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 해남군 해리라는 곳에서 태어났어. 바닷몰이라고도 했제. 내가 5남매 중 맏이인데 친정아버지가 6형제가 모두 아들만 두어서 딸을 낳았어도 겁나게 귀히 여겼어. 큰댁은 말할 것도 없이 부자고 우리집도 저금(분가)났지만 부잣집축에 들었제. 클 때는 별 어려움 없었어. 동생들 밥 해주고 바느질도 하고 그랬어. 아버지가 나를 공부시킬라고 했어. 그래도 나는 공부만 헐라고 그라면 똥물까지 다 넘어오는 것 같고 머리가 아퍼서 공부를 못했어.
남편하고는 열아홉에 만났어. 그때 남편은 스물여섯이드만. 목포에서 고무신 만드는 공장 다니고 있었어. 원래 고향은 전북 고창군 해리인디 거기서 살기 어려우니까 목포로 와서 살고 있었대. 이웃집에 살고 있는 재당고모가 소개했어. 위아랫집이지만 서로 왕래를 안한께 속사정까지는 몰랐지만 그 사람들 행실이 하도 얌전하고 남편이 착실하게 보여서 중매를 했제.
시집 와서 본께 형편 없어. 회사에서 돈 빌려다가 장가왔더라고. 또 시어머니가 만삭이어. 시집간지 석달만에 시누이를 내 손으로 받았어. 시어머니가 애기 난다고 한께 어찌 떨리고 겁이 나든지, 잘못되면 어쩔까 싶기도 허고. 그런데 내 손으로 받았던 그 시누는 죽었어.
새각시라고 해도 새각시 노릇을 못해봤어. 시집밥이라고는 꼭 한 달간 공밥 먹었제. 집이 기어들어가고 기어나오는 오두막집이어. 방도 한칸밖에 없어 시부모, 시동생들이랑 같이 잤어. 그래서 부엌에서도 자고 마당에서도 잤어. 방 얻을 돈도 없었지만 내가 못 얻게 했어. 빚지고 방을 얻어 살면 뭐 할 것이어. 한꼬(같이) 고생하자고 했제.
한 달간 부엌 살림 하다가 남편따라 같이 고무신 공장에 다녔어. 삼년을 꼬박 다녔제. 그래도 월급 한 푼 못받았어. 하루 일당이 1환50전이거든. 근디 남편 빚이 만환이라 월급에서 제하고 제하고 그런께 환장허겄드만. 그때 쌀 한 되가 50전이었으니까 월급은 많은 편이었제. 밥 싸가지고 첫새벽에 나가. 한겨울에는 고무가 꼿꼿이 서. 얼어서. 그것을 잘라서 고무신을 만들면 남자들이 가져다 솥에다가 쪘제. 남편은 그 일을 했어.
삼 년 다니면서 그만 두기 전 석 달인가 월급 받았어. 빚 다 갚으고. 그놈 받아서 양식 한 가마니 팔고, 양식을 한 말도 못팔고 살다가 양식 한가마니 판께 부자 같드만, 나머지는 시어머니 드렸어. 시어머니가 "니가 욕보고(고생하고) 벌었은께 옷이나 니 맘에 든 것 하나 해입어라" 그래. 그래도 내 자작으로 못해 입고 시어머니 모시고 가서 해있었어.
그렇게 어렵게 산께 남편은 사랑하고자 싸도 나는 사랑할 줄도 몰랐어. 비가 오는 날에는 남편은 꼭 우산 하나만 사. 같이 쓰고 갈라고. 그래도 한 오리 길 되는 거리를 그 비 다 맞고 걸어 갔어. 클 때는 이런 고생 안허고 살았는디 이런 고생을 하는가 싶은 게 서러워 죽겄더라구.
빚 다 갚은께 남편이 고향에 가서 장사를 헐란다고 해. 굶어 죽어도 고향에 가서 굶어 죽는다고. 우선 자기만 먼저 가서 기반을 닦은 다음 식구들을 델러 온다고 해. 그해 첫딸을 낳았는디 시집 온지 햇수로 삼년만이었제. 팔월에 애 낳고 동짓달에 남편을 찾아간다고 나섰어. 길을 모른께 시부(시아버지)랑 같이 갔제. 차비가 없어 시집 올 때 농지기 해왔던 옷 석 죽 저당 잡혀서 시어머니 양식, 나무 사주고 차비 마련했지. 그것도 함평까지 올 차비만.
옛날에는 미영 놓아서 농지기를 해갖고 시집갔어. 나는 열 죽 해갔제. 속치마면 속치마 한 죽, 저고리면 저고리 한죽, 그런께 겁나. 목포서 함평까지는 차타고 왔지만 거기서부터는 걸었어. 거리 거리 오면서 얻어 먹다시피 했제. 산길로 재를 넘어서 온께 조그만 솔나무는 끝터리만 뾰쪽뾰쪽 나풀나풀하제 보이질 안해. 눈에 쌓여 갖고. 꾸리만한 것을 업고 그눈길을 걸어온께 누비바지가 다 닳아져 버렸어.
걸어서 공음(전북 고창군)에 사는 시작은할매집에 들어갔제. 들어간께 야단이 났어. 무슨 난리 났다고 이 눈 속에 오냐고. 그래도 남편 있는데로 오고 싶어서 왔제. 마침 남편이 거기를 왔어. 점심상을 차리는디 나한테 미안하니까 당숙모를 모시고 밖으로 나가더니 나무하고 양식하고 팔아줄테니까, 시한(겨울)만 데리고 있어달라고 하드만. 그런께 당숙모가 야단야단이 났어.
"이 눈 속에 니가 나 농사 질 때 모폭 하나라도 꽂아 주었간디 여편네 데려다가 여기다가 둘라고 하냐."
남편이 민망한께 점심상 받아놓고도 방에 들어오지도 못하고 그냥 가 벼렸어. 나도 시부한테 그냥 가자고 그랬제.
"그 양반 성질이 그런께 이해허고 오늘 저녁 여기서 자고 내일 가자."
어른이 허시는 말이라 참고 얻어 먹으러 왔은께 어쩔 것이어. 꾹 참고 밥을 먹기는 먹는데 그것이 목구멍으로 넘어가겄소. 남편도 없는 판에. 밥을 어떻게 먹었는지 몰라. 상을 물리니까 가지고 나가서 설거지를 깨끗이 해 놓고 들어온께 당신이 부엌에 가서 조사해.
"어디서 며느리 하나는 잘 데려왔네. 저런 며느리를 어디서 도둑질 해 왔소?"
저 양반이 손아래인디 시부한테 그런다 싶어서 어떻게 해서든지 잘 살아야겠다. 오늘 이 박대를 잊지 않으리라 다짐했지.
"당숙모, 마람 석 장하고 막가지 시(세)개만 주시오."
"뭐 할라고?"
"동구(일가)간에게 피해 안주고 어디 어덕 밑이라도 막치고 둘이 살라요."
"오메, 저것 보소, 아조 아구똥하네."
남편 찾아 왔어도 잘 곳이 없어. 넘의 일 해주고 그집에서 하루 자다가 이집에서 하루 자다가 했제. 하루는 디딜방아를 찧러 가자고 해. 애기 봐줄 사람이 없어 방에다 두고 밖으로 쇠(열쇠) 채우고 일하러 갔제. 한나절내 방아 찧고 온께 시상에 애기가 온 방을 삥삥 돌아갖고 바람벽에다 어떻게나 미닥질 하면서 울었던지 머리가 빨게. 속이 상해서 애기를 안고 얼마나 울었는지 몰라. 그런께 옆에 있는 사람이 그래.
"시골서 살라고 왔담서 애기 우는 것이 그렇게 안타깝고 서러워서 어찌게 살라고 그래. 촌에서 살라면 방에다 밥바구니 놓아두고 가면 혼자 밥 먹다 울다 자다 하다가 그 속에 들어가 똥도 싸놓고 그런 것이어."
그렇게 남의 집으로 떠돌다가 음력 섣달 초하룻날 방 하나를 세 얻었어. 처음 살림살이라고 붙이고 살았제. 그때부터는 살림 어려운 줄 몰랐어. 품이라도 팔아서 먹고 남편이 각심하고 어찌 일을 하던지 살림 붙인지 삼 년만에 논 닷 마지기, 밭 서 마지기를 샀어. 목포에서 시부모 모셔다 살림을 합쳐 다른 집으로 이사했제. 거기서 또 논 열닷 마지기, 밭 닷마지기, 우아래 상하채 집을 샀어. 조금씩 조금씩 살림이 불어갔제. 그렇게 재미재미하고 살라고 한께 남편이 이젠 바람을 피워.
그때 남편은 해리(전북 고창군) 읍내에서 담배 하치장을 했어. 다섯면에 나누어줄 담배 창고를 남편이 운영했제. 가게, 정류소, 여관까지 겸업이었어. 바쁜께 집에 올 시간도 없고 내가 딸을 둘 낳고 아들을 못 낳고 있었은께 아들 난다고 바람을 피우기 시작한 거여. 내 속은 썩어도 남들한테 우세 안 할라고 쌈하고 그러진 안했어. 시부모들은 자식이 바람 피워도 다 당신 자식 똑똑헌게 바람 핀다 하드만.
내가 아들 다섯, 딸 둘을 두었어. 그중 아들 셋을 잃었제. 딸 둘 낳고 아들을 본께 오죽 귀허겄어. 큰놈이 여섯 살 되던 해, 섣달 그믐이었제. 섣달 대목이라 방애 찧러 간다고 한께 지가 따라간다고 해. 그래서 데리고 갔제. 근디 쑥떡 고물 헐라고 콩 볶은 것을 한쪽 주머니에 넣고 한쪽에는 쌀을 넣고 먹음서 따라 오다가 고샅에 사이나(꿩 잡는약)가 떨어져 있었는디 지 콩이 들린지 알고 주워먹어 버렸어. 그래서 느닷없이 죽었제. 바로 밑에 놈은 시름시름 아프더만 죽고, 이년만에 아들 셋을 잃어부렀어. 서러운 것, 서러운 것 해도 자식 죽은 것이 제일 서러워.
그래도 남편이랑 같이 살면서 병원도 데리고 다니고 약도 써보고 죽었으면 덜 서러운디 홀어미 자식만치로 혼자 있다가 자식 잃었지, 시부모들은 자식 하나도 제대로 못 키운다고 구박하지….
시모(시어머니)가 어디서 들으셨는지 다시 손자를 몰라면 죽은 자식을 화장시켜야 한다는 것이어. 한번 죽은 것도 가슴이 무너지는디 죽은 자식 다시 파서 화장한다니, 그래도 내 의견은 아무 소용이 없어. 죽은지 석 달만에 다시 파서 화장시켰어. 그런 뒤에 얻은 자식이 지금 큰놈하고 둘째놈이어. 어렵게 얻은 자식이라 별것이나 된지 알고 길렀어.
남편은 무슨 병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늘 머리가 아프다고 했어. 해리 병원 의사를 끼고 있었지만 겨울된께 더 심해졌는가비여. 나는 안 가본께 몰랐제. 음력 십일월 스무이튿날이 시아버지 생신이어. 시부가 남편한테 가 계신께 음식을 해갖고 간께 아무 정신 없이 사람도 몰라봐. 시부가 이러다간 사람 버리겠다고 빨리 큰 병원으로 옮기자고 해서 시부랑 같이 남편 옆구리 찌고 전주 예수병원까지 갔어.
병원에서도 이렇게 만삭된 사람 뭐하러 데리고 왔냐고 가라고만 해. 그래도 좌우당간 진찰이나 받자고 했어. 사진을 다 찍고 그러더니 입원을 허라고 해. 사층인가 독방에다가 입원을 시켰지. 저녁이 된께 밥이 들어와. 시부가 남편은 먹이지 말라고 해. 못쓴다고. 그래도 밥하고 양지기 하고 숟가락을 내려놓았어. 새벽녘쯤 그 밥을 양지기에다 물 좀 붓고 깡깡 이겨서 떠주었어. 훌쩍훌쩍 받아먹더니 정신을 차린 것 같더라고. 그러면서 여기가 어디냐고 물어. 그때가 새벽 네시였어. 예수병원이라고 했더니 어떻게 날 데려왔냐면서 손을 틀어잡고 울어싸.
"내가 당신 못 헐일 시켜서 죄닦음 할라고 이런갑다."
주무시는 시부를 보고는 이래.
"아버지, 아버지, 아버지 나 죽으면 어찌 살라우?"
"너를 살릴라고 왔는디 죽겄냐? 안 죽는다."
"아버지 내 예감에는 내가 죽을성 싶은디 나 죽으면 누가 아버지 야편(아편) 해드린다우?"
그러면서 자꾸 울어. 한참을 그러더만 나랑 이야기하고 싶었던지,
"아버지, 쇠고기 다쳐서, 죽을 먹으면 좋겄어라우."
시부가 죽을 쑤러 시내에 가서 8시에 오셨어. 그동안에 이야기를 해싸. 고무신 공장에 다니면서 고생시켰던 이야기며 저녁에는 잘 데가 없어서 부엌에 거적 깔고 잤던 일이며, 평생 살면서 이 네시간 동안 제일 다정스럽게 이야기 헌 것 같애. 입원한지 스무날만에 돌아갔는디 겨울철에는 길쌈해서 일꾼들 옷 해 입혀야 하니까 입원한 뒤로 한번도 올라오질 못했어. 그때 말해보고 영 갈라서 버렸제. 어른들도 병원에 못 오게 하고. 여편네 보면은 더 병이 난다고.
남편이 없은께 살길이 막막해. 바람은 피웠지만 집안에 무슨 일 있으면 돈 가져와서 일꾼 품삯도 주고 의지가 되었는디 그 많은 농사를 지을란께 힘에 부쳐. 그때 내 나이 서른일곱이었어. 그나마 시부모들도 시름시름 앓더만 두 분 다 돌아가셨어. 큰놈이 국민학교 이학년인데 그렇게 어른들이 돌아가셔버리니까 정말 농사를 못 짓겄어. 그리고 큰놈이 영리해서 공부를 잘해. 시골에서 썩기는 아까운 놈이라고. 아들을 공부 시킬라면 도시로 나가라고 해. 마침 사촌시아제가 전주에서 살고 있었어. 그래서 다 정리해서 전주에다 집 한 채 사서 나왔제. 그때부터 이제껏 하숙생 치면서 살아왔어.
시골에서는 영리하다는 애기가 도시로 온게 중간밖에 안가. 그런께 밤낮 앉아서 파드만 반년만에 일등을 차지했어. 그 뒤로 계속 일등만 했제. 등록금은 제때 다 주었지만 그래도 교복 한번 제대로 못 맞추어 주었어. 무릎이 닳아져서 반질반질 해. 검정천을 대고 몇 번 박음질해서 입고 그랬어. 집을 하나 갖고는 있었지만 그때 하숙비가 한 달에 쌀 서말이어. 그나마 방학 때는 집으로 가버리니까 먹고 살 것이 없어. 그래서 돼지를 길렀제.
사촌시아제 하고 우아랫집 살았는디 시아제가 돼지를 스무 마리 키웠거든. 같은 우리에다 우리 돼지 한 마리 키우면서 그 스무 마리 돼지를 내가 거뒀어. 새벽이면 일어나 쇠지리(소주 내린 찌꺼기)를 푸러 가. 인공 때는 이것을 사람도 먹었어. 너도나도 쇠지리를 푸러 오니까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다가 뚝하고 터져나오면 그 뜨거운 것에 벼락 맞기도 해. 사람에 밀려 못 퍼오는 날에는 난리가 나. 시아제가 나는 못 때리고 돼지 우리를 작대기로 패면서 화풀이를 해. 그래도 그 사람 덕분에 와서 사는지라 암말 못하고 당하고 있어.
낮에는 밭 매러 가. 하숙생은 허물 없은께 타일러서 아침에 밥 해주고 밭을 매러 가면 넘보다 더 매. 저녁밥 때문에 넘보다 일찍 와야 한께 더 빨리 매제.
하루는 밭을 매고 온께 이웃 부안댁이 머리 치렁치렁 갖고 다니지 밀고 비어서 애기들 연필이라도 사주라고 해. 그때는 머리 시세가 좋았거든 알량한 머리 드먼드먼 솎아가지고 두 것들 샤쓰 하나 사 입히고 연필값 주고 했어. 작은 머리칼 비어내고 나니까 낭자가 엄지손가락만하데. 그렇게라도 해서 런닝구 사서 두 것들 입혀 학교 보낸께 어떻게나 재미질 것이어. 참말로 거름 주어서 가꿀 것 같으면 가꿨으면 좋겄어.
근디 큰놈은 공부를 그렇게 파고해싸도 작은놈은 공부를 안해. 학교에 갔다 오면 책가방을 마루에다 훌떡 땡게(던져) 놓고 신주머니만 빼가지고 나가. 뭐하러 가냐 그러먼 가만 있어, 어디 좀 갔다 올게 하고 부리나케 나가.
그참에 버드나무집이 하드장시 했어. 하드통 하나 들쳐메고 여기서는 우리 학생들 볼까봐 못팔고 팔복동으로 간데. 나는 하드장시 한 줄도 몰랐어. 어디 가서 재앙 부리고 행여나 못쓸 데로 빠지까봐 애가 터지게 기다리고 있으면 신주머니를 내둘내둘 함서 와. 얼굴은 땀을 흘러서 호랭이 바둑이 되고 어깨는 하드통 짊어진께 축 쳐져 있어. 하드 팔아서 값 치르고 남은 것 가지고 저는 좋아서 내둘거리고 오는 참이어.
오매, 깡패가 도둑질 해오라고 해서 도둑질 해다 준께 돈조께 주었는가 싶어서 가슴이 두근두근해 죽겄어. 지 성이,
"어디 가서 그러고 오냐?"
"걱정 말어, 넘 속 안 태울 것인께 걱정 말어."
나도 매를 들고 으름장을 놓제. 그러면 신주머니에서 10원짜리를 방바닥에다 와르르 쏟아놔.
"쌀 팔아, 쌀 팔아. 쌀 팔아서 성 쌀밥 해줘."
"니까진 것이 어디서 도둑질해온 돈으로 판 쌀 나는 안 먹을란다."
"도둑질, 좋아하네, 뼈끝이 녹아난 돈이어. 걱정말어. 엄마, 샘표간장 사서 해줘."
큰놈이 장만 있으면 밥을 잘 먹어. 그때는 장 한 병도 살 기력이 못된께 그것이 작은놈한테 못내 마음이 쓰였던 모양이어. 쌀을 팔아서 보리쌀 한 되에다 쌀 두어 주먹 얹어서 큰놈 두어 주걱 퍼주고 도시락 싸주고, 저하고 나하고는 보리밥 먹어도 " 어찌 내가 벌어다 주었는디 성만 주냐"는 소리 안해. 한번은 그래.
"성, 성이 내 공부꺼정 다해. 나는 돈 벌랑께 성이 내 공부꺼정 다해서 성 하나 잘되아불먼 그만이어."
"내 속에 든 것을 니가 어떻게 아냐. 너는 너대로 해야지."
"못허겄는디, 골치 아파 못허겄어. 성이 내 공부꺼정 다 혀. 미국꺼정 학교가. 그러면 내 공부 다 되겄는가."
작은놈은 그렇게 공부를 안 헐라고 해.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안되겠다 싶어 서비스 공장으로 보냈어. 차 정비공장. 거기서 삼 년을 꾸준히 있었어. 중학교 다닌 요량으로 돈 한 푼 안 받고 기술을 배웠제. 공부는 안 헐라고 한 놈이 그런 기술 하나는 얼른얼른 배워. 큰놈은 순전히 도서관에서만 살은께 주위에서 그 아들은 없는 줄 알았어. 서울대에 합격했다고 한께 또 아들이 있었냐고 놀래.
대학에 들어가서는 아르바이트 하면서 다녔어. 등록금은 여기서 준비했지만 숙식은 거의 혼자 해결하다시피 했어. 둘째놈은 정비공장에서 몇 년 동안 일하드만 이젠 기술자 다 되었어. 열아홉살에 운전면허증을 땄어. 그때부터 운전하고 다니면서 조금만 먹을 것 생겨도 집으로 가져오고 월급타는 족족 나를 갖다줘. 지 성한테 편지가 오면 성 돈 급한께 무슨돈이든지 빨리 보내라고 지가 더 발버둥치고.
작은놈이 스물한 살 되던 해 집을 팔아서 중고차 하나 사줬어. 못 갈쳤은께 니 앞길 이젠 그 길로 나가라고. 큰놈도 돈은 없어도 자기가 배우겠다는 욕심 하나는 꺾지 않고 공부해서 지금은 공학박사여. 작은놈도 개인택시 하나 사가지고 돈 잘 벌고 집도 있고 웬만하게 살어.
자식들이 자기들이랑 같이 살자고 해도 안가. 집도 보다시피 허름해. 전셋집이여. 그때 집 팔고 이제껏 내 집 못 가져봤어. 그래도 지금이 제일 편해. 나가 놀고 싶으면 놀고 가을에는 도토리도 주으러 다니고 밤도 주으러 다니고 생강도 캐러 다니고. 내가 풀기가 없어 밥을 못해 먹을 때 자식한테 의탁하지 지금은 싫어. 동네 노인당처럼 동네 노인들이 놀러와서 장구도 치고 신세 한탄도 하고 그런대로 재미있어.
그래도 한밤중 잠을 깨면 못 이룰 때가 많아. 내 자식은 잠도 못자고 이시간에 거리를 누비고 다닐텐데 하고 생각허먼 뼈마디가 시려. 큰놈은 걱정이 안되는디 둘째 놈을 생각하면 평생 마음이 아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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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꼽친구에다만 띄울려고 했는데,
내가 어제부터 이걸 타이프를 쳤는데 아껍잖어
여러 할머니들 얘기이면서 우리가 알고 있는
유명하신 할머니들의 얘기도 있단다.
독서타령만 하지말고
서점에서 구입해서 보시길....
명혜한테 보채면 명혜맘이 약해져서 안돼.
그리고 책 많이 팔리면 즈그 출판사 홍보부장
자리 하나 나한테 안줄까?
첫댓글우리 어머님들 얘기구나, 누군지 몰라도 너무 고맙네 이런 내용을 채록해서 남겨주시다니...... 항상 마음 속에 간직하고 살면서 형편닿는대로 내 할 도리 하면서 살아야지. 시골에 홀로 계시는 울 아부지도 지금 너무 걸린다. 나같이 못 된 자슥이 있으까....... 눈물이 나네
첫댓글 우리 어머님들 얘기구나, 누군지 몰라도 너무 고맙네 이런 내용을 채록해서 남겨주시다니...... 항상 마음 속에 간직하고 살면서 형편닿는대로 내 할 도리 하면서 살아야지. 시골에 홀로 계시는 울 아부지도 지금 너무 걸린다. 나같이 못 된 자슥이 있으까....... 눈물이 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