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라디오 음악프로에 사연 보내기
- 1970년대 청년문화로 뜨자
- 가수들 노래 홍보 과열 경쟁
- 알바생 고용해 '가짜엽서' 뿌려
- 방송사는 감별사 뽑아 걸러내
1974년 당시 5개 방송국(TBC, KBS, MBC, DBS, CBS)의 팝송 DJ프로가 18개나 됐다. 방송국에 도착하는 우편물 가운데 80% 이상이 희망음악 신청과 함께 보내는 사연들이었고
하루에 2만여 통을 헤아렸다.
그야말로 당대 청소년들의 대표적인 문화현상이 된 것이다. 여기에 나타난 이들의 사연과 문체는 1970년대 청년문화를 잘 드러내 주는 자료가 된다.
1972년 당시 DBS 라디오 프로그램 '3시의 다이얼'을 진행한 DJ 박인희.
그녀는 최초의 가수 출신 DJ였다.
"회색의 병실에 홀로 엎드려 남몰래 읽던 헤르만 헤세의 시집도 이젠 당신 앞에서는 읽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언제나처럼 해맑은 주일 아침 성당 구석의 벤치에 말없이 앉아 있다가 당신의 청초한 모습이 지나갈 때 난 가만히 눈감아 버리겠습니다.
당신을 잊은 모습으로 아무 말 없이 기다림만으로 살겠습니다. 이슬을 머금은 채로 가장 아끼는 신촌의 희에게 띄웁니다."
"사랑하는 친구야 완벽한 어느 순간 때문에 우리는 긴 날을 견디어 있는지 모른다. 말해지지 않는 감정에 순수한 것에 의해 내 의식에 자유를 묶여."
문학청년을 지향했던 1970년대 영혼들은 순수를 사랑했지만 여전히 여성들은 표현에 소극적이었다. 청춘들의 예민한 정서는 쉽게 상처받았고 자아를 의식하면서부터 퇴색과 억압이라는 모순을 경험해야만 했다.
음악프로그램은 청취자들이 단순히 음악을 신청하는 수준을 넘어서서 다양한 용도로 응용되기 시작했다. 우연히 알게 된 여학생에게 프러포즈를 보내는 남학생은 '어떻게 내가 당신을 사랑하느냐고요'라는 브라우닝의 시를 인용하면서 '어느 사랑의 종말을 위한 협주곡'을 신청했다.
군에 입대하는 친구의 건강을 빌면서 영화음악 '콰이강의 다리'와 '영광의 탈출' 주제곡을 신청하거나 언니의 히스테리에 골탕을 먹는 동생들이 하루라도 빨리 언니가 시집가기를 원하는 탄원서의 내용을 담은 것까지 등장했다.
이 정도 수준까지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지만 점점 심야음악프로 폐인들이 속출하기 시작했다. 어떤 소녀는 한 소년을 잊지 못하는 사연으로 채워진 엽서를 매주 3장씩 무려 2개월이나 계속 보내는 바람에 방송국 측에서는 결국 그 소녀를 면담하고 상담까지 해주면서 상황을 정리해야만 했다.
최초의 가수출신(듀엣 뚜아에무아) DJ로 인기를 끌었던 CBS라디오의 박인희에게는 3년 동안 1주일에 평균 한 통씩 편지를 보내준 팬이 있었다.
1974년 부산 서면에서 영업하던
'불로다방'의 DJ 박스.
청취자로서 엽서를 띄우는 정상적인 수준을 뛰어넘어 DJ를 이성으로 보고 직접 만남을 시도하는 팬까지 생기기 시작했다. 최고의 인기 DJ 최동욱은 '탑튠쇼'가 끝나는 시간 무렵이면 동아방송 근방 다방에서 만나달라고 애원하는 소녀팬들에게 무척 시달려야 했다.
기혼자였던 MBC '뮤직다이얼'의 박원웅은 어느 날 예쁜 아가씨가 찾아와 내 친구가 박원웅을 사모하고 있다면서 만나주라고 권유해 마지못해 모처에서 만나기를 약속하고 나가봤더니 그 주인공은 바로 그 예쁜 아가씨로 판명되는 바람에 동료들에게 이상한 눈초리를 받아야만 했다.
이렇게 청소년들이 라디오 음악프로그램에 음악을 신청해서 듣는 것이 대세가 되다 보니 가수들은 라디오 음악프로그램에서 자신의 노래 방송횟수가 중요한 홍보수단이 되었다. 특히 순위를 발표하는 프로그램까지 생기면서 방송엽서에 목숨을 거는 상황이 전개됐다.
가수들은 팬들을 동원하거나 부정한 수단을 쓰면서까지 음악신청 엽서의 숫자를 인위적으로 불리는 데 갖은 수단을 동원하기 시작했고 방송사들은 이러한 '사꾸라 엽서'를 골라내는 비법을 개발하면서 대응해 나갔다.
각 레코드사와 유명가수들은 '전속 사꾸라 엽서부대'를 갖고 있었다고 하는데 이들은 미술대학 재학생들과 가요관계자 가족이었다.
미술대학 학생들이 알바로 제조해내는 '사꾸라 엽서'는 소녀 취향의 그림을 그려 희망곡을 적은 것으로 장당 수고비는 50~70원(1977년 당시 고급 청자담배값이 150원)이었다.
그리고 간단한 사연을 서툴게 적어 넣는 세칭 '공순이 위장엽서'는 30원씩의 인건비를 주었다. 발신인의 주소는 전화번호부와 각 학교의 졸업앨범 뒤쪽을 참고하고 우편번호 책까지 동원하였고 자동차로 전국을 돌며 우체통에다 엽서를 넣었다.
방송국은 이런 정보를 입수하고 일부러 서툴고 글씨체가 엉망인 엽서를 골라냈다. 당시 신청엽서의 80% 정도가 이른바 '사꾸라 엽서'로 간주됐다. (1977년 당시) 밀려드는 엽서의 물량을 처리하기 위해 엽서를 감별하는 직원을 임시로 채용하기도 했다고 한다.
1970년대에 새롭게 등장한 청년문화세대들은 심야음악프로에서 기성세대들처럼 그냥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을 일방적으로 듣는 것이 아니라 음악신청엽서라는 쌍방향의 수단으로 자신들의 문화적 공동체를 가꾸어나갔다.
또한 기성세대가 극장쇼나 캬바레라는 오프라인에서 음악을 직접 접했던 것에 비해 라디오 방송이라는 온라인 공간을 문화적 영토를 개척한 최초의 세대가 된 것이다.
김형찬의 대중음악 이야기
시그널 음악 3
첫댓글
재미 있습니다.
제가 몰랐던 이야기가 많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