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30일 우즈베키스탄과의 2006 독일 월드컵 아시아 최종예선 A조 3차전에서 「맨 오브 더 매치」로 선정된 차두리는, 경기를 마친 후 공동취재구역(믹스트 존)에서 소감을 묻는 기자에게 『이건 저 사람이 받아야 되는 거죠』라며 앞에 서 있던 朴智星(박지성·24)을 가리켰다. 차두리는 『박지성의 경기 운영 능력은 같은 선수가 봐도 절로 감탄사가 나올 만큼 세계적인 수준』이라고 했다.
사우디아라비아와의 원정 경기에서 0대 2로 패한 후 경질說까지 대두됐던 본프레레 감독과 위기에 처한 한국대표팀을 구한 사람은 박지성이었다. 축구 전문가들은 박지성의 지치지 않는 체력과 攻守(공수) 조율 능력, 경기를 읽는 폭넓은 시야를 높이 평가한다. 『한국 攻守의 흐름이 박지성의 발끝에서 시작된다』는 말은 過言(과언)이 아니다.
최전방에 찔러 주는 공간패스, 상대에게 공을 빼앗기면 악착같이 달라붙어 공을 빼앗아 오는 적극적인 플레이, 상대의 강한 압박을 헤집고 돌파하는 드리블 능력, 박지성이 공을 갖고 있으면 안심이 되는 볼 키핑력 등은 미드필더의 「교과서」로 손색이 없다.
히딩크 감독이 이끄는 네덜란드 PSV 에인트호벤에 입단할 때 박지성의 해외 진출을 월드컵 4강 신화의 「거품」으로 보는 시각이 다분했다. 박지성은 최근 네덜란드 유력 축구 주간지 「풋볼 인터내셔널」 집계에서 네덜란드 1부리그 소속 선수 400여 명 가운데 14위를 차지했다.
말 잘하고 놀기 잘하고 유행에 민감한 신세대 축구선수들과는 달리 박지성은 자신을 『애늙은이』, 『보수적인 청년』이라고 했다. 지난 3월31일 네덜란드로 돌아가기 직전 인천공항에서 그를 만났다.
『본프레레 감독 경질說에 큰 압박』
박지성은 4월6일 「올랭피크 리옹」(프랑스)과 벌이는 유럽축구연맹(UEFA) 챔피언스리그 8강 원정경기를 치렀다. 챔피언스리그 8강전은 박지성에게 새로운 도전이자 기회이다.
『월드컵도 중요하지만 챔피언스리그는 유럽 선수들에게 꿈의 무대예요. 네덜란드에 오기 전까지만 해도 제가 챔피언스리그에서 뛰리라고는 상상도 못 해봤어요. 그런데 그게 현실로 눈앞에 펼쳐지니까 신기하기도 하고 자부심도 생기네요』
박지성은 지금까지 모두 3차례의 월드컵 예선전에 풀타임으로 뛰었다. 앞으로 3게임을 더 뛰어야 한다. 현재 2승1패로 A조 선두를 달리고 있는 우리나라의 예선 결과에 대해 박지성은 어떤 생각을 갖고 있을까.
『처음 치른 쿠웨이트戰에선 경기 내내 대표팀이 달라졌다는 것을 느꼈어요.「아시아의 어느 팀과 붙어도 충분히 승산이 있다」는 확신이 생겼거든요. 한국팀의 본선 진출도 자신했었고요.
그런데 사우디와의 원정경기에선 뭔가에 홀린 듯한 느낌이었어요. 아무리 열심히 뛰어도 풀리지 않고 꽉 막혀 있는 듯한 기분이었죠. 모든 게 어긋나기 시작했고 선수들도 당황할 수밖에 없었어요. 갑자기 외로워지데요. 각자 따로 노는 듯한 그런 서글픔이라고나 할까요』
박지성은 한 달 전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한국대표팀 선수들의 정신력에 문제가 있음을 지적했다. 월드컵 이후 어딜 가나 시선을 잡아 끄는 스타 플레이어로 주목받게 되면서 축구의 질적인 성장보다 외적인 모양새에 치중하는 선수들이 늘어나고, 훈련과 팀워크를 소홀히 하는 선수들이 나타나면서 대표팀 전체에 심각한 위기감이 고조됐다는 것이다.
그는 『우즈베키스탄戰의 결과에 따라 본프레레 감독의 거취가 결정될 수 있다는 여론의 압박은 엄청난 부담이었다』고 실토했다.
『사우디戰 이후 흐트러졌던 선수들의 마음을 한데 모으는 게 급선무였어요. 월드컵 본선에 진출하는 게 중요한 거 아닙니까. 감독님의 경질 여부는 우리가 결정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는 오로지 경기에만 집중하려고 노력했어요』
「해외파」라는 꼬리표를 달고 대표팀 소집이 있을 때마다 네덜란드에서 11시간의 비행 끝에 시차 적응할 틈도 없이 대표팀에 합류하는 박지성은 『몸은 피곤하지만 대표팀의 훈련장과 숙소가 있는 파주NFC만 보면 정신이 번쩍 든다』고 한다.
한밤중에 혼자 축구연습
―어렸을 때 체격이 왜소해서 운동할 때 고생이 많았다면서요.
『수원工高 1학년 때 키가 155cm였고 바람이 불면 날아갈 듯한 마른 체격이었어요. 고등학교 입학 후 하루는 감독님이 「더 이상 축구부에 나오지 말라」고 하시더라고요. 집에서 쉬면서 체격을 키우라고 하면서 축구부 출입을 통제하셨죠. 저한테는 청천벽력이나 다름없었어요. 한 마디로 사형선고였죠. 체중을 늘리려고 무진 애를 쓴 결과 1년 새 키가 10cm 크고 몸무게가 많이 늘어 高2 때 보란 듯이 축구부에 다시 들어갔어요』
박지성은 수원工高를 졸업할 당시만 해도 선뜻 데려가려는 대학이 없었다. 가장 큰 이유는 역시 왜소한 체격 때문이었다. 성균관大 진학을 꿈꾸던 박지성은 차선책으로 명지大를 찾아갔다.
그러던 박지성에게 행운이 찾아왔다. 명지大 1학년 때 처음으로 청소년대표팀에 발탁됐고, 그 후 올림픽대표팀을 거치며 성인대표팀으로까지 수직 상승했다.
―2000년 후반기에 명지大를 휴학하고 일본 J리그의 교토 퍼플상가로 진출했는데, 유럽 대신 일본으로 방향을 튼 이유가 있습니까.
『당시 이런저런 비난을 많이 들었어요. 나이 어린 선수가 유럽이 아닌 일본을 선택했다는 사실 때문이었죠. 저는 유럽에 진출했다가 실패하고 돌아온 선배들을 보면서 좀 다른 생각을 하게 됐어요. 일본 프로축구에서 경험을 쌓은 뒤 높은 몸값을 받으며 유럽으로 진출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한 거죠.
처음 일본 도착했을 때가 잊혀지지 않아요. 기대보다는 두려움이 가득했어요. 프로 데뷔에다가 처음 해보는 외국 생활이었으니까. 아, 첫 월급을 받을 때가 생각나네요. 무척 감동적이었죠. 제가 돈을 버는 직장인이 됐으니까』
孝子 박지성
―일본에서 혼자 지냈다고 들었어요. 부모님의 뒷바라지가 절실했을 텐데.
『당시 아버지는 수원에서 정육점을 운영하고 계셨어요. 어머니는 정육점 옆에다 반찬가게를 내고 돈을 버셨죠. 생업 때문에 일본으로 오시지 못한 거예요. 그러다 2002년 월드컵 직전에 가게 문을 닫으셨어요. 전 외동 아들이에요. 부모님이 제 밑에 동생을 두지 않으신 건 제가 축구를 했기 때문이래요.
저를 훌륭한 축구선수로 만들기 위해 부모님이 더 이상 자식을 낳지 않으셨다고 합니다. 저를 위해 갖은 고생을 마다하지 않으신 부모님을 위해서라도 전 성공할 수밖에 없어요』
박지성이 고등학교에서 선수 생활을 할 무렵 고급 메이커 축구화가 유행이었다고 한다. 박지성은 졸업할 때까지 그런 신발을 신어 보질 못했다. 부모의 부담을 염려해서 단 한 번도 뭘 사달라거나 용돈을 더 달라고 떼를 쓰지 않았다고 한다.
일본 진출 이후 박지성은 매달 4000만원씩을 한국으로 보냈다. 월급의 전부였고 생활비는 수당으로 대신했다. 그 수당마저 아껴서 다시 부모님께 보낸 효심 깊은 아들이었다.
「골」로 히딩크 감독의 은혜를 갚다
박지성은 지칠 줄 모르는 체력의 비밀에 대해 『어렸을 때부터 개구리, 장어 등을 많이 먹은 덕분』이라고 털어놨다. 키가 크기를 바라는 심정으로 부모가 이런저런 보약들을 지속적으로 먹인 것이 체력의 바탕을 이룬 것이라는 얘기였다.
―2002 월드컵 때 「히딩크의 황태자」라는 별명을 얻었죠. 당시 월드컵에 출전할 엔트리가 발표되기 전까지 기자들 사이에선 「박지성이 탈락할지도 모른다」는 의견이 적지않았어요.
『엔트리 발표하기 전날 어느 신문에서 제가 「탈락 1순위」라고 기사를 내보냈더라고요. 공식 발표를 하지 않았는데 어떤 근거로 그런 기사를 썼는지 정말 어이가 없었어요. 그 기사를 보고 충격을 받았어요. 다음날 허위 보도임이 판명났지만, 천당과 지옥을 오가면서 히딩크 감독님이 진짜 좋아졌어요. 절 믿고 뽑아 준 히딩크 감독님께 뭔가를 보답해야겠다고 생각했고 훈련에 집중했죠』
박지성은 히딩크 감독의 은혜를 「골」로 갚았다. 잉글랜드, 프랑스와의 평가전에서 연속 골을 터뜨리며 새로운 스타탄생의 서곡을 알렸고, 결국 월드컵 포르투갈戰에서 멋진 골을 터뜨렸다. 월드컵 4강 신화는 박지성에게 인기라는 것의 실체를 제대로 실감하게 해준 사건이었다.
―저도 월드컵 취재 현장에 있었지만 박지성 선수의 인기가 폭발적이었어요.
『갑자기 공인 대접을 받다 보니까 마음대로 외출을 할 수 없더라고요. (김)남일이 형의 인기도 장난이 아니었죠. 결국 저랑 남일이 형은 강남의 한 호텔에서 숨어 지냈어요. 밤이 되면 모자 푹 눌러쓰고 돌아다녔어요』
박지성은 월드컵 이후 줄을 잇는 CF 요청을 모두 거절했다. 어림잡아 15억원이 넘는 거액을 챙길 수 있는 기회였지만 마다했다. 『축구할 때까지는 축구만 하겠다는 생각은 변함이 없다』고 했다.
―히딩크 감독이 부임 초부터 선후배의 벽을 허물라며 반말을 쓰라고 했죠. 선배 이름 부르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입 안에선 「(홍)명보」, 「(황)선홍」이라는 이름이 오락가락하지만 그걸 어떻게 감히 입 밖으로 꺼낼 수 있겠어요. 처음엔 이천수가 앞장 섰고, 나중엔 어린 선수들 모두 운동장에선 선배들 이름을 불렀죠.
그런 생활을 하다 보니 소속팀에 합류한 뒤 겁날 게 없는 거예요. 말이 통하지 않아도 제가 먼저 선수들에게 다가갔고 제가 먼저 벽을 허물었어요』
―일본을 떠나 히딩크 감독이 이끄는 PSV 에인트호벤으로 이적하게 됐는데, 당시 일본 팬들의 만류가 대단했다고 들었어요.
『2003년 1월1일 J리그 천황배 결승 경기에서 교토 퍼플상가에 우승컵을 안겨 주고 돌아왔어요. 정말 가슴이 벅차 오를 정도로 감격스러웠죠. 교토를 떠나던 날 일본팬들이 눈물을 흘리며 가지 말라고 하더군요.
사실 네덜란드로 이적을 결심하기까지 참 많이 힘들었어요. 교토에서 절 붙잡았고 팬들도 저에게 아낌 없는 사랑과 응원을 보내 줬기 때문에 그걸 모두 버리고 떠나기가 쉽지 않았아요.
가족들도 제가 일본에 더 머물기를 원했어요. 당시 제 몸 상태가 좋지 않았고 1, 2년 더 일본에서 생활한 뒤 유럽으로 진출해도 늦지 않다고 생각하신 거죠. 지금까지 살면서 가장 힘든 시기였던 것 같아요』
당시 교토 측에서는 박지성이 잔류할 경우 6개월 후 유럽 진출을 적극적으로 도와주고 영어 개인교사를 붙여 유럽 진출 전 언어 학습에 도움을 주겠다는 옵션까지 내걸었다. 박지성에게 3년6개월간 25억원이란 몸값을 제시하며 「박지성 잡기」에 총력전을 펼치기도 했다.
―네덜란드로 진출을 결정하게 된 가장 큰 이유가 뭔가요.
『네덜란드 진출 자체가 저한테는 굉장한 선물이죠. 아무나 그런 행운을 잡을 수 있는 거 아니잖아요. 히딩크 감독님이 계시다는 것도 마음을 잡는 데 도움이 됐어요. 그런 기회가 언제 또다시 찾아올지 알 수 없다는 생각에 네덜란드行으로 급선회 했죠』
苦行의 연속
2003년 1월6일, 박지성은 미지의 세계에 도전장을 내민다. 그러나 네덜란드行은 고행길의 연속이었다. 특히 오른쪽 무릎을 부상당하는 바람에 1년 동안 수술과 재활 훈련을 반복해야 했다.
회복이 됐는데도 조금만 심하게 운동을 하면 수술 부위에 물이 차는 바람에 그 물이 빠질 때까지 경기장을 밟아보지 못한 채 부상과 외로운 사투를 벌였다고 한다.
―그때 저와 전화통화를 자주 했잖아요. 많이 힘들어했는데 잘 견뎌 냈어요.
『제가 만약 조금 덜 유명한 선수였다면, 제가 만약 월드컵 4강 신화를 이룬 한국 출신의 선수가 아니었다면, 제가 만약 히딩크 감독님이 대표팀을 맡았던 팀에서 선택돼 온 선수가 아니라면…, 이런 생각들이 절 미치게 만들었어요.
J리그에 대한 향수병을 앓기도 했습니다. 「일본에 계속 남아 있다면 이렇게 힘든 일은 없었을 텐데」 하는 안타까움이었죠. 그러나 다시 일본으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았어요. 다시 돌아간다면 덜 힘들 수는 있었겠지만, 네덜란드 리그에서 뭐 하나 제대로 해보지도 못하고 도망치듯이 물러나는 게 싫었어요』
네덜란드 팬들의 야유에 좌절
일본으로 U턴하는 시나리오가 꽤 진지하게 논의됐던 모양이다. 히딩크 감독은 물론 주변에서 「슬럼프에 빠진 박지성을 되살리기에 위해 다시 J리그行을 적극 검토해야 한다」는 의견이었다.
『제가 싫다고 했어요. 그냥 돌아가기가 억울했죠. 네덜란드 사람들이 박지성이란 선수를 떠올렸을 때 「돈 아까운 선수」는 되지 말아야 한다고 결심했습니다. 그 오기가 절 다시 살린 거예요. 그때 일본으로 돌아갔다면 어떻게 됐겠어요. 제가 견디지 못했을 겁니다』
―네덜란드 홈팬들이 이영표와 박지성 선수에게 처음엔 야유를 퍼부었다면서요.
『그렇죠. 유럽 사람들의 축구 열기는 우리나라와 비교가 안 돼요. 한 마디로 「광팬」들이죠. 동양에서 잘한다는 용병을 데려왔는데 뛰는 거 보니까 시원찮은 거예요. 유럽 선수들과 부닥쳐서 넘어지기만 하고… .
마음에 안 든 걸 야유로 표현하더라고요. 아무리 신경 안 쓰고 덤덤해지려고 해도 「우~」 하는 소리는 제 심장을 갈기갈기 찢어 놓더라고요. 그때는 제 앞으로 공이 오는 게 무서웠어요. 실수할까 두려웠던 거죠. 아니, 실수해서 야유받을까 봐 그게 더 끔찍했어요. 빨리 경기가 끝나기만을 기다렸어요. 경기는 뜻대로 풀리지 않고 야유는 해대고 팀은 지고 있고… 이러면 정말 돌아버려요』
네덜란드語도 피할 수 없는 큰 숙제였다. 선수들이 대부분 네덜란드語를 쓰고 있고, 히딩크 감독도 네덜란드語로 훈련 지시를 하기 때문에 통역이 없으면 꿀 먹은 벙어리가 될 수밖에 없었다. 의사소통이 안 되다 보니 동료들과 친해질 수 있는 계기가 없었다.
『(이)영표 형하고만 붙어 다녔어요. 하루는 히딩크 감독님이 절 불러선 「동료들과 장난도 치고 적극적으로 팀 생활을 즐기라」고 당부하시더라고요.
홈 관중들의 야유에 대해서도 크게 개의치 말라고 덧붙이면서요. 쉽진 않았어요. 제가 축구를 배울 때는 자유스러운 분위기가 아니었잖아요. 통제와 억압 속에서 지도자의 지시대로만 따라했던 습관들이 몸에 배어 제가 뭔가를 리드하고 손을 내민다는 게 익숙하지가 않았죠』
―지금은 많이 편해졌죠. 요즘 플레이하는 게 이전과는 확연한 차이가 있어요.
『추운 겨울만 있을 줄 알았는데 몸이 회복되고 자신감이 붙으면서 플레이가 살아났어요. 어시스트도 하고 기다렸던 골도 넣고, 네덜란드 진출 2년여 만에 상승가도를 달리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마냥 행복하지만은 않아요. 하나의 산을 넘고 나면 또 다른 산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죠. 부상에 대한 두려움도 떠나지 않고요. 언제부턴가 홈 관중들이 야유를 보내지 않았어요. 야유 대신 환호와 박수를 보내줄 때의 감동은 직접 겪어 보지 않고선 잘 모르실 거예요』
『본프레레는 고집이 세다』
―월드컵 당시의 히딩크 감독부터 쿠엘류, 지금의 본프레레 감독까지 세 명의 대표팀 감독과 인연을 맺었는데, 감독들의 특징을 설명해 주세요.
『선수 입장에서 감독님을 비교한다는 것 자체가 쉬운 일이 아니죠. 밝힐 수 있는 부분만 말씀드릴게요. 히딩크 감독님은 선수들의 조직력을 굉장히 중요하게 여기세요. 세밀한 부분까지 전술을 구사하시고 선수들이 그대로 따라 주길 바라시죠.
반면에 쿠엘류 감독님은 감독의 지시보다 선수들의 능력을 최대한 믿고 맡기셨어요. 큰 골격을 갖고 그 틀 안에서 선수들의 능력을 풀어 가셨죠.
본프레레 감독님은요, 고집이 아주 센 편이죠. 자신이 주장한 건 결과가 잘못 나왔다고 해도 자신이 책임질 테니 그대로 따르라고 강조하시죠. 감독님이 고집스럽게 요구하시면 따를 수밖에 없어요』
―월드컵 이후 연예인과의 스캔들이 언론에 보도된 적이 있죠.
『그 얘기 또 해야 돼요? 아닌 거 다 아시면서… 처음 스캔들 기사가 나왔을 때는 신기했어요. 「누구와 데이트를 했다더라」는 식의 기사가 스포츠신문 1면 톱으로 나왔으니까요. 제가 그렇게 유명한 사람인 줄 처음 알았어요. 소개로 딱 한 번 봤는데 어디서 소문을 냈는지 열애설로 나왔고, 그 이후 얼굴 한 번 본 적이 없어요.
또 다른 열애설은 정말 황당한 내용이라 더 이상 설명할 가치가 없는 것 같은데요. 저 애인 없다는 거 알 만한 사람은 다 알아요. 친구들도 소개를 안 해주려고 해요. 왜냐고요? 관리를 못 한다는 거죠. 외국에 나와 있으니까 여자를 소개시켜 줘도 만날 수 없잖아요』
한계 극복
―요즘 해외파들의 국내 복귀가 활발히 이뤄지고 있습니다. 동년배인 이천수 선수가 울산 현대로 복귀를 결정했고.
『직접 외국 생활을 해보지 않고선 당사자의 심정을 이해할 수 없어요. 얼마나 힘들고 외로웠는지 겪어보지 않고 탓할 수는 없는 거죠. 사람마다 분명히 한계가 있어요. 그 한계를 느끼고 절망한 사람이라면 돌아가는 것이고, 그 한계를 극복하는 사람은 남아 있는 거겠죠. 한국으로 돌아가서 또 다른 입지를 구축한다면 국내 복귀 자체는 환영받을 만한 일이라고 생각해요. 외국에서 오랫동안 슬럼프에 빠져 있는 것보다는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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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동이네요~근데 ㅎ 제목이 원드컵 이라고 되있어요.
저는 박지성선수를 보면 항상 제모습이 부끄러워요.
감사^^;;수정했어요..^^;;;;
사우디와의 원정경기에선 뭔가에 홀린 듯한 느낌이었어요. 아무리 열심히 뛰어도 풀리지 않고 꽉 막혀 있는 듯한 기분이었죠. 모든 게 어긋나기 시작했고 선수들도 당황할 수밖에 없었어요. 갑자기 외로워지데요. 각자 따로 노는 듯한 그런 서글픔이라고나 할까요 << 이런건 감독의 문제인것 같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