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래의 글은 몇 년 전부터 반재경 전도사님이 작성한 글로, 매년 교정 및 첨삭하여 올리고 있습니다. ]
제가 신앙과 나이, 둘 다 어렸을 때는 '하나님의 생각은 왜 사람들의 생각과 꼭 달라야 하는 건가?'라는 생각을 종종 했었습니다.
(사 55:8)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그러나 '생각 mind을 새롭게 하여 변화를 받는다'라는 것을 알게 된 지금, 돌아보니 그것은 ‘원리’ 보다는 ‘결과’만 따지는 사고 방식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나는 A라는 대학에 가고 싶은데 하나님은 B에 가라고 하신다.’라거나 ‘나는 A라는 직장에 가고 싶은데 하나님은 B에 가라고 하신다.’는 식으로 하나님의 생각과 뜻을 나 위주로 이해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또 ‘세상 모든 일이 다 하나님의 뜻대로 된다.’라는 잘못된 '운명론적인 예정론'에서 나온 생각이기도 한데, ‘원리’라는 측면에서 보면 ‘세상 모든 일이 다 하나님의 뜻대로 된다.’는 말이 맞기도 합니다. 무슨 말이냐면, 중력의 법칙은 항상 역사하기 때문에 '세상 만물은 항상 중력을 만들어 놓으신 하나님의 뜻대로 역사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내가 어떤 컵을 떨어뜨려 그것이 깨졌을 때도 ‘저 컵이 깨진 것은 하나님의 뜻이야.’라고 하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라는 것입니다. 중력의 법칙이 역사했다는 것에 있어서는 하나님의 뜻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그것을 떨어뜨린 것은 내가 한 일입니다. 그러면 또 운명론적 예정론자들은 “하나님께서 막으실 수도 있지 않았냐?”고 반문합니다. 이 경우, 하나님께서 막으시려면 이미 만들어 놓으신 중력이라는 기본적 법칙을 어기셔야 하는데,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십니다. 그 사람에게 그 컵 쪽으로 가지 않으려는 생각을 주시거나 해서 막으실 수는 있겠지요. 하지만 중력을 막지는 않으십니다. 태초에 지으신 모든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는데 왜 바꾸시겠습니까?
이러한 혼란이 있는 이유는 ‘원리’와 ‘결과’를 구분하지 못해서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중력의 법칙’은 원리인데 그 결과까지 모두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혼란 가운데 빠지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면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는 방법은 중력의 법칙을 잘 이해해서 그것을 따라 모든 것을 행하는 것입니다.
여기까지는 자연적, 물리적인 영역에서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원리에 대해 생각해 본 것인데 그러면 영적인 영역에서는 어떨까요? 그것도 마찬가지 원리로 작동됩니다.
행동 하나하나에 대해 하나님의 뜻을 논한 것이 바로 구약의 율법입니다. ‘이럴 땐 이렇게, 저럴 땐 저렇게....’ 구약의 율법 중에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것은 주로 십계명이지만 실제로 구약의 율법은 600가지가 넘습니다. 그걸 다 지켜러고 한다면 일단 먼저 600개가 넘는 율법을 다 알아야겠죠. 문제는 구약의 모세 율법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어진 것이고 육신적으로는 이방인인 우리는 그 율법을 받아 본 적도 없다는 것입니다.
(롬 2:14) (율법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에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
신약에도 하나님의 뜻과 원칙이 나타나 있지만 그것은 행동 하나하나에 대한 제약이라기보단 영적인 원리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구약은 ‘이런 상황에서는 이렇게, 저런 상황에서는 저렇게 하라’고 말하고 있다면 신약에서는 ‘항상 기뻐하라.’ ‘모든 일에 감사하라’는 식으로 각각의 방법보단 원리와 원칙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우리의 행동 하나하나가 아니라 그 행동을 하는 마음의 동기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신 분이니까요.
사실, 십계명도 보면 마음이 정상적인 사람들에게는 모든 계명이 다 당연한 것들입니다. 인간의 법도 마찬가지입니다. 악한 뜻을 가진 사람들 때문에 모든 경우의 수를 대비해 그렇게 많은 조항들이 있는 것이지 ‘법 없이도 살 사람’들이 모여 있다면 사실상 법은 필요가 없지 않겠습니까?
이렇게 생각해 볼 때,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도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행동 하나하나를 어떻게 하느냐’보다는 그 행동을 누구 앞에서, 누구 보라고 하는지 그것을 생각한다면 아주 간단합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사람들 보라고 했다면(사람을 기쁘게 하려고 했다면) 태어나실 때 조용히 말 구유에서 태어나지는 않으셨을 겁니다.
그런데 사람들 보라고 하는 일이라면 정말 골치가 아픕니다. 사람들의 생각은 다양하니까요. 그래서 이렇게도 좀 해야 할 것 같고 저렇게도 좀 해야 할 것 같고, 보통 힘든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내가 오직 하나님 앞에서 행하는 자라면 중력의 법칙처럼 모든 것이 단순해집니다. 가끔 컵을 떨어뜨리는 실수는 할 수 있겠지만 ‘물건은 위에서 아래로 떨어진다.’는 원리 원칙 안에서 행하기만 하면 되듯이 내가 모든 것을 완벽하게 하지는 못하겠지만 나의 마음과 생각이 하나님만을 의식하면 되니까요.
대부분, 내 생각과 다른 하나님의 뜻을 어떻게 해서라도 돌려놓는 것이 기도요, 신앙생활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니요! 그것은 종교입니다. 신앙생활이란 나를 위해 가장 귀한 예수님을 아낌없이 주심으로써 나를 향한 사랑을 이미 증명하신 하나님의 뜻(세상에서 가장 좋은 뜻)을 알아 그 뜻에 내 생각을 맞추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단순명료합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