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편은 네가 이 세상에 오게된 과정이다.
중국공산당의 계급투쟁의 광란기에 나는 사상범으로
수감생활을 한적이 있다.
1970년 도에 나는 만기가 되어 노개대(勞改隊)를 나와서 이른바 신생대(新生隊)라는 곳에 보내졌다. 말이 신생대이지 신생대는 또 다른 형태의 노개대(勞改隊)였다.
사회에서는 이런 사람들을 일컬어 얼로까이(二勞改)
라고 했다. 그래도 얼로까이는 로개대에 비하면
많이 자유롭고 간부들에게 잘 만 보이면 휴가도 받을 수 있었다.
1974년도 3월초에 나는 보름간의 휴가를 받고 먼저 화림(樺林)에 사는 사촌형네 집에 들렀다. 사촌형네 집은 아직도 10여년 전에 살았던 그 협소한 공공주택에 살고 있었다.
형님은 문화대혁명이란 그 미친 세월에 나의 아버지와 연루가 되어 공개 투쟁을 받았다고 한다. 그 충격으로 형님은 조현병자가 되어 정신이 오락가락 했다. 나를 알아보긴 해도 히죽히죽 웃기만 했다. 듣자니 할아버지는 3년재해 때에 아사하셨다고 했다. 손자로서 예의라도 지키려고 형님과 함께 묘소를 찾는다고 갔지만
형님은 전혀 기억을 하지 못했다. 내가 죄를 진것 같아 너무나 슬펐다.
이틑날 나는 사촌 누나네 집에 왔다.
산골에 살던 누나네 집은 온천
(溫泉) 교외로 이사를 와서 여전히 벼농사를 짓고 있었다.
온천은 목단강(牡丹江)을 끼고 있어서 경치도 수려하고
날씨도 온화해서 살기 좋은 고장이었다. 매부를 비롯한 친척들이 빈털털이로 찾아간 나를 그래도 반갑게 맞이 했다. 둘째 학춘이는 나에게 양말 한컬레를 사다 주었다. 작은 선물이지만 두고 두고 미안하고 잊혀지지 않는다. 나를 위해 제일 걱정하신 분은 후덕하고 무던한 매부였다. 매부는 이번
기회에 나를 꼭 결혼 시키겠다고 영안(寧安) 동경성(東京城) 등 인맥이 닿는 곳이면 다 찾아 다니셨다. 이 못난 처남을 위해 고생이 정말 많으셨다.
그러던 중 어느날 동경성에서
어떤 젊은 부부가 매부를 찾아 왔다. 나는 매부와 함께 온천 시내로 나와서 그 사람들을 만났다. 여성은 임신 중이라 배가 남산만 했다.
이들 부부는 내가 마음에 든다며 굉장히 반가워했다.
사실은 이러했다. 그 남성의
여동생이 연변대학을 나왔다고 했다. 그해 30세인데 아직 미혼이어서 걱정을 하던 중에 나를 만났다고 그렇게 좋아 했다. 그러면서 자기네 부부의 연애담을 흥미진진하게 이야기 했다.
사연은 이랬다. 이 남성이 군 복무시절에 어는날 동경성(東京城)의 어느 조선족 마을에 가게 되었다.
마을의 중간쯤에 이르렀을 때
어떤 예쁜 아가씨가 자기 집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보고 첫눈에 반하여 따라 들어 갔던 것이다. 마침 처녀의 아버지가 집에 계셔서 큰 절을 올리고 자기를 사위로 삼아 달라고 간청을 했다.
처녀의 아버지는 뱃장있는 사내라며 일거에 수락을 하신 것이다. 그러면서 남녀간의 만남은 다 연분이 있는 것이라며 자기의 동생도 꼭 좋아하리라고 장담을 했다.
이틑날 남성이 소식을 전하러 왔다. 여동생이 계급의식이 강하여 나같은 사람과 결혼하면 부모와 식구들께 큰 피해가 온다며 단호히 거절했다고 한다.
이렇게 첫번째 혼사는 무산되었다.
며칠 후 이런저런 인연으로
누나와 함께 해림현(현 海林市) 묘산(廟山)이란 마을에 선을 보러 갔다. 그곳에서 지금의 아내를 만나게 되었다.
나는 아내와의 첫 만남에서 허심탄회하게 나의 과거를 고백했다.
그랬더니 사람은 누구나 다 죄를 지을 수 있는 것이라며 나를 널리 이해해 주었다. 그리고 감옥은 똑똑한 사람들이 가는 곳이니 그런것에 대해서는 문제삼지 않겠다고 했다. 나는 정말 고맙게 생각했다. 고마운 김에 손이라도 한번 잡아 주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고 아내는 두고두고 나를 원망한다.
이제 아내 부모님의 허락만 받으면 혼사는 결정되는 것이었다.이틑날 오전에 부모님을 찾았다. 아내 아버지는
오랫동안 신장염으로 일어나지도 못하고 1년 내내 누워계신다고 했다.
한 사람의 환자로 인해 가정은
엉망진창이었다. 다섯 남매는 밥도 제대로 얻어먹지 못하는
신세였다. 내가 돈이 있으면 한줌 쥐어주고 싶었지만 나는 몸밖에 기진 것이 없는 사람이었다.
아버님께서는 돈도 없고 성분까지 나쁜 사람에게 자기 딸을 맡길 수 없다고 했다.
장모될 분은 딸이 좋은대로 놔 두자고 남편을 설득했다. 그랬다고 장모의 말이 떨어지기가 바쁘게 아버님은 머리 맡에 있는 사발이며 컵을 집어들고 자기의 아내를 향해 날렸다.
성질이 불같은 분이었다.
그가 던진 그릇이 장모의 이망에 명중하여 장모는 피를 엄청 많이 흘렸다. 이쯤이면 혼사는 누가 봐도 끝난 것이었다. 나는 누나와 함께 버스를 타러 석하(石河)라는 곳으로 걸어 오고 있었다.
나는 실의에 빠졌다.
참새도 짝이 있다는데 나는 인간으로 태어나 짝도 한번 맺지 못하고 평생 홀아비로 살게 되었다고 생각하니 서글프기 그지 없었다.
그런데 뒤돌아 보니 아내가 작으마한 보따리를 들고 숨가쁘게 우리를 따라오고 있었다. 끝난 줄로만 알았던 인연이 그렇게 다시 맺어진 것이다. 우리는 온천으로 돌아와 하루밤을 묵고 이틑날
기차를 타고 긴 여행 끝에 내가 몸담고 있는
강교(江橋)직장으로 왔다.
ㆍ나는 휴가를 다녀왔다고 보고 차 고간사(股干事)를 찾았다.
고간사는 알았다며 나를 내 보내고 아내만 남게 했다.
한참후 아내가 우리가 머무는 초대소에 왔다. 아내의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사연은 이러 했다. 고간사가 아내에게 정치선동을 한 것이다.
👉당신의 아버지는 유공자이며 가정성분도 좋은데 하필
전과자와 결혼을 하러 하오?
전과자와 결혼하면 당신의 집안에 어떤 영향이 미친다는 것을 모르오?
지금이라도 늦지 않으니 다시 한 번 신중하게 생각해 봐요👈
이렇게 우리의 혼사는 실권자에 의해 다시 한번 위기를 맞았다. 첩첩산중이라는 생각이 들
었는데 이틑날 다시 한번 이변이 일어났다. 출장을 나갔던 왕 중대장이 우리의 소식을 듣고
우리의 혼인을 축하하며 혼인신고에 필요한 증명까지 발급했다.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우리는 비로소 법정 부부가 되었다.
또 그 인연으로 네가 이 세상에 오게 된 것이다.
까마득한 옛날 얘기인데 어제 일처럼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