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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414. 묵상글 ( 부활 팔일 축제 금요일. - 처음부터 다시 시작.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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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414. 부활 팔일 축제 금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처음부터 다시 시작
부활 8부 금요일-2018
예수님의 말씀대로 갈릴래아로 온 제자들은 하릴없이 그물을 칩니다.
그런데 베드로 사도가 “나는 고기를 잡으러 가네.”하고 말하는데
이 말이 제게는 매우 허탈하게 들리고
‘나는 고기나 잡으러 가네.’로 들리면서
‘그래 고작 고기나 잡으러 갈릴래아로 가라고 주님이 하신 건가?’하는
생각도 들고 ‘주님은 왜 늘 이런 식인가?’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프란치스코에게 아시시로 돌아가라고 하시고,
거기로 가면 프란치스코가 뭘 해야 할지 당신의 뜻과 당신의 계획을
알려주겠다고 하셨는데 알려주시지 않아 한 동안 방황하게 하셨지요.
아브라함에게도 그 늙은 나이에 살던 곳을 떠나라고 하시고,
떠나면 잘 되게 해주겠다고 약속하시지만
그게 언제 어떻게 이루어질지 모른 채 한동안 기다리게 하셨지요.
오늘도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갈릴래아로 가라 하셨지만 왜 가야 하는지,
가서 뭘 해야 하는지 알려주지 않은 채 가라고 하시니
제자들은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몰라 옛날 하던 일이나 하러 갑니다.
그렇다면 프란치스코에게 아시시와 제자들에게 갈릴래아는 어떤 곳입니까?
왜 그리로 돌아가게 하신 것입니까?
우선 살던 곳과 떠났던 곳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떠났습니까?
자기의 성취와 성공을 꿈꾸고 떠난 거지요.
그러니 떠났던 곳으로 다시 돌아감은 성공의 차원에서 보면 실패요,
욕망이나 계획의 차원에서 보면 포기와 좌절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사실 너무도 당연한 것이 하느님의 뜻과 계획을 따르기 위해서는
일단 자기의 뜻과 계획, 그것도 욕망에서 비롯된 자기의 뜻과 계획은
좌절이 되고 실패로 돌아가야만 하겠지요.
그래서 저도 이제는 거의 습관처럼 된 것이 있는데
제 뜻대로 되지 않았을 때 그것이 하느님의 뜻이라는 알아챔입니다.
일이든 사람과의 관계든 내 뜻대로 되지 않을 때
예전에는 내가 뭘 잘못해서 이렇게 됐나 저를 자책하고 반성하고,
또는 다른 누가 잘못하거나 방해해서 이렇게 됐다고 탓을 돌렸지만
이제는 내 뜻의 실패가 바로 하느님의 뜻이라고 받아들이는 겁니다.
그러면 하느님의 뜻은 나의 뜻을 꺾는 것뿐입니까?
우리 인간은 누가 자기의 뜻을 꺾지 않으면 그 못된 고집을 꺾겠다고 하며
어떻게 해서라도 뜻을 꺾으려고 하는데 주님께서도 그런 것입니까?
물론 그런 것이 아니지요.
욕망과 나쁜 계획을 좌절시키는 것도 하느님의 뜻이지만
더 중요한 하느님의 뜻은 새롭게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번 부활 판공성사 때도 수없이 얘기했지만
고백성사란 과거 죄를 고백하고 용서받는 것이기도 하지만
더 중요한 뜻은 옛 죄에 머물지 않고 새로 시작하는 것입니다.
과거의 잘못을 중지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습니다.
그것은 가던 차가 중지하고 움직이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잘못된 곳으로 가지 않는 것도 중요하지만
가야 할 곳으로 가는 것이 더 중요한 것이고,
그러므로 중지만으로 충분치 않고 새롭게 출발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이 갈릴래아로 돌아감은
<처음부터 다시 시작>의 의미임을 성찰하는 오늘이고
우리도 무엇은 중지하고
무엇은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는지 성찰하는 오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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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414. 부활 팔일 축제 금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와서 아침을 먹어라.”(요한 21,12)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두 번씩이나 발현하셨건만, 제자들은 자신들의 사명을 깨닫지 못했을 뿐 아니라 여전히 절망에 빠져있고, 과거의 생업이었던 고기 잡는 일로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밤새 한 마리의 고기도 잡을 수가 없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들을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어주셨건만, 그들은 자신들의 주제파악을 하지 못하고 엉뚱한 곳에서 그물을 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절망과 실의에 빠져 엉뚱한 곳에 그물을 던지고 있는 제자들의 삶의 현장으로 찾아오시어 말씀을 건네십니다.
“그물을 배 오른 쪽에 던져라.”(요한 21,6)
그들이 그렇게 하자,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많이 잡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새 날 아침을 열치시고 오시어, 숯불을 피워 고기를 구워서 식사를 준비하시고 부르십니다.
“와서 아침을 먹어라.”(요한 21,12)
주님을 먼저 알아본 이는 요한이었지만, 그분께 먼저 달려간 이는 베드로였습니다. 요한은 관조적이고 베드로는 열정적이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요한은 사랑을 받은 이가 되고, 베드로는 일을 맡은 이는 이가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부른 것은 와서 시중들라는 것이 아닙니다. 당신께서 그들에게 시중을 드시려고 부르신 것입니다. 사랑하시려고 부르신 것입니다. 당신께서 사랑하신다는 것을 믿게 하고 깨우쳐주고자 하신 것입니다. 비록 제자들은 당신을 버리고 도망쳤지만, 그리고 절망과 실의에 빠져 있지만, 당신께서는 그들을 소중히 여기십니다.
‘숯불에 구운 물고기’는 수난 받으신 당신의 몸을 드러내줍니다. ‘빵’은 십자가에서 찢어지고 바수어진 당신의 몸을 드러내줍니다. 그렇게 당신 자신을 바쳐 부활생명을 담은 사랑의 아침 밥상을 차려주십니다. 그러니 우리가 할 일은 먼저 당신의 밥상을 받아먹는 일입니다. 그것은 먼저 베풀어진 당신의 시중을 받는 일, 먼저 베풀어진 당신의 사랑을 먹는 일입니다. 그래야 당신의 색깔을 드러내고, 당신의 향기를 뿜게 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먼저 알아야 하는 것은 당신이 주님이시라는 사실이요, 당신의 사랑을 아는 일이요, 그리고 그 사랑을 먹는 일입니다. 그래야 그 사랑을 증거 하고 부활생명을 증거 하게 될 것입니다. 곧 저희의 삶으로 당신께 상을 차려 올려야 할 일입니다. 형제를 섬김으로 생명의 밥을 짓고, 말씀의 시중으로 반찬을 마련해야 할 일입니다. 희망과 믿음과 사랑의 국을 끓이고, 의탁과 내맡김의 생선을 구워 드려야 할 일입니다. 우리의 삶으로 상을 차려 올리는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와서 아침을 먹어라.”(요한 21,12)
주님!
이 아름다운 아침, 당신이 차려주신 생명의 밥을 먹고 새로워지게 하소서.
당신 생명과 사랑을 먹고 자란 제가 종일토록 당신의 색깔을 내고,
당신의 향기를 품게 하소서.
오늘 저의 삶이 당신께 차려 올리는 밥상이 되게 하소서.
형제 섬김으로 생명의 밥을 짓고, 말씀 시중으로 반찬을 마련하게 하소서.
희망과 믿음과 사랑의 국을 끓이고, 의탁의 생선을 굽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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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414. 부활 팔일 축제 금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주님께서 시키시는 대로 하면 된다
우리 앞길에는 항상 오르막길과 내리막길이 놓여 있습니다. 이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며 살아갑니다. 오르막길은 어렵고 힘들지만, 보람도 있고 기쁨도 있습니다. 내리막길은 쉽고 편하지만 밋밋하고 지루하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기왕이면 쉬운 길을 택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지나고 보면 거듭나는 길은 어렵고 힘든 것을 통해서입니다. 어려움을 겪지 않고는 결코 새로 태어날 수 없습니다. 하기 싫다고 하지 않고, 하고 싶다고 무턱대고 할 수는 없습니다. 해야 할 것이 있고, 하지 않아야 할 것도 있기 때문입니다. 해야 할 것은 고달프고 힘들어도 감당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 후 베드로는 다른 제자들과 함께 있었는데 그는 “나는 고기 잡으러 가네”하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다른 제자들도 “우리도 함께 가겠소”하였습니다. 스승이신 예수님의 죽음을 마주하여 마음이 착잡하고 힘들어 모든 것을 포기하고‘에라, 고기나 잡으러 가자!’하는 마음의 표현입니다. 아마도 그들은 예수님께서 돌아가셨고 그래서 마음을 잡을 수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들은 밤새 아무것도 잡지 못하였습니다. 마음이 콩밭에 있으니 고기를 잡지 못할 수밖에요. 최선을 다해 뭔가를 해도 주님과 함께하지 않으면 결실이 없습니다. 어느덧 아침이 될 무렵 예수님께서 나타나셔서 “얘들아 무얼 좀 잡았느냐?”하며 그들에게 말하였지만, 그들은 그분이 예수님인 줄을 알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져라, 그러면 고기가 잡힐 것이다”하고 이르셨고, 제자들은 그물을 던졌더니 고기가 너무 많이 걸려 그물을 끌어 올릴 수가 없었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제자가 베드로에게 “주님이십니다”하고 말하였습니다. 역시 사랑은 주님을 알아보게 합니다. 주님이라는 말을 듣자, 옷을 벗고 있던 베드로는 겉옷을 두르고 호수로 뛰어들었습니다. 호수의 출렁이는 물은 생각하지 않고 주님을 빨리 만나기 위한 마음이 컸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스승을 버리고 도망간 부끄러움과 죄책감에도 당신이 손수 마련하신 음식과 제자들이 수고로 길어 올린 고기를 합하여 직접 요리해 주심으로 사랑의 관계를 이어주셨습니다. 제자들은 “누구십니까?”하고 감히 묻지 못했습니다. 그분이 주님이시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실망과 좌절로 절망해있는 제자들에게 먼저 다가오신 주님께서 우리의 삶의 여정 안에도 그렇게 오십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알아본 것은 그물을 배 오른쪽에 던지고 난 후입니다. 오른쪽은 하느님의 권능을 상징하지만, 오른쪽이든 왼쪽이든 주님께서 명한 대로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어부인 그들이 자기의 자존심을 내세워 그대로 행하지 않았다면 아마도 그들은 여전히 주님을 알아 뵙지 못했을 것입니다. 내 뜻을 내려놓고 주님의 뜻을 받아들이면, 그분을 알아보게 되고, 많은 고기를 낚는 기적을 만나기도 합니다. 일단 주님의 지시에 순명 하고 나면 가슴이 뛰고 어떤 것도 감당하게 됩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안고 가면 그 십자가가 우리를 안고 갈 것입니다”(토마스 아 켐피스).
예수님께서 살아계실 때 여러 차례 당신의 수난과 죽음, 부활을 예고했지만, 제자들은 그것을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순명을 통해 부활하신 주님을 새롭게 만난 지금은 더 이상 “누구십니까?”하고 묻지 않았습니다. 우리도 주님과 함께함으로 지금의 실망과 좌절의 아픔을 거듭날 수 있는 은총의 기회로 알고 기뻐하는 오늘이기를 소망합니다.
물고기는 153마리였습니다. 아우구스티노에 따르면 153이란 1부터17까지 합한 숫자입니다. 마지막 숫자 17은 10과 7이 합쳐진 수로 10은 완전 수 십계명(율법)을 가리킵니다. 7은 은혜를 가리키는 숫자입니다. 성령의 일곱가지 은시를 생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153은 성령의 은혜를 통해 예수님께 오게 될 모든 신자를 가리킵니다. 전통적으로 153은 1부터 17까지의 완전수를 합한 수로 보편적이고 완전함을 나타내는 숫자입니다. 그물은 교회이며, 그토록 많은 수를 담고도 찢어지지 않은 것은 일치를 상징합니다.
숫자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가득 잡힌 물고기로 인해 영적 침체에 빠진 제자들이 다시 일어날 수 있었기 때문에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그 물고기 들은 삶의 목표와 의욕을 잃어버린 그들에게 새로운 목표와 의미를 제공합니다(송봉모).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요한2,5)하셨던 성모님의 권고대로 ‘주님께서 시키는 대로 할 때’ 물고기는 얼마든지 잡을 수 있습니다. 주님의 지시대로 그물을 던질 수 있는 은혜가 함께하기를 희망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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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414. 부활 팔일 축제 금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어릴 때입니다. 아버지의 어깨너머로 바둑을 배웠습니다. 처음에는 9점을 깔고 접바둑을 두었어도 이길 수 없었습니다. 1년 시간이 지나면서 호선으로 바둑을 두었고, 때로 제가 이긴 적도 있었습니다. 당시 저의 바둑은 급수가 7급 정도 되었습니다. 나중에 보니 바둑의 세계는 깊고도 넓었습니다. 아마추어가 있고, 프로의 세계가 있었습니다. 바둑의 수준에도 등급이 있었습니다. 저의 바둑은 우물 안의 개구리 정도였습니다. 신문에 연재되는 바둑의 기보를 보고, 문제 풀이를 하고, 친구들과 수담을 나누면서 바둑의 세계를 조금 이해하였습니다. 골프에 입문한지 오래 되지 않았습니다. 저는 그냥 남들 가는대로 따라가는 수준이지만 골프의 세계도 깊고 넓었습니다. 아마추어가 있고, 프로의 세계가 있습니다. 시간도 별로 없고, 운동 신경도 없고, 연습도 하지 않으니 저는 늘 걸음마 수준입니다. 바둑도, 골프도 언제 시작했느냐가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얼마나 연습했느냐가 중요합니다. 관심을 가지고, 꾸준히 연습하는 사람은 점차 등급이 올라 갈 것입니다.
세례를 받아서 신앙인이 되지만, 신앙에도 등급이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분입니다. 그분은 더욱 커지셔야 하고, 나는 더욱 작아져야 합니다.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드릴 자격도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여인의 몸에서 태어난 사람 중에 요한보다 더 큰 사람은 업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나라에서는 작은이라도 요한보다 크다.”고 하셨습니다. 분명 신앙에도 등급이 있습니다. 언제 세례를 받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어떻게 사느냐가 중요합니다. 직책과 직분이 중요한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의 위선과 가식을 책망하셨습니다. 그들의 교만과 편견을 책망하셨습니다. 그들은 남에게 보이기 위해서 단식을 하였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짐을 남에게 떠넘겼습니다. 그들은 잔치에 초대 받으면 높은 자리에 앉으려고 하였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지킬 수 없는 사람들을 죄인으로 단죄하였습니다. 장애인들은 죄를 지었기 때문에 장애인이 되었다고 판단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칭찬하시고 인정하시는 신앙의 등급이 있습니다. 직책과 직분이 중요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방인도, 장애인도, 죄인도, 과부도, 세리도 예수님께 인정받았습니다. 백인대장은 예수님께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주님, 그냥 한 말씀만 하십시오. 그러면 제 종이 곧 나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백인대장의 굳센 믿음을 칭찬하셨습니다. 하혈하던 여인은 예수님의 옷자락만이라도 만지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혈하는 여인의 간절함을 칭찬하셨습니다. 과부는 성전에서 정성을 다해 헌금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과부의 헌금을 칭찬하셨습니다. 소경은 예수님께 자비를 청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소경의 눈을 뜨게 해 주셨습니다. 주님의 자비를 청하는 소경의 행동을 칭찬하셨습니다. 자캐오는 예수님을 집으로 초대하였습니다. 자캐오는 재산의 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주겠다고 하였습니다. 빚진 것이 있다면 4곱절로 갚겠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캐오의 회개와 나눔을 칭찬하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이 가정은 구원 받았다.”라고 선포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그물을 배 오른쪽에 던져라. 그러면 고기가 잡힐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배의 왼쪽은 ‘성공, 명예, 권력’이라고 생각합니다. 그쪽으로 그물을 던지면 한 마리도 잡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성공, 명예, 권력을 향해 그물을 던지면서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쪽에서는 결코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없습니다. 그물이 찢겨지고, 자칫 배가 침몰하기도 합니다. 배의 오른쪽은 ‘헌신, 나눔, 사랑’이라고 생각합니다. 그쪽으로 그물을 던지면 많은 것을 끌어 올릴 수 있습니다. 기쁨과 감사를 끌어 올릴 수 있습니다. 희망과 믿음을 끌어 올릴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물을 배 오른쪽으로 던질 때 우리 신앙의 등급은 높아질 것입니다. 우리가 그물을 배 왼쪽으로 던질 때 우리 신앙의 등급은 낮아질 것입니다. 선택은 우리의 몫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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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414. 부활 팔일 축제 금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깔끔한 것을 좋아하십니까? 아니면 지저분한 것을 좋아하십니까? 또 정리 정돈이 잘 된 것이 좋습니까? 아니면 혼란스러운 것이 좋습니까?
예전에 어떤 목욕탕을 갔던 기억이 납니다. 철분 성분이 가득해서 ‘홍염천’이라고 불리는 곳으로, 피부병에 좋다는 이야기가 많은 곳이었습니다. 평소에는 사람이 가득하다는데, 이른 아침에서 가서인지 한산했습니다. ‘홍염천’이라 불리는 붉은 탕 안에 들어가 몸을 담갔습니다. 저 말고도 몇 분이 그 안에서 몸을 담그고 계셨는데, 잠시 뒤 한 분이 일어났는데 깜짝 놀랐습니다. 글쎄 온몸에 피부병처럼 보이는 종기가 가득한 것입니다. 피부병 환자와 같은 탕 안에 있었다는 생각에 기분이 좋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곳이 피부병에 좋다는 말이 떠올리면서, 멀쩡한 제가 들어간 것이 오히려 잘못이었구나 싶더군요.
우리는 깨끗하고 깔끔한 것, 정리 정돈이 잘되어 있는 것을 기본적으로 좋아합니다. 그래서 주님께도 깔끔하게 자신의 문제를 해결해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렇게 깔끔하지 않으신 것 같습니다. 침을 뱉어 진흙을 개어 눈에 바르시지를 않나, 직접 손을 얹어 주시지를 않나, 손가락을 양 귀에 넣고 침을 뱉어 그의 혀에 손을 대신 적도 있습니다.
깨끗하고 깔끔하지 않습니다. 말씀 한마디로 그냥 고쳐주시면 얼마나 깨끗하고 깔끔합니까? 심지어 당신 죽음도 깔끔하지 않았습니다. 피땀 흘리며 수난하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는 가장 비참한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주님은 깨끗하고 깔끔하지 않으십니다. 대신 사랑에만 집중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착각에 빠져서 주님의 응답을 함부로 판단합니다. 깔끔하게 자기가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불평불만하고, 그 응답이 잘못되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주님은 늘 사랑이 우선이었고, 사랑의 실현이었음을 시간이 지난 뒤에 비로소 깨닫게 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 이후, 제자들은 모든 것을 포기한 듯이 일상으로 돌아가서 고기를 잡으러 나갑니다. 아무것도 잡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부활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을 때 비로소 고기를 많이 잡을 수 있었습니다. 주님이 안 계실 때는 아무것도 잡을 수 없었지만, 주님과 함께하면서는 전혀 다른 결과를 가져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몸소 숯불을 피워 물고기를 굽고 빵도 준비해놓은 장면에서 더 크게 사랑을 체험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뜻을 외면한 채 일상으로 돌아갔는데도 아무 말 없이 배고픈 자신들을 위해 식사까지 마련하시니 말입니다.
이처럼 주님께서는 우리가 실수하거나 잘못해도 늘 먼저 사랑으로 다가오십니다. 그뿐 아니라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먼저 마련해 주십니다. 따라서 언제나 주님의 사랑에 집중하면서 함께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지금의 결과에 실망하고 좌절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도 주님을 초대할 수 있는 용기와 지혜가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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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신이야말로 사랑의 연습이다. 헌신으로 사랑은 자란다(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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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414. 부활 팔일 축제 금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우리를 찾아 오시는 부활하신 주님
-“와서 아침을 먹어라.”-
“집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네.
주님이 이루신 일, 우리 눈 에는 놀랍기만 하네.
이날은 주님이 마련하신 날, 이날을 기뻐하며 즐거워하세.”(시편118,22-24)
부활 팔일 축제 주간의 말씀이 한결같이 역동적이고 충만한 파스카의 기쁨을 전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의 고기잡이 기적 이야기는 공관복음(마태4,18-22;마르1,16-20;루카5,1-11) 앞부분 소명사화와 연결되지만, 오늘 요한복음은 복음 마지막 부분에 부활하신 주님의 발현사화에 연결됩니다.
오늘 복음은 고기잡이 기적이 주가 아니라 부활하신 주님께서 일곱제자에게 발현하신 일화로 의미 풍성한 상징들로 가득합니다. 복음을 묵상하는 순간 떠오른 강론 제목이 “우리를 찾아 오시는 부활하신 주님”이었고, 부제는 “와서 아침을 먹어라.” 라는 주님의 다정한 초대 말씀이었습니다.
“하느님을 찾는 사람” 보다 “사람을 찾는 하느님”이 더 복음적이고 고맙고 감동적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찾기 전에 이미 우리를 찾아오시는 겸손한 사랑의 주님이십니다. 무려 26년전 이런 깨달음의 자작 애송시가 지금도 생생히 떠오릅니다.
“나무에게 하늘은
가도가도 멀기만 하다
아예 고요한 호수가 되어 하늘을 담자”-1997.2.
하느님을 찾는 노고를 잠시 멈추고, 찾아오시어 함께 계신 주님을 마음의 호수에 담아 모시자는 권고입니다. 어제처럼 부활하신 주님은 오매불망寤寐不忘 제자들이 그리워, 보고싶어 당신이 돌아가신후 갈릴리 호수, 생업현장으로 돌아간 제자들을 찾아 오십니다.
말그대로 우리가 그리워 보고싶어 찾아 오시는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잔치 상황과 흡사합니다. 복음 서두부터 풍부한 의미가 계시됩니다. 아마도 예수님 돌아가신후 고기잡이 현장의 생업에 종사하게 된 일곱제자들의 실의와 좌절상태를 반영하는 듯 합니다. 여기서 일곱은 요한에게 풍부함을 상징하는 숫자입니다. 그 일례로 요한복음에는 일곱의 표징들이 나오고 “나는 이다”라는 예수님의 신원도 일곱으로 나타납니다.
제자들은 밖으로 나가 배를 탔지만 그날 밤에는 아무것도 잡지 못했다니 제자들의 내면은 말그대로 “텅 빈 허무”의 캄캄한 어둠이었을 것입니다. 바로 이 장면에서 연상되는 주일미사후 낮기도대신 바치는 시편 127장 전반부 말씀입니다.
“주께서 집을 아니 지어 주시면, 그 짓는 자들 수고가 헛되리로다.
주께서 도성을 아니 지켜 주시면, 그 지키는 자들 파수가 헛되리로다.
이른 새벽 일어나 늦게 자리에 드는 것도,
수고의 빵을 먹는 것도 너희에게 헛되리니”(시편127,1-2ㄱ)
그대로 오늘 복음의 전반부 제자들의 심정적 고백이었을 것입니다. 하느님 빠진 텅 빈 허무의 삶은 세상 무엇도 대체해줄 수 없기 때문입니다. 텅빈 배는 밥으로 채울수 있어도 허기虛氣로 “텅 빈 마음”은 하느님만으로 채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어지는 구절의 장면이 참 아름답고 구원의 진리를 함축하고 있습니다.
‘어느덧 아침이 될 무렵, 예수님께서 뭍가에 서 계셨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분이 예수님이신 줄은 알지 못하였다.’
얼마나 멋지고 구원의 위로가 되는 장면인지요! 밤새 아무것도 잡지 못한 제자들을 배후에서 물끄러미 지켜보셨을 주님께서, 찬란한 아침노을 배경으로 동터오는 태양과 더불어 당신을 계시하려는 순간입니다. “절망은 없다”라는 진리를 보여줍니다. 실의와 좌절, 낙심과 절망에 빠져 있을 바로 그때 거기 그 자리에 주님은 계시다는 것입니다.
“예들아, 무얼 좀 잡았느냐?”
“못잡았습니다.”
“그물을 배 오른 쪽에 던져라.”
실의와 좌절감에 빠진 제자들을 친히 찾아 오신 부활하신 파스카의 예수님이십니다. 제자들이 그물 가득 고기를 잡아 올리는 순간 눈이 열려 주님을 알아본 애제자의 “주님이십니다!”라는 고백에 이어 주님의 출현에 반가움의 절정에 도달한 수제자답게 베드로는 겉옷을 두른채 호수로 뛰어 듭니다.
참으로 오늘 복음은 한폭의 그림처럼 아름답고 풍부하고 역동적입니다. 백쉰 세 마리의 고기들로 가득찬 그물은 미래의 교회의 풍성한 선교 열매를 상징적으로 보여 주며, 그 많은 고기들에도 그물이 찢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은 교회일치의 견고함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이어지는 성체성사 미사를 상징하는 장면도 얼마나 아름다운지요!
“와서 아침을 먹어라.”(요한21,12)
똑같은 파스카의 주님께서 우리를 미사잔치에 초대해 주시며 하시는 말씀처럼 들립니다. 참으로 제자들의 “텅빈허무”의 마음은 “텅빈충만”으로 바뀌었듯이 우리 역시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그러합니다. “먹어라” 말마디를 대하니 문득 열왕기 상권에서 이세벨을 피해 달아나다 싸리나무 아래 잠이 든 엘리야를 흔들어 깨우던 천사의 말이 생각납니다. 그대로 광야여정중 미사에 참석한 우리들을 향한 말씀처럼 들립니다.
“일어나 먹어라. 갈 길이 멀다.”(1열왕19,7)
예전 예수님을 세 번이나 배반했던 소심하고 우유부단하고 유약한 베드로가 아니니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일치의 삶을 살게 된 덕분일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베드로의 리더십이 빛나지만 제1독서 사도행전의 최고의회에서 설교는 그 리더십의 절정을 이룹니다. 사도행전의 전반부 사도들의 말을 들은 많은 이들이 믿게 되었는데 장정만도 무려 오천명 가량 되었다니, 복음의 ‘그물에 가득 담긴 고기들’의 상징적 장면은 교회의 풍성한 선교 열매로 실현되고 있음을 봅니다.
이어지는 태생 불구자의 치유과정에 결정적 역할을 하신 부활하신 파스카 예수님께 대한 베드로의 설교는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압권壓卷입니다. 얼마나 멋지고 확신에 넘친 베드로의 감동적 설교인지, 그대로 오늘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우리에게 주는 말씀으로도 손색이 없습니다.
“나자렛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곧 여러분이 십자가에 못박았지만 하느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일으키신 바로 그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여러분 앞에 온전한 몸으로 서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집짓는 자들에게 버림을 받았지만,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신 분’입니다.
그분 말고는 다른 누구에게도 구원이 없습니다. 사실 사람들에게 주신 이름 가운데에서 우리가 구원받는 데에 필요한 이름은 하늘 아래 이 이름밖에는 없습니다.”(사도4,10ㄴ-12).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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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414. 부활 팔일 축제 금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베드로 사도가 말합니다. “나는 고기 잡으러 가네.”라고 말입니다. 이 말이 기쁨에서 흘러나온 말이 아님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희망과 열정에서 나온 말도 아닙니다. 베드로 사도의 이 말은 좌절과 포기, 슬픔과 의욕 상실에서 나온 말입니다.
희망이 사라졌기에 자신이 제일 잘하는 것, 눈 감고도 할 수 있는 고기잡이하러 가는 것입니다. 희망을 걸었던 우리 주님께서 돌아가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베드로의 희망은 하느님의 아들로서, 구세주로서의 예수님께 걸었던 희망이 아닙니다. 베드로의 희망은 위대한 스승이신 예수님의 모습과 당대에 권위를 가졌던 바리사이와 율법 학자들에 대항할 수 있는 권위를 가진 모습에 희망을 걸었었습니다. 주님께서 살아생전에 ‘당신의 하느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고백한 베드로이지만 그 희망은 다른 곳에 걸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어떤 모습에 희망을 걸고 있나요? 기도를 들어주는 주님, 치유해주시는 주님, 우리의 고난을 모두 물리쳐주는 권위를 가진 주님인가요.
만약 그렇다면 우리 또한 베드로가 희망을 걸었던 주님의 모습을 사랑하고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러한 모습과 더불어 희생하고 나약하며 아버지 하느님의 말씀에 순명하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그 순명이 우리에게 구원을 가져다주었습니다.
베드로는 그런 주님을 알아보지 못한 것에 대한 후회와 미안함도 지니고 있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을 알아본 순간 그는 그분을 뵙기 위해 물속으로 뛰어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분을 처음 만난 그날처럼 모든 것을 던져두는 말입니다.
그러나 베드로가 만난 주님은 예전의 주님과 달랐습니다. 베드로의 믿음도 예전과 완전히 다른 믿음이 되었습니다.
하느님 아버지께 모든 것을 봉헌하는 주님의 믿음은 이제 사도 베드로의 믿음이 되었습니다.
도마소리
기분 좋을 때 도마소리
탁탁, 탁탁, 탁탁탁….
기분 좋지 않을 때 도마소리
탁탁탁탁탁탁…. 으아…. 탁탁탁
우리 안에 있는 마음은 그렇게
밖으로 나옵니다.
도마를 통해서 나오기도 하고
눈빛을 통해서 나오기도 하고
손짓 하나로 나오기도 합니다.
오늘은 저의 도마 소리가
아주 아주 경쾌한 날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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