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T PEOPLE]"희망의 팀" 대전에서 더 큰 꿈을 키웁니다. - 대전 시티즌 이여성①
기사입력2008-04-21 12:02
2007시즌이 끝나기 무섭게 대전은 김창수와 정성훈을 부산으로 보내고, 부산에서 박성호, 송근수, 이여성을 받는 2대3의 트레이드를 단행했다. 이 트레이드는 두 팀 모두 전력을 상승시키기 위해 사용한 것이었다.
지난해 대전의 새로운 스타로 떠오른 김창수의 이적은 의외였다. 올림픽 대표팀에서 맹활약을 펼치며 한창 주가를 올리던 김창수는 2007년 K-리그에서 좋은 활약을 펼쳤고, 발전 가능성이 매우 높은 선수였기 때문에, 팬들은 그의 이적에 대해 많은 아쉬움을 표현했다.
하지만 우려만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기대의 목소리가 더 컸다. 부산에서 받은 박성호, 송근수, 이여성 등 세 선수 모두 지금까지 쌓아온 이력이 만만치 않고, 미래가 더욱 기대되는 선수들이기 때문이다.
특히 팬들의 시선은 이여성에게 많이 쏠렸다. 지난해 이여성의 활약이 준수했고, 팀의 핵심 선수인 고종수를 대체할 수 있는 좋은 카드이기 때문이다. 이여성은 지난해 부산에서 24경기를 뛰며, 1골 4도움을 기록했다. 중앙 미드필더로서, 득점과 도움은 조금 부족한 수치지만. 경기 운영 면에서 좋은 평가를 받았다. 또한 정확한 패스는 그의 숨겨진 무기였다.
이여성 역시 기대가 높았다. 무엇보다도 김호 감독과 재회는 그를 설레게 했다. 2001년 수원에 입단하며, 김호 감독과의 인연을 시작한 이여성. 2003년 이여성은 경찰청에 입대해, 김호 감독과의 연이 끊겼다.
하지만 여기서 인연의 끈이 끊어진 것은 아니었다. 다시 이여성과 김호 감독과의 인연이 시작된 것은 지난해 말이었다. 2007년 이여성은 부산에서 자신의 가치를 입증하며, 다시 김호 감독의 러브콜을 받았고, 수원이 아닌 대전에서 스승과 제자 관계로 돌아가게 되었다.
그래서 이여성 본인도, 대전 팬들도 많은 기대를 가지고 2008년을 시작했다.
하지만 기대가 너무 컸던 것일까. 이여성은 대전 선수들 가운데 최은성과 함께 전 경기 출전하며, 팀에 어느 정도 기여를 하고 있지만, 자신의 존재를 확실하게 각인시킬 수 있는 강한 활약을 펼친 적이 없다. 또한 지난 인천 전에서 고종수의 공백을 완벽하게 메우지 못하며, 후반전에 교체되고 말았다.
결론적으로 현재 이여성은 자신에게 부가된 합격점을 아직 넘지 못했다.
물론 높은 기대치 때문에, 준수한 활약을 펼쳐도 부족해보일 수 있다. 또한 이여성은 대전의 유니폼을 경기에 나선 지는 겨우 45일 정도 밖에 되지 않았다. 고작 8경기 뛰었을 뿐이다. 앞으로 뛰어야 하는 경기는 무수히 많다. 그래서 현 시점에서 그의 플레이와 트레이드의 득실에 대해서 왈가왈부 할 수 없다.
선수를 직접 지도하는 김호 감독도 아직 여유롭다. 긴 호흡을 가지고 선수단을 운영하고 있다. 김호 감독은 이여성도 역시 긴 호흡을 갖고 지켜 바라보고 있다. 1~2년 지난 뒤 평가해도 늦지 않는다.
그래서 현재 이여성의 생각이 궁금했다. 현재 팀에 어느 정도 적응했는지, 어느 시점에서 자신의 모든 것을 보여줄 수 있는지가 궁금했다. 또한 길고 긴 2군 생활, 방출의 서러움, 그리고 1년간의 야인 생활 등 파란만장한 그의 축구 인생과 꿈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4월 17일 저녁 6시 40분 충남 공주시에 위치한 대전의 숙소에서 이여성을 만났다. 이여성은 전 날(4월 16일) 광주와의 경기에서 90분 풀타임을 뛰었기 때문에, 꾀 피곤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인터뷰가 진행되면 될수록 이여성에게 피로는 사라지고 없었다. 그의 얼굴에는 할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가득 찼다.
축구 선수라는 꿈에 조금씩 다가선 학창시절
어린 시절 이여성에게 축구는 친구들과 어울려 놀 수 있는 수단이었다. 그래서 초등학생 이여성은 축구 선수라는 꿈을 꿔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어렸을 때부터 공놀이를 좋아했어요. 그 중 축구가 가장 좋더라고요. 당시 제가 다닌 인천 마곡초등학교에는 축구부가 없었어요. 친구들끼리 모여서 볼을 차는 것이 전부였죠. 축구부 같은 것은 없는 줄 알았어요. 그래서 축구 선수의 꿈을 꿔본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이여성의 인생이 바뀐 시기는 중학교 입학 후다. 아버지의 도움이 컸다. 이여성의 아버지는 이여성을 축구부가 있는 남강 중학교로 전학시키며, 이여성이 축구 선수라는 꿈을 꿀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중학교도 축구부가 없는 학교로 입학했습니다. 그런데 4월 경 아버지가 축구부가 있는 서울의 남강 중학교로 전학을 가자는 거예요. 사실 아버지의 꿈이 축구 선수였어요. 하지만 그 꿈을 이루지 못하셨죠. 그 꿈을 저에게 물려주셨습니다. 아들이 축구 선수가 되는 모습을 보길 원하셨어요. 저도 또래 친구들보다 축구를 잘했고, 매우 좋아했어요. 그래서 축구부가 있는 학교로 전학 간 것이 좋았습니다."
이여성은 자신의 꿈이자 아버지의 꿈을 이루기 위해 최선을 다했고, 자신이 좋아할 수 축구를 할 수 있다는 것 자체는 그에게 큰 기쁨이었다. 아버지의 지원도 든든했다. 또한 좋은 지도자를 만나 그 꿈에 좀 더 가까이 다가설 수 있었다.
"당시 남강 중학교는 양철원 선생님께서 가르쳐 주셨어요, 선생님께서 기본기를 매우 강조하셨어요. 그래서 기본기 훈련을 참 많이 했어요. 1년 내내 기본기 훈련을 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 잘 배웠던 것 같아요. 그 때 기본기를 잘 배웠기 때문에, 다른 것들도 좀 더 쉽게 습득할 수 있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기본기를 탄탄하게 배운 이여성은 정확한 패스와 뛰어난 경기 운영을 장점으로 갖추게 되었다. 하지만 약점도 많았다. 특히 몸싸움에서 많은 약점을 노출했다. 어렸을 때부터 이여성은 외소한 몸 때문에, 몸싸움에서 밀리는 경우가 많았다. 이 문제점은 쉽사리 해결되지 않는 문제점이기도 했다.
"외소한 몸이 문제였어요. 살이 안찌는 체질이에요. 학창 시절 주위 사람들이 바람만 불면 날아갈 것 같다고 말할 정도였어요.(그래도 지금은 살이 많이 붙은 거예요.) 그래서 몸싸움이 매우 약해요. 이 문제 해결점을 다른 곳에서 찾아보았어요. 바로 저의 장점 극대화였죠. 기술을 발전시키고, 남들보다 한 발 더 뛰었어요."
이여성은 1~2학년일 때, 주전 경쟁에서 밀리며 경기에 나서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후보 생활에 만족해야 했다. 중학교 2학년 때 2경기 정도 나간 게 전부였다. 하지만 3학년 때는 확실하게 주전 자리를 차지하며, 매 경기 출전했다. 이여성에게 경기 출전은 발전을 의미했고, 그 발전은 이여성이 수원에 입단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저학년일 때, 주로 후보 생활을 오래 했어요. 하지만 조급함은 없었어요. 특히 고등학교 1학년 때는 3학년 형들이 너무 커보였어요. 그래서 '경기에 뛰어야겠다.'라는 생각보다는 '발전을 해야겠다.'라는 생각을 했어요.
언제 기회가 반드시 올 것이라고 생각하고 운동에 더욱 매진해요. 운동을 하루에 4번 했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어떻게 했는지 모르겠어요. 지금 하라고 하면 못 할 거예요.
경기는 주로 3학년 때 뛰었어요. 경기를 자주 뛰며, 실력이 한 단계씩 상승했습니다. 특히 고 3때 실력이 가장 많이 늘었던 것 같아요. 뛰면서도 많이 발전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무엇보다도 게임을 뛴다는 사실 하나가 좋았어요. 너무 재미가 있었어요. 특히 패스를 하며, 골을 만드는 과정이 좋았어요. 이런 거보면, 미드필더 하길 참 잘한 것 같아요. 수비를 했다면 이러한 재미를 느끼지 못했겠죠."
소중한 배움
2001년 고등학교를 졸업한 이여성은 수원에 입단했다. 당시 수원은 올 시즌처럼 매우 강했다. "고데로 트리오"를 앞세운 수원은 화려한 공격 축구와 탄탄한 선수 구성으로 K-리그를 점령하고 있었다.
"고 2때, 부모님과 진지하게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어요. 저는 대학교 1,2학년 때 운동을 하기 보다는 살을 찌운 뒤, 프로에 가고 싶었어요. 하지만 아버지의 생각은 달랐어요, 바로 프로에 가길 원하셨어요. 이듬해 운이 좋게도 수원에서 입단 제의가 왔고 수원에 가게 되었습니다.
당시 수원은 지금과 같이 매우 강팀이고, 멤버가 너무 좋았잖아요. 수원에 처음 입단했을 때, 모든 게 신기했어요. TV로만 볼 수 있었던 형들과 한 팀이라는 사실이 가장 신기했어요. 그래서 경기를 뛰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어요. 실력이 뛰어난 형들의 플레이를 보며, 발전해야겠다는 생각을 가졌어요."
수원 입단 후 이여성은 2군에서 내일의 K-리그 스타를 꿈꾸며, 굵은 땀방울을 흘렸다. 하지만 입단 첫 해 이여성은 좀처럼 늘지 않는 실력에, 첫 번째 좌절을 느끼게 되었다.
"2001년 2군에 머물면서, 윤성효 선생님께 많이 혼났어요. 좋은 환경 속에서도 실력이 좀처럼 늘지 않았거든요. 고등학교 때 실력에서 정체되었어요. 2군 리그 경기는 계속해서 뛰었는데요. 좋은 활약을 펼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적응을 제대로 못 했죠. 그래서 자신감이 많이 떨어졌어요. 훈련장에 나가는 것이 두려울 정도였죠.
이 때 형들과 친구들의 말 한 마디가 너무 고마웠어요. (박)건하 형은 운동 끝나고, 샤워를 할 때, 옆에 다가와 자신의 신인 시절을 이야기해주며, 많은 도움을 주었어요. 너무 고마웠어요. 그리고 당시 같이 수원에 입단한 친구들이 옆에서 많이 도와주었어요. 지금 포항에 있는 (조)성환이하고, 군대 가 있는 (김)민선이라는 친구데요. 이 친구들이 있었기 때문에, 더 열심히 뛸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이여성은 2001년의 아픔을 딛고 다시 일어섰다. 2001년이 준 아픔은 그에게 많은 도움이 되었다. 이여성은 2002년 2군 리그에서 19경기를 뛰며, 3도움을 기록하는 등 매우 좋은 활약을 펼쳤고, 자신의 존재를 조금씩 알리기 시작했다.
"2002년은 저의 첫 번째 전성기예요. 이 때 칭찬도 많이 들었어요. 2001년의 아픔이 저를 강하게 만든 것 같아요. 특히 정신력이 많이 발전했죠. 그런 의미에서 2001년은 많이 힘들었지만, 헛되게 보내지는 않았던 것 같아요. 항상 2001년을 생각하며, 개인 훈련에 매진했고, 이는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박영선
2002년 이여성은 2군 리그에서의 좋은 활약 덕에 1군으로 올라설 수 있었다. 이여성은 후보 명단에 자주 자신의 이름을 올리며, 출전 가능성을 높였고, 9월 14일 전남 전에서 후반 42분 교체 투입되며, 데뷔전을 가졌다.
"데뷔전은 정말 잊을 수 없죠. 전남 전이었어요. 후반 종료 시간이 다 되어가는 시간이었어요. 팀이 1대0으로 앞서고 있는 상황이었죠. 그래서 '오늘도 이렇게 못 뛰는 구나.'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후반 종료 시간을 앞두고 저를 부르는 거예요. 갑자기 멍해졌어요. 대답도 못 했어요. 다시 저 이름이 불리는 순간, 정신을 차리고, 교체 출전을 위해 중앙선 부근으로 이동했습니다.
정말 어떻게 뛰었는지 모르겠어요. 하나도 안 들리고, 안 보였어요. '실점을 하지 말자.'라는 생각을 가지고 죽어라 뛰었어요. 볼을 한 2번 정도 잡고 끝난 것 같아요."
전남 전에서 데뷔전을 가진 이여성은 9월 18일 대전과의 경기에서 처음으로 선발 출장했고, 90분을 소화했다. 그에게 대전 전은 실질적인 데뷔전이었다. 이후 25일 펼쳐진 대전과의 홈경기에서 후반전에 교체 출전하며, K-리그 출전 기록을 조금씩 세워갔다.
"대전 전은 실질적인 데뷔전이라고 생각해요. 긴장도 너무 많이 했어요. 정말 그 때도 어떻게 뛰었는지 모르겠어요. 90분 내내 아무 생각이 안 나요. 안 들리고, 깜깜했던 기억뿐이에요.
이어진 대전 전에서 후반전에 투입되었는데요. 여전하더라고요. 이번에도 제 이름을 듣는 순간 놀랐어요. 경기는 어떻게 뛰었는지도 모르겠어요. 그만큼 정신이 없었죠."
이여성은 수원에서 2년이라는 시간을 보냈다. 많은 것을 배우고 얻은 소중한 시간이었다. 이러한 경험은 무형의 자산으로 바뀌며, 이여성을 더욱 좋은 선수로 발전시켰다.
"수원에서 보낸 2년은 정말 좋은 경험이었어요. 2001년에 고생하고, 2002년에 경험을 쌓으며, 발전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든 것 같아요. 지금도 그 때를 생각하며, 저를 더욱 강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다시 한 번 축구화 끈을 동여매며
2002년 이여성은 병역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경찰청에 입대했다. 다시 한 번 새로운 곳으로 이동했다. 새로운 팀에 적응을 해야 했고, 억압된 생활도 잘 견뎌야 했다.
"경찰청에 입대하며, 환경이 많이 바뀌었어요. 적응력이 다시 한 번 문제점으로 지적되었죠. 그래서 2003년에 제 실력을 100% 보여주지 못한 것 같아요. 더군다나 경찰청은 군 팀이기 때문에, 행동하는데 있어서도 제약이 많았어요.
그리고 2003년 여름쯤에 부상을 당했어요. 회복 훈련을 하던 중, 발을 잘못 디디는 바람에, 무릎 연골이 다쳤어요, 그래서 수술과 재활을 했습니다. 처음으로 다친 거였어요. 처음에는 많이 힘들어했지만, 강한 정신력으로 잘 견뎌낸 것 같아요."
1년이라는 적응기를 거친 이여성은 다시 한 번 화려하게 자신의 기량을 뽐냈다. 또한 자신을 뒤돌아보며, 자신의 부족함을 알게 되었고, 부족함을 채우기 위해 축구화 끈을 동여맸다.
"2002년 때 실력이 늘었다는 것을 많이 느꼈어요. 수원에서 더 뛰면서, 조금 만 더 노력하면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입대 초기 군대 간 것에 대한 후회가 많았어요,
하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면 일찍 병역의 의무를 해결 한 것이 더 좋은 것 같아요. 수원에 있는 것보다 더 큰 도움이 된 것 같고, 마음도 홀가분해졌고요.
군대에 가면. 생각할 시간이 많잖아요. 특히 지금까지 자신이 살아온 길을 돌아보며, 반성하는 시간을 가지고, 각오를 새롭게 하잖아요. 저도 제 자신을 한 번 되돌아보았어요.
잘하는 것보다 부족한 것이 더 많더라고요. 그래서 부상에서 벗어난 이후, 더욱 이를 악물고 뛰었어요. 개인 훈련 시간을 많이 가졌고, 집중력을 키우기 위해 노력했어요. 그 결과 한 단계 발전할 수 있었어요."
ⓒ박영선
군대 제대를 앞둔 군인이라면, 누구나 자신의 앞날에 대해 고민을 많이 한다. 특히 새로운 곳에 도전하는 사람은 더더욱 그렇다. 이여성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여성이 경찰청에 가 있던 2년 동안 수원은 김호 감독에서 차범근 감독으로 바뀌며, 많은 변화를 시도했다. 수원의 대 변화로 이여성의 앞날은 그리 밝지 않았다.
"제대를 앞두고 걱정이 많았어요. 앞날이 조금 불안했어요. 제대 후 김호 감독님께서 먼저 전화를 해주셨어요. 감독님께서 '팀이 많이 변화했다.'며, '가서 열심히 뛰어서 잘 적응하라.'고 조언을 해주셨어요.
복귀 후 FA컵 전주대와의 경기를 가졌어요. 이 경기는 수원 잔류 여부를 결정할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시합이었습니다. 후반전에 교체 출전했는데요. 정말 플레이가 좋지 않았어요. 제 실력이 부족했던 것 같아요."
결국 이여성은 2005년에 수원에서 방출 되었다. 하지만 이여성은 여기서 좌절하지 않았다. 오히려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또한 김호 감독의 도움으로 다시 살아날 희망을 찾기 시작했다.
"사실 방출 통보를 받은 후, 믿겨지지가 않았어요, 장난인 줄 알았죠. 하지만 시간이 흐른 뒤, 현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정말 막막했어요,
하지만 끝이라고 생각해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어요. 다시 K-리그에 갈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어요, 마음을 더 강하게 먹었어요. 그 때 마음을 약하게 먹었다면, 지금의 제 모습은 없었을 거예요.
주로 집에서 개인 훈련을 했어요. 웨이트 트레이닝과 산행을 주로 했죠. 주말에는 조기 축구회에 나가서, 축구를 했어요. 하지만 혼자서 운동하니 잘 안되더라고요. "
첫댓글 승리의 대전 승리의 이여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