초월하는 생명의 빛을 현상하고 인화하는 거듭난 성읍이 되지 않으랴.
아밋대의 아들 요나는 이곳에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여 마침내 구원에 도달하게 하는 구원의 사신이다. 이 때 요나는 아마도 그의 성냄을 거두고 구원은 자신과는 상관없이 여호와께로 말미암는다는 것을, 그가 스올의 뱃속에서 노래하던 것이 사실임을, 거짓이 아닌 참임을 고백하리라. 이것이 우리가 전해 들어야 할 요나의 표적이 아니겠는가? 그것은 다른 이야기가 아니다. 나의 이야기, 우리의 이야기, 오늘의 이야기이다.
예수께서 ‘요나의 표적’ 밖에 보일 표적이 없다 하심은 바로 이것이다. 예수께서 외치신 생명의 말씀을 듣고 자기 무의식 세계 속에 잠재해 있는 의식이 깨어나라 하심이다. 예수의 공생애 기간인 밤낮 사흘 동안 너희 마음 땅을 갈아엎을 것이니 니느웨처럼 회개하고, 남방 여왕이 솔로몬의 지혜를 사려고 멀리서 왔던 것처럼 예수의 지혜를 값없이 돈 없이 사라 하심인 것이다. 이것이 요나의 표적의 실체이다.
믿음의 형제자매들이여, 우리 각자 심령골수를 찔러 쪼개는 그리스도의 생명의 말씀의 검을 사서 남의 죄를 찔러 쪼개려 들지 말고, 산의 뿌리까지 내려가 땅의 빗장을 풀고 무의식의 세계를 찔러 쪼개는 역사가 있기를 기도한다.
보라 ! 들으라 ! 때가 가까이 왔음이라 ! 우리가..죽기전에...잠깐은... 한번쯤...생각해보고...가자 ! 2000년이 넘고넘어....그리도...기다리는 사랑이...있는지를....! 창조주앞에...까불지말라 ! 너희가...영원히...죽을까하노라 ! 너희가...별을...따랴 ! 너희가...달을...만들것이냐 ! 어린아이처럼...계속..말장난하며...까불지말라 ! 개나 소,돼지에게 성경책을 주면 무엇인지 모른다 그러나 그짐승들에게 먹을것을 주면 짐승들은 주인을 좋아라한다 ! 너희가....짐승이냐 ? 이제...너희와 약속된...용서의... 기다림의 시간이 다가왔음이라 !
창조주앞에.... 바짝...업드려... 두려움을...생각하고...참회하라 ! 그리고..지금도 기다리시는... 주님꼐...돌아오라 !
어찌하여 말벌의 침과 전갈의 독침은 두려워하면서 너의 영혼을 잡아 먹는 사탄은 두려워하지 않느냐 ! 너의 눈은 멀었으며 너의 귀는 어두워졌으며 너의 마음의 빛은 꺼져 사탄의 어둠에 갖혀있음이라 ! 인간의 썪어질...육체는... 인간의 삶의 ...목표도...목적도...전부...아니다 인간이 어찌하여... 개나...돼지나...닭이나..소처럼.... 저차원의 동물로 남아...사단과 악마의 자식으로..살려하는가! 숨어 살아있는....영원한...다음세상이 있음을... 잠들어 있는....너의 영을...깨워서...깨달으라....! 죽기전에...어서...깨달아...구원의 길로 가라 ! 영원한 생명의 빛의길로 가라 ! 죽은후에는...하나님의 영원한 심판뿐이다 ! 사후에는 잠든 너의 영을 깨울수도 없으며 너의 영은 거듭날수도 없다 ! 잠들어 있는....너의 영을...깨워서...깨달으라....! 죽기전에...어서...깨달아...구원의 길로 가라 ! 영원한 생명의 빛의길로 가라 ! 그길로 가는 법은...오직한길... 창조주 하나님이...예수님을 통하여 우리게 주신... 생명의 성경 말씀...뿐이라 ! 숨쉬는...우상(사탄)을 섬기지말라 ! 너희가 영원히 죽을까 하노라 !
창조주... 하나님은 반드시 계신다 ! 어리석은 자들아.... 밤하늘의 수많은 별들을 혜어보라 ! 그...끝도없이...많은 별들을... 만드신이는 석가도...마호메트도...교황도...목사도...신부도 성황당 고목나무도...돌부처도...돌아가신...내부모도... 하느님도..하늘님도 아니며...하날님도 아니라 ! 모두 ..아니다 ! 어린아이처럼...계속..말장난하며...까불지말라 ! 창조주는..오직...한분! 하나님 이라 !
숨쉬는...우상(사탄)을 섬기지말라 ! 그들도...모두..우리와 같은 피조물이며, 죄인이다 ! 못 알아 듣는자는....짐승이다 ! 숨쉬는...우상(사탄)을 섬기지말라 ! 신은
오직 한분...창조주...하나님이시다 !
하나님의 무한하신 참사랑으로 돌아오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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