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의 하나님 됨을 부끄러워하지 않으심 (히 11:16하)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히 11:16).
이 구절은 히브리서 2:11의 병행구절입니다. “거룩하게 하시는 이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한 근원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이 두 구절은 함께 살펴보아야 합니다.
히브리서는
“세상 모든 것이 우리를 대적하는 상황에서 어떻게 승리하며 살 것인가?”
그중 한 가지는 주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의 관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기를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히 2:11).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셔서 그 모든 일을 하신 것은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이끄시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는 중보자이실 뿐,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아버지께 나아갑니다.
주님이 우리를 형제라 부르길 부끄러워하지 않으신다는 진술에서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길 부끄러워하지 않으신다는 11:16의 진술로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아벨이나 에녹이나 노아나 아브라함이나 모세나 다윗이나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다른 사람들처럼 이길 수 있을까요?
그 비결이 대체 무엇일까요?
모든 사람이 기꺼이 내놓은 대답은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믿음의 중요성은 하나님을 믿게 하는데 있습니다.
하나님께로 인도하며 하나님과 관계를 맺게 하는 데 있습니다.
믿음을 통해 우리를 만나 주시는 하나님께 집중해야 합니다.
이들의 중요한 특징은 믿음이 아니라 하나님과 이들의 관계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관계란 정확히 어떤 것일까요?
고린도후서 6:14-18이 이 진리를 놀랍게 설명해 줍니다.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둠이 어찌 사귀며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들 가운데 거하며 두루 행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되리라. 그러므로 너희는 그들 중에서 나와서 따로 있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 내가 너희를 영접하여 너희에게 아버지가 되고 너희는 내게 자녀가 되리라. 전능하신 주의 말씀이니라.”
하나님은 자기 백성과 특별한 관계를 맺으십니다.
모든 사람과 한데 묶으신 것이 아닙니다. 불경건한 자들과는 한데 묶지 않으시며 언약의 관계를 맺지 않으십니다.
출애굽기 3장에는 모세를 부르시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처음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모세는 두려워하며 떨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모세에게 자신을 “아브라함의 하나님”으로 소개하셨습니다.
단순히 “하나님”으로 소개하지 않고 아브라함과 묶어서 소개하셨습니다.
“나는 ……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출 3:6). 하나님은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길 부끄러워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길 부끄러워하지 않으신다는 말씀을 하나님 편에서 보면 이것입니다.
“내가 그들 가운데 거하며 두루 행하여”(고후 6:16).
요한복음 14장에 나오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가장 놀라운 말씀과 아주 비슷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라고 하셨습니다.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가서 거처를 그와 함께 하리라”(21, 23절).
그가 우리 안에 들어오시며 우리 삶 속에 들어오신다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거처를 정하십니다.
우리에게 자신의 이름을 두십니다.
우리 안에 거하십니다. 우리를 살아계신 하나님의 성전으로 삼으십니다. 하나님은 만물을 소유하고 계시지만,
자기 백성은 특별한 방식으로 소유하시며 특별한 관심을 기울이십니다.
전에 없던 방식으로, 다른 사람들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방식으로 우리 삶에 개입하십니다.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며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는” 분입니다(딤전 6:16). 그러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을 알 때 우리 안으로 들어오십니다. 우리 안에 거하시며 우리와 동행하십니다.
에베소서 2:13에 나오는 바울의 말처럼 전에 멀리 있던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집니다.
하나님과 친밀하고 인격적인 관계를 맺으면
그가 나의 하나님이시라는 확신,
그가 나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길 부끄러워하지 않으신다는 절대적 확신이 생깁니다.
로마서 8:16은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신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않으실 뿐 아니라 그 사실을 친히 우리에게 알려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가 주신 모든 약속과 맹세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는 자신의 특별한 백성에게만 이 약속을 주시며, 예비하신 것을 공급해 주십니다. 세상은 이에 대해 아는 바가 없습니다.
그러나 저와 여러분은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 이는 너희로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9:8).
사도 바울이 빌립보 교인들에게 한 말도 들어 보십시오.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1-13).
사도는 친절하게 선물을 보내 준 빌립보 교인들에게 감사를 표하면서도 “내가 죄수로 갇혀 있지만 아무 부족함이 없다고 말할 수 있어 기쁘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너희도 미래를 생각하며 걱정할 필요가 없다”라고 덧붙입니다.
왜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까?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실” 것이기 때문입니다(빌 4:19). “나의 하나님”이라는 표현에 주목하십시오.
여러분은 온 우주의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독차지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이 여러분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길 부끄러워하지 않으시며 여러분과 자신을 한데 묶으셨다는 사실, 그가 약속하신 모든 복이 여러분에게 해당된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입니다.
주님은 하나님이 여러분과 이런 관계를 맺으셨기에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다”고 하셨습니다(마 10:30).
그는 약속하십니다. “내가 결코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히 13:5).
이사야 46:3-4에는 또 다른 영광스러운 진술이 나옵니다.
아무 자격 없는 옛 백성에게 하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야곱의 집이여 이스라엘 집에 남은 모든 자여 내게 들을지어다. 배에서 태어남으로부터 내게 안겼고 태에서 남으로부터 내게 업힌 너희여, 너희가 노년에 이르기까지 내가 그리하겠고 백발이 되기까지 내가 너희를 품을 것이라. 내가 지었은즉 내가 업을 것이요 내가 품고 구하여 내리라.”
고린도후서에 나오는 “내가 너희를 영접하여”라는 은혜로운 말씀도 보십시오(고후 6:17).
그렇다면 하나님이 우리를 자기 것이라 부르길 부끄러워하지 않으신다는 말이 우리 편에서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요?
그를 무한히 신뢰한다는 것입니다.
그가 우리를 홀로 버려두지 않으심을 안다는 것입니다.
항상 품에 보살펴 주심을 안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 자체는 이해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일하고 계신다는 시실과 그가 우리의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은 압니다.
“여호와께서 그의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신다”는 사실과(시 127:2)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이는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신다”는 사실을 압니다(시 121:4).
그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항상 우리에 대한 의무를 지키시며 우리를 보호하시고 지켜보십니다.
그러니 언제 어디서든 그에게 나아가야 합니다.
“여호와의 이름은 견고한 망대라. 의인은 그리로 달려가서 안전함을 얻느니라”(잠 18:10).
우리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길 부끄러워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은 “전능하신 주”이십니다.
히브리서 13:6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담대히 말하되 주는 나를 돕는 이시니 내가 무서워하지 아니하겠노라. 사람이 내게 어찌 하리요?”
하나님은 우리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길 부끄러워하지 않으시는 증거로 한 성을 예비하셨습니다. 그 성이 무엇입니까?
장차 올 세상입니다. 그리스도인의 큰 소망이 그 성에 있습니다. “의가 있는 곳인 새 하늘과 새 땅”(벧후 3:13).
우리가 살펴보고 있는 16절은 일종의 요약문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의 영웅들에 대해 이야기하다가 아브라함을 다루는 부분에 이르러 이렇게 말합니다.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히 11:13). 이들은 모두 하나님께 전적으로 복종했습니다.
이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을 뿐 아니라 그 믿음의 증거를 보여주었습니다. 성경은 이들이 “더 나은 본향”을 추구했으며(히 11:16), “터가 있는 성을 바랐다”고(히 11:10) 말합니다.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를 떠나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듯이, 더 이상 세상을 위해 살지 않았습니다. 세상에 살았지만 세상을 위해 살지 않았습니다. 세상을 등지고 더 나은 본향을 추구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가 사용하는 용어에 주목하십시오.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히 11:13).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 세상을 더 이상 바라지 않는 사람들이며, 세상을 위해 살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고대하는 곳은 하나님의 성입니다. 더 나은 땅입니다.
우리 눈은 장차 올 영광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했습니다(히 11:13). 우리도 그래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이면서 동시에 세상 사람일 수는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