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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주님의 느티나무에서 원문보기 글쓴이: 친타
+ 찬미 예수님
주님의 이름으로 평화를 빕니다.
오늘은 아담과 하와 이야기 네 번째가 되겠습니다.
지난 수요일, 그저께 어떻게 끝났는지 기억하십니까?
‘아담과 하와가 하느님과 같이 되고 싶어서 금단의 열매를 먹은 죄가 더 큰 것이냐,
아니면 용서를 청하지 않은 죄, 사죄하지 않은 죄가 큰 것이냐?’
어느 쪽이 더 무거운 죄냐라는 질문을 던지고 강의가 끝났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선악과를 먹은 죄가 더 큰 겁니까, 아니면 용서를 청하지 않은 죄가 더 크다고 생각되십니까?
여러분이 하느님의 마음이었다면 어느 죄 때문에 낙원에서 추방하기로 결정했겠습니까?
결론부터 얘기하면 아무래도 ‘사죄하지 않은 쪽이 죄가 더 무겁다’라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우리의 매일의 생활을 살펴봐도 비슷한 답이 나올 때가 많습니다.
제가 한 가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사춘기 12-3세였던 아이가 자기 엄마의 천 원을 훔쳤다고 생각해 봅시다.
아마 그 아이는 천원을 훔칠 때 분명히 심장이 마구 뛰고 손이 떨리고 후들거렸을 겁니다.
살금살금 지갑 옆으로 다가가 사방을 둘러보고 재빨리 천원을 훔쳐냅니다.
그리고 난 다음 지갑 위치가 이전과 같은지 확인하겠죠.
훔친 후에도 탄로가 날까 겁먹고 훔친 것을 또 후회도 해봅니다.
그러면서 어떤 생각을 할까요?
‘지금도 늦지 않았다. 엄마 지갑에 도로 천원을 집어넣을까? 아니야 엄마가 천원이 없어진 거 모를 거야.
왜냐하면 천 원짜리가 여러 장 있었거든, 애써 훔쳐낸 것 다시 엄마한테 돌려줄 이유가 없어.
아닌데, 우리 엄마 얼마나 눈치가 빨라, 발각되기 전에 차라리 지갑에다 두는 것이 낫지 않을까?’ 이렇게 방황합니다.
그러다 마침내 어머니에게 들켰습니다.
어머니에게 발각되자 그 아이의 심장은 굳어버리지요.
엄마가 얘기합니다. ‘이거 이상하네. 지갑에 돈이 천 원이 비네. 아들아, 너 모르니?’
‘난 몰라요. 정말이에요. 제가 알 리 있겠습니까?’ 아이는 시치미를 뚝 떼고 얘기합니다.
그렇지만 엄마가 계속 다그치죠.
‘너 이전에도 엄마 지갑에서 돈을 꺼낸 일이 있었지?’
그러자 아이는 넉살 좋게 ‘엄마가 그렇게 생각하면 할 수 없죠. 그냥 제가 훔쳤다고 해두세요.’
이렇게 심술이 난 자식의 주머니 속에서 엄마는 천 원짜리를 발견합니다.
‘이놈아, 이게 어찌 된 일이냐? 너 또 훔쳤구나.’
아이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됩니다.
그리고 속으로 ‘에이 재수 없어. 들키고 말았네.’
‘또 역시 너였구나.’ 하고 엄마가 혼을 내키자, 아이는 입이 댓 발 나와서 ‘그래 훔쳤어요. 어쩌란 말이에요?’
엄마가 또 묻죠. ‘왜 엄마 지갑에서 돈 훔쳐 갔니?’
아이가 대답합니다. ‘엄마가 늘 용돈을 조금 주어 용돈이 부족하니깐 그랬죠, 뭐.’
엄마는 타이릅니다. ‘부모 돈도 훔치는 것은 아주 나쁜 거야’.
아이는 또 속으로 생각하죠.
‘엄마가 남인가? 남의 것도 아닌데 어때? 엄마 것이 내 것이고 내 것이 내 것인데.’
엄마는 아이에게 얘기합니다.
‘엄마한테 잘못했다고 빌어라.’
아이는 속으로 ‘바보처럼 빌기는, 그게 그렇게 큰 잘못인가?’
엄마는 다그치죠. ‘어째서 잠자코 있는 거니? 왜 이렇게 점점 못 돼질까? 한번 빌어봐. 용서해 줄게.’
아이는 속으로 생각합니다.
‘정말 귀찮아 죽겠네. 저놈의 잔소리. 그까짓 천원 하나 훔친 것 가지고. 그냥 줘도 될 법한 일인데 뭘 사과해?’
결국 그 아이는 뻔뻔스럽게 버티고 서서 엄마에게 사과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말이죠.
이 아이는 범한 죄가 드러나기 전에는 그래도 죄에 대하여 겁을 먹고 있었죠.
그래서 다시 천원을 갖다 놓을까 말까, 한참 갈등을 겪고 있었죠.
그러나 일단 들통이 나고 나니 배짱이 커집니다. 태연해집니다.
아마 이러한 심리가 바람피우는 사람의 심리이기도 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들킬까 조마조마, 조심조심하다가 일단 탄로 나는 순간부터는 뻔뻔스럽게 나온다고 해요.
‘그래, 너 용케 알아챘다. 나 바람피우고 있다. 내가 바람피울 때 네가 뭐 돈 보태줬냐?’ 하면서 대놓고 바람피운다고 그럽디다.
어떻게 이렇게 사람들은 죄를 짓고 시침을 뚝 떼면서 뻔뻔스럽게 버티는 걸 까요?
어째서 솔직하게 사죄하지 않을까요?
아마 그것은 자신이 지은 죄가 사죄할 만큼 나쁘지 않다고 생각되기 때문일 겁니다.
다시 말하면 제가 전에도 많이 얘기했지만 ‘죄의 불감증’에 걸려버린다는 겁니다.
‘이런 짓을 수도 없이 하고 살아가는 사람도 많은데 나는 딱 한 번 했는데, 뭐 큰 죄야?’
이 죄의 불감증에 걸리면 본인 자신이 죄인이라는 걸 못 느낍니다.
그리고 간덩이가 커지게 되죠.
바늘 도둑이 소도둑이 되는 겁니다.
바늘을 처음에 훔칠 때는 간이 조마조마하던 사람이 자꾸 도둑질하다 보면
나중에는 휘파람을 불며 소를 끌고 나올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죄의 불감증에 걸리게 되는 원인을 뭐라 그랬습니까?
자기보다 늘 못한 사람과 비교하게 됩니다.
주일을 잘 지키는 사람과 성당 안 나가는 사람과 비교해 보면 내가 훨씬 더 의인 쪽에 속해 있다고 착각합니다.
나보다 더 못되게 사는 사람과 나를 비교해 보면 내가 지은 죄는 죄 같지 않다고 여기게 됩니다.
비교의 대상이 잘못됐다는 거죠.
나보다 훨씬 더 선한 사람과 나를 비교해야 한다.
그래서 우리 비교의 대상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뿐이라는 거죠.
나는 그리스도만큼 선한가?
나는 그리스도만큼 봉사하고 살아가는가?
나는 그리스도만큼 봉헌하는가?
나는 그리스도만큼 기도하는가?
우리의 기준이 예수 그리스도가 될 때 우리는 자비를 청할 수밖에 없습니다.
죄인임을 고백할 수밖에 없다는 얘기지요.
죄를 죄로 느끼지 않는 것,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죄가 아니겠는가?
불감증에 걸린 무딘 양심에 눈이 떠지기는 참 쉽지 않습니다.
용서받는다고 하는 것, 그것이 그렇게 어렵게 느껴집니다.
그래서 우리들의 가장 큰 죄는 ‘죄인이면서 죄인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일 겁니다.
아담과 하와는 자기들이 얼마나 불손한 죄를 범했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했을 겁니다.
그들은 하느님께 용서를 빌지 않았습니다.
아담은 뭐라고 생각했습니까? 하느님과 하와의 잘못이다. 내 잘못이 아니다.
또 하와는 뱀이 속였으니 뱀의 잘못이라고 또 핑계를 댔던 거죠.
그렇기에 사죄해야 할 사람은 서로가 자기가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겁니다.
설령 아담과 하와가 하느님의 자리에 앉으려고 교만한 죄를 지었다고 해도,
이들 두 사람이 정말 진심으로 하느님 앞에 꿇어 엎드렸었다면 하느님은 분명히 용서해 주셨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아직 하느님과 대화할 수 있었기 때문이지요.
그렇지만 그들은 용서를 빌지 않았던 겁니다.
죄를 범하고도 죄를 인정하지 않을 때는 정말 용서하기 어렵고 확정적인 죄가 되어지는 것이 분명합니다.
본문에 나오는 뱀의 태도를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뱀은 ‘나는 분명히 먹으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라고 변명할 수 있었음에도 성경에 보면 아무런 변명도 없었습니다.
사죄도 하지 않고 또 누구처럼 타인에게 죄를 전가도 안 합니다.
악마의 화신인 뱀은 죄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를 알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또 죄의 무서움을 충분히 알고 있었기에 사탄은 인간을 죄의 구렁텅이로 끌어내리려 하는 것이 분명합니다.
야고보서 2장 19절에 보면 ‘당신은 한 분이신 하느님을 믿고 있습니까? 그것은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마귀들도 그렇게 믿고 무서워 떱니다.’
이렇듯 사탄은 분명 하느님을 가장 두려워하고 있고 하느님이 어떤 분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단, 어떻게 알고 있는 것이냐?
하느님을 신앙으로서가 아니고 적대의 상대로서 알고 있었던 겁니다.
진실로 거룩하신 하느님이신 것을 알고 있는 사탄은 하느님 앞에서 한마디의 변명도 할 수가 없었을 겁니다.
그 점에서 인간 쪽이 하느님의 거룩하심을 알지 못하고 있는 것이 훨씬 더 큰 것 같습니다.
이렇게 해서 뱀은 더욱 저주받은 존재가 되어버립니다.
성경에 ‘하와의 후손과 뱀의 후손 사이가 원수가 될 것이다’라는 말씀이 있고,
하와의 후손이 어느 날인가 뱀을 치는 날이 올 것이라고도 얘기가 나오죠.
여기서 나오는 하와이 후손은 그리스도를 뜻합니다.
즉 그리스도께서 오시는 첫째 예언으로 볼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훌륭한 구속의 약속이 여기서 이미 나타나고 있다는 뜻이지요.
어쨌든 아담과 하와는 죄를 범하고 사죄하지 않은 채 낙원에서 추방당합니다.
그때 하느님은 이렇게 얘기하십니다.
‘땅 또한 너 때문에 저주를 받으리라. 너는 죽도록 고생해야 먹고 살리라.’
이 말씀으로 낙원에서 추방하면서 하느님은 두 사람에게 가죽옷을 지어 입히십니다.
그래서 구약의 하느님이 보통 노하시는 하느님, 정의의 하느님이라고 얘기하고 있는데
나는 ‘과연 그럴까’하는 의문을 가져봅니다.
미래에 구원될 희망의 날을 준비해 놓으시고,
가죽옷을 입혀서 고통에 대비해 놓으신 하느님 역시 처음부터 한량 없이 깊은 사랑의 분이었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사실 하느님이 아담과 하와에게 엄중한 벌을 내릴 생각이었다면 두 사람을 즉시 죽일 수도 있었을 겁니다.
그렇지만 이렇게 가죽옷까지 입혀서 내보내시는 것을 보면
구약의 하느님 역시 노하시는 하느님이 아니라 ‘자비의 하느님’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노하시는 하느님이 아니라 ‘인내의 하느님’이라고 생각됩니다.
여러분들 만약에 말입니다.
죽음 없이 무한정 살아간다고 하면 죄를 안 짓게 될까요. 아니면 많이 짓게 될까요?
인간이 살아가면서 죄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유한하게 살아가는 것이 축복이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만일 무한히 살아간다면 얼마나 많은 죄를 짓게 될까, 생각만 해도 아찔해집니다.
에덴동산의 생명나무 얘기 아시죠?
에덴동산의 생명나무를 인간이 먹지 못하게 거룹들을 세우시고 돌아가는 불칼을 장치하여 지키게 하셨다.
거룹이라고 하는 것은 초인간적 힘의 상징으로 알고 계시면 되겠습니다.
화염검과 거룹을 두어서 지키게 하셨다 했으니 어찌 보면 이것도 큰 사랑인 것 같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보다 생명나무 열매를 먼저 먹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먹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무서운 일이 벌어지는 겁니다.
죄 없는 사람은 무한정 살아 있어도 좋겠지만, 죄 있는 자에겐 유한한 삶이 감사한 삶이 될 수밖에 없는 거죠.
어떤 인간이든 천년만년 살아 있으면 필경 살인도 할 수 있을 것이오,
가지가지 극악비도(極惡非道)를 중복할 것이 틀림이 없습니다.
생명나무의 열매는 말 그대로 죽지 않는 열매입니다.
그래서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고 생명나무를 못 먹게 된 것은 참 큰 다행이라 생각합니다.
우리들이 무한히 못 사는 것에 대한 아쉬움을 가질 필요가 없다는 얘기입니다.
또 선악과는 선과 악을 분별할 수 있게 하는 나무였다고 그랬죠.
그렇지만 선을 알아도 선을 행할 힘이 없고, 악을 알아도 악을 물리칠 힘이 없는 것이 인간의 존재 상황이었던 겁니다.
하느님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영적으로 새롭게 살 수 있는 길을 준비해 주셨습니다.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들은 비록 뒤틀린 모양으로나마 하느님의 사랑을 알고 하느님을 찬양할 수가 있는 것이지요.
나는 또 하나의 의문이 있었습니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왜 하느님은 먹어서는 아니 되는 선악을 아는 나무를 자라나게 하였을까,
또 그 열매는 누가 먹을 열매였을까 하는 점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분명히 때가 오면 인간에게 먹이실 생각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인간도 갓난 아기에게는 고기를 먹이거나 딱딱한 것을 먹이지 않습니다.
먹이는 것도 때가 있습니다.
하느님은 선악을 아는 열매를 먹일 때도 정하고 계셨음이 틀림없었으리라 생각합니다.
우리는 종종 주변에서 그런 모습을 보죠.
좋은 환경 또 굳은 믿음을 갖고 있는 부모님을 모시고 있는 집안에서도 많은 냉담자가 나옵니다.
창세기 첫머리인 3장을 읽어보면 신앙적으로 좋은 환경 속에서도 이단아와 냉담자가 나올 수도 있다는 것이 이해됩니다.
하느님과 함께 낙원에 있던 아담과 하와조차도 하느님 말씀보다 뱀의 말을 먼저 따랐다는 얘기입니다.
자기들을 지으신 하느님을 눈앞에 보면서도 하느님을 똑똑히 바라보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을 믿질 않았죠.
낙원에도 유혹이 있어서 하느님을 믿지 못했으니, 단순히 좋은 환경이 신앙을 자라게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결론이 나옵니다.
하느님이 자유 의지를 부여한 것이 얼마나 깊은 뜻이 있었는지는 측량할 수가 없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왜 하느님은 인간을 하느님에게서 반역하지 않도록 만들지 않으셨을까?
우리는 이런 질문을 자주 하게 됩니다.
여기에 대한 답은 이렇게 이해하시면 좀 편할 것 같습니다.
어떤 힘 있는 자가 한 여성을 우격다짐으로 붙들어 놓은 다음에 ‘나는 너를 사랑하고 있다.
내 곁에 있어만 주면 무엇이나 너 좋은 대로 해주겠다. 그러나 나를 떠나는 것은 절대 용서하지 않겠다.’
한다면 이것은 사랑이 아니죠.
자기 힘을 믿고 자기애를 관찰하려는 무모한 행동에 지나지 않습니다.
강제나 무리에 사랑은 없습니다.
참사랑은 상대방의 자유와 자발성을 존중한 인격적인 교제에만 있을 수가 있다고 우리들은 알고 있습니다.
우리들은 다시 한번 아담과 하와의 이야기를 통하여 하느님의 사랑에 정직하고 겸손하고,
또 하느님과의 약속을 지켜야 한다는 막중한 책임이 있다는 것을 깨닫도록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아담과 하와의 이야기는 이것으로 간략하게나마 묵상을 해봤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카인과 아벨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여러분들 영원에 영원을 더하여 사랑합니다.
+전능하신 천주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는 이 강의를 듣는 모든 이들에게 강복하소서.
아멘.
♣청주교구 원로 사목자 김웅열(느티나무)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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