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나의 모교로서 서울 신림초등학교와 서울 남서울중학교의 얘기를 했지만, 사실 두 학교에 대해 내가 '모교'란 명칭까지 부여하기가 어색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둘 다 공립학교로서 이렇다할 학교 특유의 개성은 존재하지 않았고, 그런 점에서 내 성격이나 습관에 미친 영향도 굉장히 적었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반면 내가 열일곱살 때부터 다닌 학교인 남강고등학교는 사립고등학교로서 나름대로 확고한 개성을 갖고 있었고, 10년 이상을 근속하시던 다수의 선생님들에 의해 학교의 전통 같은 것 역시도 조금이나마 형성되고 있었으므로, 내 성격이나 습관에 미친 영향도 상당히 큰 편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듯하다. 비단 그런 이유때문만이 아니라, 우리나라는 어차피 고등학교에 관계된 학연이 다른 모든 학연보다 더 우선시될 수밖에 없는 환경이므로, '모교 남강'이 앞의 두 학교보다 싫든 좋든 내게 더 많은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은 나로서 인정할 수밖에 없는 부분이 아닌가 생각된다.
물론 나의 모교 남강고등학교는 그렇게 객관적으로 보아 대단한 명문고등학교로 불릴 만한 학교는 아니었다. 경기, 서울, 경복, 광주제일, 경북, 경남, 부산, 목포고처럼 과거 빛나던 최고학교로서의 명성을 갖고 있었던 것도 아니고, 배재, 환일, 양정처럼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것도 아니었으며, 휘문, 배명, 상문, 단대부속, 영동, 중동처럼 8학군에서 날리는 학교도 아니었고, 과학고등학교나 외국어고등학교처럼 수재들만 모이는 학교도 아니었다.
더군다나 남강고등학교는 서울에서 대표적 빈민굴로 불리우는 '낙골'지역에 자리잡고 있는 학교였다. 그래서 대부분의 학생들이 극빈자층에 속했고, 그 흔한 변호사 아들이나 국회의원 아들, 재벌 아들은커녕 대기업 중역 아들 한 명조차 찾아볼래야 찾아볼 수가 없었다. 다들 고만고만한 집안의 아이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서 빨리 대학이나 입학해 샐러리맨 노릇이나 하다가 늙어죽을 꿈이나 꾸고 있었으며, 거기서 조금 더 큰 포부를 품는다고 하는 것이 고작해야 법대에 입학해서 사법고시에 합격하겠다거나 의대에 진학해서 의사가 되어보겠다는 정도가 전부였다. 미국의 유명사립대학에 유학을 나가서 세계적 엘리트가 되어보겠다거나 MBA를 따오겠다거나 서울시내 중심가에 정통 프랑스식 레스또랑을 경영해보겠다거나 하는 식의 상류사회적 마인드를 갖고 있는 애들은 단 한 명도 찾아볼 수 없었고, 나 역시 고등학교 다닐 때에는 대학진학 이후의 진로 등에 대해 전혀 감도 못 잡고 살고 있었다.
가난한 공무원집안의 아들이었던 내가 언제나 반에서 그래도 여유가 있는 집 아들 중 하나로 꼽힐 정도였으니, 얼마나 다들 빈한한 집 아이들만 모여서 공부를 했을지 대충 짐작이 갈만 할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고등학교 시절 내가 우연히 한번 들춰봤던 학급 생활기록부 부모님 직업란은 공장노동자 아니면 건설노동자라는 답변기재가 항목의 다수를 차지하고 있었으며, 점심시간에 급우들 도시락 반찬도 그린필드 일색 아니면 멸치나 싸구려 쏘세지 정도가 대종을 이루고 있었다. 내 바로 윗기수에서 전교1등을 했던 선배도 서울시청 소속 환경미화원의 아들이었으니, 당시 내 고등학교 친구들이 얼마나 어려운 집안환경에서 성장하고 있었는지는 다들 미루어 짐작하실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그 당시 남강고등학교는 조금 특이하게도 학생들에게 교복(校服)을 입히지 않고 사복(私服)을 입히고 있었는데, 그 이유도 내가 보기엔 비싼 외제 메이커 옷을 입고 학교에 올만큼 부잣집에 살고 있는 애들이 없었다는 데 기인하는 것 같았다. 복장자율화 때문에 교내에서 위화감이 발생할 염려도 없는 데다, 오히려 교복 정장을 구입하는 데 다들 크나큰 부담을 느낄 만큼 학생들의 집안 형편들도 어려웠으므로, 교복보다는 사복이 학생들 입장에서 차라리 더 나을 수가 있었던 것이다. 다른 학교에 다녔던 애들은 어처구니 없다며 다들 웃겠지만, 당시 나를 포함한 우리 남강 학생들은 그깟 싸구려 체육복 한 벌 가지고서도 그 값이 너무 비싸다고 혹시 커미션이 붙은 것 아니냐며 데모를 했을 정도로 모두들 돈문제에 민감했고, 그렇게 다들 돈 몇백원이 장난이 아닐 만큼 찢어지게 가난한 환경에서 살았다.
이런 학생들의 수준에 걸맞게 학교시설 역시도 열악하기 그지없었다. 산꼭대기를 대충 깎아서 지은 학교였기 때문에 매일마다 등산하듯 가파른 산비탈길을 올라 등교해야 했으며, 지대가 워낙 높아 '해발 200미터의 남강고원엔 산소가 부족하다'는 말이 떠돌아다녔다. 학교 입지도 서향이라 오전엔 볕조차 잘 들지 않았으며, 교실 밖 창문에는 황량한 산비탈만이 가로막혀 있거나 난곡 달동네의 을씨년스러운 풍경만이 눈 앞에 펼쳐져 있곤 했다.
무엇보다도 나를 경악시켰던 것은 그 시절의 고등학교로서는 거의 유일무이하게도 화장실이 재래식이었다는 점이었다. 그래도 우리 학생들은 그걸 참고 견딘다고 하지만, 교장선생님 이하 전 선생님들과 교직원 여러분들까지도 점잖게 양복 입으신 채 그 냄새 나는 된장덩이 위에 쪼그려 앉아 용무를 보셔야 했다는 사실은 우리 모두를 서글프게 만들고도 남을 만했다. 더구나 그 재래식 화장실의 소변 보는 곳 창문턱은 지극히 낮았는데, 그렇게 누구나 발돋움만 좀 하면 친구들의 소중한 부분들을 적나라하게 감상할 수 있었다는 사실은 다수의 학생들에게 무척 받아들이기 곤란한 일이었다. 물론 나 역시도 나중에는 내 물건을 누가 쳐다보건 말건 그냥 초탈해지는 경지에 도달하게 되었지만, 가끔은 존경하던 선생님의 그 부분도 본의 아니게 쳐다보게 되는 경험을 우리 모두가 공유하게 되었다는 사실은 피차 민망한 일이 아닐 수가 없었다.
그런 시설상의 이유로 이곳 남강고등학교에는 여자선생님이 단 한 분도 존재하시지를 않았다. 가까이에 여자고등학교나 여자중학교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고(물론 '미림여고'가 있었지만 그렇게 가까운 거리는 아니었다), 심지어는 초등학교나 유치원조차도 없었기 때문에, 당시 우리는 여섯살짜리 소녀라도 여자라면 모두 반가와서 광분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나처럼 유난히 여자를 피하는 것으로 소문나있던 인간도 그런 환경 속에서는 여자를 안 밝힐래야 안 밝힐 수가 없게 되었다. 아니 역설적으로 말하자면, 오히려 그런 환경이었기 때문에 성적인 언술에 대한 억압이 학우들간에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당시 우리 학생들에게 가장 인기를 모으던 선생님들 역시도 성(性)에 관한 농담을 가장 재미있게 잘하시던 선생님들이었고, 한편으로는 여성을 완전히 배제하는 식의 남근주의적 발언이나 '남강(南崗)은 남강(男强)이다'같은 성폭력적(?) 주장들도 더 횡행할 수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당시의 남강고등학교가 갖고 있던 가장 특이한 점은 무엇보다도 선생님들의 학생장악능력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우선 아이들 중에 소위 특권층의 자제가 거의 없다 보니 선생님들의 전제적 권력이 거의 하늘을 찌를 듯했으며, 특히 '미친 개'라는 별명을 갖고 계시던 이종천 선생님을 비롯한 여러 선생님들의 경우 학생들에게 거의 살인적인 폭력을 무차별적으로 휘두르셨기 때문에, 교내의 치안은 거의 완벽할 이만큼 바로잡혀 있었고, 수업시간도 거의 전시(戰時)를 방불케 할 만큼 군기가 아주 엄정하여 아무리 바깥에서 '한 주먹' 날리던 애들이었다 하더라도 그런 삼엄한 질서를 깨뜨릴 생각은 꿈에도 갖지 못했다. 우선 선생님들부터가 도저히 그 고학력이 믿어지지 않을 만큼 굉장히 거칠고 사나우셨기 때문에, 학생들 누구도 그들의 생존(?) 자체가 위협받는 그런 상황에서 감히 일탈을 저지를 수는 없었던 것이다.
물론 하루가 멀다 하고 빳다를 갈기거나 귀싸대기를 올리거나 발로 걷어차거나 주먹으로 얼굴을 때리는 등의 이러한 살벌한 분위기는 학생들의 자율적 인격을 왜곡시키는 것이었을 수도 있었겠지만, 의외로 당시의 학생들은 그러한 무서운 선생님들에 대해 별로 미워하는 마음을 갖지 않았던 것으로 여겨진다. 체벌의 기준이 그런대로 객관적이고 명확했으며, 누구는 봐주고 누구는 때리고 하는 식이 아니라 완전히 무차별적인 것이었기 때문에, 놀랍게도 대부분 그에 대해 이렇다할 이의제기 필요성을 느끼지 않았던 것이다.
더군다나 그러한 선생님들께서 보여주신 우직한 성실성이라는 것은 그것이 비록 가학적 조증(躁症)의 형태를 띠고 있는 것이었다 하더래도, 감히 '열정'이란 말까지 붙여도 좋을 만큼의 것이었기 때문에, 다들 희망 없는 극빈자층의 아들로서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우리 사회의 가파른 신분상승의 계단을 도저히 걸어 올라갈 수 없다고 믿고 있던 우리 남강친구들은 그 선생님들에 대해 오히려 고마운 마음까지 갖곤 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우리들 중 상당수는 정말 그러한 선생님들처럼 '미치고' 싶었으며, 그래서 그러한 선생님들께서 복도가 쩌렁쩌렁 울리도록 '왜 이리 떠드나~ 왜 이래애애애애~!!!'하고 부르짖으실 때면 짜릿한 피학적 쾌감까지 가슴 속 깊은 곳에서 느껴대곤 했던 듯하다.
이러한 서글픈 헝그리정신과 사도마조히즘적인 정숙분위기가 뒷받침되고 있었던 까닭에 당시 우리 동기들(남강고 14회)은 이미 1학년때부터 달동네 촌놈들로서는 가당치 않게도 강남 8학군의 영동고, 단대부고 등과 자웅을 겨루며 수시로 학교별 평균점수 서울시내 1위를 차지하곤 했었다. 비단 평균점수 뿐만 아니라 고득점자의 숫적 두께에 있어서도 시내 최고수준을 유지하며 적어도 성적면에 있어서는 학교의 위상을 꽤 올려놓기도 했다. 실제로 당시 뭇 고등학교를 평가하는 최고의 기준은 '서울대에 학생을 몇명 집어넣는가'에 다름 아니었는데, 그런 기준에서만 따져놓고 봤을 때 그때쯤 서울대에 매년 30~50명 정도의 학생을 입학시키고 있던 남강고등학교는 대외적으로 명문고등학교로서 전혀 손색이 없던 학교였다. 비록 남강출신의 서울대 입학생 가운데 절반 가까이는 농대생과 사범대생이었고, 특히 서울농대 학생회장 선거는 남강동문회의 맘대로 좌지우지되었다고 할 정도로 서울농대에 졸업생들을 많이 집어넣기는 했지만, 적어도 9학군에서는 대적할 학교가 없다 했을 정도로 당시의 남강고등학교는 인근에서 '입시명문'의 학교라는 평판을 얻는 학교에 속했다.
또한 다들 고만고만한 집안수준인 데다 똑같이 매맞고 똑같이 쥐어터지며 살아가고 있었기 때문에 당시 남강고등학교 내에서는 공부 잘하는 애들과 공부 잘 못하는 애들간에 이렇다할 거리감 같은 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인근 사방팔방을 아무리 둘러봐도 아파트란 게 존재하지 않아 서로의 집안형편을 아파트 평수로 비교할 수도 없었고, 당시 학생들에게 가해진 대부분의 체벌은 집단적 체벌이어서 우등생에 대한 편애 같은 것도 거의 눈에 띄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긴 워낙 선생님들의 몽둥이찜질이 압도적인 공포로 다가왔기에, 학생들 간의 시기, 경쟁, 질투 같은 것도 당장은 다급한 문제들이 아니었으며, 오히려 서로가 일단은 강철 같은 위험공동체로서 서로 위로하고 다독거리는 정신자세를 키워나가지 않을 수 없었던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물론 이렇게 학생들 간에 진한 일체감이 형성되어 있었다 하더라도, 당시의 남강고등학교가 무슨 바람직한 인성교육을 실천하던 진보적 학원이었다고는 말할 수가 없을 것이다. 어차피 우리나라 거의 모든 고등학교는 당시나 지금이나 그냥 단순한 입시학원에 불과한 것인데, 남강고등학교는 그 중에서 좀 더 효율적으로 돌아가고 있던 입시학원 정도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더구나 그러한 명성조차도 1989년부터는 전국적으로 과외가 허용되고 단과학원 수강붐이 일어나면서 급격히 쇠락해버리고 말았으니, 이는 과외교육으로 입시준비의 중심이 완전히 넘어가면서 본격적으로 돈놀음판처럼 재구성돼버린 대학입시경쟁에서 1988년까지 그래도 통할 수 있던 남강고등학교 특유의 강압적 주입식 교육이 더이상 뚫을 구멍을 찾을 수 없었던 탓이기도 했다.
하지만 적어도 1980년대 후반 그때를 기준으로 봤을 때는 남강고등학교에 '문제풀이식' 강의를 잘하시거나 컷트라인을 절묘하게 뛰어넘어서 제자들을 대학에 아슬아슬하게 잘 집어넣는 것으로 유명하시던 '진학지도의 귀재' 선생님들이 꽤 많았던 것도 분명한 사실이었다. 지금은 고인이 되신 당시 이두식 교장선생님 이하 여러 선생님들께서는 매우 탄탄하고 안정적인 시스템 속에서 '사시사철 연중무휴 타자학원(打者學院)'이라는 모토하에 학교를 매우 일사불란하고 능률적으로 잘 이끌어가고 계셨으며, 약간 권위주의적인 면은 있었지만 나름대로의 합리성과 유연성을 갖춘 채 그래도 학교조직이 원활하고 속도감 있게 운영되고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또한 어느 사립학교에서나 존재했던 자질구레한 비리, 예를 들어 재단 소유의 테니스장 공사에 학생들의 노동력을 강제동원했던 것이나, 재단 소유의 신용금고에 학생들의 저금을 반강제로 유치했던 비리 등이 남강고등학교에도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었으나, 그만하면 남강재단도 다른 사립학교 재단(예를 들어 상문고 재단 등)에 비해 나쁜 짓을 그리 심하게 저질렀던 것은 아니었다고 생각된다. 이후 남강재단 이사장 은병기씨는 부동산투기였는지 사기죄연루였는지 하여튼 그런 이유로 형사입건되어 언론에 대서특필되는 등 온갖 수모를 다 겪었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인간적으로 참 안됐다는 느낌마저 들 정도다.
사실 당시의 남강고등학교 분위기는 그 열악한 환경에도 불구하고 그만하면 웃음이 넘치고 화목하기까지 했던 것이었다. 워낙에 수업시간에 선생님들께서 강하게 조여대셨기 때문에, 쉬는 시간에는 말뚝박기니 학급노래자랑이니 권투시합(?)이니 해서 (그 당시 권투?를 무척 즐겼던 나는 '록키IV'의 소련복서와 비슷하게 생겼다는 이유로 친구들에게 '드라고'라 불리우기도 했다) 다들 미친 듯이 놀아제꼈고, 금녀의 공간이다 보니 다들 스타일이고 뭐고 상관 없이 스스로를 마구 망가뜨리면서 엽기적으로 하루하루를 보낼 수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선생님들 중에는 김차대 선생님(별명 '호구'), 박현성 선생님(별명 '마골피'), 장봉원 선생님 같은 분들께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유머감각으로 수업시간 50분을 쏜살같이 지나가게 만들어주기도 하셨는데, 이 분들께서는 강의도 무척 잘 하셨으므로 학생들에게 색다른 존경을 받기도 하셨던 것으로 기억된다.
물론 유머감각은 적지만 열정적이고 감동적인 강의를 하시던 선생님들도 여럿 계셨다. 대표적으로, 대학교 강좌보다도 더 깊이가 있었을 뿐 아니라 내용도 아주 풍부한 강의를 하셨던 국사과목 오강헌 선생님께서는 인격적으로도 매우 뛰어난 분이셔서 학생들의 많은 흠모를 받으셨고, 신명균 선생님의 국어강의, 장학연 선생님의 한문강의 역시 매우 어조가 힘이 있으면서도 풍부한 영감과 진지한 사색거리를 던져주는 명강의였다고 생각된다. 또한 강병석 선생님(별명 '쫌팽이')의 수학강의 역시도 무척 깔끔하고 충실했다고 여겨지며, 정기태 선생님의 위트 있던 영어강의나 지금은 고인이 되신 신윤범 선생님(별명 '알리')의 구수하던 지리강의 역시도 지금까지 잊을 수 없는 좋은 강의들이었다고 생각된다. 또한 대부분의 강의들이 서민적이고 남성적인 일상언어(?)로 이루어졌다는 점 역시도, 남강출신 학생들의 언어습관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던 것으로 생각되곤 한다.
이제 10여년의 시간이 지난 지금, 당시의 남강고등학교 시절을 가만히 돌이켜보면, 나는 한도 끝도 없이 위를 향해 펼쳐지던 그 경사진 등교길의 안개낀 새벽녘을 어슴프레하게 떠올리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몇년이 지난 후 다시 그 길을 올랐을 때 숨이 차서 중간에 몇번이나 쉬어야 했을 정도로 높고 가파르던, 그 높고도 멀던 남강고등학교의 등교길. 그때 3년을 하루같이 등산을 했던 덕분인지 나는 군대시절 적어도 가파른 사격장에서의 선착순구보만큼은 1등을 수시로 차지할 수 있었고, 지금도 내 건강의 절반 이상은 그때의 새벽등산(?)으로 다져진 것이 아닌가 생각되기도 한다.
그 밖에도 밤늦게 야간자율학습을 마치고 한밤중에 귀가할 때면 교문까지 내려가는 길 양 옆으로 희미하게 켜져있던 가로등들, 체육복이나 교련복을 입고 서있으면 눈 앞에 모래바람이 휘몰아치곤 하던 운동장, 메탈밴드들의 흉내를 즐겨 내던 동기들, 이런 모든 것들은 내 눈에 익어있는 만큼이나 내게 슬프고도 조용한 기쁨이 되어주며, 그런 일들을 추억할 때마다 나는 그동안 내 의식 속에서 도망쳐버렸던 수많은 것들이 다시 내 마음 속으로 가만히 되돌아오게 되는 것을 느끼곤 한다.
사실 과거의 것이 아무리 전부 죽어 없어진다 하더라도 내가 이곳 남강고등학교를 쉽게 내 머리 속에서 지워버릴 수는 없음이 분명할 것이다. 그것은 내가 아무리 자만과 허영 속에 빠져들어가게 된다 하더라도, 그 시절 그곳 신림동과 '낙골'에게서 받았던 수많은 환경적 영향들을 내 평생토록 거부할 수는 없는 것과 마찬가지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당시의 남강고등학교는 내게 너무나 좁은 공간이었고, 그곳에서 보낸 3년의 시간도 생각해보면 내게 너무나 짧은 순간에 지나지 않았다. 어차피 과거만 뒤돌아보고 살아선 안 되는 인간으로서 가끔씩 내가 이곳 남강고등학교의 정든 모습을 내 머리 속에서 완전히 지워버리려 노력하는 것도 그런 점에서는 너무나 당연한 일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첫댓글임정묵, 좋은글 잘 읽었다. 동문회와 지리적으로 떨어져 있다보니 내 머리속에는 네 대학교때 모습 밖에는 떠올려 지질 않는다. 글 속에 나온 선생님들의 모습도 비록 시간은 다를지 모르지만 선배님/동기/후배들 모두의 머리속에 네 인상처럼 아름답게 각인되 있으리라 생각 된다. 학교에 한 번 가보고 싶다.
첫댓글 임정묵, 좋은글 잘 읽었다. 동문회와 지리적으로 떨어져 있다보니 내 머리속에는 네 대학교때 모습 밖에는 떠올려 지질 않는다. 글 속에 나온 선생님들의 모습도 비록 시간은 다를지 모르지만 선배님/동기/후배들 모두의 머리속에 네 인상처럼 아름답게 각인되 있으리라 생각 된다. 학교에 한 번 가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