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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106
#번제 #속죄제 #속건제
번제는 매일 두번씩 드려져야 했던것으로 봐서 원죄의 대속을 의미하는것 같고,속죄제와 속건제는 특정한 죄에 대한 제사로 드려져야 했던것으로 봐서 자범죄의 대속을 의미하는것 같다.
#공의 #사랑
구약의 그리스도는 공의로 사랑을 드러내셨고,신약의 그리스도는 사랑으로 공의를 이루셨다.
#20230106
시공을 초월하는 영원성과 광대성은 하나님뿐만 아니라,그리스도의 영광의 인성에도 해당되는 것이다.그리스도의 인성은 영원전부터 삼위일체 하나님과 함께 계셨었기 때문이다.하나님 우편에 계신 그리스도의 인성에 편재성이 없으시다면,이땅에 재림하실때 어떻게 지구의 모든사람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주님을 볼수 있겠는가.
#벨기에신앙고백서 12.#천지창조 (3)
He has also created the angels good, that they might be his messengers and serve his elect.
또한 성부 하나님께서는 천사들도 선하게 지으셨습니다. 그래서 천사들은 성부 하나님의 전령이 되며 성부 하나님께서 창세 전부터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하시기로 선택하신 이들을 섬기고 있습니다.
사람은 영혼과 육체 또는 영과 혼과 육의 연합체로 지어졌으나, 천사들은 오로지 영으로만 지어졌다. 사람은 창조주 그리스도의 명을 따라 생육하고 번성하지만, 천사들은 서로간의 생육함이 없이 처음 지어진 그대로 존재한다. 천사들은 셋째 하늘에서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직접 섬기기 때문에 죄로 인해 부패하고 타락한 인간의 눈에는 우리보다 높고 존귀한 존재로 보이게 마련이지만, 사도 바울이 히브리서에서 언급한 바에 의하면 천사들은 하나님의 자녀들도 아니고 그리스도의 후사들도 아니며 단지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백성된 성도들을 섬기도록 지음받은 존재들이다. 따라서 사람이 천사를 숭배한다는 것은 일단은 하나님과 그리스도가 아닌 다른 존재를 섬기는 우상숭배인데다가, 섬김을 받는 자가 섬기는 자를 섬기는, 순리로 써야 할 것을 역리로 쓰는 죄를 저지르는 것이다.
Some of them have fallen from the excellence in which God created them into eternal perdition; and the others have persisted and remained in their original state, by the grace of God.
성부 하나님께서 선하게 지으신 천사들 중 얼마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셨던 그 탁월함에서 영원한 멸망으로 타락하였습니다. 반면에 타락하지 않은 나머지 천사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처음 지음받은 선한 상태를 고수하고 유지하였습니다.
하나님과 그리스도께서 물질세계를 창조하시기 전에 천사들 중 얼마가 사탄이라 하는 천사를 중심으로 해서 그리스도를 대적하게 되고, 이에 하늘에서 전쟁이 벌어져 사탄과 그 추종 천사들이 패하여 하늘에서 쫓겨나 땅으로 떨어지게 된다. 사탄을 비롯한 악한 천사들은 자기들 스스로의 의지로 그리스도께 반역을 저지른 것이고 그것이 죄의 시작이다. 그러나 하나님과 그리스도께서 창세 전에 모든 것을 계획하시고 작정하셨는데 어떻게 사탄과 악한 천사들에게 죄책을 돌릴 수 있느냐 하는 것과, 과연 사탄이 처음 악한 마음을 품은 그 죄의 기원은 어디서 오는 것이냐 하는 것은 지금의 우리로서는 밝혀낼 수가 없기 때문에 감히 하나님과 그리스도께 죄책을 덮어 씌우려 하지 말고 믿음으로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절대 선을 붙잡아야 한다. 그런데 한가지 의아한 것은, 분명 사탄과 악한 천사들은 하늘의 전쟁에서 패해 쫓겨났음에도 불구하고 구약성경에서는 여전히 그리스도께서 계신 셋째 하늘을 왕래하고 심지어 그리스도와 이야기도 나누는 장면이 있다는 것이다. 또한 신약의 유다서에는 사탄이 천사장 미가엘과 모세의 시체에 대해서 변론했다고까지 나온다. 따라서 아마도 사탄과 악한 천사들은 아주 제한적으로나마 그리스도의 허락이 있을 때에만 셋째 하늘에 출입이 가능했던 것 같다.
The devils and evil spirits are so corrupt that they are enemies of God and of everything good. They lie in wait for the church and every member of it like thieves, with all their power, to destroy and spoil everything by their deceptions.
마귀들과 악한 영들은 심히 부패하여 하나님과 모든 선한 것들을 대적합니다. 그들은 마치 도적과 같이 교회와 교회의 모든 구성원 가운데 숨어들어 자기들의 모든 능력을 동원한 속임수로써 모든 교회와 교회 구성원들을 파멸하고 망쳐놓으려 합니다.
사탄은 동산에서 뱀을 이용해서 하와를 타락시켰고, 하와를 이용해서 아담을 타락시켰다. 그래서 하와의 후예인 여자들은 허영의 죄에, 아담의 후예인 남자들은 음욕과 간음의 죄에 빠지기 쉽게 되었다. 붉은 용인 사탄은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인 경제제도를 통해서 교회와 성도들을 돈으로 매수하려 하고, 땅에서 올라온 짐승인 통치제도를 통해서 교회와 성도들을 권력으로 억압하려 하며, 두 짐승을 올라탄 이세벨 같은 음녀인 거짓 교회를 통해서 교회와 성도들을 유혹하려 한다. 바다 짐승의 돈에 매수된 교회는 복음 사역보다 영리 사업에 더 치중한다. 바다 짐승의 돈에 매수된 교인은 일요일에도 아무런 거리낌없이 자기 사업과 장사를 한다. 땅의 짐승의 권력에 영합한 교회와 교인은 정치이념과 진영논리에 빠져서 반대되는 국가 지도자와 정부에 대해서는 스스럼없이 악으로 규정하고 저주와 비방과 악담과 조롱을 비롯해 온갖 불법적인 집단 시위를 행사한다. 음녀에게 미혹된 목사와 교인들은 왜곡되고 거짓된 가르침으로 인해 간음과 음행을 비롯한 죄를 짓고도 회개하지도 뉘우치지도 용서를 구하지도 않으면서도 스스로 구원받은 성도라고 단단히 착각하게 된다.
So then, by their own wickedness they are condemned to everlasting damnation, daily awaiting their torments.
그래서 이 마귀들과 악한 영들은 자기들의 사악함으로 인해 끝없는 저주를 받기로 정죄되어, 자기들이 받을 지옥의 고통을 날마다 기다리게 됩니다.
사탄을 비롯한 악한 천사들은 완전한 영이기 때문에 이미 하늘에서 그리스도께 반역한 때부터 완전히 부패해버리고 타락해버려서 죄사함을 받을 여지가 전혀 없게 되었다. 따라서 그것들은 성경에 기록된 바 자기들이 영원한 형벌을 받게 될 처지라는 것을 뻔히 알면서 교회와 성도들을 죄짓도록 유혹하고 회유하고 협박하는 것이다. 짐승의 권세와 회유와 겁박에 못이겨서 손이나 이마에 짐승의 표를 받는 교회나 목사나 교인들은 외형적으로는 신앙이 있는 것처럼 보일 수는 있어도 주님 앞에서는 거짓 교회와 거짓 목사와 거짓 신자임을 드러낸 것과 같다. 즉, 짐승의 표를 받은 교회와 목사와 교인들은 처음부터 주님의 성령을 받은 교회와 목사와 성도였다가 성령께서 떠나시고 버림받은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주님의 성령을 받은 적 없이 겉으로만 흉내내다가 때가 되어 사탄의 회당, 발람과 이세벨과 니골라, 사울 왕과 가룟 유다와 아나니아와 삽비라처럼 자기들의 정체를 드러낸 것에 불과한 것이다. 더욱 두려운 것은, 그런 거짓 교회와 목사와 교인들도 처음에는 마치 주님께 헌신한 것과 같은 모습으로 시작했다가 시간이 서서히 지나면서 조금씩 변질되어가기 때문에 그들 스스로도 자기들이 거짓 되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용의 짐승의 표를 받은 것은 자기들 스스로의 의지로 한 것이기 때문에, 두 번 다시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는 배교로 나아가게 되는 것은 전적으로 자기들의 책임인 것이다.
For that reason we detest the error of the Sadducees, who deny that there are spirits and angels, and also the error of the Manicheans, who say that the devils originated by themselves, being evil by nature, without having been corrupted.
이런 연유로 우리는 영과 천사의 존재를 부정하는 사두개인들의 오류를 혐오합니다. 또한 우리는 마귀와 악한 영들은 부패한 것이 아니라, 자기들의 악한 본성에서 기원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마니교도들의 오류도 혐오합니다.
성경에 기록된 천사와 마귀에 관한 모든 내용은 그저 허상이나 착시나 신화가 아니라 실제적인 사실이다. 따라서 이러한 영과 천사와 마귀의 존재를 부정한다는 것은 결국 성경을 사실과 진리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과 같다. 마귀와 악한 영들이 스스로 타락한 것이 아니라 원래 본성이 악하기 때문이라고 하는 것은 그들을 처음 지으신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죄의 조성자와 원인으로 보는 신성모독이다. 마귀를 비롯한 악한 천사들이 어째서 어떻게 악하고 죄악된 마음을 품을 수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우리로서는 알 수가 없으나,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 그리스도께서는 절대적으로 선하신 분이심을 견고히 믿는 것이다.
#20220106
#사사기 #Judges 6:25-32 #기드온
25 그 날 밤에 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이르시되 네 아버지에게 있는 수소 곧 칠 년 된 둘째 수소를 끌어 오고 네 아버지에게 있는 바알의 제단을 헐며 그 곁의 아세라 상을 찍고
26 또 이 산성 꼭대기에 네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규례대로 한 제단을 쌓고 그 둘째 수소를 잡아 네가 찍은 아세라 나무로 번제를 드릴지니라 하시니라
여호와의 사자로서 기드온을 만나시고 그의 예물을 제물로 받으신 여호와 그리스도께서는 기드온을 이스라엘의 큰 용사와 사사로 세우시자마자 이번에는 혼자만의 제단이 아니라 기드온의 가족과 성읍 모든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제사를 지내라고 명령하신다. 기드온의 아비에게 있는 7년 된 둘째 수소를 바치라는 것은 가장 힘이 세고 극상의 가치를 지닌 소를 바침으로써 자신의 모든 소유는 여호와 그리스도께로부터 온 것임을 고백하라는 뜻이다. 바알의 제단과 아세라 우상을 부수고 그 나무 잔해로 번제의 땔감에 쓰라는 것은 여호와 그리스도 이외의 모든 신들은 헛되고 그 우상 재료는 한낱 피조물에 불과하여 아무런 신령한 영향을 끼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그 우상의 재료는 잘해봐야 여호와 그리스도께 드리는 제사의 땔감으로나 쓰일 뿐이어서 우상을 만들고 섬기는 자들에게 수치와 모욕을 주기에 합당했다. 규례대로 제단을 쌓으라는 것은 아마도 모세를 통해서 이스라엘에게 주신 율법의 규례대로 제단을 쌓으라는 의미일 것이다. 그런데 그 바알아세라 제단과 우상은 기드온 자신의 것이 아니라 아비의 것이었는데 그것을 부수라고 하신 것은 진리 수호가 부모 공경보다 앞서기 때문에 부모를 공경하는 것도 언제나 주 안에서 행해져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부모의 죄악된 지시를 거역하는 것은 부모 공경의 계명을 위반하는 것이 아니다. 어쩌면 7년 된 둘째 수소는 기드온의 아비가 바알과 아세라에게 제사를 드리기 위해서 준비한 제물이었을지도 모르는데 그것으로 도리어 여호와 그리스도께 제사를 드리라고 하신 것일지도 모른다. 교회와 신자가 성경과 성령으로서가 아니라 육체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위해 재물이나 시간이나 봉사나 헌신 등을 준비해 왔다면 이제는 그 모든 것들을 하나님 그리스도를 위해서 사용해야 하는 것이다. 바알의 제단은 교회에서 반 그리스도적인 방식으로 행해지는 모든 예식을 의미한다. 우상숭배적인 죄악된 예식이라도 당회가 승인했다는 이유로, 오랫동안 전통을 유지해왔다는 이유로 묵인되는 경우가 많은데, 아무리 당회가 승인하고 오랫동안 이어내려온 전통이라 하더라도 성경과 성령의 원리에 어긋나는 것은 바알의 제단을 부수듯이 과감하게 혁파해야 할 필요가 있다.
27 이에 기드온이 종 열 사람을 데리고 여호와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대로 행하되 그의 아버지의 가문과 그 성읍 사람들을 두려워하므로 이 일을 감히 낮에 행하지 못하고 밤에 행하니라
기드온에게는 여전히 성읍 사람들에게서 받을 보복이 두려웠으나 자기 눈으로 그리스도이신 여호와의 사자를 보고 자기 입으로 그분과 대화를 했으며 자기 귀로 그분의 음성을 들은 것이 너무나 확실하고 뚜렷했기 때문에 그 두려움을 얼마간 극복하고 한밤중에 몰래라도 여호와 그리스도께서 명하신대로 규례에 맞는 새 제단을 쌓고 바알의 제단과 아세라 우상을 훼파하여 그 나무조각들로 번제를 드릴 재료로 삼았다. 사람들은 촛불의 꺼져가는 모습과 갈대의 상한 모습만을 보고 비방하기 일쑤지만 여호와 그리스도께서는 꺼져감에도 불구하고 타오르는 촛불과 상했어도 여전히 근근하게 생명을 유지하고 있는 갈대의 모습을 보시고 새롭게 타오르게 하시고 상한 것을 낫게 해주신다. 사람들은 기드온의 두려움과 겁많은 모습을 보고 비웃지만 여호와 그리스도께서는 그가 두려운 가운데서도 명령을 이행한 것을 더 귀하게 여기신다. 순종의 불완전성이 핑계나 변명거리가 되어서도 안되지만 비방거리가 되어서도 안된다. 불완전한 가운데서도 순종했다는 것을 더 귀하게 여길 수 있어야 한다.
28 그 성읍 사람들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본즉 바알의 제단이 파괴되었으며 그 곁의 아세라가 찍혔고 새로 쌓은 제단 위에 그 둘째 수소를 드렸는지라
29 서로 물어 이르되 이것이 누구의 소행인가 하고 그들이 캐어 물은 후에 이르되 요아스의 아들 기드온이 이를 행하였도다 하고
30 성읍 사람들이 요아스에게 이르되 네 아들을 끌어내라 그는 당연히 죽을지니 이는 바알의 제단을 파괴하고 그 곁의 아세라를 찍었음이니라 하니
성읍 주민들은 더이상 무엇이 여호와 그리스도의 뜻인지도 판단할 수 없을 정도로 무지와 완악함에 휩싸여 있어서 바알 제단과 아세라 우상을 부순 기드온을 도리어 죽이려는 적반하장의 모습을 보인다. 성읍 주민들이 바알과 아세라를 애지중지 했던 이유로는 자기들을 괴롭히는 미디안의 눈치를 봐야했기 때문도 있었을 것이다. 그들은 자의로나 타의로나 바알과 아세라를 극진히 섬겨왔다. 이스라엘의 회개를 위해 극심한 가뭄을 기도하여 응답을 받은 선지자 엘리야는 아합 왕을 비롯한 이스라엘 백성들로부터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 자라는 모욕을 들어야 했다. 기드온의 이야기를 알고 있는 우리들은 성읍 사람들의 적반하장과 패역함에 어이없음을 느끼지만 정작 우리 각자의 교회에서도 이런 성읍 사람들의 행태가 벌어지는 것에 대해서는 매우 둔감하다. 교회학교 목사가 미성년자를 대상으로 성범죄를 저질렀어도 교회 평판이 떨어질까 우려해서 조용히 사임시키는 것으로 마무리를 짓는다. 그 여학생이 몇년 후에 교회에서 자살을 해서 언론에까지 보도가 되었는데도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려는듯이 쉬쉬하기에만 급급해한다. 벌어진 사태를 총괄하여 책임지고 투명하게 해결해 나가야 할 담임목사는 자기 자리만 지키기에 급급해한다. 당회는 사분오열되는 교회 상태를 수습하기는 커녕 아무런 대책도 취하지 않고 방치한다. 사태 해결을 위해 올바른 의견을 내는 부교역자들은 교회를 괴롭게 하는 자들이라는 누명을 쓰고 전부 쫓겨나버린다. 그와중에 담임목사는 교회에서 찾아먹을 수 있는 모든 혜택들을 한푼도 남김없이 핥아먹고 자기를 초빙할 다른 교회와 내통했던 것이 발각돼서 스스로 교회를 버리고 떠나버리게 된다. 그때에라도 당회는 그 사태의 발단으로 되돌아가서 모든 단계에서의 죄악들을 공개적으로 시인하고 사죄하고 회개하여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라는 미명하에 그저 묻어두기에만 바빴다. 새로이 담임목사가 청빙되고 수년이 흐른 지금에는 그 당시 사건을 들추는 것은 마치 바알의 제단과 아세라 상을 부순 죄목으로 간주되어 교회 전체의 지탄을 받게 된다. 당회의 반성경적인 결정을 공개적으로 지적하는 교인은 당회의 권위를 존중하지 않고 교회에 분란을 일으키는 자라는 누명을 쓰게 된다.
31 요아스가 자기를 둘러선 모든 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바알을 위하여 다투느냐 너희가 바알을 구원하겠느냐 그를 위하여 다투는 자는 아침까지 죽임을 당하리라 바알이 과연 신일진대 그의 제단을 파괴하였은즉 그가 자신을 위해 다툴 것이니라 하니라
기드온의 아비 요아스는 기드온을 잡아 죽이려고 찾아온 성읍 주민들을 향해 반박할 수 없는 강력한 논리로 완강하게 항변하며 아들 기드온을 지켜낸다. 그러나 이는 요아스가 원래는 여호와 그리스도의 신앙을 가지고 있었는데 성읍 주민들의 강압과 성화에 못이겨서 그동안 어쩔 수 없이 바알 제단과 아세라 상을 관리해오고 있었던 것인지, 아니면 성읍 주민들처럼 진심으로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며 제단과 우상을 자원하는 심령으로 관리하고 있었는데 차마 아들을 죽일 수는 없어서 그랬던 것인지는 불분명하다. 긍정적으로 생각해본다면 이 사건을 계기로 요아스가 우상숭배를 완전히 저버리고 아들 기드온을 따라 여호와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으로 전향했다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부정적으로 생각해본다면 요아스는 라오디게아 교회처럼 여호와 그리스도께 차지도 더웁지도 않은 미지근한 신앙을 가지고 있었거나 선지자 엘리야가 책망한바와 같이 여호와 그리스도와 바알 사이에서 갈바를 알지 못하고 갈팡질팡 머뭇거린 것일수도 있다.
32 그 날에 기드온을 여룹바알이라 불렀으니 이는 그가 바알의 제단을 파괴하였으므로 바알이 그와 더불어 다툴 것이라 함이었더라
기드온은 성읍 주민들에 대한 두려움에 벌벌 떨면서도 여호와 그리스도께서 명하신대로 바알 제단과 아세라 상을 부수고 그분께 제단을 쌓아 제사를 드림으로써 한 인간으로서 바알이라는 우상과 가히 대적하며 다투는 자라는 여룹바알이라는 별명을 가지게 된다. 기드온을 여룹바알이라고 부른 것은 어쩌면 그에 대한 성읍 주민들의 분노와 저주와 멸시를 담은 칭호일수도 있겠지만 여호와 그리스도를 섬기는 참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더없이 영광스럽고 높고 존귀한 칭호가 아닐 수 없다. 이는 이방인들이 처음에는 성도들을 그리스도인이라 부르며 멸시하고 조롱했으나 성도들에게는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존귀한 명칭이 되는 것과도 같다.
#20210106
#민수기 #Numbers 22:23-30
#발람
23 나귀가 여호와의 사자가 칼을 빼어 손에 들고 길에 선 것을 보고 길에서 벗어나 밭으로 들어간지라 발람이 나귀를 길로 돌이키려고 채찍질하니
24 여호와의 사자는 포도원 사이 좁은 길에 섰고 좌우에는 담이 있더라
25 나귀가 여호와의 사자를 보고 몸을 담에 대고 발람의 발을 그 담에 짓누르매 발람이 다시 채찍질하니
26 여호와의 사자가 더 나아가서 좌우로 피할 데 없는 좁은 곳에 선지라
27 나귀가 여호와의 사자를 보고 발람 밑에 엎드리니 발람이 노하여 자기 지팡이로 나귀를 때리는지라
28 여호와께서 나귀 입을 여시니 발람에게 이르되 내가 당신에게 무엇을 하였기에 나를 이같이 세 번을 때리느냐
29 발람이 나귀에게 말하되 네가 나를 거역하기 때문이니 내 손에 칼이 있었더면 곧 너를 죽였으리라
30 나귀가 발람에게 이르되 나는 당신이 오늘까지 당신의 일생 동안 탄 나귀가 아니냐 내가 언제 당신에게 이같이 하는 버릇이 있었더냐 그가 말하되 없었느니라
발람이 탄 나귀는 어찌 된 일인지 발람도 보지 못하는 여호와의 사자를 보고서는 본능적으로 사망의 두려움에 휩싸여 발람의 저지하는 매질에도 불구하고 어떻게든 그 자리를 벗어나고자 하였다. 그런데 만약에 이 나귀가 동물의 생존본능에 따라 자기만 살려고 했다면 몸부림을 쳐서 발람을 떨군 후에 혼자서 도망갔을 것이다. 그러나 나귀는 발람을 태운 채로 그 자리를 피하고자 하였는데, 이는 아마도 평생동안 발람을 태우면서 그를 주인으로 여겨서 자기뿐만 아니라 발람도 함께 살리고자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오직 나귀만 여호와의 사자를 볼 수 있었던 것은, 나귀에게 어떤 신렁한 능력이 있어서가 아니라 여호와께서 발람의 어리석음을 깨우치시려고 가장 하찮은 나귀의 눈을 여신 것으로 보는 것이 합당해보인다. 술사 발람은 여호와께로부터 축복과 저주의 큰 은사를 받았으면서도 영혼의 눈이 가리워져 여호와의 사자를 보지 못한 반면에 미천한 동물에 불과한 나귀는 여호와의 사자를 보고서 두려움으로 경외하는 역설적 모순의 아이러니한 파라독스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여호와께서는 니느웨가 멸망하기만을 바라는 요나를 일깨우시려고 벌레를 준비하셔서 요나에게 그늘을 만들어준 박넝쿨을 갉아먹게 하셨다. 새끼를 낳은지 하루밖에 안된 암송아지 두마리는 슬피 울면서도 언약궤를 실은 수레를 끌고서 곧장 벧세메스로 향함으로써 블레셋 제사장들과 고관들에게 여호와의 섭리하심을 드러내었다. 어떤 사자는 여호와의 명을 어기고 중간에서 음식을 먹어 범죄한 선지자를 물어 죽이고서는 그 시체를 먹지 않고 옆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사자굴의 사자들은 의로운 다니엘에게는 애완동물처럼 애교를 부리는 반면에 다니엘을 모함한 자들과 가족들은 저들이 땅에 닿기도 전에 맹렬히 움켜 잡아먹음으로써 여호와의 공의를 다리오 왕과 신하들에게 드러내었다. 생물들 중에서 가장 낮은 지능을 가지고 있다고 여겨지는 물고기 조차도 그 입에 동전 한닢을 물고 베드로에게 잡힘으로써 예수님의 능력을 드러내었다. 막강한 영향력을 지닌 교회와 직분자들이 잘못된 길로 향할 때, 하나님과 그리스도께서는 마치 나귀처럼 하찮게 취급받는 누군가나 무언가를 통해서 징계의 전조를 드러내신다.
여호와의 사자를 보지 못한 발람은 갑자기 나귀가 말을 안듣고 두려움에 떨며 이리저리 피해다니기만 하자 화를 내며 나귀를 때린다. 아마도 그 전까지는 나귀도 발람의 말을 잘 듣고 발람도 평생 이 나귀만 탄 것으로 봐서는 나귀를 무척이나 아꼈던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발람 정도 되는 유능한 술사라면 어마어마한 복채를 받고 큰 부를 누렸을 것이 분명한데도 오로지 이 나귀만 탔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발람이 이상한 행동을 보이는 나귀를 사정없이 매질한 것은 여호와를 거스를 정도로 모압 왕에게서 받을 부귀영화에 대한 탐욕에 얼마나 눈이 멀어있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게 한다. 만약에 발람이 이 제안을 받지 않았다면 이상행동을 보이는 나귀를 먼저 진정시켰을 것이다. 또한 나귀가 말을 할 때도 이게 대체 무슨 일인가 먼저 의아해 했어야 했다. 그러나 사람이 한 번 탐욕에 눈이 멀면 마치 발정난 짐승과도 같아서 아무 것도 신경쓰지 못하고 오로지 그 탐욕으로 달려들게 마련이다. 세겜 족속의 추장 하몰의 아들은 야곱의 딸 디나를 보자마자 성욕에 눈이 멀어 강간했다가 부족 전체가 야곱의 두 아들에 의해 진멸된다. 다윗의 맏아들 암논도 이복 누이 다말에 대한 성욕에 눈이 멀어 강간했다가 다말의 오라비 압살롬에게 살해된다. 사울 왕은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어떻게든 이겨보려고 하다가 신접한 여인을 찾는,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어버리고 만다. 그 여인에게서 죽은 사무엘의 영혼을 불러들여 예언을 듣지만, 그 예언대로 다음 날 전투에서 자기를 비롯한 세 아들이 처참하게 전사하고 시체는 블레셋 성벽에 달리는 수모를 겪는다. 아합은 나봇의 포도원을 탐내어 나봇을 죽이고 차지했다가 나중에 전장에서 치욕스럽게 전사한다. 오늘날에도 발람처럼 이 땅의 부귀영화에 눈이 멀어 뒤집힌 교회들과 목사들은 나귀 같은 사람과 현상이 나타내는 그리스도의 형벌의 징조를 파악하지 못하다가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될 뿐이다.
사람이 아닌 동물에 불과한 나귀가 어떻게 여호와의 사자를 볼 수 있고 사람의 말을 할 수 있는가 논한다는 것은 그다지 유익할 것이 없는 지적 호기심에 불과하다. 다만 생명이 있는 동물들에게도 사람과 동등하지는 않고 열등할 뿐이지만 각자 나름대로의 영혼이 부여되어 있다는 것과, 아담이 범죄하기 전 동산에서는 뱀이 하와에게 그랬던 것처럼 사람과 동물간에 자연스러운 대화가 가능했을 것이라는 추정을 해볼 수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모든 피조물 중에서 가장 고귀하고 동물들은 사람의 필요를 위해 사용될 수 있다 하더라도 무분별한 학대나 학살은 동물들에게도 영혼으로 생명을 부여하신 하나님을 거스르는 죄임을 알아야 한다.
#20200106
#성경묵상 #창세기 #Genesis 18장.
1 여호와께서 마므레의 상수리나무들이 있는 곳에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시니라 날이 뜨거울 때에 그가 장막 문에 앉아 있다가
2 눈을 들어 본즉 사람 셋이 맞은편에 서 있는지라 그가 그들을 보자 곧 장막 문에서 달려나가 영접하며 몸을 땅에 굽혀
3 이르되 내 주여 내가 주께 은혜를 입었사오면 원하건대 종을 떠나 지나가지 마시옵고
4 물을 조금 가져오게 하사 당신들의 발을 씻으시고 나무 아래에서 쉬소서
5 내가 떡을 조금 가져오리니 당신들의 마음을 상쾌하게 하신 후에 지나가소서 당신들이 종에게 오셨음이니이다 그들이 이르되 네 말대로 그리하라
6 아브라함이 급히 장막으로 가서 사라에게 이르되 속히 고운 가루 세 스아를 가져다가 반죽하여 떡을 만들라 하고
7 아브라함이 또 가축 떼 있는 곳으로 달려가서 기름지고 좋은 송아지를 잡아 하인에게 주니 그가 급히 요리한지라
8 아브라함이 엉긴 젖과 우유와 하인이 요리한 송아지를 가져다가 그들 앞에 차려 놓고 나무 아래에 모셔 서매 그들이 먹으니라
아브라함은 더운 날 뙤약볕에 서 있는 세 명의 사람들을 보고서는 바로 자기 장막으로 모셔서 극진히 대접한다. 물론 아브라함은 나그네와 손님 대접하기를 좋아하는 너그러운 성품의 소유자였겠지만 그저 단순히 어려움에 처한 나그네를 대접한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 세 명을 대접하고자 하는 아브라함의 태도는 마치 왕 앞의 신하와 같이 주인 앞의 종과 같이 매우 겸손했고 신속했으며 극진했기 때문이다. 아마도 아브라함은 그 세 명에게서 일반인의 모습이 아닌 신령한 천상의 존재로서의 표징을 보았음이 틀림 없다. 아브라함의 예상대로 세 명 중 한 분은 여호와 성자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이시고 다른 두 명은 인간의 형체를 입은 천사들이었다. 두 천사들이 가진 인간의 모습은 실제 인성은 아니고 단지 인형이나 마네킹 같이 모습만 인간인 일시적인 껍데기를 입은 것 뿐이다. 그러나 여호와 성자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입으신 육체는 일시적인 인성의 껍데기가 아니라 창세 전부터 성자 하나님과 연합하여 삼위일체 하나님과 함께 하시고 멜기세덱으로 잠깐 이 땅에 오셔서 참된 제사장 직분의 기반을 닦으셨으며 먼 훗날 구세주로 이 땅에 오실 그 본연의 인성의 육체를 입으신 것이었다. 그리스도의 때를 볼 것을 즐거워하며 고대한 아브라함은 그 동일한 믿음으로 나그네의 모습 속에서 그리스도와 천사들의 모습을 볼 수 있었고 영접할 수 있는 영광을 누릴 수 있었던 것이다. 물론 아브라함의 경우는 좀 특이하고 특별한 경우이기는 하지만 성경에는 종종 이렇게 하나님의 사람을 뜻하지 않게 영접하고 봉양하는 에피소드들이 있다. 선지자 엘리야는 사렙다의 과부에게서 3년 여 동안 섬김을 받았고 어떤 수넴 여인은 선지자 엘리사를 위해 머무를 방과 탁자와 음식 등을 제공하였다. 다윗 왕이 압살롬의 반역으로 피난할 때 거부 바르실래는 다윗 왕과 그 측근들을 위해 음식을 풍부하게 제공하였고 시드기야의 신하였던 이방 구스인 에벳멜렉은 선지자 예레미야가 진흙 구덩이에 빠져 죽게 되자 왕에게 탄원하여 그를 구출해 낸다. 그렇게 하나님의 사람들을 대접하고 도운 사람들은 하나 같이 하나님의 복을 누리게 되었다.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계실 때 어떤 아이가 믿음으로 드린 오병이어를 가지고 성인 남자만 5천 명을 먹이시고 열 두 광주리를 남기셨다. 사마리아 여인은 목마른 예수님께 물을 떠드리다가 구원을 받았다. 마르다와 마리아는 평소에 예수님 접대하기를 좋아하고 순종하였으므로 병들어 죽은 오라비 나사로를 나흘만에 다시 살림 받기도 하였다. 도르가라는 여인은 주변 사람들에게 나눠주기를 좋아했는데 그녀가 죽자 마을 사람들이 베드로 사도에게 탄원하여 새 생명을 얻게 되었다. 멜리데 섬 사람들과 추장은 난파 당해 추위와 배고픔에 떨고 있는 사도 바울을 비롯한 승선자들에게 호의를 베풂으로써 추장의 부친을 비롯한 섬 사람들이 바울 사도의 능력으로 병고침을 받기도 하였다. 예수님께서는 지극히 낮은 자에게 베푸는 것이 곧 예수님 당신께 베푸는 것이라 하셨고 복음을 전하는 자들을 위해서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하늘의 상급을 잃지 않을 것이며 병들고 가난하고 옥에 갇힌 자를 돌보는 것이 곧 주님께 한 선행이라고 말씀하신다. 또한 사도 바울도 손님과 나그네 대접하기를 힘쓰고 즐겨 하라고 했는데 이는 부지중에 우리가 천사들을 대접할 수도 있기 때문이라 하였다. 사도 바울이 말한 천사가 하늘의 천사를 말하는지 아니면 비유인지는 모르겠으나 어쨌건 복음을 따라 어려운 이를 돕는 것은 그리스도와 천사들을 섬기는 것과 같다는 것은 명확하다.
그리스도와 두 천사는 천상의 존재이기 때문에 이 땅의 음식이 아무리 맛나고 좋다 하여도 그분들에게는 별 유익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은 자기 소유 중에서 가장 좋은 것들로 음식을 대접하였고 그리스도께서는 그 음식을 기쁘게 드셨다. 이는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소유의 풍부함이 아니라 우리가 가진 것으로 얼마나 진심으로 하나님을 섬기는지를 중요하게 보신다는 것을 가르친다. 왜냐하면 만물이 다 하나님의 것이므로 하나님께서는 무엇이 부족하신 것처럼 우리에게 재물을 요구하실 필요가 없으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천천의 수양과 만만의 기름을 바친다 하여도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 불쾌히 여기시고 받지 않으신다. 반면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담은 두 렙돈은 예수님께는 부자들의 천금의 헌금보다도 더 가치있는 것이다.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제사장이면서도 하나님께 드릴 제물을 갈취하다가 멸망의 심판을 받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 드릴 제물이 아까워서 병들고 가치없는 것들만을 드림으로써 하나님을 멸시하였다. 결국 그들은 외세의 침략을 받아 나라가 멸망 당했고 오랫동안 포로가 되는 징계를 받아야 했다. 오늘날 교회가 홉니와 비느하스처럼 재물로 교회의 주인이신 그리스도를 멸시하는 가장 대표적인 죄악은 부교역자들의 생활을 제대로 베풀지 않는 것이다. 교회의 재정 상황과 다른 교회들의 보편적 기준이라는 미명하에 부교역자들의 사례비는 가정을 부양하기도 어려울 정도로 턱없이 낮다. 교회가 세상의 기준보다 더 탁월해야 함에도 세상의 최저시급에 겨우 맞추거나 이에 미치지도 못하는 사례비를 책정하면서 할만큼 다 했다는 식으로 스스로를 위로하고는 한다. 부교역자들을 주님의 귀한 복음 사역자로 여겨 교회의 더 귀한 구성원으로서 끝까지 책임지려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들지 않으면 언제라도 쉽게 쫓아낼 수 있는 계약직보다도 못한 대우를 하기도 한다. 그러나 복음 사역을 위해 대접한 냉수 한 그릇에도 하늘의 상급을 주신다면 부교역자에게 한 푼이라도 주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얼마나 더 큰 지옥 형벌을 주시겠는가.
우리가 가진 재물과 은사들로 하나님을 섬기는데에는 두 종류가 있는데 하나는 자기가 소속 된 교회를 위해서 다른 하나는 개인적인 구제를 위해서 섬기는 것이다. 전자는 이 땅의 교회가 그리스도의 복음 사역을 제대로 수행할 수 있도록 십일조 등으로 교회의 필요를 제공해 주는 것이고 후자는 신자가 개인적으로 어려운 이웃을 위해 기부하고 봉사하는 것을 말한다. 우리의 섬김은 항상 이 둘이 함께 가야 하며 어느 한쪽만 이행하는 것으로 만족해서는 안된다. 교회를 위해 섬겼다고 해서 이웃에 대한 구제를 소홀히 해서도 안되고 개인 기부를 많이 한다고 해서 교회에 해야 할 헌금을 소홀히 해서도 안된다. 바리새인들은 이를 악용해서 '고르반'이란 악습을 만들었던 것이고 예수님께서는 이를 꾸짖으시면서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내 마음속에 풀리지 않는 한가지 문제는 재정이 투명하지 않은 교회에 헌금하는 것이 과연 하나님의 뜻인가 하는 것이다. 이런 때는 교회의 개념을 내가 소속 된 유형 교회로 한정할 것인지 아니면 좀 더 영역을 넓혀도 되는지 아직 확실한 결론을 내리지는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