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수없이 많은 문인과 시인이 있었지만 글쓰기 혹은 시 쓰기에 대한 완전한 방법이나 지름길을 알려 준 사람은 없었다. 그야말로 글쓰기에 왕도(王道)가 없다는 말이다. 오로지 자기 나름대로 방법을 터득해야만 한다.
어떤 돈 많은 부자에게 젊은 사람이 물었다고 한다. 어떻게 하면 돈을 많이 벌 수 있느냐고.
“돈을 많이 벌고 싶은가? 그렇다면 책에 없는 것을 알아야 하네.”
책에 없는 것을 알아야 한다니? 좀은 엉뚱한 말씀이다. 좋은 것, 옳은 것이 다 쓰여 있는 것이 책이다. 그런 줄 알고 믿고 있는 젊은이다. 그런데 책에 없는 것을 알아야 한다니…. 노인은 계속해서 말을 한다.
“책을 보고 돈을 많이 벌 수 있다면 이 세상에 부자가 안 될 사람이 없다네.”
듣고 보니 옳은 말씀이다. 이 말은 공부하기나 글쓰기에도 통하는 말이다. 서점에 가 보면 공부하는 방법에 대해서 쓴 책은 많고 많다. 그러나 그런 책을 읽어서 공부를 잘했다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 그런 책을 읽지 않아도 공부만 잘 하면 공부를 잘할 수 있는 일이다. 글쓰기도 그렇다. 글쓰기 잘하는 책이 세상에는 아주 많다. 그러나 그런 책만 읽어서는 글을 잘 쓸 수 없다. 실제로 글을 잘 써야 잘 쓰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에 대한 지침이 되는 말이나 방법은 아무 데도 없단 말인가? 이쯤에서 생각나는 것은 중국 송나라 때 문장가인 구양수(歐陽脩)란 분이 말했다는 삼다법(三多法)이다. 글쓰기를 잘하기 위해 많이 해야 할 세 가지 방법, 다독(多讀), 다작(多作), 다상량(多商量)이 그것이다.
처음은 역시 다독이다. 많이 읽기, 그것이 글쓰기의 기초다. 밭갈이 같은 것이다. 먼 길을 떠나는 사람에게 이정표나 지도를 주는 것과 같다. 어떤 경우든 많이 읽은 사람을 당해 내는 재주는 없다. 다른 사람의 글을 많이 읽는 것은 자기 집 울타리를 높이 쌓는 것과 같고, 담장을 멀리 두르는 것과도 같다. 글쓰기의 첫 단추가 끼워진다고 보아야 한다.
다음은 많이 쓰기다. 어쨌든 많이 쓰고 볼 일이다. 이것은 글씨를 쓰는 사람이나 그림을 그리는 사람도 마찬가지다. 어떤 분야든 많이 해 본 사람을 또한 당해 낼 재주는 없는 일이다. 사람의 능력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아는 능력이고 또 하나는 어떤 일을 할 줄 아는 능력이다. 시험문제를 푸는 것은 아는 것만으로도 가능하지만 글을 쓰는 것은 아는 능력 위에 할 줄 아는 능력이 더 있어야 한다.
쓰고 또 써야 한다. 무조건 많이 써야 한다. 지치지 말고 써야 한다. 어떤 시골 문학청년이 소설가 황순원 선생을 찾아간 일이 있었다고 한다. 가지고 간 작품을 읽고 난 황순원 선생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돌아가 자네 키만큼 원고지로 소설을 쓴 다음 다시 찾아오게.”
그 청년이 끝내 소설가가 되었다면 선생의 말대로 자기 키만큼 높이의 원고지에 소설을 썼을 것이고 소설가가 되지 못했다면 역시 자기 키만큼 높이의 원고지에 소설을 쓰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동양에서 그림을 그리는 사람들 사이에 자주 하는 말이 있다. 좋은 그림을 그리려면 “만 리를 여행하고 만 권의 책을 읽고 만 장의 그림을 감상하고 만 장의 그림을 그려야 한다”고 한다. 여기서 ‘만’이라는 글자는 ‘많다’는 뜻이다. 그렇게 많이 해야 할 것 네 가지 가운데 앞의 것 세 가지, 즉 여행과 책 읽기와 그림 감상은 견문(見聞) 넓히기에 해당된다. 좋은 그림을 위해서는 실지로 그림 그리기도 중요하지만 동시에 견문 넓히기가 중요하다는 것을 말한다. 시인도 마찬가지다. 좋은 글을 많이 읽음으로 소아(小我)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것이다.
끝으로 다상량은 많이 구상하는 일이다. 마음속에 글감을 오랫동안 품고 생각하고 또 생각하는 일이다. 나도 젊어서는 무조건 다독과 다작만 있으면 글쓰기가 잘 되는 줄로 알았다. 그러나 나이를 먹으면서 생각해보니 마지막에 나오는 이 다상량이란 것이 중요하다는 걸 알게 되었다. 이것은 마음속에 글감이나 감흥을 간직하고 그것을 키우고 숙성시키는 과정이다. 말하자면 김장 배추를 담아 곰삭게 하는 작업이 다상량이다.
구양수의 다상량과 관련해서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바로 구양수 자신에 대한 일화다. 구양수는 평소 잠을 잘 때 울퉁불퉁한 통나무를 그대로 다듬어 베개로 삼았다 한다. 사람들이 물으면 자기는 글을 쓰는 사람이므로 이런 베개를 베고 잠을 자야만 글이 잘 떠오른다고 말했다고 한다. 실지로 구양수는 그런 베개를 베고 잠을 잤는데 베개는 불편하므로 깊은 잠이 오지 않아 잠을 자면서도 글을 생각했고, 때로는 비몽사몽(非夢似夢, 꿈인지 생시인지 어렴풋한 상태)간에 비상한 아이디어의 글을 쓰기도 했다고 한다.
그래서 당시의 문사들에게 이 베개가 유행이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웬만한 문사들은 자기 집에 울퉁불퉁한 나무로 깎은 통나무 베개를 하나씩 준비해 두고 자기도 그럴듯한 문사라고 자랑했다고 한다. 허세다. 이것은 속은 모르고 겉만 보는 일로서 우스꽝스러운 일이긴 하지만 어쨌든 글을 쓰는 일에 있어서 구상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알려주는 좋은 일화라 할 것이다.
시인은 시만을 생각하며 사는 사람이다. 하루 24시간 전부를 생각할 수는 없겠지만 가장 많은 시간을 시한테 투자하는 사람이다. 나도 하루에 여러 차례 시를 생각하며 사는 사람이다. 심지어는 화장실에 갔을 때나 목욕을 할 때도 시를 생각한다.
어떤 때는 잠을 자면서도 시를 꿈꾼다. 꿈속에서 시의 문장이 떠오른다. 구양수의 베개, 그 비몽사몽일까? 아래에 적는 글은 며칠 전 꿈에 떠올린 「김밥」이란 제목의 작품이다.
괜스리 목이 메인다
어디론가는 떠나야만
할 것 같은 조바심
칸칸마다 고향
캄캄한 밤
별도 떴다
<함께 읽는 시 >
저녁눈/ 박용래
늦은 저녁때 오는 눈발은 말집 호롱불 밑에 붐비다
늦은 저녁때 오는 눈발은 조랑말 발굽 밑에 붐비다
늦은 저녁때 오는 눈발은 여물 써는 소리에 붐비다
늦은 저녁때 오는 눈발은 변두리 빈터만 다니며 붐비다
< ‘꿈꾸는 시인, 나태주의 시 이야기(나태주, 푸른길, 2017)’에서 옮겨 적음. (2019.10.26. 화룡이) >
첫댓글 둥근 소리, 둥근 소리를 생각합니다. 모나지 않은 소리 가을 들판을 휘돌아오는 여문 둥근 소리. "9월" 하고 소리내면 둥근 소리가 납니다. 9월이 시작되자 떠오른 둥근 소리를 10월 말이 되어서도 여전히 생각합니다.
'둥근 소리' 속에서 벗진 시 한 편이 태어날 날을 기다립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