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323
11월28일 [대림 제1주간 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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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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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TO_rZDIsxEw (인영균 끌레멘스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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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따뜻한 마음과 넉넉한 인품의 소유자, 백인 대장!>
복음서 안에 예수님으로부터 큰 칭찬을 받는 사람들이 몇 명 등장합니다.
나타나엘이 칭찬을 받습니다. “보라, 저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다. 저 사람은 거짓이 없다.”(요한복음 1장 47절)
끝까지 줄기차게 딸의 치유를 청하던 가나안 부인을 칭찬하십니다.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마태오 복음 15장 28절)
그리고 오늘 예수님께서는 로마군단 조직의 장교였던 백인 대장의 믿음 앞에 감탄까지 하시며 극찬을 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이스라엘의 그 누구에게서도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마태오 복음 8장 10절)
백인 대장이 예수님으로부터 극찬을 받은 이유가 무엇인지 알아봐야겠습니다. 그는 여러모로 특별한 사람이었습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마음이 따뜻한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예수님께 도움을 한 가지 청했는데, 그것이 자기 자신이나 가족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부리고 있는 종의 병을 치유해 달라는 청이었습니다. 그가 얼마나 자상한 사람이었는지, 얼마나 넉넉한 인품의 소유자였는지를 잘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당시 종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백인 대장의 진급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백인 대장 가정의 가사를 돌보기 위해 그저 얼마간 몸값을 치르고 산 노예였습니다. 당시 많은 주인은 종이 병에 걸려 죽거나 말거나 전혀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죽으면 더 건강하고 ‘품질 좋은’ 노예를 사면 그만이었습니다.
그런데 백인 대장은 철저하게도 달랐습니다. 그는 참으로 따뜻한 마음을 지녔습니다. 아랫사람에 대한 배려가 특별했습니다. 그뿐만 아닙니다. 그는 종의 치유를 청하는 데 있어 그 마음 자세가 지극히 겸손할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 대한 믿음도 아주 탁월했습니다. 백인 대장의 말을 통해서 이러한 사실을 잘 확인해볼 수 있습니다.
“주님, 저는 주님을 제 지붕 아래로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 그러면 제 종이 나을 것입니다.”
말 한마디 한마디, 행동 하나하나가 다 예수님 마음에 쏙 들었습니다. 너무나 흐뭇했던 예수님이었기에, 그가 청하는 바를 기쁜 마음으로 들어 허락하십니다. 그리고 이어서 백인대장의 확고한 믿음과 겸손한 자세를 극찬하십니다.
하느님과 우리 사이에는 강이 하나 흐르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도달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노력이 필요합니다. 하느님과 우리를 연결하기 위해서는 다리가 하나 필요합니다. 다리를 놓기 전에 먼저 튼튼한 교각 두 개가 필요하지요.
우리 쪽 강변에는 ‘겸손’이란 교각을 세워야 합니다. 가난하고 부족한 우리는 겸손이란 교각을 통해야만 부유하고 완전하신 하느님께로 건너갈 수 있습니다. 하느님 쪽 강변에는 ‘자비’의 교각이 세워져 있다고 우리는 믿어야 합니다. 백인 대장처럼 겸손한 마음으로 자비로우신 하느님께로 건너가야 할 것입니다.
겸손과 자비란 두 개의 교각 위로 사랑과 믿음이란 다리가 놓이면 죄인이고 부족한 우리 인간이지만 그 크신 하느님께로 건너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하느님께서 친히 다리를 건너 우리에게 오실 것입니다. 우리를 사랑과 약속의 땅인 건너편으로 데려가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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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주님, 제 종이 중풍으로 집에 드러누워 있는데 몹시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공감, 치유의 시작>
세바시 313회에서 ‘경청은 왜 인간을 위대하게 만드는가?’란 제목으로 기업분쟁연구소 소장이자 변호사인 조우성 씨가 강연한 내용을 들었습니다.
조우성 변호사는 기업 간 분쟁이 있을 때 클라이언트의 의뢰를 받아 변호하는 일을 맡고 있습니다. 변호사 새내기 티를 막 벗었을 때 한 은행에서 의뢰가 왔습니다. 그런 큰 건수는 자신보다 경력이 많은 사람에게 맡기는 것이 보통인데 자신에게 의뢰가 와서 의아해 했다고 합니다. 알고 보니 은행을 고소한 사람이 워낙 악명이 높은 사람이어서 윗선에서는 누구도 그 사람이 고소한 건수는 맡지 않으려고 해서 자신까지 내려온 것입니다.
물론 그 사람은 질 것을 뻔히 알면서도 은행을 괴롭히려고 계속 트집을 잡아 고소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재판을 할 때마다 은행 직원들을 증인으로 세우는데 몇 년 전 이야기라 잘 기억이 나지 않으면 그 사람도 위증죄로 고소하여 또 괴롭힌다고 합니다.
모든 재판은 은행이 이기지만 이 재판을 하면서 직원들과 증인으로 불려나가는 사람들이 계속 받아야 하는 스트레스는 이루 말을 다 할 수 없다고 합니다. 이기기 위한 재판이 아니라 괴롭히기 위한 재판인데, 이번에는 증인으로 부은행장을 신청한 것입니다. 이 의뢰를 부탁한 은행 쪽에서는 이것으로 부은행장까지 법정에 서게 된다면 자신들은 회사에서 잘리게 된다며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첫 재판은 가볍게 끝나는 것이 보통인데 그 때 조우성 변호사는 은행을 고소한 사람에게 가서 정중히 먼저 인사를 하였습니다. 매우 험상 굳게 생긴 50대 중반의 남성이었는데, 그는 변호사를 본 채 만 채 하며, “이번에 변호사가 바뀌었군. 흠. 잘 해 봅시다.”라고 퉁명하게 말하더랍니다. 조우성 변호사는 잠깐 이야기를 하자며 그를 복도로 데리고 나갔습니다. 그리고 왜 뻔히 질 것을 알면서 이런 재판을 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복도에서 한 30분간 입에 거품을 물면서 은행이 자신에게 했던 억울했던 일들을 토해내더랍니다.
그러던 중에 이 사람이 또 다른 소송을 하고 있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변호사는 시간이 되면 자신의 사무실에 들르라고 했습니다. 자신이 다른 소송을 이길 수 있게 도와주겠다고 했습니다. 그는 지나가던 길에 생각이 나서 전화를 했다며 도움을 청해왔습니다. 조 변호사는 몇 시간을 투자해가며 이것저것 조언해 주고 서류도 자신이 직접 만들어 정리해 주었습니다. 5억이 걸린 소송이었는데 나중에 조 변호사 덕에 3억을 받아내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도 다음 재판 때 부은행장을 증인으로 내세우는 것을 철회하지 않았습니다. 조 변호사가 좀 섭섭하다고 말하자, 그때서야 다른 사람에게는 다 그래도 조 변호사에게는 그러면 안 되겠다고 하며 증인을 모두 철회하였다고 합니다. 조 변호사는 지인을 통해 그분의 아들을 취직까지 시켜주었고 지금도 그분과 매우 친하게 지내고 있다고 합니다.
은행을 괴롭히던 그 사람은 자신의 분노를 털어놓고 싶은 사람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아무도 들어주지 않자 은행을 고소한 것이고 은행은 자신을 방어하기 바빠서 그 사람의 말을 제대로 들어줄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던 것입니다. 자신을 공감해주는 단 한 명만 있어도 모든 아픔을 깨끗이 내려놓을 수 있는 수많은 사람이 우리 주위에 있습니다.
얼마 전에 필리핀 여자아이들 몇 명이 강아지를 밟아서 죽이는 장면이 동영상으로 유포되면서 동물 학대에 대한 논란이 일었었습니다. 저도 잠깐 보았는데 처음에는 장난하는 것처럼 맨발로 강아지를 살짝 밟거나 툭툭 치더니 나중에는 조금 세게, 그다음에는 차례로 밟고 건너가며 작은 강아지의 모든 뼈와 내장을 다 망가뜨렸습니다. 그렇게 강아지를 죽이며 웃는 사춘기 여 아이들의 모습이 담겨 있었습니다. 어떤 공포영화보다 마음에 잔상이 오래 남았습니다.
‘어쩌면 강아지가 아파하는 것을 저렇게 느끼지 못할까?’
공감능력이 전혀 없는 사람을 사이코패스라고 합니다. 살인을 저질러도 죄책감도 없습니다. 상대가 아픈 것을 전혀 공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공감능력은 사랑을 많이 받은 사람이라야 길러진다고 합니다.
내가 행복해야 상대의 마음도 느낄 수 있지, 내가 힘들면 남들의 아픔에 무관심하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소중하다고 생각해야 남도 소중하게 여겨지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공감’이라는 말이 많이 떠오릅니다. 우선 백인대장은 자신의 하인이 아프다는 것에 마치 자신이 아픈 것처럼 아파합니다. 가족도 아니고 많은 하인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런데도 지배하는 나라의 장교임에도 피지배국인 한 갈릴레아 사람에게 기적을 청합니다. 이는 자신의 하인을 위해서 바보가 될 수도 있는 위험을 감수하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그 마음을 공감하십니다. 그 정도로 자신을 낮추고 기적을 청한다면 그 사람 마음에 실망을 안겨주고 싶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직접 그 집으로 가려고 하십니다.
이방인의 집에 들어가면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고발을 당할 수도 있는데 말입니다. 실망시키려 하지 않는 마음. 상대의 마음을 느끼고 있지 않다면 불가능한 행동입니다.
백인대장은 또 예수님께 피해를 끼치기를 원치 않습니다. 이방인의 집에 들어오면 부정해진다는 이스라엘 풍습을 잘 알고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말씀만 하시라고 청합니다. 어차피 오셔서 고쳐주실 능력이 있는 분이라면 멀리서도 고치실 수 있을 것이라 믿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백인대장도 예수님에게 안 좋은 일이 일어나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공감과 배려의 연속인 것입니다.
예수님과 백인대장의 공감능력은 말할 것도 없고, 조우성 변호사가 한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준 것 때문에 그 사람의 분노와 쓸데없는 재판을 통한 쌍방 피해를 줄일 수 있었던 것처럼, 공감의 능력은 상상외로 이 세상의 분쟁을 줄이고 또 기적을 일으키게도 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요즘 우리나라는 서로를 느끼지 못하도록 흑과 백, 좌익과 우익 등으로 확연히 구분된 듯하고, 또 그렇게 몰고 가는 느낌도 있습니다. 작은 것을 트집 잡아서 서로를 미워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눈만 오면 나무에 올라가 내려오지 않는 팬더가 있었습니다. 다 미친 팬더라고 했지만 그 팬더는 눈 올 때 먹이를 찾으러 나갔다가 자신의 발자국 때문에 굴에 있던 새끼를 사냥꾼들에게 빼앗긴 아픈 상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눈 위에 찍힌 자신의 발자국이 공포가 된 것입니다.
사람을 쉽게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판단하지 말고 공감하려 노력합시다. 한마디 말이 그 사람의 인격 전체를 대변해주지 않습니다.
백인대장과 예수님은 우리로 말하면 일본 장교와 조선 평민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이념이나 풍습을 넘어서 서로 이해하고 공감하려고 했습니다. 사람을 치유하는 것은 판단이나 비판이 아닙니다. 바로 공감의 힘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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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요즘은 가전제품을 ‘리모컨’으로 작동합니다. 텔레비전, 선풍기, 에어컨, 전축의 작동을 리모컨으로 합니다. 자동차의 내비게이션은 운전 중에는 음성으로 목적지를 말하면 알려주기도 합니다. 불르투스 기능이 있어서 선을 연결하지 않아도 음악을 듣고, 자료를 내려받고, 메일을 보낼 수도 있습니다. 저도 지금은 리모컨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하지만 예전에는 가전제품의 작동을 대부분 손으로 했습니다. 아련한 추억이지만 군대에서 텔레비전 채널의 선택권은 선임 병이 가지고 있습니다. 선임 병은 주로 말로 채널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면 이제 막 전입한 이등병들이 달려가서 채널을 돌리곤 했습니다. 그러면서 ‘인간 리모컨’이라고 농담을 하기도 했습니다. 리모컨과 블루투스 기능은 우리의 삶을 한층 편안하게 해 주고 있습니다. 과학기술의 발달은 가상현실, 메타버스의 세상으로 우리를 이끌고 있습니다.
‘이심전심, 염화미소’라는 말이 있습니다. 유래는 이렇습니다. “그때 여래가 그 보좌에 앉아서 이 연꽃을 받고서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다만 꽃을 들었을 뿐이었다. 법회에 참석했던 팔만 사천의 인간 세계와 천상 세계의 당시 대중이 모두 멈추고 침묵하였다. 이에 장로 가섭 존자가 부처님이 꽃을 들어 대중에게 보이는 불사(佛事)를 보고, 그 자리에서 확연해져 파안미소(破顔微笑)하였다.” 부처님이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제자 가섭은 부처님의 의중을 알았다는 뜻입니다. 저와 같이 일하시는 주방 자매님도 이심전심의 마음, 염화미소의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제가 굳이 말을 하지 않았어도 제가 즐겨먹는 음식을 알고 계십니다. 제가 좋아하는 과일도 알고 계십니다. 가섭은 부처님과 함께 있으면서 부처님의 말과 행동을 유심히 보았기 때문에 부처님의 의중을 알 수 있었습니다. 주방 자매님도 제가 즐겨 먹은 음식과 과일을 유심히 보았기 때문에 제가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었습니다.
리모컨과 블루투스는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이루어지지만 이심전심과 염화미소의 지혜는 상대방에 대한 존경과 관심으로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상대방에 대한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제자들은 “세례자 요한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엘리야라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예레미야나 예언자 가운데 한 분이라고 합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그러면 너희들은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다른 제자들은 침묵하고 있을 때 베드로가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 사도를 칭찬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시몬 바르요나야, 너는 행복하다! 살과 피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것을 너에게 알려 주셨기 때문이다.” 베드로 사도의 관심과 믿음도 있었지만 그것을 하느님께서 알려주셨다고 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로마의 백인대장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의 종이 아팠을 때입니다. 백인대장은 예수님께 도움을 청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기꺼이 백인대장의 청을 들어주시기로 했습니다. 종을 사랑하는 백인대장의 마음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백인대장은 종을 치유하기 위해서 오시는 예수님께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주님, 저는 주님을 제 지붕 아래로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 그러면 제 종이 나을 것입니다. 사실 저는 상관 밑에 있는 사람입니다만 제 밑으로도 군사들이 있어서, 이 사람에게 가라 하면 가고 저 사람에게 오라 하면 옵니다. 또 제 노예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백인대장의 믿음을 보시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이스라엘의 그 누구에게서도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
우리는 어제부터 주님의 탄생을 기다리는 대림시기를 지내고 있습니다. 이심전심과 염화미소의 마음으로 주님의 탄생을 기다리면 좋겠습니다. 백인대장의 믿음으로 주님의 탄생을 기다리면 좋겠습니다. 하느님께서 베드로 사도에게 예수님께서 누구신지 알려주었듯이, 하느님의 크신 사랑을 청하며 예수님의 탄생을 기다리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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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8,5-11: 한 말씀만 하소서.
백인대장은 예수께 자기 종을 위하여 도움을 청한다. 그 백인대장은 종을 예수께 데려오지 않았다. 그 이유는 “주님, 제 종이 중풍으로 집에 드러누워 있는데 몹시 괴로워하고 있습니다.”(6절) 종이 숨을 거두려 한다는 말 같다. 그의 믿음은 지붕으로 올라가서 기와를 벗겨 내고 환자를 예수님 앞으로 내려보낸 일보다 더 큰 믿음이다. 예수님의 말씀 한마디면 종이 일어나리라는 확신을 했다. 예수께서는 지금까지 한 번도 하신 적이 없는 일을 하신다. 발 벗고 그 종을 치유해주시겠다고 하시며, “내가 가서 그를 고쳐 주마.”(7절) 하신다. 종을 치유해주시는 것은 물론이고 그의 집으로 가시겠다고 하신다. 이렇게 되어 우리는 백인대장의 믿음을 알게 된다. 그냥 종을 치유해 주셨으면 우리는 그에 대해 알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백인대장은 “주님, 저는 주님을 제 지붕 아래로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 그러면 제 종이 나을 것입니다.”(8절) 하고 대답한다. 여기서 백인대장은 자신을 자격 없는 이로 여김으로써, 그리스도를 자기 집뿐 아니라 마음에도 모실 자격이 있는 자임을 보여준다. 그분을 마음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면 그런 큰 믿음과 겸손을 보여주는 말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만일, 주님께서 그의 집에만 들어가시고 마음에는 들어가지 못하셨다면 기쁨은 없었을 것이다. 백인대장의 말은 어떤 일이 일어나리라고 짐작하는 것만으로 그리스도에 관해 그렇게 믿은 그의 지성을 드러낸다. 그는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드님이요 주님으로 알고 찾아온 것이 아니다. 하느님으로부터 특별한 권한을 받은 분으로 여기고 찾아왔다.
백인대장은 예수께 “말씀만 해 주십시오.”(8절) 했고, 이 말은 하느님께만 어울리는 말로 보일 수 있다. 그러니 하느님으로부터 권한을 받으신 그분이 이런 일을 하실 수 있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예수께서는 감탄하시며 그를 칭찬하신다. 그리고 하늘나라의 선물을 베풀어주신다. “나는 이스라엘의 그 누구에게서도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10절) 예수님께서 육으로는 이민족이지만 믿음의 가족인 백인대장을 칭찬하셨다. “많은 사람이 동쪽과 서쪽에서 모여 와, 하늘나라에서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과 함께 잔칫상에 자리 잡을 것이다.”(11절) 하느님의 백성이라고 하면서 하느님을 거절한 백성들은 쫓겨나고 그리스도인들은 동서에서 몰려와 복된 잔칫상에 앉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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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이병근 대건안드레아 신부님]
<'성모님'과 함께 준비하고 기다리기>
(27일 대림 제1주일 강론)
https://youtu.be/BuC5hH5DAG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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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서울대교구 김상우 바오로 신부님]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백인대장의 병든 종을 고치시는 이야기입니다.
이야기의 배경은 카파르나움입니다. 카파르나움은 예수님께서 공생활의 많은 시간을 보내셨으며, 코라진과 벳사이다와 함께 당신 권능을 가장 많이 드러내신 고장이기도 합니다. 여기에서 예수님께서는 열병을 앓던 베드로의 장모를 낫게 하셨고, 중풍 병자를 고치셨으며,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리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또한 이방인 백인대장의 종을 치유하시기까지 합니다.
특별히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백인대장의 대답을 들으신 다음 당신을 따르는 이들에게 “나는 이스라엘의 그 누구에게서도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라며 극찬을 아끼지 않으십니다. 왜일까요? 유다인이 아닌 백인대장의 믿음은 예수님께서 환자의 병을 먼 거리에서 치유하실 수 있다거나, 질병에 관한 특별한 권능을 지니신다고 믿는 것에만 그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는 예수님께 부여된 더욱더 깊고 특별한 ‘권위’, 곧 하느님을 대신하여 말씀하시고 일하신다는 것을 믿음으로 고백하였기 때문입니다. 마치 로마 군대에서 백 명의 군인을 총괄하는 백인대장의 말이 로마 황제를 대변하는 것처럼, 예수님의 말씀도 하느님의 말씀을 드러낸다는 굳건한 믿음과 신뢰가 전제되어 있습니다.
고단한 일상을 살다 보니 우리도 특별한 은사에 목말라합니다. 갑작스럽게 닥친 불행과 질병 때문에 마음 졸이며 간절히 하느님께 치유를 청하기도 합니다. 고통의 현실에서 샘솟는 목마름과 간절함을 과소평가할 수는 없지만, 오히려 그럴수록 백인대장 같이 예수님께 온전히 내맡기는 굳은 믿음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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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김웅태 요셉 신부님]
<백부장의 믿음>
예수님 당시 로마 군대의 백부장이라 하면, 100명의 군인을 거느리고 있는 사람을 칭하였다. 로마 군대의 한 군단은 6,000명의 군인으로 되어 있고, 여기에 60명의 장을 두어 60개로 나뉘어 있었고, 이 백부장은 장기복무자로서, 로마 군인의 사기가 바로 이 백부장에게 달려있었던 것이며, 로마 군대에 우수한 지도자들이었다.
또 당시의 '종'의 신분이란 일하는데 쓰이는 도구, '종, 노예'란 살아있는 도구로 여겼기 때문에, 자기가 데리고 있는 종이 고통을 당하든지, 죽을병에 걸렸다든지 하는 것이 그 주인에게 그리 마음쓸 문제가 못되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보면 로마 군인인 이 백부장은, 자기 종이 병든 것을 애석히 여기고,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해 주었다. 그런데도 치유할 수 없었기에 그는 예수를 찾아 그를 구해 주려고 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가 그러한 마음 자세로 예수께 청했기 때문에, 예수님은 그의 인간미, 자기 종에 대한 온유한 사랑의 태도에 감동을 하시어, 그의 종을 완치시켜 주셨다.
이처럼 사람에게 대한 사랑은, 자신의 수많은 죄를 덮어 주게 되는 것이고, 어려움 중에 있는 이웃에게!, 더욱이나 자기에게 의무도 없고, 인연도 없는 이에게 사랑과 온유함을 가지고 동정해 가며 아픔을 같이 해 줄 때, 바로 오늘 복음에서 볼 수 있듯이 예수님은 그러한 사람에게 가까이하시는 것이며,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소청을 들어주시는 것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이 백부장의 믿음과 확신을 생활 속에서 되새기는 자세가 있어야 하겠다. 즉, 예수께서 '내가 가서 고쳐주마' 하실 때 그는 무엇이라고 대답했겠는가?
"주님, 저는 주님을 제집에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한 말씀만 하시면…… 했다. 이렇게 말하는 백부장을 근면하고 성실한 생활 속에서, 그러면서도 사람을 위할 줄 알고 또한 자신이 노력하고 난 다음에 힘이 부족함을 통감하고, 겸손되이 청하면서도 예수님의 능력에 대한 추호의 의심도 없이, 말씀대로 이루어지겠다는 그의 믿음의 자세를 예수님은 감탄하신 것이다.
그렇다면 백부장이 자기 종에게 한 것처럼 우리는 우리 이웃에게 아니 가까이 있는 집안 식구, 또한 나와 함께 생활하는 내 주위 사람들에게 어떻게 대하고 있는가?
그들의 어려움을 그들의 아픔을 얼마나 동정하고, 고통을 같이 나누려고 힘써왔는가? 또한 주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백부장과 같은 믿음의 자세를 가지고 있는가?
우리는 미사 때, 성체를 받아 모시기 전에, 바로 오늘 복음에 백부장이 한 말을 되새겨 말하기는 하지만, 무슨 믿음의 자세로 하는지 살피면서, 백부장과 같은 믿음을 우리에게도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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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류한영 베드로 신부님]
이사야 예언자는 모든 민족이 하느님의 구원을 얻는 시대를 내다보고 있습니다. 예언자는 이스라엘 민족의 경계를 넘어 만백성에게 주어질 평화의 시대를 이렇게 묘사합니다.
민족들은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리라.” 예언자는 증오의 칼을 다듬어 관용의 보습을 만드는 시대, 분노의 창을 녹여 추수하는 사랑의 낫으로 탈바꿈하는 시대를 예고하고 있습니다.
대림 시기는 이사야가 갈망하는 구원과 그 희망을 키우는 기간입니다. 우리는 수많은 세대와 사람들이 기다리던 주님의 말씀이 우리 가운데 탄생하시는 신비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영적인 시온성과 새 예루살렘에서 선포되는 메시아의 말씀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구원의 희망은 우리에게 말씀의 빛을 가져다줍니다. 온 세상을 향해 활짝 열리는 구원의 힘은 기다림과 희망에서 옵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백인대장은 따뜻한 사람이었습니다. 백인대장은 중풍으로 고생하는 종을 위해 예수님께 도움을 청합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누구이신지 알아보고 깊은 믿음을 가졌습니다. 그는 구세주의 한 말씀으로 자신의 종이 치유될 것을 확신합니다.
백인대장의 이 확신과 믿음은 어디에서 오는 것이겠습니까? 그는 로마제국의 관리였지만 영원한 평화와 구원을 갈망하고 찾았기에 예수님을 알아보았습니다. 그는 이스라엘 사람보다 더 깊은 믿음을 가지고 예수님께 나아갔습니다. 백인대장은 이사야가 예언한 구원의 상징으로 드러납니다.
우리도 구원에 대한 깊은 확신과 믿음으로 주님의 오심을 준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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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경규봉 가브리엘 신부님]
<깊은 믿음과 사랑의 마음을 지닌 백인대장>
예수님께서 선교의 중심지로 삼으셨던 카파르나움은 당시 군사적 요충지로서 헤로데의 군대가 주둔했던 곳이었다.
헤로데의 군인들은 대부분 이방인들이었으며, 백인대장은 100명의 병사를 거느린 지휘관이다. 그런데 이방인인 백인대장이 예수님에 대하여 독실한 믿음과 존경심을 가지고 찾아왔다.
당시 유대인들은 점령자인 로마인을 침략자며 이방인이라고 경멸하고 있었고, 로마인들 역시 유대인들을 편협하고 독선적인 피지배자로 멸시하고 있는 상태였다. 이러한 상태에서 백인대장이 예수님을 찾아가 자신을 낮추며 간청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지극히 겸손하게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르며 자신의 종이 중풍으로 드러누워 몹시 괴로워하고 있다고 말씀드린다. 당시 로마인들은 종을 말하는 가축 정도로 생각하였다. 그런데도 백인대장은 자신의 부모나 형제, 친구나 상관이 아닌 종을 위하여 예수님을 찾아와 부탁드린다.
예수님께서는 그처럼 겸손한 그를 보시고 몸소 가셔서 고쳐주시겠다고 말씀하신다. 그런데 백인대장은 자신이 주님을 집에 모실만한 자격이 없는 사람이라며 예수님의 말씀만으로도 자기 종의 병이 나을 것이라고 말씀드린다. 그는 예수님을 전능하신 분, 절대자로 믿었다.
만약 그가 예수님을 어떤 뛰어난 의사로 생각했다면 특효약이나 손으로 만지는 등의 치료 요법을 요청했을 것이다. 또 예수님을 위대한 종교 지도자로 생각했다면 기도나 안수 등을 요청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주님의 말씀 자체에 절대적인 능력이 있다고 믿었다.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신 하느님처럼, 예수님이 말씀으로 병을 고치실 수 있는 주님이요 메시아임을 믿고 고백한 것이다.
사실 예수님께서 만나 본 유대인들 가운데 어느 누구도 말씀만으로도 병이 나을 것이라고 고백한 사람은 없었다. 하느님의 백성인 유대인들도 그러한 믿음을 가지고 있지 못한데, 이방인인 백인대장이 그처럼 깊은 믿음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와 같은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구원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그의 믿음에 진실로 감탄하시며 그러한 믿음으로 인하여 온 세계의 백성들이 신앙의 조상들과 함께 천국의 잔치에 참석하게 될 것을 말씀하신다.
백인대장 그는 이방인이었지만 누구보다도 깊은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그는 당시 말하는 가축처럼 취급되던 종을 위하여서도 자신의 체면을 생각하지 않고 유대인인 예수님에게 머리를 조아릴 정도로 따뜻한 사랑의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믿음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고 구원받기에 충분한 믿음이었으며, 그가 지닌 사랑의 마음은 곧 하느님의 마음이었다. 오늘 우리에게 백인대장과 같은 깊은 믿음과 사랑이 가득하길 기도하는 하루가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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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내가 가는 겁니다>
마태오 8,5-11(백인대장의 병든 종을 고치시다)
예수님께서 카파르나움에 들어가셨을 때에 한 백인대장이 다가와 도움을 청하였다. 그가 이렇게 말하였다. “주님, 제 종이 중풍으로 집에 드러누워 있는데 몹시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가서 그를 고쳐 주마.” 하시자, 백인대장이 대답하였다. “주님, 저는 주님을 제 지붕 아래로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 그러면 제 종이 나을 것입니다. 사실 저는 상관 밑에 있는 사람입니다만 제 밑으로도 군사들이 있어서, 이 사람에게 가라 하면 가고 저 사람에게 오라 하면 옵니다. 또 제 노예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합니다.” 이 말을 들으시고 예수님께서는 감탄하시며 당신을 따르는 이들에게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이스라엘의 그 누구에게서도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사람이 동쪽과 서쪽에서 모여 와, 하늘나라에서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과 함께 잔칫상에 자리 잡을 것이다.”
<내가 가는 겁니다>
아픈 이에게
돌보기 위하여
내가 가는 겁니다
슬픈 이에게
위로하기 위하여
내가 가는 겁니다
외로운 이에게
함께하기 위하여
내가 가는 겁니다
힘없는 이에게
북돋우기 위하여
내가 가는 겁니다
쓰러진 이에게
일으키기 위하여
내가 가는 겁니다
뒤처진 이에게
같이 걷기 위하여
내가 가는 겁니다
버려진 이에게
보듬기 위하여
내가 가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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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참된 믿음의 소유자>
아주 오래전의 일입니다. 대전 공설 운동장에서 한국성체대회가 거행되던 날, 눈부시도록 파란 하늘이었고 태양은 강렬한 빛을 발하고 있었습니다.
추기경님의 파견 강복이 있기 직전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자 김수환 추기경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거기 뭐 나타났어요?” 그 말씀에 자극을 받아 참가자 모두가 환호하며 하늘을 바라보았고 저도 태양을 보았습니다.
그야말로 성체모양으로 빛이 쏟아져 내렸습니다. 그런 현상에 부정적인 저였지만 저도 모르게 성호경을 그으며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를 반복하였습니다. 그때 추기경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믿음이 약한 사람은 보고라도 믿어야죠!”
예수님의 능력은 언제 어디서나 한결같으셨지만, 당신을 의심하는 고향 사람들 앞에서는 별로 기적을 행하지 않으셨습니다.(마태13,58) 주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힘이 있으셨지만, 그 말씀의 능력은 믿음을 바탕으로 드러났습니다.
그렇다면 주님의 살아있는 말씀이 힘을 내느냐 못 내느냐는 그 말씀을 듣는 우리에게 달려있습니다. 우리가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믿고 실천하면 능력의 혜택을 입게 됩니다. 믿음은 머리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그대로 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하라 하시면 그대로 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가르치시고 명하는 것은,, 못할 것이 없습니다. 믿고 행하십시오. 그러면 그분의 모든 것을 받게 됩니다.
오늘 복음은 그 믿음이 무엇인지를 보여준 사람을 유다인이 아닌 한 이방인 백인대장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백인 대장은 “주님, 저는 주님을 제 지붕 아래로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하고 고백합니다. 자신의 자격에 대한 겸손한 고백은 영혼을 치유하고 하느님을 기쁘게 합니다.
그러나 선민의식에 사로잡힌 유다인에게는 큰 충격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들은 타인의 자격이나 합당함에 대한, 판단으로 영혼을 파괴하고 하느님을 슬프게 하고 있었으니 말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지적하셨으니 예수님께서 그들의 미움을 사게 된 것은 당연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소위 열심하다고 하는 사람, 활동을 많이 하고 본당의 여러 직책을 맡은 사람들, 성직자나 수도자도 믿음을 자신할 수는 없습니다. 지식으로 아는 것은 많을지 모르나 주님과의 일치를 이루는 믿음에는 소홀할 수 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참된 믿음의 소유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사실 “믿음은 우리가 바라는 것들의 보증이며 보이지 않는 실체들의 확증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느님 마음에 들 수 없습니다. 하느님께 나아가는 사람은 그분께서 계시다는 것과 그분께서 당신을 찾는 이들에게 상을 주신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히브11,1. 6) 믿음으로 하느님의 능력을 보게 되기를 희망합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기도로 마칩니다.
“오 하느님, 믿음으로 당신을 부르나이다. 인간이 되신 당신 아드님을 통하여 당신을 선포하신 아드님의 일생을 통하여 제게 불어넣어 주신 그 믿음으로 오 하느님! 당신을 애타게 부르나이다.” 그리고 고백합니다. “주님, 제 안에 주님을 모시기에 합당치 않사오나 한 말씀만 하소서 제 영혼이 곧 나으리이다.”
마음을 다하여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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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매일 7km 정도를 걷습니다. 뛰면 운동량이 더 늘어날 것 같아서 뛰었다가 무릎이 아파서 고생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부담 없는 걷기를 즐깁니다. 제 나이에 뛰기란 틀렸다고 하면서 말이지요.
그런데 팔십 대의 몸과 오십 대의 몸 중 어떤 몸이 더 뛰기에 적합한 몸일까요? 당연히 오십 대의 몸이라고 누구나 말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분은 팔십 대인데도 어떤 사람보다도 더 뛰어난 몸을 간직하고 계십니다.
이분은 마라토너 남정조 할아버지입니다. 그것도 젊었을 때 마라톤을 시작하신 것이 아니라, 나이 일흔에 시작하셨습니다. 그리고 마라톤 입문 10년을 앞두고 풀코스 1,000회를 달성하셨습니다. 2012년에 처음 도전해서 대회에서 달린 거리만 42,195km로, 지구 한 바퀴를 넘어 달린 셈입니다.
이 기록은 대한민국에서 단 13명만 성취한 기록이라고 하더군요. 나이 들면 걷기도 힘들다고 하는데, 이 할아버지는 인간의 한계에 도전한다는 마라톤을 지금도 꾸준히 하십니다. 불가능함은 능력이 없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할 수 없다는 스스로에 대한 불신에 나오는 것임을 깨닫게 됩니다.
주님께서도 믿음을 강조하셨습니다. 그런데 자기 자신에 대한 믿음을 갖지 못하는 상태에서 다른 존재에 대한 믿음을 가질 수 있을까요? 주님께서는 나를 통해 불가능한 것도 가능하게 만드신다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로마인에게 종은 노예로서 상품이지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백인대장은 예수님께 이 종을 위해 직접 와서 부탁했습니다. 상품이 아닌 사람으로 자기 종을 대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랑에 사랑의 주님께서 움직이지 않을 수가 없겠지요.
주님께서는 사랑에 사랑을 더해 더 큰 사랑을 만드시는 분이 아닙니까? 그런데 직접 가시겠다는 예수님을 향해 자신에게 자격 없음을 이야기합니다. 이교도인 로마인 백인대장은 예수님께서 자기 집에 오시면 당시 풍습에 따라 부정하게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 저는 주님을 제 지붕 아래로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 그러면 제 종이 나을 것입니다.”(마태 8,8)라고 고백합니다.
이런 모습은 예수님을 믿기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굳이 자기 집에 모시지 않아도 충분히 사랑하는 종을 고쳐주실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이렇게 사람을 사랑하고 당신을 향한 굳은 믿음을 갖춘 사람만이 하느님 나라 잔칫상에 자리를 잡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주님께 대한 믿음은 어떠한가요? 그 믿음에서 불가능한 일이 가능한 일로 내 안에서 이루어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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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대림절의 모범>
교회는 대림절 첫 복음으로 백인대장의 종을 주님께서 치유해주신 얘기를 택했고, 복음 환호성은 “주 하느님, 어서 오시어 저희를 구원하소서. 당신 얼굴을 비추소서. 저희가 구원되리이다.”입니다.
이 복음 환호성에 비추어 오늘 복음을 보면 백인대장은 주님께서 어서 오시어 구원해주시기를 바라고, 그래서 마침내 구원을 받는 대림 시기 우리의 모범입니다.
사실 주님께서는 이 세상에 오셨고, 오늘 복음에서는 가파르나움까지 찾아오셨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고, 가파르나움까지 찾아오신 것은 오시기를 당시 백인대장이나 지금의 우리가 바랐기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가 바라고 청하지 않아도 주님은 오실 분이라는 말입니다.
엄마는 꼭 와달라고 해야 집 떠나있는 자식을 찾아가는 분이 아닙니다. 청하지 않아도 그리고 청하기도 전에 찾아가시는데 주님도 그러십니다.
오늘 주님께서도 종이 아프다는 백인대장의 말에 청하기도 전에 “내가 가서 그를 고쳐 주마!”하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런데도 우리가 주님 오시기를 바라고, 초대하고, 기다려야 하는 것은 그러지 않으면 안 오시기 때문이 아니라 그래야 구원이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바라야 하는 이유는 바라지 않는 우리가 되어서는 아니 되기 때문입니다. 초대하고 기다려야 하는 이유도 마찬가지입니다.
바라지도 청하지도 기다리지도 않는데 주님이 오시면 우리는 주님께서 오셨는지도 모를 것이고, 알더라도 주님을 거들떠보지도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청하지 않고, 청하기도 전에 주님이 오시는 것은 하느님의 자유로운 사랑이고, 바라고 청하고 기다리는 것은 우리 구원의 도리입니다. 믿음과 희망과 사랑이 우리 구원의 도리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구원받고자 한다면 다른 데서 구원을 찾지 않음은 물론, 하느님은 전능하실 뿐 아니라 사랑이시라는 것을 우리가 믿고 그 하느님께서 우리를 찾아오시리라는 희망을 우리가 잃지 않으며, 마침내 찾아오셨을 때 그 하느님을 우리가 사랑으로 모셔드려야겠습니다.
구원이 오지만 구원을 모셔드리는 것은 우리 몫입니다.
사랑께서 찾아오시지만 그 사랑을 갈망하고 기다리고 모셔드리는 것은 우리 몫입니다.
백인대장은 주님을 자기 집에 모실 자격이 없다고 했지만 그것은 그의 겸손이고 그의 갈망은 모실 자격이 충분하며 그래서 그의 겸손과 갈망은 대림절의 모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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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새 예루살렘>
- 참 겸손한 이들이 영원히 머무는 곳 -
‘고향에서 고향을 그리워하는’(homesick at home) 역설적 인간입니다. 이미 오늘 지금 여기서 새 예루살렘 하늘나라 본향을 앞당겨 사는 참 겸손한 이들입니다. “행복하여라, 겸손한 이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고백이 저절로 나옵니다. 오늘 제1독서 이사야서는 예루살렘의 부흥에 대해, 즉 새 예루살렘에 대한 묘사입니다. 주석에 나오는 설명입니다.
“이사4,2-6 대목은 귀양살이 다음에 쓰여진 것이다. 어둡고 재앙으로 가득한 지난날이 흘러간 다음에는 솟아날 희망이 엿보인다. 하느님이 선택하신 남은 자들에게서 하느님과 맺은 계약에 충실한 백성이 생겨날 것이다. 저자가 보기에 탈출기의 기적을 다시 보여주실 것이다.”(탈출13,21이하 참조)
이어지는 화답송 시편이 의미심장합니다. 어제와 똑같이 반복되는 화답송 시편122장입니다. 특히 최민순 신부님 번역의 화답송 시편 1절은 제가 8년전 2014년 800km 2000리 산티아고 순례 여정중 걸으면서 끊임없이 바쳤던 성구이기에 지금도 생생히 기억합니다.
“주님의 집에 가자 할 제, 나는 몹시 기뻤노라.”
산티아고 순례 여정의 목적지는 바로 산티아고 대성전으로 그대로 예루살렘 대성전을 상징합니다. 주님의 집, 산티아고 대성전에 가까워질수록 빨라졌던 발걸음이었습니다. 지금도 기적처럼 생각되는 것이 산티아고 대성전 목적지에 가까워질수록 기쁨에 샘솟는 힘이었다는 것입니다. 전혀 피곤함을 느끼지 못했고 달려가듯 걸었던 당시 상황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매일 새벽 수도원 산책때 마다 산티아고 순례는 계속됨을 깨닫습니다. 순례여정 중의 순례자 신원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기쁨의 샘, 활력의 샘, 주님의 집, 산티아고 대성전은 바로 예루살렘 대성전을 상징하는 듯 참 반갑고 고마웠습니다. 이어지는 후속 시편입니다.
“예루살렘아, 네 성문에 우리 발은 이미 서 있노라.
너 예루살렘은, 그 짜임새 멋지게 이룩된 도성,
지파들이, 주님의 지파들이 저기 올라가도다.”
시편의 예언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분명히 확인되고 있습니다. 장차 종파를 초월하여 참으로 주님을 믿고 희망하고 사랑하는 모든 겸손한 자들에게 활짝 열린 새 예루살렘 하늘나라 잔칫상임을 깨닫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사람이 동쪽과 서쪽에서 모여와, 하늘나라에서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과 함께 잔칫상에 자리 잡을 것이다.”
참으로 종파를 초월하여 진리 자체이신 주님을 찾는 모든 겸손한 이들에게 활짝 열린 새 예루살렘 하늘나라 잔칫상임을 깨닫습니다. 바로 그의 전형적 본보기가 오늘 복음의 이방인 백인대장입니다. 예수님이야 말로 새 예루살렘 하늘 나라를 상징합니다. 다음 주님과의 대화를 통해 백인대장의 면모가 잘 드러납니다. 종에 대한 지극한 사랑과 또 주님께 대한 지극한 겸손입니다.
-“주님, 제 종이 중풍으로 집에 드러누워 있는 데 몹시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내가 가서 고쳐주마.”
“주님, 저는 주님을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 그러면 제 종이 나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백인대장의 사랑과 겸손의 믿음에 감탄하시며 당신을 따르는 이들에게 이르십니다. 이런 사랑과 겸손으로 표현되는 믿음을 배우라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믿음이 주님을 감동시킬 때 일어나는 치유의 기적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이스라엘의 그 누구에게서도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
이어 곧장 주님은 “가거라, 네가 믿은대로 될 것이다.” 백인대장에게 응답하셨고 바로 그 시간에 백인대장의 종은 나았습니다. 치유의 기적에 앞서 백인대장의 지극하고 순수한 사랑과 겸손의 믿음이 있었고, 이어 주님 말씀의 권능에 의한 치유입니다. 결코 주님만의 일방적 치유는 없습니다.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 우리의 최선을 다하는 사랑과 겸손의 믿음과 더불어 주님의 은총이 합력하여 이뤄지는 치유의 기적입니다. 이 거룩한 하늘나라 미사 잔치 시간, 백인대장처럼 겸손한 믿음을 고백하며 주님의 성체를 모시기 바랍니다.
“주님, 제 안에 주님을 모시기 합당치 않사오나, 한 말씀만 하소서, 제 영혼이 곧 나으리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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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나는 이스라엘의 그 누구에게서도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마태8,10)
<이방인의 구원자이신 예수님!>
오늘 복음(마태8,5-11)은 예수님께서 '백인대장의 병든 종을 고쳐주시는 말씀'입니다. 백인대장이 예수님께 다가가 중풍으로 고생하고 있는 자신 종의 처지를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가서 그를 고쳐 주마." 하시자, 백인대장은 예수님께 이렇게 대답합니다. "주님, 저는 주님을 제 지붕 아래로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 그러면 제 종이 나을 것입니다."(마태8,8) 예수님께서는 백인대장의 이 큰 믿음에 감탄하시면서, "많은 사람이 동쪽과 서쪽에서 모여와, 하늘나라에서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과 함께 잔칫상에 자리 잡을 것이다."(마태8,11) 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 시대에 '백인대장'은 '백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있는 로마제국 군대의 지휘관'으로서, 유다인들의 입장에서 보면 구원으로부터 멀어져 있었던 '이방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런 이방인과 대화하십니다. 그런 이방인의 큰 믿음을 보시고 감탄하십니다. 그리고 다른 많은 이방인들이 구원으로 초대되어질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나도 이방인이지 않을까?
예수님으로부터 멀어져 있는 이방인! 예수님의 옷을 입지 않은 이방인! 예수님을 통해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을 지금 여기에서 살아내지 못하고 있는 이방인!
그래서 백인대장의 큰 믿음이 필요한 이방인이지 않을까?
예수님은 이방인을 구원하러 오신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런 주님께 먼저 깊은 찬미와 감사를 드리고, 나도 백인대장의 큰 믿음이 되어 구원으로 초대되는 이방인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독서(이사4,2-6)는 그런 이방인들에게 주어지는 은총을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정녕 주님의 영광이 모든 것을 덮어 주는 지붕과, 초막이 되어, 낮의 더위를 피하는 그늘이 되어 주고, 폭우와 비를 피하는 피신처와 은신처가 되어 주리라."(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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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m.youtube.com/watch?v=qlEPg-o4Vf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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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그 누구에게서도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마태 8, 10)
믿음에는
이방인과
토박이의
까다로운
구분이 없습니다.
믿음의 자격 앞에
내놓을 수 있는 것은
우리의
간절한 기도입니다.
믿음은 마음을
동반합니다.
마음을 만나는 것이
믿음이며
치유입니다.
믿음은 사람을
만들어가고
사람은 믿음으로
치유를 얻습니다.
연민의 깊이가
곧 믿음의
깊이입니다.
믿음은 주님께
도움을
청하는
간절한
사랑입니다.
주님께서
하실 수 있도록
이 아픔을
믿음으로
내어드리는
사랑입니다.
사랑으로
내어드리는 것이
겸손입니다.
겸손은
높고 낮음의
관계가 아닌
너와 내가
결국 하나임을
알게되는 믿음의
행위입니다.
믿음을
바탕으로 하는
치유는 서로를
살립니다.
그래서 믿음은
우리모두를
깨어나게 합니다.
하느님의 믿음과
백인대장의
믿음에서
함께하는 믿음을
봅니다.
믿음은 고립되어
있지 않습니다.
믿음의 잔치상에는
믿음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모여들 것입니다.
자리 잡아야 할
흔들리는
우리들
믿음입니다.
믿음의 자리는
도움의 자리이며
실행의 자리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실행으로
더 깊어지길
기도드립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
그러면 제 종이
나을 것입니다."
믿음의 여정 앞에
필요한 것은
간절한
믿음뿐입니다.
간절한 믿음은
아무 것도
따지지 않는
간절한
겸손입니다.
내려오고
내려오면
말씀은
살이있는
치유로
자리 잡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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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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