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04주일설교 누가복음22:63-71
본문: 누가복음22:63-71
제목: 모욕당하고 정죄당하면서도
오늘은 누가복음22:63-71의 말씀을 가지고
“모욕을
당하고 정죄당하면서도”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오늘 말씀 제목이 무엇입니까?
“모욕을 당하고 정죄당하면서도”
살다 보면 상상치 못한 모욕을 당할 때가 있습니다.
또한 죄인이라고 정죄되기도 합니다.
여러분은 그런 일을 당해 보았습니까?
그때 어떻게 했습니까?
죄가 없는데 그런 일을 당할 때
참으로 기가 막히고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어 당혹할 때가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어떻게 행합니까?
야단법석을 떨기도 하고
가까운 사람에게 하소연하기도 하고
혼자 펑펑 울기도 합니다.
아직도 세상 어디에서는
모욕과 조롱을 당하며 사는 이들이 있습니다.
사람이 어떻게 다른 사람에게 그렇게 행할 수 있습니까?
아무리 그들이 약하고 힘이 없다고 해도
그렇게 행하는 것은 참으로 악한 일입니다.
그렇게 행하면서 부끄러운 줄 모르고
도리어 낄낄대며 자랑스러워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흠 없으신 예수님께서 그러한 일을 당하셨습니다.
그런 본문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을 나누기를 바랍니다.
1.예수님를 희롱하고 때리는 사람들
예수님은 가룟 유다의 배신으로
잡혀서 심문을 당하였습니다.
자유로우신 예수님을 군인들이 지키고 있습니다.
지켜야 할 군인들이 어떻게 합니까?
그런데 군인들은 예수님을 눈을 가리고 빰을 때립니다.
그리고 누가 때렸는지 맞추어 보라고 합니다.
그들에게 예수님은 놀이감이었습니다.
자신들의 재미를 위해서
때리고 희롱하는 일을 하고 욕을 하였습니다.
시간적으로 보면 새벽 시간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잡히시고 공회가 열리기전
그런 일을 행하였습니다.
졸리는 새벽에 남에게 상처를 주고 모욕을 주는 일로
재미를 삼는 참으로 악한 자들의 모습입니다.
이같은 행위는 인간이
얼마나 악하고 추한지를 보여주는 모습입니다.
이렇게 행하는 자들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어떻게 사람이 사람에게 이럴 수 있습니까?
하나님을 싫어하기에
하나님의 성품을 가진 자들에게 그렇게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끊임없이
마귀를 통제하지 않고 방치하신다면
세상이 어떻게 될지 상상조차 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그런 모습을 보여줍니다.
보통 사람이라면 부끄러워
고개도 들지 못한 일을 하면서도
높은 지위를 얻는 사람들을 봅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거꾸로 의 세상 같습니다.
악한 자들은 승승장구하고
선하게 살려는 자들은 고난과 고초를 당하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은 오늘 본문에
설명 되어 있는 악한 자들의 모욕에도
주님은 잠잠히 굴복하셨습니다.
왜 그렇게 하셨을까요?
그것은 죄인들을 향하신
주님이 깊은 사랑을 볼 수 있습니다.
주님은 그렇게 때리는 자들의 손을 마비를 시킬 수 있고
낄낄대는 소리를 멈추게도 할 수 있는 분입니다.
분명 예수님은 죽은 자도 살리고 귀신도 잠잠케 하고
풍랑도 멈추게 하신 분입니다.
예수님을 지키는 군사들보다 놀라우리만큼 많은
하늘의 군대를 불러 오실 수도 있는 분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원수를 갚을 수도 있었지만
원수갚는 일은 아버지 하나님께 맡기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자신의 할 일
이 땅에 하나님께서 보내신 목적을 이루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겸손한 행동을 통하여
우리를 구속하십니다.
그래서 한 푼도 남김없이
죄의 삯을 지불하기를 주저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한
대속의 고난의 쓴 잔을 자청하였습니다.
그런 모습을 보고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브리서12:2)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주어진 잔을 최후의 한 방울까지 다 마셨습니다.
여기 주님이 보여주신 인내는
우리에게 큰 교훈을 주십니다.
세상에서 미움을 받을 때
우리는 모든 불평과 원망 그리고 초조한 마음을
인내로 극복해야 합니다.
우리가 당하는 모욕은
주님이 당하신 모욕과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베드로는 베드로전서2:21-23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고난을 당하셨습니까?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을 따라오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은 고난을 받으시되 대신 욕하지 아니하셨습니다.
고난을 받으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셨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따르는 자라면 그렇게 해야 합니다.
그래야 예수님을 따르는 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2,다가올 영광을 말씀하시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자신을 모욕하는 원수들 앞에서
자신의 영광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인자가
하나님의 권능의 우편에 앉아 있으리라 하시니“(69절)
예수님을 심문하는 공회 의원들은
어떻게든 예수님의 모욕하여
추한 모습을 드러내어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들에게 선언하고 있습니다.
나를 모욕하고 희롱하고 죽이려고 하는 너희들이
영광 가운데 있는 자신을 볼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지금 보기에 예수님은 외부적인 위엄이 없고
권능이 없어 보여 연약하게 보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어느 날 하늘에서
가장 고귀한 위치에 계시는 주님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때 주님과 영광에 자리에 함께 있지 못하는 자는
심판의 자리에 있게 됩니다.
그런 영광의 주님을 믿지 않고 불신하는 자는
영원한 멸망의 자리로 가는 심판을 받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고난 뿐 아니라
미래의 영광이 우리 신앙 고백의 일부를
이루고 있음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조롱과 멸시를 받고 십자가에 죽으신 바로 그 주님이
이제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고 계시며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의 모든 천사들과 함께
언제가 다시 오시리라“는 것을
우리는 믿고 경건 생활의 첫째 원리로 삼아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사셨던
그 부분만 본다면
진리의 반절 밖에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재림과 그의 면류관을 바라보는 것은
이 땅에서 고통당하는 이들에게 큰 위로가 됩니다.
대제사장과 빌라도의 법정에 서신 바로 그 예수님은
언젠가 영광의 보좌에 앉으셔서
그 원수들을 그 앞에 불러 모으실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끊임없이 간직하는 자는 복된 그리스도인입니다.
지금 예수님을 믿는 자들은
고난과 연약하심에 동참하는 것을 만족해야 합니다.
하지만 이제 후로는 그렇게 주님의 고난에 동참한 자들이 주님과 더불어 영광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렇기에 주님을 따르다가
조롱과 멸시와 불신을 당해도 놀랄 일은 아닙니다.
주님도 그러셨고 주님이 영광의 자리에 가셨듯이
그렇게 주님을 따른 자들도
역시 주님과 더불어 영광의 자리에 있게 될 것입니다.
3.담대하게 증언하다.
예수님을 심문하는 자들이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야“라고 물었을 때
”너희들이 내가 그라고 말하고 있느니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메시야직과 신성에 대하여
충분하고도 담대하게 고백하신 것입니다.
이 말은 이해하기가 좀 어렵습니다.
이 말의 뜻은 ”너희들이 진리를 말했다.
나는 네게 말하듯이 하나님의 아들이다“는
뜻을 나타납니다.
예수님의 이렇게 말씀하심은
그 완악한 자들의 불신앙에 대한 모든 핑계를
하지 못하도록 그들의 입을 막으십니다.
여기어 예수님은 자신이 누구이심을 밝히며
우리들 보다는 유대인들이 더 잘 이해할 수 있도록
그들에게 말씀해 주십니다.
하지만 그렇게 그들이 들을 수 있는 말로 말해 주어도
그들에게 전혀 듣지 못하고 어떤 영향력도 없었습니다.
그것은 그들의 눈이 가리어 졌고
귀가 닫혀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주님께서 메시야이심을 선언해도
그들은 그런 예수님께 순종하고
엎드려 구원을 받아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고 무서운 죄 속에 빠져들고 말았습니다.
들어야 할 것은 듣지 못하는 것은 슬픈 일이며
보아야 할 것은 보지 못하는 것은
아주 불행한 일이 됩니다.
그렇기에 유대인들은 그들의 높은 지위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만왕의 왕이요 구원자인 예수님을 앞에 두고
그들이 한 일은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니라
멸망 길을 향해 나가기 위해
예수님을 모욕하고 조롱하는 일을 행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예수님처럼 담대하게 주장해야 합니다.
무엇을 주장해야 합니까?
예수님께서 주되심과 구원자 되심을 선언하고
주장해야 합니다.
누가 뭐라고 하던 어떤 위협과 핍박이 있어도
우리는 움츠러들지 말고 많은 사람 앞에서
담대하게 증언해야 합니다.
그저 우리 믿음의 사람들 안에서만
예수님의 주되심을 전할 것이 아니라
밖에서도 거부하는 자들 사이에서도 전해야 합니다.
우리의 주가 누구신지, 우리가 무엇을 믿고 따르고 있는지
우리의 소망이 무엇인지를 사람들에게 보여주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처럼 말할 기회가 생겼을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두려워하지 말고
담대하게 선언하고 전해야 합니다.
우리가 그렇게 솔직한 말과 용감한 증거를 행할 때
예수님도 그런 우리를 귀하게 여기실 것입니다.
그것은 주님을 따라서 행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마10:32)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무엇을 보여주고 있습니까?
참 하나님이고, 구원자이지 예수님 옆에서
예수님을 지키고 있었던 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한 일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을 때리며 조롱하며 모욕하는 일을 했습니다.
왜 그렇게 했을까요?
몰라서 그랬습니다.
왜 모를까요?
분명 예수님은 모든사람들 앞에 드러내놓고 말씀하셨고
그들에게 엘리야 선지자 이상으로
놀라운 이적과 기사를 보여주었습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그 사실을 믿었습니다.
그들은 그것을 듣지 않았을 수도 있고
들었어도 지금 자신 앞에 초라하고 연약한 모습으로 인해
들었던 말씀을 믿지 않았던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믿고 행동합니까?
내 눈에 보이는 것으로 판단하고 행동합니까?
사람들이 말하는 것으로 판단하고 행동합니까?
우리는 말씀이 우리의 판단 근거가 되어야 합니다.
분명 말씀을 알았다면 그들은 예수님이 참 선지자요
참 메시야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알았을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을
무시하고 조롱하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내 눈에 보이는 그것으로 그렇게 행합니다.
내 눈에 보이는 것으로 판단해서
연약해 보이고 나보다 부족해 보이니
모욕하고 조롱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믿는 자로서 어리석은 행동입니다.
주님께서 그를 어떻게 보시는지
말씀에서 주님께 어떻게 보라고 하셨는지를 알고
행하여야 합니다.
그래야 믿음의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보이는 것만으로
내 생각만으로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행동한다면
그것은 예수님을 모욕하고 조롱했던
지키던 사람과 같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말씀을 잘 안다는 공회의원들은
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판결을 내렸습니까?
그것은 예수님이 메시야가 되면 안되었기에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메시야가 되면
자신들은 망하기 때문에 그랬습니다.
자신 앞에 붙잡혀 있는 예수님의 말씀이 이루어지면
그들이 지금 붙잡고 있는 권력은 무너지기 때문에
그들은 예수님을 거부하고 죽이려고 합니다.
왜 이런 일을 행합니까?
그들이 믿는 것은 하나님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믿는 것은 자신 앞에 있는
예수님이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예수님은 없어져야 했고
그래서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했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지금 우리가 행하며 살고 있는 길이 어떤 길입니까?
무엇을 따라서 행동하고 있습니까?
말씀을 따르고 있습니까?
예수님이 우리의 구원이심을 믿고
예수님을 믿고 따르고 있습니까?
그러한 길이 조롱과 멸시를 받을 수도 있고
죽음의 고통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영광의 보좌에 서신 주를 보아야 합니다.
지금의 권력이나 세상의 부귀 영화가 아니라
지금의 나의 어떤 이익이나
내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라
오직 주님만을 바라봄으로
주님을 따라 사시는 복된 성도님들이 되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