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산(又山) 손경석의 『韓國登山史』 읽어보기 17
이즈미 세이치(泉靖一)②
이강승·조장빈(근대등반사팀)
외지원정(註: 당시 일본 외 점령지)
젊은 이즈미가 고립과 후진성의 비애를 싫을 정도로 느낀 것은, 1934년 말엽부터 35년 초에 있었던 이마니시 긴지(今西 錦司) 박사를 대장으로 한, 쿄토제국대학이 동계 백두산원정대의 방문이었을 때일 것이다. 이즈미는 “이렇게 준비가 잘 된 원정체계를 경성의 한 구석에서 선망의 눈으로 꼼짝없이 지켜보고”있었다. 그리고 동계 백두산의 첫 등정이 일본내 대학의 손에 의해 거행된다는 것은, 자신의 생활터에 있는 자로서 무척이나 분하고 유감이였지만, “빌족하여 얼마되지 않은 경성제대 예과 스키부의 산악회의 실력으로는 어쩌 할 수 없었다”는 것이었다. 그는 “이 원정을 곁눈질로 노려보고…” 감당 할 수 없었던 마음에 북조선의 산으로 등산을 떠난다.
이즈미의 등산가로서의 성장을 이야기하기 전에, 이 백두산 원정 전후에 일본에서의 학생등산계의 움직임에 조금 더 주목 해 보자. 일본의 산들은 이미 오래 전부터 다 정복되어, 1930년경에는 이미 두드러진 벨류에이션 루트도 대체로 마무리 완성 되어 버린 것이다. 그리하여 1930년대에는 이른바 ‘외지원정”의 시대가 시작되고 있었다. 순수하게 외국 산을 오른다는 것은, 당시에 일본이 처한 국제적 환경으로부터 곤란이 많아서, 목표는 주로 조선, 대만, 천도열도(千島) 등, 당시 일본 속령지역에 국한되어 있었다. 대학 산악 보고에서도 외지원정의 기록이 발표되고 ”관서 학련 보고’에도 ”외지” 란이 할애 되게 된다. 그리고 그러한 “외지원정시대”에 이즈미는 그 ‘외지”에 살고 있어서, 외지산들은 이즈미에게 자신의 고향과도 같은 곳이었다.
당시 학생등산가들이 말하는 “원정” 혹은 엑스피디션(Expedition)은 독특한 매력을 가지고 있던 것처럼 생각된다. 관서나 동경의 학생들에 있어서 일본의 알프스는 동계 등반에 이르기까지 집 안마당 뜰과 같이 산행을 했다. 바다를 건너 외지로 나가는 것은 일본 알프스의 일상화 된 등산행위에서는 충족하지 못하는 특별한 로맨티시즘이 있었다. 더구나 외지로 나가기 위해서는 여러가지 장애가 있고, 기간도 장기화되어 신중한 준비가 필요했다. 외지원정에서는 많은 계획이 필요하여 실제 등산루트의 기술적인 난이에 관계없이, 원정은 그 자체로 곤란을 가지고 있고, 그러한 만큼 젊은 등산가들에게는 의욕을 솟게 하는 것이었다. 실은 관서학련과 같은 각 대학 연합 조직이 생겼다는 것도, 단일 대학 산악부로서는 할 수 없는 거대 규모의 원정을 하려는 의도가 결성 당시부터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주1) 교토대학 백두산 원정대 “백두산” 1936년
히말라야를 목표로
그런데 내지의 학생에 있어서는 외지의 산들은 원정대상이 되지만, 외지에 살고 있다는 것은, 그것은 고향 안방과 같은 것이므로 원정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그러면 외지 거주자는 어떻게 하면 좋은 것일까? 외지 거주자에게 원정은 불가능한 것일까? 아마도 이것이 경성제국대 산악부시대의 이즈미에게 큰 문제점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별도로 원정 따위 하지 않아도 부지런히 내지인 조선에서의 등산을 즐기면 좋은 것이 아닌가라고 사람들은 말할지도 모르지만, 그렇지는 않은 것이다. 당시의 등산가들에 있어서 원정은 단순히 로맨티시즘 만이 아니라, 그것은 일류 등산가로써 제1급의 타토를 목표로 하기위해서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하지 않되면 안되는 길이였던 것이다. 어째서 일까? 그것은 히말라야라고 하는 목표가 있었기 때문이다.
일본에서 처음으로 히말라야 원정을 명확한 목표로써 내세운 것은 쿄토제국대학교 였다. 1930년에는 이미 원정을 위한 조직으로 쿄토학사산악회 – 이른바 A.A.C.K가 결성되어 있었고 그것은 Akademisher Alpen Club, 약어로 Kioto다. 이는 재학생단체가 아니라 주로 졸업생으로 구성된 단체이고, 처음부터 히말라야를 목표로해서 본격적인 준비와 훈련을 시작했다. 1934~1935년의 동계 백두산 원정도 전적으로 히말라야에 대한 하나의 사전 훈련등반으로써 기획되어 실행된 것이다.
이러한 분위기에 경성의 젊은 리더인 이즈미가 원정을 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그도 또한 등산가로서 당연히 히말라야를 목표로 하게 된다. 그러기 위해서 외지 거주자라고하는 것은 조금은 겸연쩍지 않았을까. 좌우간 “원정”을 경험 해야만 했다. 그래서 그 자신의 “외지”를 추구하게 되었고 그 자신의 “원정”을 추구하게 되었다. 1935~36년의 겨울 제주도 원정이라는 것은 실로 그런 것이 아니었던가 하는 추측을 해본다. 요즘 들어 일본의 등산사에 있어서도 꽤나 중요한 시기이므로, 꼭 그에게 물어 보고 싶은 것이지만, 이것도 이제는 불가능하며 추측으로 머무를 수밖에 없다. 여하튼 이즈미는 이 “원정”으로 인해 바다를 건넜다. 이것은 그에게 있어 하나의 “외지” 경험이었던 것이다.
선명한 기억의 오류
경성제대 산악부의 제주도 원정은 대원 한 사람의 죽음이라는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하였다. 이 원정에 대해서 나에게는 서로 기묘한 관련이 있다. 이즈미는 나중에, “잉카의 조상들”이라는 책을 썼다. 그 후기로써 그 자신의 “방랑기”가 기록되어 있다. 그것은 이 “저 멀리 아득한 많은 산들”을 위한 초안과 같은 것으로, 그의 성장으로부터 1960년 안데스까지의 30년간의 방랑이 10페이지 정도로 정리되어 있다.
그 안에 한라산 등정이 나오지만, 그것에 의하면, 섬의 북측으로부터는 이즈미가 지휘하는 경성제국대학의 대원이, 남으로부터는 우메사오 타타오(梅棹 忠夫)씨가 리더인 코난고교(甲南高校)반이 1월 1일을 기해, 등정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조난이 일어나자, 거기에서 “후에 올라온 우메사오 일행이 수색에 가담하여 준 것에 대해 이후 26년 이 지났지만 지금도 너무나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다”고 그는 썼다.(본서 236페이지) 이것은 물론 그의 “선명한 기억”의 오류이다. 나는 코난고교(甲南高校)가 아니라, 三高이였고, 제주도에 간 적이 없다. 중요한 것은 이 해(年)에 나는 아직 쿄토일중(京都一中)의 중학생이다.
이 오류에 대해서는 이미 생전 그에게 정정을 요창하였으므로, 이번 “저 멀리 아득한 많은 산들”에서는 정정되어, 나니와고교(浪速高校)의 이마니시 토오시(今西 壽雄 – 후에 마나슬루 첫 등반자) 씨로 되었다.
어찌해서 이런 착각을 일으켰던 것일까? 그 자신은 이 “저 멀리 아득한 많은 산들”의 첫 머리말에 “타고난 기억력이 좋지 않은 탓에, 지나간 일은 차례차례 잊어버린다”라는 의미의 것을 쓰고 있지만, 이것도 단순한 건망증이라고 말 할 수 있을까?
나는 다음과 같이 추측해 본다. 그것은 이전에 언급 했던 것과 관련되는 것이지만, 경성재국대의 제주도 한라산 동계 첫 등정은, 그의 의식하에서 쿄토대의 백두산 동계 첫 등반과 연결되어 있었던 것은 아니였을지. 그래서 그것과의 관련되어 후에 쿄토대학파의 일원으로써, 그 와도 깊은 교섭을 갖게 된 내가, 여기에 심어져 있었던 것은 아니었는가라는 것이다. 좀 너무 핵심을 찌른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아무튼 쿄토대의 동계백두산 원정대는 그에 대해서 정말로 깊은 영향을 미치게 한 것은 틀림이 없다.
주1) 이즈미 세이치, “ 잉카의 조상들” 1962년 문예춘추신사
어렴풋한 기억의 오류
쿄토대 동계 백두산 원정대는 나에게도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그 당시 나는 중학 4년생 산악부원이였다. 그리고 이 백두산원정대는 대장 이마니시 긴지(今西 錦司)를 비롯해, 4명의 대원이 쿄토제일중학교 졸업생이였다. 학교에서는 이 훌륭한 선배들을 초대해 강연회를 열었다. 선배들의 이야기는 조금도 기억나지 않지만, 후에 상영된 기록영화의 훌륭함은 우리들 소년들의 마음에 깊게 잡았던 것이다. 나의 일생은 대체로 이때 정해진 듯하다. 나는 스스로 이러한 등반을 하려고 생각했다.
실은 이 백두산이 나를 이즈와 연결시킨 역할을 한 것이다. 내가 이즈미와 교섭을 가지게 된 것은 정말로 어떤 계기였는지 기억이 없다. 1936년에 삼고(三高)에 입학한 이래, 나는 산악부에 있었으므로, 이미 당시 경성제대 산악부 리더로써 유명했던 그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고 해도 이상 할 것은 없다. 1940년 여름, 나는 경성의 그를 방문했다. 관모봉 연산 및 백두산방면으로 가는 도중이었다.
그 때 산악계에는 아직도 외지원정 열기가 남아 있었지만, 우리들이 북조선 산을 오르려 했 던 것은 원정으로써의 개념은 아니었다. 일본 알프스와 같은 맥락으로, 작은 텐트 하나를 가지고, 극히 가벼운 복장으로 원더링(wandering)을 하려고 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외지의 산들까지 내지(일본 본토) 학생들이 고향 안방처럼 드나들게 되어갔다는 것이다. 그 산행은 결과적으로 송화강 수원지 확인이라는 이외의 지리적 발견을 동반했지만, 처음부터 전혀 그럴 예정은 없었던 것이다.
여하튼, 일행 두 사람은 배편으로 츠루가(敦賀)애서 나진으로 직행하고, 나 혼자서는 철도로 경성으로 향해, 이즈미와 만났다고 하는 것이 나의 어렴풋한 기억이어서, 그대로 추도문에 썼던 것 이였지만, 이 “저 멀리 아득한 많은 산들”을 보고, 그것이 착각 이였다는 것을 알았다. 그 때에는 그는 병역중이여서 경성에 없었다. 이번엔 완전히 내 기억의 오류였다. 이것으로 서로 기억의 착각은 무승부가 되었다.
그 당시, 경성에서 친절하게 대해 주었던 것은. 스즈키 마코토(鈴木 誠 – 신슈대학 교수)씨와 이이야마 타츠오(당시 조선 철도국 근무)씨 였다. 이즈미와 실제로 만났던 것은 아마도 후에, 1942년 다이코안레(大興安嶺 - 중국동북부를 남북우로 뻗어 있는 산맥) 산맥에서의 왕복할 때이거나 혹은 1944년 몽골로의 도중이었을까? 이 점에 대해 나의 기억은 확실치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의식 속에서는 그에 대해서 왠지 모르게 백두산과 깊이 결부되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아마도 쿄토대에 의해 동계 첫 등반되었다고 하는 사실이, 기억하에서 매개(媒介)가 되어있어서였을 것이다. 경성제대의 이즈미는 왠지 모르게 동류의식으로 친근감이 내 가슴속에 남아 있는 것이다.
주1) 우메사오 타타오(梅棹 忠夫) ‘백두산을 넘어 만주로” 쿄토 탐험 지리학회 년보 제2집 1941년
4. 탐험가의 시대
등산에서 탐험으로
1930년도 후반부터 40년대 전반에 걸쳐서는 등산에서 탐험으로 그의 활동 중심이 옮겨 간 시대이다. 1936년 북중국 여행을 시작으로, 37년에 송화강 유역조사, 38년 소오대산(小五大山-중국소재)및 몽골 학술탐험, 그리고 나서 3년간의 군대생활 후, 43년 뉴기니아 학술조사, 43년에 다이코안레(大興安嶺)의 오로촌族조사 및 오로도스(중국 내몽골 자치구)조사, 그리고 45년에 북중국 등, 정말이지 쉴 틈이 없을 정도였다.
물론 하나의 원인으로써 그 사이에, 그가 국문학과에서 사회학과로 전과하고, 자신의 전공을 민족학 내지는 현재에서 말하는 문화인류학으로 정한 것도 관계가 있다. 그러나 아까도 이야기 하듯이 그의 경우는 필드워크로의 의욕이 앞서서, 그것 형편에 맞도록 전공을 선택한 계기가 되었다. 사회학 전공의 계기가 된 것은, 전례의 제주도 한라산 원정이다.
그는 이렇게 해서 이 시기에 동북아시아의 민족학 전공을 하게 되었고 각각의 조사활동을 통해, 본격적인 학술 탐험가로 성장해 가고 있었다. 계속 외지에 살아서 내지로부터의 원정, 엑스피디션(Expedition)을 생각하고 있었던 그가 만주, 몽골 등, 동북 아시아를 직접 필드로 체험함으로써, 그 자신의 엑스피디션(Expedition)의 대상을 발견해 낸 것이고 본격적인 엑스피디션이 되었다.
마침 같은 시기에, 경성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내지” 쿄토에서도 그것과 일맥상통한 변화가, 정말로 패럴럴(parallel)하게 계속 움직이고 있었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쿄토파의 총수 이마니시 긴지(今西 錦司)의 문하생을 필두도 말 할 수 있는 카토 타이안(加藤 泰安) – 그는 물론 쿄토대 동계 백두산 원정대의 대원이며, 당시의 일본 제일의 등산가였다. 쿄토대 여행부 학생들을 인솔하여 다이코안레(大興安嶺)를 원정 한 것은 동계 백두산 원정의 다음 해인 1935년 겨울이었다. 1937년 여름에는 카토는 단신으로 다이코안레(大興安嶺)를 넘어, 우르무치로 들어갔다. 우르무치 초원에서 에델바이스가 어우러져 핀 몽골의 흙을 손으로 담고, 눈물이 한없이 흘러 멈추지 않을 정도였다고 한다. 1938년에는 키하라 히토시(木原 均) 교수를 대장으로 한쿄토제국대학 내몽골 학술조사가 파견되었다. 이후, 이마니시(今西) 자신에 의한 내몽고조사를 비롯해, 학생팀을 포함, 쿄토로부터 다이코안레(大興安嶺) 및 내몽고까지 갔던 엑스피디션(Expedition)의 수는 셀 수 없을 정도로 귀찮을 정도였다, 그리고 동북 아시아에서의 학술 탐험 활동의 마지막은 1944년 이후에, 쵸카코(張家口 -중국 하북성 북서부 소재 도시) 에서의 서북 연구소 활동이였다. 그 연구소에 관한 것은 후에 이야기하겠다.
주1) 경성제국대학 대륙 문화 연구회편 (몽고,신강의 자연과 문화 – 경성 제국대학 몽고, 신강 학술 탐험대 보고서) 1939년 古今書院(고콘서원) 이즈미는 이 보고서 안에 3편의 기고를 했다. 이즈미 “내몽고 기행”이즈미 “ 소오대산 등반기 ”이즈미 “내몽고 민속”
주2) 이즈미 “필드 워크 기록” 1969년 講談社 現代 新書에서는 “오로촌족을 탐구한다” “뉴기니아 사람들” 등의 조사보고가 수록되어 있다.
주3) 카토 타이안(加藤 泰安) “산림, 초원, 빙하” 1966년 茗渓社(메케샤)
중앙 아시아의 꿈
경성과 쿄토, 이 두 도시에서 산에서 탐험으로의 패럴럴(parallel)한 변화가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말했다. 그러나 어느 쪽의 경우에도 산을 단념하고 탐험으로만 전환했던 것은 아니였던 것에 주의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즈미는 최초의 북중국 여행, 1936년 소오대산 정찰 중에도 등산을 하였다. 그도 또한 최종적으로 히말라야에 가는 것을 이상으로 하고 있었지만, 유럽 사람들처럼 독일을 거치지 않고 조선으로부터 육지로 연결된 지대, 즉, 중국령 토루키스탄(현재의 신강 위구루 자치구)을 지나, 이른바 배후로 히말라야로 접근하고 싶었다라고 하는 것이다. 이미 일중관계는 긴장관계여서 중국 깊숙히 엑스피디션(Expedition)을 파견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비교적 감시의 눈이 덜 한 산을 선택하여 미리 떠보기 위해, 소오대산을 주목했다는 것이다.
이런 생각은 당시, 쿄토에서 거행되고 있었던 것과 거의 같은 것이다. 예를 들면 카토 타이안(加藤 泰安)은 “카라코람(K2)으로의 길”의 문장에도 있다. 1937년에 쿄토에서 카라코람 K2봉으로 정찰대가 출발하게 되고, 이토(伊藤)와 카토가 가게 된다. 그것이 자금 형편으로 출발 직전에 이토(伊藤) 혼자서 가기로 정해진다. 카토는 울분을 풀 길이 없이, ‘인도에서 갈 수 없는 것이라면, 차라리 몽골에서 신강을 통해 카라코람으로 잠입 해 보려고, 하숙하고 있었던 집의 물건을 전당포에 팔아 치우고, 몽골로 갔었다”라는 것이다.
중앙 아시아를 통해 히말라야로, 라고 하는 발상은 이마니시 긴지(今西 錦司)에 있어서도 예전부터 명백하게 존재하고 있었다. 쵸카코(張家口)의 서북 연구소는 그 최초의 일환으로써 구상된 것이 여서, 몽골 연구를 시작으로, 창하, 청해 티벳으로 조사연구의 폭을 진행하여, 북측에서 히말라야로 도달하려고 하는 것 이였다. 몇 년이 걸릴지 모르겠지만, 실로 원대한 계획이었다.
이러한 사람들을 만주로부터 몽골로 몰아치게 한 원동력이 히말라야만 있었다고는 생각 하지 않는다. 히말라야는 이른바 일종의 윤리적 종결점으로써 끌어내리게 되는 것이어서, 현실적으로는 몽골에서 신강, 혹은 청해, 티벳 등의 이른바 중앙아시아 지방이 커다란 매력의 원천이 되고 있었다는 것은 의심치 않는다. 그 자신이 다른 곳에서도 썼듯이 “언젠가는 시베리아와 중앙 아시아로 연구를 진행하고 싶다고, 한여름 구름과 같은 꿈을 품고 있었다” 는 것이다.
처음으로 자식을 위해 준비한 이름이 타클라마칸에서 딴 ‘拓良(타구라?)’라고 했던 것을, 이 책에서도 그는 기록하고 있다. 그 당시의 자식은 딸 이였지만, 후에 태어난 장남에게 정말로 이 이름을 주었던 것이다.
중앙 아시아로의 동경은, 카토 타이안(加藤 泰安)에게 있어서도, 일찍이 지극히 분명하게 나타나고 있다. 그 “산의 편력” 이라는 문장에 의하면, 중아아시아로의 꿈은 소년시절 아버지로부터 심어진 것이라고 한다. 그의 경우, 둥산보다도 오히려 중앙아시아 쪽이 우선이였던 것이다. 메이지 이후의 일본 모험가들의 정신형성에 중앙 아시아가 커다란 역할을 했다는 것은 의심 할 여지가 없다. 이것은 어째서 일까? 근대일본 정신사에 하나의 문제점이라고 생각 하지만, 지금은 더 이상 깊게는 파고들지 않겠다.
주1) 카토(加藤) 前揭書所收
주2) 이즈미 “필드 노트” 의 후기. 1967년 신조사(新潮社)
주3) 카토(加藤) 前揭書所收
뉴기니아
쿄토에서는 탐험가들의 주된 관심은 역시 대륙방면에 있다고는 하나, 별도로 연구대상을 만주나 몽골에 한정한다는 것은 없었다. 뉴기니아나 보루네오 등에 대해서의 연구도 전부터 거행되고 있었다. 그래서 1941년, 태평양전쟁이 시작되기 전에, 쿄토대학에서는 이마니시 긴지(今西 錦司)를 대장으로 하는 원정대가, 미크로네시아의 포나페 섬으로 나섰다, 나 자신도 그 대원이었다, 그 밖에 실현은 되지 않았지만, 뉴기니아 원정 계획도 있었다. 쿄토는 탐험가의 수도 많아서 전문이나 관심도 여러가지였으므로, 챤스만 있으면 어디에라도 원정대를 보내려고 하는 준비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경성에서는 사정이 달랐다. 그곳은 조선반도의 수도이고, 대륙의 일각이다. 그곳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 진영의 탐험가들의 의식이, 강하게 대륙으로 집중했다고 해도 이상 할 것은 없다. 이즈미에게도 그 활동의 무대는 거의 동북아시아로 한정되어 있었던 것이다.
전쟁 후에, 그의 주된 필드는 남아메리카로 바뀌었지만, 만년에는 그의 관심은 다시 동북아시아로 바뀌었다. 결국 그의 일생은 유라시아와 남아메리카의 사이를 크게 격동하며 움직이고 있었던 듯하다. 그리고 상당히 넓은 발자취를 남긴 그였지만, 결국 동남아시아나 인도에는 발을 들이지 않았다. 그 자신이 말했듯이, 습윤 열대를 정말로 싫어했는지도 모른다.
그런 그가 단 한번 습윤열대에 발을 들였던 것이 1943년 뉴기니 학술 조사였다. 타야마리 사부로(田山利三郞)박사를 대장으로하는 해군 뉴기니아 민정국 주최의 학술조사대였다. 거기서 그는 사실상의 부대장으로써, 무리를 통솔하는데 크게 힘을 쏟은 듯 하다.
뉴기니아 탐사 때의 이즈미 세이치
그가 뉴기니아로 간다고 한다는 것을 들었을 때, 나는 솔직히 말해, 왠지 어울리지 않다고 하는 느낌을 받은 것을 기억하고 있다. 뉴기니아는 우리들도 전부터 계획을 짜고 있던 곳 이였고, 먼저 진행되는 것에 질투심이 있었지만, 특히 그가 가지는 않을 것이라는 느낌이었다. 그의 뉴기니아행에는 여러가지 사정도 있고, 또한 그 나름대로의 수확도 있었던 듯하다. 그 때의 조사결과 일부가 그의 저서 “필드 워크의 기록” 속에 수록되어 있고, 꽤나 충실한 내용이었다.
그의 성과는 그렇다 해도 일본의 탐험사에서 그의 뉴기니아행의 의미는, 다음과 같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으로 인해, 그는 동북 아시아부터 한 발짝 더 들여 놓은 것이다. 그리고 이 일로 인해, 그 자신 스스로가 이끄는 경성제대의 등산과 탐험 그룹으로부터 한 발 짝 더 들여 놓은 것이다. 그리고 보다 넓은 일본의 학술탐험의 인적 네트웍 속에서 완전하게 기반을 확립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주1) 이마니시 긴지(今西 錦司) “포나페섬 – 생태학 연구” 1934년 彰考書院
주2) 이즈미 “필드 워크 기록” 1969년 講談社
일본에서의 탐험 확립
1940년대 전반, 종전까지 어수선했지만, 일본에 있어서 현대적 학술탐험의 확립시기였다고 생각한다. 그 시대까지 축적된 지식과 경험은, 요즈음에 들어 조직화 되고, 학술탐험의 일은 전국적인 규모로 궤도에 오르기 시작했다. 이 시기에 쌓아진 기초는 전후(戰後)까지 남아, 종전 후의 휴식기를 거쳐 1955년 이후에 일본 탐험생활의 활발함은, 대체로 1940년대의 전통 속에서 쌓아 올려진 것이다.
근대 일본 탐험사라고하는 것 같은, 적당하게 정리 된 책이 아직 나오고 있지 않은 것이 이상 할 정도다. 언젠가 그런 책이 나오게 되면, 충분한 사료를 바탕으로 입론(立論)이 거행될 것이지만, 지금은 선구자로써 40년대 학술탐험 확립기에 이르기까지의 몇 가지 흐름을 개관(槪觀)하자.
일본의 경우, 학술 탐험의 전통을 제일 크게 지탱 한 것은 이미 보아 온대로 명백히 산악계인 것이다. 등산과 탐험과의 친근성은 세계적으로도 인정 받는 점이고, 영국등에서도 Royal Geographical Society 의 회원은 제법 많은 수가 The Alpine Club의 회원을 겸하고 있다. 일본의 경우는, 물론 일본 산악회 회원도 적지는 않지만, 실은 그 이상으로 각 대학 산악부 출신인 것이다.
그런 경향은 전후에 있어서도 계속 이어졌고 예를 들면, 오늘의 많은 대학에서 볼 수 있는 탐험부 조직은 산아부에서 파생된 것이 많다. 또한 히말라야로 엑스피디션(Expedition) 참가자의 거의 전부가 등산가인 것을 당연하다고 해도, 가령 남극 관측이나 북극에서 학술적 활동이 중심적인 추진력이 되고 있는 사람들 중에는 동경대학, 북해도대학 등의 산악부 출신자가 적지 않은 것이다. 동남아시아나 아프리카에서 전후 활동을 하고 있는 학자들의 제법 많은 사람들이 등산가인 것을 주목해도 좋다. 등산계는 일본의 탐험계에서 최대의 인재 공급원이다. 이즈미 또한 그 중 한 사람 이였던 것은 말 할 나위도 없다.
두번째로, 메이지 이후 각 대학 연구기관에서 진행되어 온 필드 사이언스(야외과학)의 전통이 1940년대에 겨우 결실을 맺었다는 사정이 있다. 지질학, 동물학, 식물학, 인류학, 역사학, 지리학 등의 모든 분야에서 일본국내에서 조사연구는 대체로 끝나고, 학계의 에너지는 아시아의 주변 모든 지역으로 미치려 하고 있었다. 쿄토에서는 이미 1939년에 쿄토탐험 지리학회가 결성되어, 각 학부의 전문을 달리하는 야외과학자들의 협력태세가 완성되어 있었다. 41년 미크로네시아 원정은, 그 쿄토 탐험 지리학회가 주최한 엑스피디션(Expedition)이였던 것이다. 동경에서는 야외과학의 강력한 추진 기관으로써, 자원과학 연구가 설립되고, 또한 자원과학 모든 학회 연맹이 결성되었다. 그리고 그것들의 소속된 야외과학자들에 의해, 42년에는 제1차 산서(山西) 학술조사연구단이 편성되어, 북중국으로 파견된다.
마침 이때, 일본에서 근대학술탐험의 확립을 가리키는 역사적 사실로써, 잊을 수 가 없었던 것은 1942년의 잡지 “탐험”의 창간 일 것이다. 탐험 전문잡지가 탄생 한 것이다.
산악잡지 ‘케룬”의 이름난 편집자로써, 등산가들 사이에서도 평판이 높았던 카노 이치로(加納一郞)의 편집이다. 일본에서의 최초로 본격적 탐험 져널리즘의 성립이라도 봐도 좋을 것이다. 거기에는 기행, 연구, 탐험사, 문헌소개 등과 함께, 몇 가지 탐험 기술에 대한 논고를 볼 수 있다. 창간 제1호에서 이즈미의 ‘탐험에 있어서의 운송과 문제”를 기고하여 그 분야의 선구자였던 것이다. 일본에서도 착실하고 제대론 된 탐험의 전통을 확립해야 한다는 일종의 사명감 같은 것이, 이 잡지의 편집자에게도 기고자에게도 공통으로 흐르고 있었다, 이즈미도 그 중 한사람 이었다.
주1) 이즈미 ”탐험에 있어서의 운송과 문제” ---- 1932년 탐험-창간호 朋文堂
북방파와 남방파
탐험학자들은 점차로 교류를 하며, 조직화가 진행되어 이즈미도 자신의 뜻을 펼칠 무대가 아련되었다. 크게 북방파와 남방파로, 북팡파인 이즈미는 43년경에 남방파의 사람들과도 교류한다.
뉴기니아의 조사단의 대장, 타야마리 사부로(田山利三郞)박사는 나에게 있어서도 매우 중요한 사람이다. 나와는 41년 미크로네시아 원정 때, 배에서 함께 했다. 해양지형 학자이고, 당시 동북제국대학 조교수였다. 친해져서, 쿄토로 초청을 하여 현재, 오사카 시립대교수인 후지타 카즈오(藤田 和夫)와 내가 영접을 하였다. 전후(戰後), 묘진죠(明神礁- 일본 이즈반도 남쪽에 있는 섬)의 폭발로 조난당하셨다.
카노 타다오(鹿野 忠雄)박사도 잊을 수 없는 사람이다. 이즈미가 거절했던 보르네오를 떠맡고, 결국 돌아오시지 못했다. 카노 박사도 뿌리부터 남방파였다. 타이페이 고교 이래, 타이페에서 오래 살았고 지리학자로서 또한 곤충학자로서도 이미 유명한 사람 이였다.
남방파와 북방파를 비교하면, 조금 다른점이 있다. 타이페이에서도 필드 사이언티스트는 적지 않았을 터이다. 민족학의 동료에서도 고인이 된 오카다 유즈루(岡田 謙), 미야모토 노부히토(宮本 延人), 마부치 토이치(馬淵 東一)이라고 하는 쟁쟁한 사람들이, 당시에 타이페이에 있었다. 한편으로, 타이페이를 중심으로 한 타이페이 산악회도 결성되어 있었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타이페이에서는 조선처럼 알피니즘과 필드 사이언스와의 결합이 거의 없었던 듯하다. 산이라면, 타이페이에는 조선보다도 매우 훌륭한 산들이 있었지만 스포츠 알피니즘은 활발하지 않았다. 조선과 타이페이, 경성과 타이페이, 그 양자의 비교는 일본의 등산사, 탐험사에 있어 흥미있는 문제이다.
앞서거니 뒤서거나
전쟁 상황은 갈수록 격화되어 학술탐험 따위, 한가한 일은 도저히 하고 있을 여유가 없었다. 그러나, 탐험가들은 매우 어려운 가운데 일을 계속하고 있었다. 코토의 동료들은 몽골 연구를 계속 하기 위해서, 44년에 쵸카코(張家口)로 본거지를 옮기고 서북연구소에 틀어박혀 있었다. 소장은 이마니시 긴지(今西 錦司), 차장이 이시다 에이치로(石田 英一郞)이였다. 이 일은 후에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져온다. 소원(所員)으로는 카토 타이안(加藤 泰安), 후지에다 아키라(藤枝 晃) 나카오 사스케(中尾 佐助)등이 있었다. 나도 그 한사람 이였다.
경성의 이즈미는 경성제국대를 무대로, 새로운 기구를 만들기 위해 매우 분투하고 있었다. 45년 봄, 대륙자원과학연구소 관제가 생겨서, 이즈미는 그 곳 소원(所員)이 되었다. 그것은 공공연하게 탐험을 할 수 있는 실로 훌륭한 기구였다. 연구소는 곧장 그 여름, 몽고(蒙疆-현재의 내 몽고)지방으로 탐험대를 파견한다.
이마니시 긴지(今西 錦司)는 그 당시, 쵸카코(張家口) 서북연구소의 소장실에 있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내일은 경성제국대의 대륙자원과학 연구소의 사람들이 오지를 향해 트럭 2대로 출발하다고 하는 날이었다. 우리들도 자유롭게 트럭을 사용 할 수 있다면, 좀 더 착실하고 정확한 일을 할 수 있을 텐 데…게다가 현재 현지에 있는 사람들이 일을 해 야 할 것을 짓밟아 놓고, 외부에서 온 사람들만이 알쫑거리며 하다니, 아무리 생각해 봐도 납득이 가지 않는다. 여기로 온 이후, 때때로 맛보았던 마음의 분노가 재차 머리를 치민다”
전에 이마니시 긴지(今西 錦司)가 이끌던 쿄토제국대 백두산 원정대가 조선에 왔을 때, 현지 이즈미 조직이 분해했던 것을 나는 상기한다. 이번엔 이마니시 긴지(今西 錦司)가 쵸카코(張家口)주재의 현재조직이다. 이즈미의 경성조직이 만든 당당한 연구소 관영 엑스피디션(Expedition) 대원들은 이마니시(今西)의 서북연구소원들이 분개하고 있는 가운데 눈앞에 위세를 떨치고 있는 것이다.
실로 이 주변의 움직임은, 앞서거니 뒤서거나 하고 있었다. 쿄토는 탁월한 리더 이마니시 긴지(今西 錦司)의 지도하에, 의기(意氣)양양하고 있었지만, 쿄토파인 나와 조직원들로 본다면 최대의 라이벌은 역시 경성이였다. 전국적으로 봐도, 개인적으로는 훌륭한 학자, 탐험가는 적지 않았지만, 모두 조직을 갖고 있지 못했다. 경성에는 강력한 조직이 있었다. 그리고 그 조직의 중심에 이즈미가 있었다.
그러나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 갔다. 소련이 개입하여 쵸카코(張家口)는 전쟁터가 되었다. 경성제국대의 엑스피디션(Expedition)도, 이마니시 긴지(今西 錦司)들의 서북연구소조직도 서둘러 철수하여 돌아 와야 만 했다.
주1) 이마니시 긴지(今西 錦司) “유목론 그 외” 1948년 秋田屋(아키타야)
이것은 후에, 이마니시 긴지의 “산과 탐험” 1970년 문예춘추 “사람과 사상 시리즈” 에 수록 되어있다.
5. 동경에서
날개를 잃은 새
종전의 해인 12월, 이즈미는 경성으로부터 후쿠오카 하카타(博多)로 철수했다. 나는 다음해인 5월에 북경에서 쿄토로 철수했다, 나는 집으로 돌아와 아직 적(籍)이 있었던 쿄토대의 이학부 동물학 교실로 복귀했다. 쿄토는 전쟁의 화마를 만나지 않았던 관계로, 집도 대학도 그대로 남아 있었다. 생활은 고됐지만, 옛 친구도 속속히 돌아오고, 비교적 단절없이 전쟁전의 의식을 회복할 수 있었다.
우리가 이렇게 혜택받은 상황을 비하면, 이즈미는 매우 달랐다. 그는 모든 것을 잃었던 것이다. 집은 물론, 그는 대학도 잃었다. 쿄토제국대는 얼마 안 있어 간판을 바꿔 쿄토대학으로 이름을 변경했지만, 경성제국대학은 이름뿐만 아니라, 실체도 없어져 버린 것이다. 그것은 일본 제국의 붕괴와 함께, 영구히 소멸해 버린 것이다.
나는 여기서 이즈미의 근무처 소멸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근무처는 대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는 거점을 잃은 것이다. 그가 만들어 온 대륙자원 과학연구소도, 경성제국대학 산악부도, 예과 스키 산악부도, 모두 소실된 것이다. 이것들의 조직을 잃은 엑스피디쇼니스트((Expeditionist-탐험가)라는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날개를 잃은 새 가 아닐까? 이것이 이 후, 그의 활동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나는 보고 있다.
쿄토의 경우에는, 모든것을 혜택받고 있었다. 쿄토에서는 오래된 전통이 밑바탕이 된 아카데미즘(academism)은 패전의 충격에 조금의 움직임도 없었고, 알피니즘도 사멸하지 않고 있었다. 엑스피디쇼니스트(Expeditionist-탐험가)들의 거점의 하나인 쿄토탐험 지리학회는 해산되어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모든 활동의 근원이 된, A.A.C.K(쿄토대 학사 산악회)는, 회원 중 몇사람의 전사자를 냈을 뿐 이여서 실로 건재했다. 이들은 전후 히말라야 시대의 선구자그룹을 이루게 된다.
양자택일
1952년 이즈미는, 처음으로 남아메리카로 향하게 된다. 그 계기를 만든 것은 전쟁 전에 그를 뉴기니아 조사대로 보낸 인물, 경성제국대학 교수로 산악부장이었던 오타카 도모오(尾高朝雄)였다.
그 해, 학회는 쿄토에서 열렸다. 이즈미는 남아메리가로 출발하기 전에, 학회의 장로들(이마니시 긴지도 그 중 한사람)로부터 히말라야를 선택할지, 남아메리카를 선택할지, 둘 중 하나를 권유 받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1952년이라고 하면, 교토는 이미 히말라야 진출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해 예정된 강화조약(講和條約) 체결을 예측하고, 전년도에는 히말라야 학술탐험을 목표로 한 생물지연구회(소위 F.F)가 발족하여 52년 1월에는 회원 니시보리 에이자부로(西堀 栄三郎 – 백두산 원정 부대장이며, 후에 제 1차 남극 월동 대장이다)가 네팔을 방문하여 교섭을 하고 이에 따라 마나슬루 계획이 궤도에 오르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마니시가 이즈미에게 히말라야를 선택할지, 남아메리카를 선택할지, 양자택일을 선택하게 한 것은 일종의 참가 요청은 아니었다고 생각된다. 이마니시는 이즈미라는 인물을 깊이 사랑하고, 그 재능을 대단히 높게 평가하고 있었다. 그 역량, 그 경험을 가지고 앞으로 이마니시가 거행하려고 하고 있는 히말라야 연구에 이즈미가 참가하면, 이 것은 대단한 힘이 된다. 이마니시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그러나 이즈미는 이 때에, 남아메리카로 선택하기를 결심한다. 그것은 내 해석으로 한다면, 무엇보다 가장 좋은 선택이었다. 물론, 이즈미도 히말라야에 크게 미련이 있었던 것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러나 쿄토대는 이미 엑스피디션(Expedition) 실현의 거의 일보직전까지 도달하고 있었다. 그런 단계에서 참가 한 들, 그에게 얼마만큼이나 발언권이 있을까. 게다가 쿄토대로 말하지면, 철의 단결력을 자랑하는 A.A.C.K가 주력이다. 또한 일본 산악회로 계획이 이양되고, 전 일본적으로 계획이 수행되도록 되었던 참에, 전후로 강대한 대학산악부를 가지지 못한 그가 무엇을 할 수가 있었을까? 경성제국대 산악부는 이미 존재하지 않은 것이다.
이러한 사정을 생각하면, 이것이 점점 개척해 나가고 있는 히말라야를 단념하고, 독자적으로남아메리카의 길을 개척하려고 했던 그의 기분을 알 것 같다. 그것은 아마도 현명한 선택 이였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오거나이져
카노 이치로(加納 一郞)가 편집장으로 있는 ”탐험” 창간호에 이즈미가 탐험기술론을 전개하고 있었다는 것은 이미 말했다. 그 뒤를 이어받아, 나는 다이코안레(大興安嶺) 탐험을 근거로 한 기술론을 쓰고, 도쿠라 쿠죠(土倉 九三)와 함께 공저(共著)로 냈다. 이것은 “탐험” 3호에 실렸다.
그리고 나는 탐험대의 편성법으로써, 합성주의와 양성주의로 두가지 방법을 구별했다. 합성주의라고 하는 것은, 기존의 전문가를 임시로 불러 모아 편성하는 방법이고, 양성주의 라고하는 것은, 젊었을 때부터 고도의 훈련을 실시하여 엑스피디쇼니스트 (Expeditionist-탐험가) 를 양성해 두어, 점차로 각각의 분야의 전문가로 양성하는 방식이다. 지금까지의 예를 들자면, 중국산서학술조사 연구단이라고 하는 것은 합성주의의 예이고, 또한 이즈미가 참가 한 뉴기니아 조사대도 그 예일 것이다. 그것에 대해서 쿄토대의 A.A.C..K 등은, 양성주의의 견본 같은 것이다. 쿄토파의 엑스피디션(Expedition)은 거의 이 시스템이다. 대원들은 학생시절 때부터 같은 산악부원으로써 연대의식을 가지고, 후에 성장하여 각각의 전문학자가 된 것이다.
경성제국대의 이즈미의 방침은, 분명하게 양성주의를 선택하고 있었던 것 같이 나는 추측해 본다. 그는 양성주의 성공하여, 상당할 정도로 자기충족적인 양성 시스템을 형성했다. 그리고 패전과 함께 괴멸했던 것이다.
동경에서의 이즈미는, 이제 경성에서의 이즈미가 아니었다. 동료도 그 양성시스템도 갖지 못한 한 마리의 늑대인 것이다. 그는 동경에서는 처음부터 합성주의로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패전 후, 그가 8학회 공동조사의 조직과 운영에 열심히 노력했던 것은, 아마도 그 것 과도 관계가 있었을 것이라고도 생각 한다. 그리고 그는 그의 경험과 능력으로 본다면, 조금도 어려운 것은 아니 였을 것이다. 그는 집단의 통솔에는 놀라울 정도로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놀라울 정도의 재능이라고 하면, 이즈미는 조직 만들기 천재였던 듯하다. 천성적으로 오거나이저인 것이다. 경성제국재 예과 스키 산악부를 시작으로, 경성제국대 산악부, 대륙자원 과학 연구소, 전후에는 드디어 동경대학 교양학부 문화 인류학 교실이라고 하는 큰 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그 사이동안, 차례차례로 큰 엑스피디션을 주최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자신도 고백하고 있듯이, “새로운 조직을 만들고서, 기존 조직에 접목시키려고 했던, 끝없는 노력”의 일생 이였다.
그런 경우, 그의 배후에는 꽤나 조력이 될 실력자 장로들이 있었다. 경성제국대 예과 타케나카 카나메(竹中 要)교수를 비롯해, 경성 제국대 오타카 도모오(尾高朝雄)교수, 게다가 야마베(山家)총장, 패전후에는 시부자와 케이조(渋沢 敬三)씨, 동경대의 야우치 하라(矢内原)총장등, 제 1급 뒷빽이 붙어 있었던 것이, 그의 오거나이징(organizing) 특징일 것이다. 어떤 의미로는 그 사람들이 오거나이저로서의 이즈미의 실력을 간파하고, 그에게 마음껏 실력을 발휘 할 수 있도록 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주1) 梅棹 忠夫(우메사오 타타오) * 土倉 九三(도쿠라 쿠조) “다이코안레(大興安嶺) 탐험의 기술적면부터 – 탐험의 평상주의, 합성주의와 양성주의” “탐험 3호” 1934년 붕문당(朋文堂)
6. 영예와 죽음
공부합체(註: 막부말기, 천황조정과 무사정권인 막부와 협력해 정치를 거행하고자 하는 것)
나는 패전 후, 오랫동안 그를 만날 기회가 없었다. 1950년 전후였던가? 몽골 학련에 관련한 것인가? 무엇인가의 모임에서 그와 오래간만에 만났다. 메이지대학에 있을 때였을 것이다. 드디어 그는 이시다 에이치로(石田 英一郞)씨과 함께 동경대로 옮겨 문화인류학 연구실을 건설한다. 일본에서는 오랫동안 냉대 받아온 민족학, 문화 인류학이 동경대의 일각에 비로써 그 거점을 가진 것이다. 그것은 일본에서 문화인류학의 거점인 동시에, 경성제국대를 잃은 이즈미에 있어서, 거점이기도 했을 터이다.
쿄토에서는 히말라야에서 카라코람, 힌두쿠시(파키스탄)산맥으로 엑스피디션(Expedition) 동선을 넓혀가고 있는 동시에, 학문적으로는 역시 이마니시 긴지(今西 錦司) 지도하의 원숭이 연구가 급속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그리고 동남아시아 아프리카 등으로, 차레차례로 엑스피디션(Expedition)을 보내게 된다. 그러던 중에 여러가지 사회의 비교인류학적 연구가 태생하고, 원숭이로부터 근대사회까지를 포함한 장대한 진화사적 인류학이 구상되게 된다.
쿄토대학에서는 인문과학 연구소에 사회인류학 부문이 설립되어, 이마니시 교수가 담당을 한다. 드디어 이학부에 자연 인류학 연구소가 설립되고, 역시나 이마니시 교수가 병임교수로서 그것을 주재(主宰) 한다. 동경대에서는 아까도 이야기 한 것처럼, 문화 인류학 연구실을 이시다 에이치로(石田 英一郞)가 주재하고 있다. 여기에 동서 2개대학에 걸쳐서, 이마니시(今西), 이시다(石田) 출현하는 것이다.
이마니시(今西), 이시다(石田)의 결합는, 이미 말했듯이 전쟁 중 몽골연구 안에서 형성 된 것이었다. 쵸카코(張家口)의 서북연구소에서는 시종일관 이마니시(今西)소장, 이시다(石田)차장의 콤비가 많은 소원(所員)들의 연구를 지휘하고 있었던 것이다. 전후, 이즈미가 학계로의 복귀가 된 계기를 만든 것은 이시다(石田)였다. 그리고 동경대 문화인류학 연구실은 이시다(石田)교수, 이즈미 조교수 콤비로 운영된다. 그리고 이시다(石田)교수의 정년 퇴임 후에는 그 뒤를 계승한다. 쿄토대학에서는 이마니시(今西) 퇴임 후에는 그 당시에 쿄토시립대 있었던 내가(梅棹 忠夫 - 우메사오 타타오) 쿄토대 인문과학 연구소로 옮겨, 사회 인류학 부문을 담당한다.
학계의 많은 분야에서는, 쿄토대와 동경대의 대립이 종종 회자되었다. 문화인류학, 사회 인류학에서는 그런 종류의 대립이 없다. 오히려 동경대와 쿄토대의 사이가 너무 좋아서 외부로부터 ”마치 공무합체(公務合體) 는 아닌가”라고 놀림 당했던 것이다. 그것은 여기서 언급했던 이와 같은 경위로부터 온 것이었다. 이즈미와 나와의 교우 관계도 있지만, 그 전에 이마니시(今西), 이시다(石田)의 깊은 교우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몽골에서 공동연구소라고 하는 공통된 타토의 경험으로부터 초래된 것이었다, 학문을 하는데 있어서, 대학 연구실에서의 관계 뿐만 아니라, 필드에서의 공통체험이 이외로 커다란 의미를 가질 수 있는 것이다.
게마인샤프트(Gemeinschaft- 공동체 사회)
동경대를 거점으로 해서, 그는 남아메리카로의 일을 확대하고 있었다. 1952년 최초로 남아메리카를 방문한 이래로, 어째서 이 대륙으로 건너왔던 것일까? 58년에 제 1차 동경대학 안데스 조사단은 이시다 교수가 단장이였지만, 제2차 이후부터는 이즈미 자신이 지휘를 하고 있었다. 발굴은 본격화하고, 드디어 페루의 코토슈(Kotosh)에서, 그는 남아메리카 최고의 문명의 유적을 발굴했다. 이 공적으로 1964년에는 페루 정부로부터 훈장을 받았다.
그의 발굴로 남아메리카에서 최고의 문명유적이 출현한 코토슈라고 하는 곳은, 페루의 중부지방, 안데스 동사면의 와누코라고 하는 마을 외곽에 있다. 1970년 그의 갑작스런 죽음이 이 이 마을에 전해졌고 와누코시는 그의 공적을 영원히 기리기 위해, 그 마을에 도로의 하나를 세이이치 이즈미 거리라고 이름을 붙이기로 결정했다. 1971년 8월14일에 명명식과 기념탑 제막식이 거행되고 일본으로부터는 이즈미의 부인 키미코씨가 참석했다.
그가 남아메라카에 몰두하고 있는 사이에, 나는 아시아와 미국에서 일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연구에 있어서는 직접적인 교섭이 없었다. 그러나 그의 일의 진척상항과 성과의 훌륭함에는 언제나 계속해서 박수를 보내고 있었다. 안데스에서 그의 일은 정말로 장대한 엑스피디션이었다. 거기에는 그의 탐험가로써의 전쟁 전부터 모든 경험이 집약되어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실로 탐험가가 할 학문이라며 눈이 휘둥그래졌음이 틀림없다.
그러나 전쟁 전부터 산과 탐험을 통해 교류가 있었던 우리들이 보자면, 남아메리카에서의 그의 일하는 방식에는 어디엔가 그답지 않은 것이 있었다. 그는 걸어 다니는 사람이다. 바람처럼, 도처를 바람이 지나가듯이 가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왜 발굴등과 같은 고착적인 일에 몸을 구속했던 것일까?
그가 안데스에서 일하는 모습에는 무엇인가 대단한 자기억제가 있었던 듯하다. 그는 히말라야를 포기하고 안데스를 선택했다. 안데스라고하면, 히말라야에 이은 세계의 대산맥이고, 아직 답사하지 못한 봉들이 몇 개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식욕이 나지 않았던 모양이다. 우리들의 생각에 대원들 중에서 반드시 등산의 요소를 제법 포함시킬 터였는데 그는 그것을 하지 않았다.
그 이유를 잘 모르겠지만, 역시 그의 거점이 동경대학이고 쿄토대학이라서가 아닐까? 등산을 하기위해서는 동료가 필요하다. 동경대에서는 그는 훌륭하게 게젤샤프트(Gesellschaft – 이익사회 / 조합)관계 건설에는 성공 했지만, 게마인샤프트(Gemeinschaft- 공동체 사회)적 관계는 아직 되어있지 않았던 것은 아니였을까? 산은 게마인샤프드가 아니면 할 수 없다.
그 점, “저 멀리 아득한 많은 산들”에서의 최후의 여행은 암시적이다. 그는 탐험부 학생들의 대장으로써 멕시코로부터 과테말라를 여행했다. 학생데모에 지쳐있었던 그는 이 여행을 정말로 즐기고 있었던 듯 보인다. 학내 문제로 학생들의 데모가 심각하게됨에 따라 그는 도중에 귀국해야 했지만, 학생들은 그 후에도 남아메리카 종단여행을 계속하여, 드디어 티에라 델 푸에고까지 갔다. 그가 만약 학생들과 계속해서 여행을 같이 할 수 있었다면, 그것을 통하여 새로운 게마인샤프드 형성의 싹이 이루어질 수도 있었을 것이다.
무도회 수첩
그의 긴 편력의 기록 중, 마지막 제목으로 “한국으로의 무도회 수첩” 이라는 것을 썼다. 이 표현은 우리들 영화세대에는 실로 잘 이해하지만, 젊은 독자에게는 잘 이해하기 어려울 지도 모른다. 이것은 물론 두비비의 명작 “무도회의 수첩”을 근거로 하고 있다.
평생을 사교계에서 지내온 중년의 주인공이 자신의 딸이 최초의 댄스파티에서 춤을 춘 상대 남자들 하나하나를 방문해 가는 내용이다. 50세를 넘은 이즈미는 많은 추억이 있는, 청년시절을 보낸 한국에 다시 한번 돌아온다. 그리고 옛날에 만났던 사람들을 방문해 간다.
그의 이 여행은, 추억의 아름다움뿐만 아니라, 새롭게 현실적인 착상으로 지탱되어 있었던 것처럼 생각된다. 그는 조선문회의 인류학적 연구를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서울대학교로부터 이두현(李杜鉉)교수를 동경대 객원교수로 초대하거나, 조선문화 연구회를 조직하거나, 필요한 손을 쓰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남아메리카로 손을 댈 생각은 없었지만, 한국문화에는 크게 관심이 있었다. 특히 고대일본 국가성립과 얽혀 있어, 한국문화를 연구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즈미는 그런 나를 권유하여 함께 한국에 가자고 했다. 나는 그것을 기대하고 있었다. 나 혼자 가기보다는 한국을 가장 잘 이해하고 있는 그와 함께라면 얼마나 성과가 오를까? 그것이 실현되었다면, 그것은 우리들 최초의 공동 필드 워크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실현되기 전에 그는 세상을 떠났다.
그가 세상을 떠난 후, 몇 개월이 지나서, 나는 혼자서 한국으로 갔다. 한국과 그 문화에 대해서 나의 지식은 부족했고 감이기는 했지만, 이즈미를 알고 있는 한국 인류학자인 이두현 교수와 김택규 교수들의 도움을 받아 여행은 즐겁고 배울 것이 많았다. 나는 대구에서 강연을 했다. 제목은 “문화 인류학으로 본 한국과 일본”이라는 것이였다. 이즈미가 살아 있다면, 그야말로 이즈미가 이 강연을 해야 할 사람이었다. 나는 강연 서두에 한국을 가장 깊게 이해하고, 가장 강하게 사랑하고 있었던 일본 문화인류학자로서 그의 이름을 소개했다. 그리고 칠판에 “이즈미 세이치” 라고 크게 썼다.
그 때, 젊은 여성 한사람이 조용히 강연회장으로 들어온 듯했다. 강연회가 끝나고 나는 그 여성을 소개받았다. 정말로 놀랐던 것은 그 젊은 여성이 이즈미의 딸 “유카”씨였다. 이즈미의 가정 상황 등, 잘 모르는 나는 “유카”씨가 너무나도 귀여워서, 무심코 “막내 따님이신가요?” 라고 했더니“ 아니요 제일 큰 딸입니다” 라고 했다.
그래서, 동북(東北)대학교에서 사회학을 전공하고 있는 딸이 있다고 하는 이야기를 생전에 그로부터 들은 기억이 났다.
“유카”씨는 그가 세상을 떠난 후, 이즈미의 유지를 이어서, 한국문화 연구를 하기로 결심하고 서울에 지금 유학중이라고 했다. 그리고 우연히 대구에 왔더니. 나의 강연이 있다고 하길래 들으러 왔다고 했다. 이건 우연일까?
나는 이즈미의 혼이 아직 “무도회 수첩”을 계속하고 있다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첫댓글 이즈미 세이이치의 몰랐던 부분들이 많이 밝혀지네요...
더구나 서울대 인류학과 이두현교수와의 관계가 나와서..
얼른 이런 자료들이 단행본으로 번역되어 나와 관심있는 분들이
편하게 책으로도 볼 수 있는 날들이 오기를 기대해 봅니다..
이강승 조장빈 두분 많이 수고하였습니다... 감사드리면서~~ 위하여@@
여정은 즐거우셨는지요.
형님의 글이 이어지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