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월 6일 기독교회관에서 "죄책고백 세미나- 국가 폭력과 한국기독교 "가 열렸다.
세미나 명칭이 "죄책고백 세미나" 라니? 무슨 세미나 이름이 이런 것이 다 있나?
죄에 대한 책임을 고백하려면 조용히 할 것이지 무슨 세미나까지 한다는 말이냐?
사연은 이렇다.
도무지 뭐가 뭔지를 제대로 알 리가 없는 윤 군이 일으킨 역사전쟁 때문에 지금 소리 없는 아우성이다.
박정희를 들먹이는 것까지는 “그러려니…” 했는데 이승만까지 들먹이는 것은 선전포고가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현대사의 대부분의 국가폭력은 이승만에 의해 저질러졌기 때문에 이승만의 부활은 각성된 한국인에게는 악몽에 다름이 없는 것이다.
4. 19 혁명으로 쫒겨난 이승만은 1960~990년대는 '기억처벌'(memory punishment)의 시대였다. 그런데 1995년 조선일보에 특집기획을 통해 허문도가 이승만에 대한 재평가를 요청한 이래 보수 진영에서는 이승만 부활을 위한 다각도로 여러 번의 시도가 있었으나 안타깝지 않게 성공할 수가 없었다.
한 때 코미디언 서세원이 회사 이름도 오글거리는 애국프로덕션이란 회사를 만들어 이승만 영화제작 목표로 애국보수주의자들의 열광적인 지지 속에 제작발표회를 성대하게 막을 올렸으니 서세원이 부부간의 권투시합을 벌인 것이 문제가 되어 영화제작 작업이 중단된 일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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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그들은 왜 애처럽게 이승만을 목매어 부르짖을까? 그 배경에는 내세울 것이 없어 뭔가 허전한 보수세력에게 정치적 의미 보다는 '국부(國父)'라는 조작된 심리적 의미가 작용하고 있을 것이다.
요즘처럼 선행학습이 아니라 후행학습으로 한국근대사를 복습할 수 밖에 없는 분위기에서 일단의 연구자들이 별난 세미나를 연 것이다. 해방 이후 한국현대사에서 나타났던 국가폭력의 과정에서 교회 및 기독교인들이 가담했던 것을 고백하고 회개하는 세미나인 것이다.
세미나에서 국가가 폭력을 저지를 때 기독교가 어떻게 국가폭력과 범죄에 부역하고 침묵 방관이 아니라 앞장 섰는지를 낱낱히 밝혔다.
어떤 이들에게는 모르는게 약이고 어떤 이들에게는 아는 게 약인 경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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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경직 목사(1903-2000)가 친미 반동 기독교인으로 몰릴 위기에서 일부 교인들과 함께 월남해서 12월에 서울 명동에 영락교회를 세웠다. 자연스럽게 영락교회는 서북지방에서 월남한 사람들이 집결지가 되었다. 다음 해인 1946년 11월 교회에 속한 청년들이 중심이 된 서북청년회가 출범했으며, 이들이 바로 서북청년단의 모체였다. 서북청년단은 잔혹하리만큼 철저한 멸공(滅共) 정신으로 무장하고 있었는데, 그 배후에는 ‘가정과 교회와 나라를 살리는 길은 멸공’이라고 강조한 한경직 목사의 영향이 컸다. 그는 훗날 다음과 술회하였다.
“그때 공산당이 많아서 지방도 혼란하지 않았갔시오. 그때 ‘서북청년회’라고 우리 영락교회 청년들이 중심되어 조직을 했시오. 그 청년들이 제주도 반란사건을 평정하기도 하고 그랬시오. 그러니까니 우리 영락교회 청년들이 미움도 많이 사게 됐지요”(김병희 편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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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9월23일 부산에서 철도파업이 시작된 뒤 전역에서 총파업이 일어났다. 대구에서는 총파업과 시민대회 진압도중 10월1일 노동자가 경찰에 살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시신 시위’가 벌어지고 삽시간에 노동자총파업이 시민항쟁으로 확대되었다. 청년과 학생들이 앞장을 섰다. 미군이 계엄령을 선포하고 무력으로 항쟁을 진압했지만 대구뿐 아니라 영천, 선산을 포함한 대부분의 농촌에도 항쟁이 들불처럼 번졌다. 해방 직후 미군정이 친일 관리를 고용하고 토지개혁을 지연하며 식량 공출을 강압적으로 시행한 데 대한 반발이었다.
저항의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희생당했다. 선산 인민위원회 간부였던 박상희(박정희 전 대통령의 형)도 항쟁이 진압되는 과정에서 경찰에게 학살되었다.
서북청년단 100명이 대구역 근처에 적산가옥을 본부로 사용하면서 총을 들고 다니며 민간인 학살, 가옥방화, 주민재산 탈취, 성폭행 등을 자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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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년 11월 서청 제주도본부가 결성됐다. 그들은 1947년 3·1절 발포사건 직후 제주에 내려오기 시작했다. 이들은 이승만 사진 등을 판매하는 등 우익 활동 기반 수입원을 창출하다가 1947년 하반기부터 경찰 등 공직을 맡기 시작했다. 미군정도 서청의 문제를 파악하고 있었다. ‘반민주적’이라고 의심되는 인사들에 대해 정력적으로 맹렬한 공격을 퍼부으며 ‘빨갱이 사냥’에 매달렸다."(미군 정보보고서) 서청은 정치적 반대 세력과 민간인에게 위력을 쓰는 ‘정치 깡패’ 노릇을 해왔다. 주민들을 서청 사무실에 끌고 가서 구타하거나 주민을 고문하기도 했다. 하지만 서청은 이승만의 후원을 받으며 성장했다.
그렇다면 이승만은 왜 서북청년단을 왜 비호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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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4·3 무장봉기와 5·10 남한단독선거 선거 보이콧은 미군정과 우익 정치인들에게 충격을 줬다. 서청은 해방 후 건준 및 인민위원회 출신 인사가 뿌리를 내리고 있는 제주도를 우경화하기 전략에 맞춤했다. 그들의 반인륜적 행위들은 ‘반공’ 논리에 가려졌다.
1948년 7월 20일 이승만이 대통령에 당선됐다. 9월 1일, 반민족행위처벌법이 국회에서 통과됐다. 하지만 이승만은 ‘반공주의자’로 변신한 친일 인사들을 내버릴 수 없었다. 이미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그들이 자신의 정치적 기반이었기 때문에. 오히려 이승만은 적극 친일파를 비호하며 정권 안정화를 도모했다.
1948년 10월 19일, 동족을 죽일 수 없다면서 제주도 출동 명령을 거부하며 군인들이 반란을 반란을 일으킨 ‘여순항쟁’은 이승만의 정적 축출을 위한 기회였다. 반공 이념이 강화됐고 11일 20일 국가보안법이 통과됐다. ‘친일파’ 처단보다 ‘반공’이 우선 시 됐다.
1948년 11~12월 최소한 1000명이 넘는 서청 단원들이 경찰이나 경비대원으로 탈바꿈했다. 도민 진압작전에 있어 서청은 무소불위였다. 그들을 학살을 벌여도 처벌할 기관이 없는 셈이었다. 미군 정보보고서에는 은밀한 모병활동으로 서청 단원을 모집해 제주도에 파견했다는 기록도 존재한다. 이북에서 내려와 먹거리가 변변찮은 서청 단원들에게 이승만 정부는 열흘 가량의 교육을 거쳐 제주도로 가서 경찰이나 경비대원이 될 수 있는 기회를 줬다. 그리고 그들은 충실히 따라서 무장대 색출이라는 미명 아래 무차별 민간인 체포와 살인을 저지른다.
인류역사에서 혼란기에 종교의 역할이 폭력적으로 나타난것은 흔한 일이지만 특이한 점은 한반도에서는 분단이라는 상황에서 기독교가 지배적 종교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발생했다는 것이다.
1948년 5월 31일에 열린 제헌국회 제1차 회의에서 임시의장이 된 이승만이 "하나님에게 감사를 드리지 않을 수 없읍니다"며, "나는 먼저 우리가 다 성심으로 일어서서 하나님에게 우리가 감사를 드릴 터인데 이윤영 의원 나오셔서 간단한 말씀으로 하나님에게 기도를 올려 주시기를 바랍니다."고 했다.
이승만의 제의에 의원들은 일동 기립했고, 목사였던 이윤영 의원은 "이 우주와 만물을 창조하시고 인간의 역사를 선림하시는 하나님이시여...." 라며 기도를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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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기독교 국가가 아닌 상황에서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당시 기독교인은 전체 인구의 1% 안팎에 불과했지만 이런 일이 가능했던 것은 국회를 비롯해 당시 정치권력을 획득한 이들 중에 기독교인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한홍구 교수의 발표 자료에 의하면 이승만 정권 초기 내각의 42.9%, 역대 장차관 및 처장의 약 38%, 역대 국회의원의 21.3%가 개신교였다.
일제 강점기 일제에 협력의 길을 갔던 기독교 세력들이 해방 후에 미군정과 이승만 세력에 협력해 세력화하면서 민간인 학살을 실행할 수 있는 권력을 차지했던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최근 소위 뉴라이트 인사들의 준동을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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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것을 윤 군만큼 모르고 있기에 지금도 한국 기독교는 사학법 반대, 과세 반대, 차별금지법 반대 등 개혁적 입법을 반대하는 악한 짓만 골라서 하고 있기 때문에 세미나 뿐만 아니라 가능한한 모든 방법을 통해서 알려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자리를 마련하는 데에는 여전히 많은 어려움과 결단이 필요한 것이 현재 한국 기독교의 현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