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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경환의 명시감상 제1권에서
송광사 해우소
최명률
근심, 우울
죄
다
풍
덩
오오, 못난
덩어리들
주접 소리
발효되어
솔밭에서
지저귀는
까만 어둠
승천하여
천상에서
빛이 나는
----최명률, [송광사 해우소]({나비, 봄을 짜다},종려나무
2007년) 전문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시간도 재화가 되고, 공간도 재화가 된다. 여가와 놀이의 시간도 돈을 주고 사지 않으면 안 되고, 단 하룻밤만을 쉬고 가는 숙소도 돈을 주고 사지 않으면 안 된다. 자본주의 사회는 이처럼 흔하고 흔해빠진 것들도 재화로 만들어 버렸지만, 그 반면에, 다른 한편으로는 이처럼 흔한 것을 흔하지 않게 만들어 버리고, 그 흔하지 않을 것을 통해서 새로운 재화를 만들어내고 있다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흔한 것이 흔하지 않게 되면 그 고귀성과 희소성 때문에 그 값어치가 상승하게 되고, 따라서 그 값비싼 재화들은 부자들만의 특권이 되게 되어 있다. 그 옛날에는 맑은 물과 깨끗한 공기와 시골의 전원주택이 별 다른 재화가 될 수가 없었지만, 오늘날에는 맑은 물과 깨끗한 공기와 교외의 전원주택이 귀중한 재화가 되었고, 대부분의 일반 시민들은 그 재화로부터 멀어지게 되었다. 오늘날의 기계문명과 대도시로의 군집형태는 무차별적으로 자연환경을 파괴시켰던 것이고, 대부분의 부자들이 맑고 깨끗한 교외의 별장지대에서 사는 것에 반하여, 대부분의 시민들은 더럽고 추한 대도시의 삶으로부터 벗어날 수가 없게 된 것이다. 유엔 산하 ‘기후변화위원회’는 지구의 온난화로 인한 ’전 지구적 재앙‘을 막기 위해서는 2015년을 정점으로 ’온실가스‘를 대폭 줄이지 않으면 안 된다고 경고를 한 바가 있고, 또한 ’교토의정서‘에 따라서, 2013년 이후에는 우리 대한민국도 의무감축 대상국이 될 수밖에 없게 되어 있다. 2006년 3월 24일, ’문화유산 및 자연환경 국민신탁법‘이 국회를 통과했고, 일년여의 유예기간을 거쳐서 2007년 3월 25일부터 실질적인 시행단계로 들어갔다고 한다. 유엔 산하 ‘기후변화위원회’의 경고가 아니더라도, 이 ’문화유산‘과 ’자연환경‘에 대한 ’국민신탁법‘이 우리가 살고 있는 대한민국의 국토가 얼마나 오염되어 있는가를 역으로 반증해주고도 있는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는 탐욕스러운 입만이 크게 찢어졌지, 영원한 소화불량증의 환자들이며, 그들의 소화불량증에 의하여 더 이상의 맑은 물과 깨끗한 공기와 푸르고 푸른 숲은 찾아볼 수도 없게 되어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시는 삶 자체이며, 자연 자체이다. ‘도법자연’이라는 노자의 사상이 그것을 말해준다. 시는 우리에게 먹는 법과 배설하는 법을 가르쳐 주고, 시는 우리에게 사는 법과 죽는 법을 가르쳐 준다. 먹는 법과 배설하는 법, 그리고 사는 법과 죽는 법을 가르쳐 주는 시는, 그러니까 삶의 이치와 자연으로부터 멀어진 우리 인간들에게, 그 본래의 삶과 자연으로 되돌아가게 해주고 있는것인지도 모른다. 시는 이 세상의 떠돌이--나그네들에게 있어서 잃어버린 고향에 대한 향수이자, 그 고향을 찾아가려는 의지 자체라고 할 수가 있다. 따라서 인간의 사상과 감정의 표현에 불과한 시가 우리 인간들의 삶 자체가 되고, 자연 자체가 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말대로, 시에는 카타르시스의 기능이 있다. 이 카타르시스의 기능은 ‘감정의 정화’를 뜻하는 윤리적 기능과 ‘감정의 배설’을 뜻하는 의학적 기능으로 풀이 될 수가 있다. 근심과 우울을 씻어내고 근심과 우울을 치료한다는 것은 시의 진정제 효과에 해당되고, 그진정제 효과를 떠나서 우리 인간들의 삶의 의지를 북돋아주는 것은 시의 강장제 효과에 해당된다. 그리고 그 꿈이 달성되었을 때는 하늘을 찌를듯한 환희에의 기쁨(‘흥분제 효과’)으로 나타나고, 그 하늘을 찌를듯한 환희에의 기쁨은 그 즉시, 영생불사의 효과로 이어지게 된다. 시는 진정제 효과와 강장제 효과, 그리고 흥분제 효과와 영생불사의 효과가 있다는 것이 나의 주장이며, 이 네 가지 효과에 대해서는 나의 {행복의 깊이} 제2권, 제1장, [영원불멸의 삶에 대하여]를 참조하여 주기를 바란다.
나는 지금, 이 순간에도, 여러분들에게 과연 건강한 정신과 건강한 육체를 지니고 있는가라고 묻고 싶은 마음을 어쩌지 못하면서 살아간다. 왜냐하면 건강한 정신 속에 건강한 육체가 깃들어 있고, 건강한 육체 속에 건강한 정신이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 인간들은 대부분이 건강한 정신과 건강한 육체를 상실한 환자들이고, 그 증세는 소화불량증으로 나타난다고 나는 생각한다. 소화불량증은 단순히 상한 음식을 먹거나 지나치게 과식하는 것을 뜻하지 않고, 우리 인간들의 욕망이 지나치게 크다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그 욕망의 이상증세는 ‘정신의 소화불량증’과 ‘육체의 소화불량증’, 그리고 우리 인간들의 삶의 터전인 ‘자연의 소화불량증’으로 나타난다고, 나는 생각하고 있다. 정신의 소화불량증은 그 커다란 욕망에 반하여 근심과 우울로 나타나고, 육체의 소화불량증은 소화기관의 장애로 인한 설사로 나타나며, 그리고 자연의 소화불량증은 엘리뇨와 라니냐처럼 이상기후현상으로 나타난다. 근심과 우울은 지나친 욕망을 소화시키지 못한 정신의 설사이며, 엘리뇨와 라니냐는 우리 인간들의 욕망을 소화시키지 못한 자연의 설사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근심과 우울은 모든 일이 제대로 풀리지 않아 슬프고 괴로운 것을 말하고, 엘리뇨와 라니냐는 더 이상의 맑은 물과 깨끗한 공기와 푸르고 푸른 숲을 생산해낼 수가 없는 이상기후현상을 뜻한다.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나도 소화불량증 환자이고, 당신도 소화불량증 환자이고, 그리고 그대들도 소화불량증의 환자들에 지나지 않는다.
만일, 그렇다면 우리 인간들은 어떻게 해서 이 정신과 육체와 자연의 소화불량증을 치유할 수가 있단 말인가? 고통을 발견하고 그 고통을 치료하는 것이 모든 시와 종교의 궁극적인 목표이라면, 그것은 우리 인간들의 욕망을 적절하게 통제하고 절제하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나는 욕망을 적절하게 통제하고 절제하라고 말하지, 욕망을 제거하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욕망을 근절시킨다면 우리 인간들의 삶의 의지가 없어지고, 욕망을 무한대로 방치해둔다면 우리 인간들의 삶의 터전인 자연이 파괴될 수밖에 없다. 어느 때는 욕망이 약이 되고, 어느 때는 욕망이 독이 된다. 욕망은 이 어렵고 힘든 세상 속에서도 보다 나은 내일을 향해가는 원동력이 되어주기도 하지만, 그러나 그 욕망은 상호경쟁적인 이전투구 속에서 모든 삶이 끝장이 나게 되는 ‘만악의 근원(독약)’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욕망을 통해서 이 세상의 삶을 살아가면서도 그 욕망을 절제한다는 것, 자연을 통해서 모든 천연재화들을 얻고 있으면서도 그 자연을 파괴시키지 않는다는 것----, 바로, 이것이 오늘날 우리 인간들이 풀어나가야 할 지상최대의 난제들이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최명률 시인은 전라남도 해남에서 태어났고, 조선대학교 국어교육학과를 졸업했으며, 2006년도에, 우리 {애지}를 통해서 이제 마악, 등단한 신진 시인이다. 그는 전통적인 서정시의 기법과 현대적인 산문시의 기법에 다같이 능통한 시인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이 [송광사 해우소]는 전통적인 서정시에 그 파격의 옷을 입히고, 그 풍자와 해학적인 웃음과 함께, 도덕적인 숭고함마저도 물씬 풍겨나게 하고 있다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전통적인 서정시에 파격의 옷을 입혔다는 것은
근심, 우울
죄
다
풍
덩
이라는 시구에서처럼, 이 ‘해우소’에서의 과정을 그 시각적인 효과를 고려하여 ‘극사실주의적’인 기법으로 표현했다는 것을 말하고, 그 파격적인 형식이 전통적인 서정시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은 “오오, 못난/ 덩어리들// 주접 소리/ 발효되어/ 솔밭에서/ 지저귀는// 까만 어둠/ 승천하여/ 천상에서/ 빛이 나는”이라는 시의 형식이 전통적인 서정시의 형식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 최명률 시인은 이 [송광사 해우소]에서, 그곳에서 ‘큰일’을 보는 것은 ‘근심, 우울/ 죄/ 다/ 풍/ 덩’ 떨어뜨리는 것이라고 말하고, 또한 그 똥덩어리들을 “오오, 못난 덩어리들“이라고 말한다. 왜, 하필이면, 똥을 누는 일이 근심과 우울을 죄다 떨어뜨리는 일이 되었던 것이고, 또한, 왜, 하필이면, 그 생리적인 자연의 배설물이 “오오, 못난/ 덩어리들”이 되었던 것일까? 해우소는 풀해(解), 근심우(憂), 곳소(所)로 되어 있고, 따라서 해우소는 글자 그대로 근심을 푸는 곳이 된다. 그러나 그 해우소의 기원은 해의소(解衣所)였다고 하는데, 왜냐하면 제 아무리 법력이 큰 스님도 그곳에서는 옷을 벗지 않으면 안 되게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 ‘해의소’가 ‘해우소’로 새롭게 명명(변형)된 것은 고통을 극복하는 것이 지상최대의 과제였던만큼, 우리 인간들의 형이상학적인 열망이 반영되었기 때문이었다고 해도 틀림이 없을 것이다.
우리는 항문을 통해서 소화되고 난 노폐물들을 배설하게 된다. 우리가 음식물을 통해서 자양분을 얻고 난 나머지의 노폐물들은 대장을 가득 채우게 되고, 이 노폐물들이 쌓이게 되면 일정한 수준의 힘으로 항문괄약근에 압력을 가하게 된다. 이 노폐물들이 잘 배설되면 모든 긴장이 해소되는 쾌감을 맛보게 되지만, 그러나 그렇지가 못하게 되면 매우 심각한 변비증으로 고생을 하게 된다. 이 배변의 효과는 긴장의 해소라는 육체적인 쾌락을 가져다가 주게 되고, 따라서 모든 근심과 우울을 죄다 떨어뜨리는 일은 그 육체적인 쾌락에다가 정신적인 쾌락마저도 가중시키는 일이 되고 있는 것이다. 이제 해우소는 단순한 해우소가 아니다. 그 해우소는 모든 근심과 걱정을 털어버리고 새로운 옷을 갈아입는 성소이며, 그곳을 나오는 사람은 진흙 속의 연꽃처럼, 새로운 인간, 즉, 새로운 부처로서 탄생을 하게 되는 것이다. “오오, 못난 덩어리들”은 단순히 못난 덩어리들이 아니라, 만악의 근원이었던 욕망의 덩어리들이었던 셈인 것이다. 하지만 이 욕망의 덩어리들은 특정의 개체가 필요한 만큼의 영양분을 소화시키고 난 다음의 노폐물이지, 전혀 쓸모가 없는 어떤 것이 아니다. 나에게 쓸모가 있는 것은 좋은 것이고, 나에게 쓸모가 없는 것은 나쁜 것이다. “오오, 못난 덩어리들”이라는 시구에는 자기 자신의 입맛에 따라서 가치판단을 하는 우리 인간들의 도덕적인 잣대가 들어 있는 것이지만, 그러나 그 쓸모 없는 배설물들은 새로운 생명의 에너지가 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주접 소리/ 발효되어/ 솔밭에서/ 지저귀는”이라는 시구가 그것이고, “까만 어둠/ 승천하여/ 천상에서/ 빛이 나는”이라는 시구가 그것이다. ‘주접 소리’는 ‘음식물에 대하여 더럽게 욕심을 부리는 태도’와 ‘자질구레한 일에 속된 욕망을 드러내는 태도’를 뜻하지만, 그러나 여기서의 이 ‘주접소리’는 욕망의 화신인 똥덩어리가 내는 소리가 된다. 따라서 이 욕망의 똥덩어리가 발효되어 어느 새 솔밭에서는 수많은 새들이 지저귀게 된다. 그리고 그 해우소에서 큰일을 보는 것은 “까만 어둠”이 ”승천하여“, 하늘에서 더없이 빛나는 별이 되는 일인 것이다. 왜냐하면 그 주체자는 모든 근심과 우울을 털어버리고, 인간 자체를 초월하는 신적인 인간이 될 수가 있기 때문이다.
최명률 시인은 이 [송광사 해우소]라는 시를 통해서, 정신과 육체, 그리고자연의 소화불량증에 시달리고 있는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질병들을 치료하고, 이 시의 신전을 통하여 우리 인간들의 지상낙원을 건설하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의 파격적인 첫 연의 시구는 서정성의 회복에 대한 그의 의지의 표현이며, 그 ‘못난 똥덩어리들‘에 대한 풍자와 해학은 탐욕스러운 입만이 크게 찢어진 우리 인간들에 대한 질타의 채찍이었던 셈이다. 이제 우리는 우리의 욕망과 소화기관 사이에서 균형을 취하지 않으면 영원한 소화불량증의 환자들로서 이 세계와, 모든 생명들과, 심지어는 자기 자신들마저도 영원히 회복될 수 없는 파멸의 늪에서 빠져나올 수가 없게 될는지도 모른다. 노폐물을 제대로 배설해내지 못하면 그는 소화불량증의 환자가 되고, 근심과 우울을 제대로 배설해내지 못하면 그는 정신병자(정신의 소화불량증 환자)가 되고, 그리고 마지막으로, 맑은 물과 깨끗한 공기와 푸르고 푸른 숲을 생산해내지 못하면 그는 자연의 소화불량증 환자가 될 수밖에 없다. 이제 똥을 눈다는 것도 근심과 우울을 털어버리는 일이 되었고, 또한 그 근심과 우울을 털어버리는 일 역시도 그 근심과 우울을 발효시켜서 수많은 새와 짐승과 푸르고 푸른 숲을 가꾸는 일이 되었다. 옷을 벗는다는 것은 과거의 낡은 인간의 탈을 벗어버린다는 것을 뜻하고, 그 옷을 다시 입는다는 것은 부처와 예수처럼 새로운 인간으로 태어난다는 것을 뜻한다. 이 자연의 윤회사상은 “까만 어둠/ 승천하여/ 천상에서/ 빛이 나는” 기적을 연출해내며, 이 세상의 삶을 더없이 거룩하고 숭고하게 만들어 준다. 어제의 시간은 오늘의 시간이 아니고, 오늘의 시간은 내일의 시간이 아니다. 우리 인간들이 날이면 날마다 새롭게 태어나야 할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최명률 시인의 [송광사 해우소]를 읽는다는 것은 이 세상의 근심과 우울을 모두 털어버린다는 것을 뜻한다. 우리는 모두가 다같이 튼튼한 소화기관과 위장을 자랑해야만 하고, 아무쪼록 그 못난 똥덩어리들을 더욱 더 잘 발효시키지 않으면 안된다.
오오, 새로운 성자의 탄생지인 송광사의 해우소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