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사장은 오늘 기분이 좋다. 며칠 전 택시 한대를 80만원이라는 말도
안 되는 가격에 샀는데 그 택시가 오늘 첫 운행을 한다. 차 번호도 서울 30 바 1414번. 좋다. 맘에 든다.
'우리 회사이름이 일사천리인데 차 번호가 1414번이니 이거 찰떡궁합이야, 찰떡궁합'
이 택시는 일사천리의 경쟁회사 신호택시로부터 사들인 것인데 이사장이 100만원을 부르자 신호택시 사장이 아예 20만원 깎아서 내주었다. 자기들은 이 택시를 몰려는 기사가 없으니 어서 갖고 가라 말 하면서 말이다.
김씨는 날씨가 더우니 얼음물을 갖고 가라고 챙겨주는 아내의 손길을
뿌리치고 나와 버스를 탔다.
'이 나이에 버스타고 출근하는 것도 쪽팔린데 물통까지 들고 가봐. 사람들이 노가다 꾼으로 보지. 날씨가 더우면 에어컨 세게 틀지 뭐'
어느덧 김씨도 40대 중반의 나이로 접어들었다. 30대 후반까진 택시를 몰다가 사업을 한답시고 택시기사를 하면서 푼푼이 모은 돈을 다
탕진하고 이제 다시 일사천리라는 택시회사에 오늘 첫 출근하는 날이다.
타고 다니던 승용차는 집에 세워 두었다. 호주머니 사정이 기름 넣어가며 승용차로 출퇴근하기엔 넉넉치 않다.
12시까지 출근하라는 어제의 통화내용에 따라 회사입구에 도착해서
시계를 보니 11시 50분이다. 좀 걸었다고 땀이 관자놀이를 타고 귀밑을 지나 턱 끝에 고였다. 뉴스에서 이번 여름 날씨는 살인 더위라고 날마다 떠들어 댄다. 매일마다 낮 최고기온은 이전의 최고기록을 갱신하고 있다고 한다. 하늘을 보니 태양이 오늘도 그 위엄을 뽐내 듯 눈부시게 빛나며 자리잡고 있다.
"젠장"
김씨가 땀을 닦으며 회사 입구를 들어서자 노란 택시 몇 대가 줄지어
나란히 주차 되어 있는 게 보였다. 그런데 유독 한대의 택시는 사무실
문 앞에서 김씨를 노려 보며 서 있었다. 가까이 가서 보니 도색을 새로이 한 차다. 뒤로 돌아 차 이름을 보니 '멤시멈'이다. 지금은 단종 되었지만 3,4년 전엔 꽤나 인기 있었던 차종이다. 중고차를 수리한 새 택시인가보다라고 생각한 뒤 사무실로 들어 갈려는데 노란색의 차 번호판이 눈에 들어왔다.
'번호 더럽네. 1414번이 뭐야. 일사병이 떠오르는구먼…'
택시나 용달차 같이 차로 영업을 하는 사람들은 차 번호에 민감하다.
최소한 죽을 사(死)자와 발음이 같은 4번이 들어간 차 번호는 꺼려 한다. 아무래도 교통사고는 예고 없이 닥치므로 재수없는 것은 피하려는 생각일 것이다. 엘리베이터의 4층이 F로 표시되는 것과 같은 심리라고 할 수 있겠다.
1414번 택시한테 한바탕 욕을 퍼붓고 김씨는 사무실에 들어섰다.
"사장님! 바꿔 주세요… 1414번은 안 탑니다."
"이사람 왜 이래? 괜찮다니까 그러네."
젊은 기사가 이사장의 심기를 건드린다.
"사장님 아시잖아요. 저 여기 오기 전에 신호택시에서 근무 했었어요.
1414번은 귀신 들린 택시라고요."
'하하 귀신들린 택시? 앞에 서 있는 그 택시인가 보네. 하긴 1414번은 기분나쁘지.'
김씨는 젊은 기사가 싫어할 만하다고 생각했다.
"젊은 사람이…. 귀신이 어딨다고 그래? 자네가 저 차에서 귀신을 봤어?"
1414번을 아끼는 이사장이 버럭 소리를 지른다.
"제가 직접 보진 못했지만 신호택시에 근무하던 나이 좀 든 사람들은
다들 그래요. 1414번은 타지 말라고요. 저 택시를 타고서 살아남은 사람이 없대요."
"이 친구가 진짜…"
언성을 더 높이던 이사장은 사무실 문 앞에서 두 사람 사이를 끼어 들
틈을 노리는 김씨를 발견했다.
"아, 어떻게 오셨어요?"
"네? 안녕하세요? 어제 전화 드렸던 김택호입니다."
이 말을 들은 이사장은 좋은 생각이 떠올랐는지 능글맞게 웃으며 김씨에게 다가갔다.
"아 그러세요? 이리 앉으시죠… 미스 정! 여기 커피 한 잔 뽑아와."
안쪽에서 책상에 앉아 고개를 파묻고 얼굴도 안 보여주던 미스 정이라 불렸던 젊은 여자가 일어나 입을 삐죽 거리며 문밖으로 나갔다.
"이제 앞으로 김기사라고 부르겠습니다. 오늘 보자…"
이사장은 벽쪽에 걸려있는 손때 찌든 차트를 뒤적거리는 것 같더니
말을 이었다.
"어허 차가 한대 남아있네요. 번호가 1414번이네요."
좀 전의 대화를 뻔히 듣고 있었는 줄 알면서 이사장은 짐짓 모르는 체
말했다.
미스 정이 자판기에서 뽑은 종이 컵에 든 커피를 들고 왔다. 날씨도 더운데 뜨거운 커피가 먹힐 리 없었지만 김씨는 입에 살짝 가져 다 대고
말했다.
"키는 꽂혀 있나요?"
차문을 열자 더운 열기가 김씨의 얼굴로 화끈히 올라온다. 대나무 시트가 깔려있는 운전석에 앉으니 등이 뜨거워 좌석 등받이에 기대어
있지도 못했다.
"아, 이거 열 받네. 첫 출근부터 1414번은 안 탄다고 할 수가 있었어야지."
창문을 활짝 열자 그래도 뜨겁지만 차 안의 살인적인 온도보다 좀 더
시원한 바깥공기가 차 안으로 들어왔다.
LPG연료를 채우면서 잔돈을 바꾸고 있는데 좀 전 이사장에게 1414번은 안탄다고 말하던 젊은 기사가 다가왔다.
"김기사님이라 하셨죠? 저 택시 조심하세요…"
그러곤 안도의 한숨인지 앞으로 닥칠 김씨의 운명을 아쉬워한 한숨인지 모를 한숨을 쉬고 멀어져 갔다.
"건방진 놈, 저 땜에 내가 1414번 타는 건데…"
좀 속도를 내서 달리자 차 안의 공기가 확 바뀌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아스팔트의 열기가 차 창문을 넘어 김씨에게 전달 되었다.
에어컨을 틀어야겠다고 느끼고 창문을 올리는 버튼을 누르고 있는데
저 앞에 선그라스를 쓴 아가씨가 손을 들고 있는 게 보였다.
김씨는 오늘의 첫 손님을 태우고 물었다.
"어디로 모실까요?"
김씨는 그렇게 친절한 사람은 아니건만 더운 날씨에 부응한 듯 노출이 심한 옷을 입은 젊은 아가씨에겐 친절한 모범적인 택시기사가 되었다.
"올림픽공원"
말이 짧다. 그래도 룸밀러로 보이는 그녀의 짧은 치마에 마냥 김씨는
즐겁다.
"네. 조금만 가면 돼는군요. 차 안이 더우시죠. 지금 에어컨 틀려던 참이었습니다."
기본요금만 지불하고 그녀가 내리자 오늘은 젊은 여자들이 많을 것
같은 백화점쪽으로 가서 매상을 올려봐야겠단 헛된 욕심을 품었다.
백화점으로 빨리 가기 위해 올림픽대로로 차를 올렸다. 핸들을 오른쪽으로 꺾는데 차가 덜컹덜컹 튀기 시작했다.
오토매틱차는 기아변속이 속도와 RPM에 따라 자동으로 이루어지는데 간혹 액셀레이터를 너무 갑자기 많이 밟으면 짧은 시간에 변속이
여러 번 이루어지면서 차가 튀는 현상이 일어날 때가 있다. 변속충격이라고 말하는데 물론 좋은 차일수록 변속충격이 적다.
그 충격에 김씨는 하마터면 브레이크위에 발이 미끄러져서 앞차를 들이 박을 뻔했다.
김씨는 고장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 괜히 차를 탓했다.
"이 넘의 차. 재수없게 4자가 두개나 들어가더니 하는 짓이 그렇지"
1414번 택시가 대답을 하듯 차문의 안전핀이 덜컹하고 잠겼다.
택시는 손님을 언제나 태울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하는데 차문 안전핀을 걸어 잠그고 다닐 수는 없지않은가?
"잘~한다. 가지가지 하는구나"
김씨는 보지도 않고 운전석 안전핀을 뽑으려고 하는데 올라오지를 않는다. 행여나 해서 운전석 문도 열어보지만 안전핀이 내려가 있는데
문이 열릴 리가 없다.
김씨는 당황했다. 차 안에 갇힌 것이다.
핸들이 스르르 왼쪽으로 혼자 돌아간다. 이 무슨 일인지 김씨는 핸들을 붙잡아보지만 핸들은 부드럽게 왼쪽으로 돌더니 1414번 택시는 차선을 바꾸어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김씨는 브레이크를 밟아보았다. 솜 뭉치를 밟는 것같이 가볍기만 하고 차는 속도를 더해갔다.
김씨는 예전에 텔레비전에서 보았던 한 외화가 떠올랐다. 내장된 컴퓨터가 인공지능을 가지고 있어서 스스로 운전을 하는 자동차를 본
적 있는데 이 상황이 똑같다고 느꼈다.
그래도 그 차는 사람 말이라도 잘 들었는데…
1414번 택시는 올림픽대로 위를 질주하기 시작했다. 더운 날씨로 흐물흐물해진 아스팔트가 1414번의 곡예운전에 벗겨질 듯 했다. 사람이
운전을 한다면 그렇게 절묘히 운전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옆차를 가로지를 때마다 '쌔 앵'하는 공기 파열음이 김씨의 귀에 들려왔고, 택시가 앞차를 박을 듯이 비켜갈 때마다 놀이공원의 놀이기구를 탈 때의 가슴이 털컹 내려 앉고 양쪽 골반안쪽과 아랫배사이의 오금이 쩌렁 쩌렁 저리는 기분을 느껴야 했다.
김씨는 경찰이 있어도 잘 메지 않았던 안전벨트를 채웠다. 그것도 안전벨트고리로 손등을 몇 번 찍고 나서야 고리와 클립을 결합할 수 있었다. 이 차를 자신이 제어할 수 없음을 알면서도 위험하다 느낄 때면
솜 같은 브레이크를 자신도 모르게 밟아대고 있었다.
1414번을 안탄다고 하던 그 망할 놈이 떠올랐다. 이 차에서 내리기만
하면 제일 먼저 그놈의 면상을 날려주리라. 그리고 그 좀상의 사장도…
이마의 땀이 눈썹에 송글송글 맺히더니 눈 안으로 떨어졌다. 눈을 깜박이며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 더운지는 몰라도 자신은 아까
보다 더 땀을 많이 흘리고 있었다. 자신의 옷을 내려다 보니 이미 옷은
원래의 색보다 물에 젖은 더 진한 색을 하고 있었다. 그제서야 김씨는
더운 열기가 자신의 안면을 강타하고 있음을 알았다.
45도로 고개를 돌려 약간 내려다보니 에어컨의 버튼을 나타내는 A/C
버튼의 불이 꺼져있다.
그 위에선 왼쪽은 굵은 파란색, 오른쪽으로 갈수록 파란색의 굵기가
줄어들고 줄어든 파란색 위에서 오른쪽 끝까지 갈수록 굵어지는 빨간색이 그려진 차 안의 온도를 조절하는 레버가 빨간색 끝에서 그 손잡이에 그려진 흰색의 선이 머물어 있었다.
'히터?'
에어컨은 꺼지고 1414번 택시는 이 뜨거운 햇살아래 히터를 켜고 달려가고 있었다.
A/C버튼을 눌러보았다. 역시 불이 들어오지 않았다. 차 안의 온도를
조절하는 레버도 파란색으로 움직이지 않았다.
레버를 조작해 보려던 김씨의 눈은 더 커져 갔다. 온도를 조절하는 옆의 에어컨, 히트의 세기를 조작하는 레버가 1에서 2로 딸깍 움직이는
게 보였다. 김씨의 얼굴에 더 뜨거운 기운이 불어 닥친다.
"이 차가 미친 거야! 이 차가 미쳤어!"
운전석 유리창을 두드리고 조수석 유리창을 발로 차 봤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럴수록 김씨의 몸에서 땀은 더 흘렀고 차 안의 온도는 더 높아만 갔다.
다시 딸깍하고 숫자가 적힌 레버가 2에서 3을 가리킨다. 땀으로 머리털까지 흠뻑 젖은 강씨는 그 레버도 움직여보려 하지만 역시나 자기의 뜻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김씨는 전에 실수로 여름에 히터를 켜고 운전을 해본적이 있지만 이렇게까지 뜨겁다고 느끼진 않았었다. 1414번 택시는 귀신들렸다고 한
젊은 기사가 더 밉게 느껴진다.
"오늘은 어제보다도 더 더운 날씨가 되고 있는 가운데 낮 최고기온이
44도를 넘을 것으로…"
라디오가 갑자기 켜졌다. 깜짝 놀란 김씨는 가슴이 떨어지는듯한 충격이 온몸으로 알싸히 퍼져나감을 느꼈다. 소리가 점점 켜져 간다. 차의 오디오화면이 볼륨을 나타내는 'Vol'은 고정시킨 채 그 옆의 숫자는 자꾸자꾸 더하고 있었다.
24,25,26…40,41,42,43,44,45.........
고막이 찢어질 것 같다. 김씨는 귀를 막았다. 히터의 강도는 김씨의 반응이 재미있다는 듯이 3에서 4로 더 강하게 바뀌었다.
룸밀러는 얼굴에 울룩불룩 붉은 얼룩이 솟아있는 김씨의 화상으로 변해가는 얼굴 중 일부를 반사 시키고 있었다. 그 얼룩은 색깔은 다르지만 마치 젖소의 얼룩과 비슷하게 보였다.
김씨는 탈수증세로 의식이 희미해져 갔다. 1414번 택시는 이리저리
차들 사이로 질주하지만 더 이상 무섭지 않았다. 뉴스는 제일 큰 볼륨으로 오늘의 이슈를 말하고 있지만 점점 그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눈앞이 흐릿해지면서 눈엔 땀방울만이 보이고 반대로 입안은 텁텁한 것이 침도 모이지 않는다.
자꾸만 출근 전 아내가 챙겨주던 얼음물이 든 물병이 생각난다. 그 물병의 물을 한 방울만 먹을 수 있다면…
김씨는 더디어 의식을 잃고 다시는 깨어나지 못했다.
"사장님! 1414번은 절대로 안 탄다고 해도 그러시네요 정말… 바꿔 주세요…"
이사장은 오늘도 열심히 택시 기사를 설득중이다.
첫댓글 아...꼭 이사장이 일부러 1414번에 태워서 사람을 죽이는 것같군요..^^ 재미있었습니다~!!!!
와아, 재밌다. 여운이 남는 소설, ^^
뚱떙이-ㅁ-ㅋ 라고 느껴지는군요.ㅎㅎ
재밌었어요> < 근데 용달차가 뭐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