엽서 소개 '간택'되면 학교스타…
DJ문화 동네 분식집까지 확산
- TBC '밤을 잊은 그대에게' 등
- 심야음악방송 팬클럽도 결성
- 생방송 전화연결 '일생의 영광'
- 친목회까지 만들어 기술 공유
1970년부터 시작된 심야음악방송의 경쟁으로 청취자들은 수동적인 자세에 머물지 않고 음악 프로그램별로 팬클럽을 결성하기 시작한다. 가장 먼저 DBS의 팬클럽인 'DBS 팝패밀리'가 1971년 5월 결성되어 4000여 명의 회원을 확보했다.
그 뒤를 이어 TBC에서 '밤을 잊은 그대에게'의 팬클럽이 결성됐다. MBC에서는 프로그램별로 따로 팬클럽이 결성됐다. 박원웅이 진행을 맡았던 '뮤직다이얼'의 팬클럽 '뮤직다이얼 팝패밀리'가 출범했고 이종환의 '별이 빛나는 밤에'의 팬클럽 '별밤클럽'이 결성돼 1만여 명의 회원을 자랑했다.
1970년대 초 MBC 라디오 '뮤직 다이얼'의 팬클럽이 정기 음악감상회를 열고 있다. 무대에 출연한 사람은 가수 양희은과 서유석(앞줄 왼쪽부터), 투코리언스(뒷줄 두 사람)이다.
이들은 각 방송국의 지원을 받아 팬들을 위해 다양한 행사를 기획했다. 가수들을 초빙해 음악 감상회를 열거나 콘서트를 했다. 그 밖에 인기 가수들과 함께 야외로 자전거 하이킹 떠나기, 열차 타고 교외로 야유회 가기 등의 특혜를 누렸다.
이런 분위기에서 DJ는 새로운 스타로 떠올랐다. 팬레터는 물론 팬들의 스토킹과 유혹도 받았으며, 최동욱의 결혼설이 나돌 때는 결혼 반대를 읍소하는 편지가 줄을 이었다. 시내 음악 감상실은 이들을 고액에 모셔 가서 진행 시간을 마련하여 매상을 올리려고 애썼다.
1981년 MBC 예쁜엽서전시회에 출품된 각양각색의 엽서들.
인기에 비례한 질투와 시기도 극심했다. 최동욱이 팬들에게 훈계성 설교를 늘어놓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긴 팬들이 작당하여 생방송으로 최동욱과 설전을 벌이는 바람에 체면을 구긴 사건도 있었다.
DJ 문화의 확산은 음악 감상실에서 분식집으로 확대됐다. 특히 서울 종로 근처에는 학원들이 많아 자연히 분식집이 생겨나 고교생들은 만남의 장소로 분식집을 애용했다. 바로 이곳에 DJ박스가 설치되고 음악을 좀 안다는 고교생들이 DJ 흉내를 내는 단계에까지 이르렀다. 'DJ 2군'이 탄생한 셈이다.
청취자 사이에는 두 가지 경쟁이 불붙기 시작했다. 하나는 자신이 방송에서 듣고 싶은 곡을 엽서로 신청해 원하는 날짜에 자신의 이름과 같이 듣고 싶은 친구들의 이름이 불리는 '간택'이 될 수 있느냐 하는 것이었다. 채택되면 자기 친구를 띄워주고 자신도 학교에서 뜨는 그야말로 작은 사건이었다.
하지만 한 프로그램에 하루에 수백 통씩 쇄도하는 엽서 중에서 10통 남짓한 엽서만 소개될 수 있으니 수십 대 일의 경쟁률을 뚫는 것이 관건이었다.
따라서 애절한 사연, 호소력 있는 내용에 폼 나는 시를 곁들이는 것은 기본이고 누가 엽서를 시각적으로 화려하게 꾸미느냐 하는 것이 간택에 중요한 변수가 될 수밖에 없었다. 남성들은 낙엽이나 사람 얼굴을 그린 펜화 정도가 고작이었지만, 여성들은 심각성이 더했다.
잡지 사진을 오려 빠삐에꼴레(종이 붙이기)를 만들거나 엽서를 타자기에 걸어 타이핑을 하는가 하면 앞뒤로 염색한 것도 있었다. 얼룩얼룩하게 모자이크한 것이나, 헝겊으로 씌워 화려한 색채 구성으로 장식한 것도 많았다. 예쁘장하고 앙증맞은 만화를 그리는 것을 넘어 낙엽을 말려 붙인 오브제형, 버선이나 인형모양으로 엽서를 만들거나 수를 놓거나 테두리를 코바늘로 뜨기도 모자라 향수까지 뿌려대니 남성 DJ와 여성 청취자 사이의 끈끈한 공감대 속에서 남성 청취자는 상대적으로 차별받기 쉬운 구조였다.
두 번째의 경쟁은 생방송으로 하는 애청자 전화 리퀘스트에 누가 당첨되느냐 하는 것이었다. DJ가 "애청자의 전화를 연결하겠습니다"라고 말하는 순간 얼마나 많은 전화가 동시에 접속되었겠는가? 이것은 엽서 신청보다 10배나 어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뜻이 있으면 길이 있고 어디나 고수는 있는 법. 나중에 공개된 비결은 마지막 전화번호를 돌린 상태에서 DJ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손가락을 놓는 것이었다.(당시 전화기는 지금처럼 버튼식이 아니고 대여섯 자리 번호를 일일이 돌리는 다이얼식이었다)
전화 신청 당첨 기술을 가진 청취자끼리 친목회(요즘으로 치면 사이버 카페다)가 결성되어 이들이 '하늘의 별 따기'와 같은 전화 리퀘스트에 잇달아 등장하는 경우가 발생하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이들 친목회에서 평소 청취자 전화에 충고를 일삼다가 안티팬을 형성하고 있었던 최동욱을 골탕 먹이기로 작정했다.
30여 년 전에도 안티팬들이 잘나가던 스타 DJ를 공개적으로 물 먹였으니 예나 지금이나 팬이 무서운 건 마찬가지인 것 같다. 이 전화 리퀘스트라는 생방송을 이용해 기상천외의 무료광고를 해대는 인간들까지 생겨나 방송사를 뚜껑이 열리게 만들었다.
다름이 아니라 "낮엔 식사 밤엔 주류를 취급하는 종로 ××극장 건너편 ○○정의 순이가 보내드립니다" 라고 기습적으로 업소 광고를 하고는 끊어버리니 방송사는 앉아서 당하는 수밖에 없었다. 궁여지책으로 캠페인방송도 하고 구별로 전화 리퀘스트를 돌아가며 받기도 했지만 획기적으로 개선됐다는 말은 들리지 않았다.
김형찬의 대중음악 이야기
시그널 음악 2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