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을 직시하고 분별을 멈추라
불교에서 괴로움 이야기는
삶 직시해 해결하자는 의도
불교에서 고(苦)를 강조하니, 불교는 세상을 비관적으로 본다고 말하는 이도 있다. “나는 즐거운데 왜 자꾸 괴롭다고 하는가? 이 즐거움이 곧 사라지기 때문에 괴롭다고 한다면, 괴로움도 사라지기 때문에 괴롭지 않은 것이 아닌가? 왜 그렇게 부정적인 측면만 보고 비관적으로 생각하지.”
불교에서는 세상 자체를 괴롭다고 보지 않는다. 그리고 비관적이지도 않다. 따져보면 불교에서 언급하는 고(苦)는 세상을 보는 마음 작용에 중점을 둔다. 그러나 마음 작용에 대한 풀이는 이해하기 쉽지 않다. 우리의 시선이 마음보다는 바깥 물질에 가 있고, 마음을 이야기하면 관념적이라는 견해가 있기 때문이다. 여러 각도로 살펴볼 시간이 필요하다.
불교에는 괴로움을 이야기할 때 사고팔고(四苦八苦)를 언급하기도 한다. 생로병사가 네 가지 괴로움으로 사고(四苦)다. 이 사고에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하는 괴로움(愛別離苦, 애별리고), 미워하는 사람을 만나는 괴로움(怨憎會苦, 원증회고), 구하고자 하지만 얻지 못하는 괴로움(求不得苦, 구부득고), 오음성고(五陰盛苦)를 합하여 여덟 가지 괴로움으로 팔고(八苦)다.
팔고 가운데 오음성고는 설명이 쉽지 않다. 오음성고를 이해하면 불교에서 말하고자 하는 고(苦)의 의미에 다가갈 수 있다. 오음은 색음(色陰), 수음(受陰), 상음(想陰), 행음(行陰), 식음(識陰)을 말한다. <반야심경>에 등장하는 ‘색즉시공 공즉시색 수상행식 역부여시’에서 색수상행식이 오음이다. 오온(五蘊)이라고도 한다. 간단하게 설명하면, 색은 대상이고, 수는 대상을 받아들이는 작용, 상은 받아들인 대상을 형상화하는 작용, 행은 받아들인 대상을 조작하는 작용, 식은 이러한 대상을 분별하고 인식하는 작용을 말한다. 이렇게 다섯 가지가 화합하여 마음 작용이 일어나 세상을 분별한다. 이러한 분별로 인해 야기되는 괴로움이 오음성고다. 오음은 우리의 삶이다. 따라서 오음성고는 삶 그 자체 및 삶으로 야기되는 괴로움이라고나 할까.
오음성고는 팔고를 다 포함하는 말이다. 생로병사 등 그 자체가 괴로움은 아니다. 생로병사 등을 받아들이고 분별하는 마음 작용에 탐진치(貪瞋癡, 탐욕 성냄 어리석음) 삼독이 함께하기에 괴로움이 일어난다. 우리의 삶은 오음(五陰)인 마음 작용으로 전개된다. 오음의 바탕에는 어리석음이 자리하고 있다. 이러한 어리석음으로 인해 끝없는 괴로움이 야기된다. 그런데 헛똑똑이로 사는 중생은 이 삶이 어리석음으로 인해 드러난 삶인 줄 알지 못하고 있다. 그리하여 그 삶에 취해 있다.
따라서 불교에서 괴로움을 이야기하는 것은, 삶을 직시하고 해결해보자는 의도이지 비관적인 인생을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불교의 근본 가르침인 사성제(四聖諦)에서 고성제(苦聖諦)가 먼저 등장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사성제는 현실을 직시하여 그 문제점을 인식하고, 평온한 삶에 이르는 길이 있으니 수행하라는 가르침이다. 괴로움만 언급한 가르침이라면 비관적이라는 비판에서 벗어나기는 힘들다. 그러나 불교는 그렇지 않다.
부처님이 열반하시기 전에 마지막으로 하신 말씀이 있다. “모든 것은 변해가니, 부지런히 노력하라.”
첫댓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