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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를 방해하지 마라
출 5 : 1 - 14
오늘은 6.25 한국전쟁이 발발한지 56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예전 같으면 6.25에 대한 각종 행사도 벌어지고 또 ‘잊지 말자 6.25!’ 라는 구호를 외치기도 하였습니다.
요즘에는 좌익정부가 들어선 이후로 6.25전쟁은 남침이 아니라 북침이라고 억지 주장을 하고 있는 무리들이 판을 치고 있습니다. 지난 주간에 광주에서 있었던 6.15기념대회에서 북측에서 온 사람들은 어린 중,고등학생들을 모아놓고 우리가 통일을 하려고 해도 미국의 외세 때문이라고 하여 물의를 일으켰고, 또 때를 같이 하여 김대중 전 대통령은 노벨평화상을 받은 사람들을 불러다가 놓고 기조연설을 통해서 외세에 의해 분단된 우리 조국을 어떻게 운명으로 받아드려야 하겠느냐는 망발을 하였습니다.
일본에게는 항상 역사왜곡을 한다고 집안에서는 방방 뛰는 소리를 하면서 어찌 정작 우리의 역사는 왜곡 하고 있는지 이해를 할 수가 없습니다.
이스라엘 나라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의 히틀러가 차마 말로도 할 수 없는 잔악한 행동으로 유대인 600만 명을 학살하였습니다. 그들은 독립을 한 후 1948년 독립 기념관을 건립하고 독립 기념관으로 가는 고속 도로변에 나치에 희생당한 영령들을 추모하는 의미로 600만 그루의 가로수를 심었습니다. 그리고 기념관 지하에는 꺼지지 않는 불이 있는데 그 곳에 써 있기를 “용서는 하되 잊지는 말자” 는 글귀가 있다고 합니다.
오늘의 우리 한국도 과거의 아픈 역사를 되새기면서 언제까지나 감상주의로 있을 수는 없습니다. 세상이 많이 바뀌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사람들처럼 용서는 하되 잊지는 말아야 합니다. 오늘의 젊은 세대들은 전쟁의 고통이 어떤 것인가를 모르기 때문에 자꾸만 환상적인 생각을 하는데 이는 경계해야 할 생각입니다.
성도 여러분!!
저는 오늘 6.25전쟁에 대한 말씀을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이 마침 6.25전쟁이 발발한 날이기에 서두에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저는 지난 주일에 예배에 대한 말씀을 드리면서 오늘까지 예배에 대한 말씀을 드리겠다고 예고한바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예배를 방해하지 말자” 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저는 지난 주일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를 드리자” 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리면서
①우리 인간의 궁극적인 목적은 바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라고 말씀을 드리고
②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방법은 오르지 예배를 통해서만이 가능하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③그리고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 때는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려야 한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주의할 것은 사탄이 우리의 예배를 방해한다는 것입니다. 그 사탄은 영적 존재이기 때문에 육체를 가진 피조물인 우리 인간들이 사탄을 이길 수가 없습니다. 다만 우리가 사탄을 이길 수 있는 것은 예수의 이름으로 이길 수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430년동안 고통의 세월을 보내다가 드디어 하나님께서 그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모세와 아론을 세워 구출하시려는 역사의 시작입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호렙산 기슭의 떨기나무 불꽃 속에서 부르셔서 애굽의 바로 왕에게로 보냈습니다. 왕 앞에 선 모세와 아론은 담대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였습니다. 모세와 바로 와의 싸움이 시작되었습니다. 모세와 백성들은 가야한다고 하고 바로는 안 된다고 합니다.
오늘의 우리들도 교회 가는 것은 곳 사탄과의 전쟁입니다. 영적 싸움입니다. 그러면 오늘은 사탄의 형상인 바로가 모세가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어떤 반응을 나타내었는가에 대하여 살펴보면서 오늘의 우리들은 신앙생활 하면서 수없이 부딪치는 문제들을 어떻게 헤쳐 나갈 것인가를 생각하면서 함께 은혜 받는 시간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 바로의 1차 반응은 ‘하나님이 누구냐? 난 모른다’ 는 것입니다.
본문 1절 “그 후에 모세와 아론이 바로에게 가서 이르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렇게 말씀하시기를 내 백성을 보내라 그러면 그들이 광야에서 내 앞에 절기를 지킬 것이니라 하셨나이다”
이 말씀을 분석하여 보면 세 가지의 의미를 알 수 있습니다.
①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전한다 고 하였는데 자기들의 생각이나 말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②내 백성을 보내라 고 하였는데 이스라엘 백성은 바로의 백성이 아닌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것이고
③그들이 광야에서 내 앞에 절기를 지킬 것이라 고 하였습니다. 그들을 애굽에서 인도하는 목적은 저들을 잘살고 잘먹고 하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 절기를 지키게 하기 위해서 곧 예배를 드리게 하는 것에 목적이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출애굽의 역사는 제사의 역사입니다. 곧 오늘의 예배의 역사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로 왕에게 우리가 광야에 가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겠으니 보내달라고 하고 바로는 안 된다고 거절을 합니다. 못 가게 합니다. 이 말씀에서 광야는 바로 오늘의 교회를 뜻하는 말씀입니다.
바로는 사탄의 모형입니다. 그래서 사탄은 오늘의 우리들에게도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려고 교회에 갈려면 못 가게 방해를 합니다.
백성들을 보내달라는 요구에 바로는 말하기를 “ 여호와가 누구이기에 내가 그의 목소리를 듣고 이스라엘을 보내겠느냐 나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니 이스라엘을 보내지 아니하리라” 고 거절하였습니다.
오늘날도 이와 같은 어리석은 말을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모른다고 하고 또 하나님을 저주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그런데 우리들은 그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의 은혜로 죄 사함 받고 구원을 얻었으니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2. 바로의 2차 반응은 ‘어찌하여 백성들의 역사를 쉬게 하느냐 가서 일이나 하라’ 는 것입니다.
모세와 아론은 낙심하지 않고 계속하여 바로 에게 백성들을 보낼 것을 요구합니다.
본문 3절 말씀 “그들이 이르되 히브리인의 하나님이 우리에게 나타나셨은즉 우리가 광야로 사흘길쯤 가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려 하오니 가도록 허락하소서 여호와께서 전염병이나 칼로 우리를 치실까 두려워하나이다”
그러나 바로는 허락지 않습니다. “모세와 아론아 너희가 어찌하여 백성의 노역을 쉬게 하려느냐 가서 너희의 노역이나 하라”
그러면서 가중의 고역을 주었습니다. 간역자들과 패장들에게 명령을 내려서 벽돌을 만드는데 소용되는 짚을 주지 않고 만드는 생산량은 전과 같게 하라고 하였습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날도 우리가 교회 가는 주일날은 사탄이 교회 가지 못하게 일을 만들어 냅니다. 계속 내 놀던 사람이 교회 갈려면 일하러 와달라고 요청이 옵니다. 또 교회 가려면 불신자 가족들이 자꾸만 뭐라고 합니다. ‘이 바쁜 시절에 한번쯤 빠지면 어떻냐’‘오늘은 바쁘니 일하고 다음 주일에 가도록 하라’ 고 합니다.
그러나 속지 마십시오. 한번이 두 번 되고, 두 번은 한 달이 되고, 한 달은 1년이 됩니다. 이와 같은 것은 사탄의 고등 술책입니다.
바로 왕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내지 않자 하나님은 바로가 강퍅하여 말로 해서는 듣지 않을 것을 아시고 애굽의 전역에 재앙을 내리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래도 강팍한 바로 왕의 마음은 요지부동입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진노를 당하고 시험과 환난을 당해도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마음이 강퍅하기 때문입니다.
(시49:20) “존귀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라고 하였습니다.
3. 바로의 세 번째 반응은 ‘광야로 가지 말고 이 땅에서 너희 하나님께 제단을 쌓고 희생을 드려라’ 고 하였습니다.
(출8:25) “바로가 모세와 아론을 불러 이르되 너희는 가서 이 땅에서 너희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라”
사탄은 항상 그럴듯한 말로 우리들을 유혹하고 교회를 못 가게하고 예배를 못 드리게 합니다.
‘바쁜데 꼭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려야 하느냐? 하나님은 무소부재(無所不在) 하신 하나님이라 어디든지 계시니 이곳에서 기도해도 하나님은 들어주신다’ 고 합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사탄의 속임수에 속지 마십시오 물론 우리 하나님은 전지전능(全知全能) 하시고 무소불능(無所不能) 하시며 무소부재(無所不在) 하신 하나님이심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말씀하시기를 성전에서 만나 주시고 성전에서 드리는 예배를 흠향 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만나 주시는 곳은 성전입니다.
(출25:22) “거기서 내가 너와 만나고 속죄소 위 곧 증거궤 위에 있는 두 그룹 사이에서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네게 명령할 모든 일을 네게 이르리라”
출30:6절에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그곳에서 너를 만날 것이라” 고 하셨고 왕상 9:3절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네 기도와 네가 내 앞에서 간구한 바를 내가 들었은즉 나는 네가 건축한 이 성전을 거룩하게 구별하여 내 이름을 영원히 그 곳에 두며 내 눈길과 내 마음이 항상 거기에 있으리니…” 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과 만날 수 있는 장소는 오직 하나님의 집, 하나님의 성전, 교회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와 같은 말에 모세는 단호히 거절을 합니다.
(출8:26) “모세가 이르되 그리함은 부당하니이다 우리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는 것은 애굽 사람이 싫어하는 바인즉 우리가 만일 애굽 사람의 목전에서 제사를 드리면 그들이 그것을 미워하여 우리를 돌로 치지 아니하리이까 우리가 사흘길쯤 광야로 들어가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되 우리에게 명령하시는 대로 하려 하나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불의와 죄와는 타협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는 적당히가 있을 수 없습니다. 오르지 말씀대로만 해야 합니다. 그렇게 믿으시면 다같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4. 바로의 네 번째 반응은 ‘너무 멀리 가지 말라. 그리고 나를 위해서 기도해 달라’ 는 것입니다.
(출8:28) “바로가 이르되 내가 너희를 보내리니 너희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 광야에서 제사를 드릴 것이나 너무 멀리 가지는 말라 그런즉 너희는 나를 위하여 간구하라”
사탄은 참으로 간교합니다. 모세가 전혀 바로의 말을 듣지 않으니까 이제는 멀리 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를 위해서 기도해 달라는 것입니다. 얼마나 간교합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3일 길을 가서 광야에서 하나님께 제단을 쌓고 희생의 제물을 드리겠다고 하였으나 바로는 가지 말라고 하면서 이곳에서 너희의 하나님께 제단을 쌓고 예배를 드리라는 것입니다.
3일 길은 십자가의 길입니다. 예수님이 3일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물로 바치기 위해서 3일 길을 걸어 모리아 산으로 갔습니다.
요나는 3일 동안 물고기 뱃속에서 회개하면서 기도했습니다.
예수님 나이 열두 살이 되든 해 유월절이 되어 예수님의 부모 요셉과 마리아는 예수님과 함께 예루살렘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예수님을 잃어버리고 3일 길을 헤매다가 성전에서 찾았습니다.
사탄은 항상 그럴듯하게 봐주는 것처럼 하면서 차츰차츰 성도들의 믿음을 약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신앙생활 하는데도 이와 비슷한 일을 많이 당하게 됩니다.
낮에는 교회 가도 밤에는 가지 마라 낮에나 밤에는 가도 새벽기도는 하지 마라
기도는 해도 철야 기도나 금식 기도는 하지 마라
교회는 가도 헌금은 하지 마라
헌금을 해도 조금만 하고 십일조는 하지 마라
성도 여러분!!
지금도 사탄은 이와 같이 달콤한 말로 우리들을 유혹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유혹에 미혹된 사람들은 저녁예배 나오지 않습니다.
새벽기도 안 합니다. 헌금은 형식적인 헌금만 합니다. 십일조는 절대로 하지 않습니다. 어떤 집사가 한다는 말이 ‘어떻게 농촌에서 십일조 할 수 있느냐고 안 해도 된다’ 고 하더랍니다. 착각하지 마십시오 십일조 하기 싫으면 자신이나 안 하면 되지 남까지도 못하게 막는 사람 절대로 하나님은 묵과하시지 않습니다. 주님은 이와 같은 자들을 책망하셨습니다.
(마23:13-15)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교인 한 사람을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도다”
하나님은 이와 같이 강팍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내지 않는 바로와 애굽 전역에 재앙을 내려 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한 결과가 이와 같이 엄청난 재앙을 불러오게 되었습니다.
5. 바로 왕의 다섯 번째 반응은 ‘어린아이들과 여자들은 집에 놔두고 장정들만 가라’ 고 하였습니다.
(출10:10-11) “바로가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너희와 너희의 어린 아이들을 보내면 여호와가 너희와 함께 함과 같으니라 보라 그것이 너희에게는 나쁜 것이니라 그렇게 하지 말고 너희 장정만 가서 여호와를 섬기라”
바로는 이스라엘 남자들이 처자들을 두고 가면 반드시 돌아오리라는 계산에서 이와 같이 제안을 하였던 것입니다. 발목을 잡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우리들의 가정에서도 이와 같은 일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한 가정에 두 사람 이상이 교회 다니는 집에서 농번기나 특히 바쁠 때 한사람이나 가면 되지 않느냐고 합니다.
성도 여러분!!
천국은 한 가정의 대표만 가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은 나 개인과 하나님과의 1:1의 문제이기 때문에 누구나 하나님 앞에 나와 예배를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내 믿음 가지고 내가 구원받아서 내가 천국 가는 것이지 다른 사람의 믿음으로 내가 구원받는 것 아닙니다. 또 내 믿음 가지고 다른 가족 데리고 천국 가는 것도 아닙니다.
고넬료는 온 가족이 더불어 하나님을 섬겼다고 하였습니다.
(행10:2) “그가 경건하여 온 집안과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더니…”
6. 바로 왕의 여섯 번째 반응은 ‘양과 소는 두고 가라’ 는 것이었습니다.
(출10:24) “바로가 모세를 불러서 이르되 너희는 가서 여호와를 섬기되 너희의 양과 소는 머물러 두고 너희 어린 것들은 너희와 함께 갈지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려면 반드시 양이나 소를 희생시켜 그 피를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그와 같은 것을 하나님은 예수님으로 단번에 제물이 되게 하셔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희생하심으로 우리의 속죄 제물이 되신 것입니다. 이와 같은 바로의 말에 모세는 동의할 수가 없습니다. 또 해서도 안됩니다.
① 바로가 양과 가축을 데려가지 말라고 한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때 제물을 드리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바로 오늘날 하나님께 예배는 드리되 헌금하지 못하게 하는 것과 같습니다. 매우 유감스럽게도 우리 교인 중에서도 헌금하지 못하게 하는 교인이 있다고 합니다. 남편이 아내에게 못하게 하고, 아내가 남편에게 못하게 하고, 집사가 교인에게 하지 않아도 된다고 하는 이들이 있다고 합니다. 회개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예배를 방해하는 자나 성령을 훼방하는 자들은 반드시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습니다.
② 양과 가축을 데려가지 말라고 한 것은 피 없는 형식적인 예배를 드리라는 것입니다.
예배는 드리되 희생이 없고, 용서가 없고, 감사가 없고, 예수도 없는, 형식적인 예배를 드리라는 것입니다. 사탄은 항상 피 없는 예배를 드리라고 합니다. 그냥 몸만 갔다와도 된다고 우리를 유혹하고 있습니다. 정신차려야 합니다. 그리고 깨달아야 합니다.
③ 불 없는 예배를 드리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제단에는 항상 불이 있어야 합니다. 불은 제물 있는 곳에 역사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제물 없이 불 없는 제사 불 없는 예배를 드리라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이와 같은 사탄의 속삭임에 속지 말아야 합니다. 사탄의 목적은 우리들이 하나님께 예배드리지 못하게 하는 것이 1차 적인 목표지만 그것이 실패하였을 때는 형식적인 예배를 드리도록 미혹하고 있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결 론 : 오늘의 말씀을 마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와 만나시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만날 수 있는 곳은 바로 교회입니다. 이 교회에서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탄은 우리들을 훼방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말세가 가까워지면 많은 사람들의 믿음이 식어지고 사랑이 식어진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모이기를 게을리 한다고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말세를 당한 이때에 믿음을 유지할 수 있는 길은 오르지 하나님께 제단 쌓는 생활 즉 예배를 통해서 만이 유지할 수가 있습니다.
초대 교회의 성도들은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모이기를 힘썼다고 하였습니다(행2:46)
또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히10:25)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계22:10-11) “또 내게 말하되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인봉하지 말라 때가 가까우니라 불의를 행하는 자는 그대로 불의를 행하고 더러운 자는 그대로 더럽고 의로운 자는 그대로 의를 행하고 거룩한 자는 그대로 거룩되게 하라”
이 말씀의 뜻을 잘 깨달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북실교회 성도 여러분들이여!!
사도 바울은 그의 제자 디모데에게 “엄히 명하노니” 라고 하면서 당부의 말씀을 하였습니다.(딤후4:1)
그래서 나도 ‘우리의 구주가 되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북실교회 성도 여러분들에게 간곡히 부탁을 드립니다’
기왕 어렵게 신앙생활 하는데 믿음으로 열심히 최선을 다하여 충성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히11:6),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한(행13:22), 믿음의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하나님께서 나를 세우시면
출 5: 1-14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아래 사람 없다'고 합니다. 사람은 평등하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삶의 현실은 그렇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사람 위에 사람이 있고, 사람 아래 사람이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때에 따라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사람을 붙여 주실 때가 있습니다. 하는 사업이 잘 되어서 직원을 써야하는 경우도 있고, 다니는 회사에서 직책이 올라가며 밑으로 부하직원이 생겨날 때도 있습니다. 믿는 사람들은 이렇게 하나님께서 축복하셔서 사람을 쓰게 하실 때에 그 자리에서 잘해야 합니다.
사람을 쓰는 자리에서 내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우리 하나님의 이름까지도 오르락내리락 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는 말입니다. 밑에 있는 사람들이 나 하나만 놓고 평가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언제나 나와 함께 내가 믿는 하나님까지 한 묶음으로 평가를 합니다.
또 하나 기억할 일은 사람을 어떻게 쓰느냐 하는 것은 큰 축복의 기회가 되기도 한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회사보다도 그 안에서 일하는 사람을 더 소중히 여기시며, 재물이 늘고 주는 것보다도 사람이 행복한가 불행한가에 더 관심이 있으십니다. 그러므로 내게 맡기신 사람들을 얼마나 소중히 하고, 또 그들의 행복에 얼마만큼의 도움을 주느냐에 따라, 내게도 또한 큰 축복이 될 수 있으며, 실패가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지혜의 왕 [솔로몬]이 죽자 그 뒤를 이어 그 아들 [르호보암]이 이스라엘의 네 번째 왕이 되었습니다. 그 때 왕이 된 르호보암 앞에 이스라엘 온 회중들이 와서 말합니다.
"왕의 부친이 우리의 멍에를 무겁게 하였으나 왕은 이제 왕의 부친이 우리에게 시킨 고역과 메운 무거운 멍에를 가볍게 하소서. 그리하시면 우리가 왕을 섬기겠나이다." (왕상12:4절)
부왕 솔로몬 시대에는 사람들이 성전과 왕궁을 건축하느라 노역에 많이 동원되었습니다. 성전은 하나님의 집이니 모두를 위하여 짓는다고 하지만, 왕궁은 왕을 위한 거처인데 13년 동안이나 지었으니 노동에 진저리가 날 만 합니다.
본문의 내용대로, 사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 조상들이 애굽에서 노예로 살았던 경험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눈만 뜨면 주어지는 뼈빠지는 일들을 대를 이어 짊어져야만 했던 고통스런 역사가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런 노역에 진저리가 난 사람들이 이제 새로 왕이 된 [르호보암] 앞에서 그 노역을 감해주기를 요구해 온 것입니다.
백성들의 요구를 들은 르호보암은 삼일 후에 다시 오라고 말하고는 '나이가 들고 경험이 많은 신하들'과 의논을 합니다. 이 때 나이든 신하들이 권하는 말입니다.
"왕이 만일 오늘날 이 백성의 종이 되어 저희를 섬기고 좋은 말로 대답하여 이르시면 저희가 영영히 왕의 종이 되리이다." (왕상12:7절)
그러나 르호보암은 같은 연배의 '젊은 신하들'을 불러다 다시 의논을 했고, 그러자 새파란 신하들이 혈기로 대답하는 말이 이렇습니다.
"왕은 대답하기를 나의 새끼손가락이 내 부친의 허리보다 굵으니, 내 부친이 너희로 무거운 멍에를 메게 하였으나 이제 나는 너희의 멍에를 더욱 무 겁게 할지라. 내 부친은 채찍으로 너희를 징치하였으나 나는 전갈로 너희를 징치하리라 하소서." (왕상12:10下~11절) 이 양자 중 르호보암은 젊은 신하들의 말을 따랐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 나라가 두동강이 나고 말았습니다.
이렇듯, 사람을 잘못 부리면 심하게는 나라가 갈라지기도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사람을 맡겨 주셨을 때는 정말 잘해야 하는 겁니다.
⊙ 오늘 본문에서도 왕이 등장을 합니다.
애굽의 바로입니다. 하나님 앞에 서 있는 바로의 자세를 살펴보면서 '하나님께서 나를 사람들 앞에 세우실 때에 어떻게 사람들을 섬길 것인가'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첫째, 땅보다는 하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바로는 '백성을 보내라'는 모세의 말을 듣고는
"여호와가 누구관대 내가 그 말을 듣고 이스라엘을 보내겠느냐? 나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니 이스라엘도 보내지 아니하리라." (2절) 고 했습니다.
자기보다 높은 존재가 없는 것입니다. 교만할 대로 교만해진 바로의 모습입니다. 사람은 사람 위에 서게 되면 아래만을 바라볼 뿐, 그 위를 잘 보지를 못하는 습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언제든지 사람을 쓰는 우리 위에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바로만 하나님을 모르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안다고, 믿고 의지한다고 하는 우리들도 사람들 앞에서 이렇듯 교만해 질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을 사람들 앞에 세우실 때마다 겸손해야 함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언제나 가장 높은 곳에는 하나님이 계신 것입니다.
둘째, 현실보다는 복음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본문 4절에 보면 모세가 백성들을 보내 줄 것을 요구하자 완고한 바로는
"모세와 아론아, 너희가 어찌하여 백성으로 역사를 쉬게 하느냐? 가서 너희의 역사나 하라." 고 말을 합니다. 바로는 모세가 전한 하나님의 명령에 귀 기울이기 보다는 자신의 정치적인 이권과 노동력 확보라는 현실적인 문제에만 급급하여 오히려 백성들이 꾀를 부린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 어떤 목사님이 아내가 예수를 잘 믿도록 협조하면서도 자신은 신앙을 갖지 않는 남편이 있어서 '신앙생활을 하게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하루는 전도하기 위해 그 남편이 경영하는 안경점으로 심방을 갔습니다. 그리고 이런 저런 이야기 끝에 예수 믿기를 권했더니 그 분이 자기 과거의 경험을 이야기하는 것이었습니다.
자신이 안경점을 차리기 전까지 자신은 '금은 세공 기술자'로 어느 공장에서 일했는데, 그 공장의 사장이 교회의 장로님이었답니다. 그런데 이 장로사장님이 주일이 되면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리라고 교회 갈 시간을 주는데, 빠듯하게 그 시간만을 겨우 빼주고는 점심을 먹고 다시 작업으로 들어가게 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교회에서는 장로라는 직분 때문에 다른 교우들에게는 보란 듯이 자신의 직원들을 다 데려와 예배를 드리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교인들은 그 장로를 믿음대로만 살려고 하는 장로로 보게되는 것이지요. 그리고는 자신은 주일을 누리면서 직원들은 다시 공장으로 바로 보내어 작업을 시키는 것입니다.
교회에서는 교회대로 인정을 받고, 공장 일은 공장 일대로 실속을 차리는 이중적인 모습입니다. 그래서 그 공장을 그만 둔 이후로 교회는 발을 끊어 버린 것입니다. 그리고는 교회를 생각할 때마다 그 장로의 모습이 생각이 나는 것입니다. 그러니 어떻게 신앙생활을 다시 할 수 있겠습니까?
많은 신앙인 기업가들이 직원들을 이렇게 대합니다.
신앙은 신앙이고, 실속은 실속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현실보다는 복음을 먼저 생각하신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내가 쓰는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서 감수하는 손해들은 하나님께서 갑절의 대가로 돌아오게 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셋째, 감정보다는 기도로 사람을 대해야 합니다.
바로는 모세가 전해주는 하나님의 메시지를 '거짓말'로 치부해 버립니다. 그러면서 그런 거짓말을 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미워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의 고역을 더 무겁게 했습니다.
어떤 방법으로 그렇게 했습니까?
벽돌이 부스러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흙으로 반죽할 때 반드시 짚을 섞어 넣어야 합니다. 그래야 이 짚이 부스러지지 않도록 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바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벽돌을 만들 때에 섞어 넣어야 하는 이 짚을 주지 말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러면서도 하루 동안에 만들어 내는 벽돌의 숫자는 그대로 만들어 내도록 했습니다.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의 짐이 몇 배는 더 무거워졌습니다.
짚을 넉넉하게 주었을 때도 힘들던 일인데, 이젠 애굽 온 땅에 흩어져 다니면서 곡초의 그루터기를 모아와서 벽돌을 만들어야 했으니 얼마나 더 힘이 들었겠습니까? 백성들의 입에서 신음이 배어나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의 모세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습니다만, 우리가 사람을 쓰다보면 별의 별 사람들이 다 있습니다. 개중엔 정말로 눈에 보이는 거짓말을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럴 땐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럴 때 우리는 감정적으로 대할 때가 많습니다. 괜스레 미움의 감정이 북받쳐 오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은 언제 어디서나 사람을 대할 때 감정으로 대해서는 안됩니다. 거짓을 대할 때에도 우리는 기도로 대처해야 합니다.
※ 어느 목사님이 교회를 건축하는 과정에서 큰 아픔을 겪게 되셨습니다. 건축 위원장을 맡고 있던 분이 안수 집사님인데, 건축을 시작하면서 업자와 짜고는 목사님께 반항을 한 것입니다. 일은 이렇게 된 것입니다. 건축업자가 건축 위원장에게 '교회 건축비용 전액을 미리 주면 집사님의 개인 집을 이익을 남기지 않고 지어주겠다'고 미끼를 던진 것입니다. 그렇게 합의가 되자 건축업자는 목사님께 건축비용 전액 선불을 요구했고, 건축위원장인 이 집사님도 허락을 요구해 온 것입니다.
목사님은 기도하며 심사숙고 해 본 결과, 그렇게 하는 것은 사기 당할 우려도 있고 하나님께서도 기뻐하시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는 허락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랬더니 건축위원장 집사님이 심하게 나오는 것입니다. 밤마다 전화를 해서 '목사 이 XX, 죽여 버리겠다'고 협박을 합니다. '그냥 낫을 가지고 가서 목을 잘라 버리겠다'는 말도 서슴없이 해댔습니다. 목사님은 죽는 것이 겁이 나서가 아니라, 그 집사의 선동으로 교회가 점점 어수선해지고 교회의 건축 분위기가 은혜롭지 못하자 마침내 허락을 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목사님의 우려대로 그 건축업자는 선불 받은 건축자금을 가지고는 잠적해 버렸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교회 건축이 어찌어찌 이루어지기는 했지만, 그 여파로 교회는 건축을 하는 과정에서 큰 고난을 겪었습니다.
그런 일이 있은 몇 해 후, 교회는 더 부흥되어 장로를 선거하게 되었습니다. 건축위원장을 했던 안수 집사도 장로로 피택 받을 자격이 되었지만, 그 때의 실수가 목사님과 온 교우들의 생각에서 벗어지지를 않는 것입니다. 목사님도 사람인지라 그 때의 생각을 하면 그 집사님을 곱게 쳐다볼 수가 없었습니다. 마음이 괴로운 목사님께서 선배 목사님을 찾아가서 자문을 구했습니다. 장로선거를 앞두고 일이 여차여차히 되었는데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느냐고 말입니다. 그랬더니 그 선배 목사님의 말씀의 골자는 [사람을 잃어버리면 안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지나간 실수는 실수이고, 아픔은 아픔이다. 그러나 지나간 그 일 때문에 사람을 잃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선배 목사님의 조언을 들은 목사님은 장로 선거 후보자로 그 집사님을 적극 추천했고, 선거결과 장로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장로가 된 그 집사님이 그 이후로 얼마나 헌신하며 충성을 하는지, 목사님의 말씀에 한 번도 '아니요'라고 반대하는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혹 당회에서 다른 장로님들이 목사님의 의견에 재고를 건의해도 이 장로님만은 똑바로 얼굴을 쳐다보지도 못하는 자세로 순종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사람이 중요한 것입니다.
확신하건대 내 사업이 잘되는 것보다도 그 사람의 영혼이 중요한 것이요, 물질을 다소간 잃는 한이 있더라도 사람을 잃지 않는 것이 장기적인 안목으로 보면 이득이 되는 것입니다.
크리스천인 우리들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람들을 부리는 자리에 앉히실 때에 아주 조심스럽게 그 자리를 감당해야 합니다. 내가 저 사람들 보다 월등해서 이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여러분!
내가 사람을 부리는 자리에 있게 된 것은 오직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배려일 뿐입니다. 하나님께는 조금 지위가 높은 자신이나 밑에서 일하는 저 사람들이나 다 똑같은 것입니다. 다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람들의 힘과 능력을 모아 일하시게 하려고 내게 맡기신 것뿐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사람을 하나님의 뜻에 따라 잘 부리면, 생각지도 않은 축복이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진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사람 부리는 자리에 앉게 하실 때에 잘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을 체험하는 주인공들이 될 것입니다. - 아 멘 -
출 5 : 1 - 14
돼지 앞에 진주
서 론
바로왕은 하나님을 모르는 불신왕인데 그 앞에 하나님이 어떻고 그의 진노가 어떻고 하는 것은 도저히 통하지 아니하는 말이져 즉 돼지 앞에 진주 던지는 것이나 다를 바가 없습니다.
욥은 불신자들의 태도에 대하여 말하기를 "그들은 하나님께 말하기를 우리를 떠나소서 우리가 주의 도리알기를 줄겨하지 아니하나이다. 전능자가 누구이기에 우리가 섬기며 우리가 그에게 기도한들 무슨 이익을 얻으랴 하는구나"(욥 21:14-15)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지만 전도를 받는 그에게는 돼지 앞에 진주격이 되는 아쉬움이 없지 아니합니다.
1. 하나님을 모르는 인생에게…
본문 1-2 "모세와 아론이 가서 바로에게 이르되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에 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광야에서 내 앞에 절기를 지킬 것이니라 하셨나이다.
바로가 가로되 여호와가 누구관대 내가 그 말을 듣고 이스라엘을 보내겠느냐 나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니 이스라엘을 보내지 아니하리라"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나오는 인생과 입씨름하는 것은 돼지 앞에 진주를 던지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2. 자기 유익밖에 모은 인생에게…
본문 4-9 "애굽왕이 그들에게 이르되 모세와 아론아 너희가 어찌하여 백성으로 역사를 쉬게 하느냐 가서 너희의 역사나 하라… 그 사람들의 고역을 무겁게 함으로 수로롭게 하여 그들로 거짓말을 듣지 않게 하라"하였습니다.
이는 하나님도 모르고 다른 사람의 고통도 모르며 오직 자기 유익밖에는 모르는 사람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제사드리는 것은 자기와 관계없고 오직 이스라엘 백성들의 노동력을 착취하여 제욕심만 채우면 된다는 것 뿐입니다.
이와같은 사고방식을 가진 자에게 하나님의 말씀은 전하지만 본인에게도 돼지 앞에 진주와 같은 것입니다.
3. 하나님 백성을 괴롭히는 인생에게…
본문 6-14 "바로가 당일에 백성의 간역자들과 패장들에게 명하여 가로되 너희는 백성에게 다시는 벽돌 소용의 짚을 전과 같이 주지 말고 그들로 가서 스스로 줍게 하라"하였습니다. 이는 바로가 모세와 아론의 말을 들은 후부터 바로왕의 마음이 더욱 강팍하여져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더욱 심하게 괴롭히는 수단으로 재료도 주지 아니하고 벽돌을 굽게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사실을 보다 못한 모세는 "여호와께 돌아와서 고하되 주여 어찌하여 이 백성으로 학대를 당케 하셨나이까 어찌하여 나를 보내셨나이까 내가 바로에게 와서 주의 이름으로 말함으로부터 그가 이 백성을 더 학대하며 주께서도 주의 백성을 구원치 아니하시나이다"(출 5:22-23)하였습니다.
하나님과 대항하는 이와 같은 자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이 돼지 앞에 진주가 되는 것입니다.
결 론
사도 요한은 말하기를 귀가 복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으라 하였습니다.
바로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은 돼지 앞에 진주를 던지는 것이나 다를 바가 없습니다.
우리는 영의 귀가 밝아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줄 알고 영의 눈이 열려서 신령한 세계를 볼 있어야 하겠습니다.
출처: 복있는 그리스도인 원문보기 글쓴이: 예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