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라도 아름답다 부인못할 시월의 어느 멋진 가을날, 올망졸망 섬들이 옆집 손자 장난감처럼
뿌려져있는 거제도 앞바다를 내려다보며 잠시의 행상막간에 이 시리도록 아름다운 가을을 더
가을이게 하는 봉다리 커피 한잔 끌어당기며 몇줄 나열해봅니다, 다들 잘 계시리라 생각하오며..
사람은 지구상 존재중 유일한 기억의 동물이라는데 제 어릴 때의 기억은 많은 부분을 할머니가
차지합니다, 고모 삼촌들 이후 수십년만에 세상에 나온 맏손자 저를 우리 영의정.. 으로 늘 독점
해서 데리고 다녔습니다
가물한 제 기억에, 예닐곱쯤의 어느 날 할머니 친구들이 와서 그놈 밉게 생겼다, 몇살이고.. 물은
적이 있는데 제가 대답하기도 전에 할머니가 얼른, 여섯살이지 대답하셨습니다
만사가 그런 식이었고 손자를 끔찍이도 사랑하며 싸고 돌았습니다
응정 받친 외고집이라 한번 울면 좀체 울음을 그치지않아 달래다가 모두 내버려두면 혼자 온종일
울었습니다, 엎드려 우는 방바닥에 눈물 고인 걸 손가락으로 줄도 긋고 동그라미도 그리다가 나중
에는 울음이 흥얼흥얼 노래로 바뀌고, 그러다가 잠이 들면 할머니가 발짝소리를 죽이며 다가와서
살포시 이불을 덮어주던 일도 아련한 기억으로 남아있습니다
육곡수 큰 개울을 건너 구봉산 암자에 불공 다닐 때도, 낡은 버스에 먼지 자욱한 신작로로 누군지
모르는 할머니들을 찾아갈 때도 저는 할머니 손을 꼭 잡고 따라다녔습니다
저녁 밥상도 할머니와 겸상이었고 밥수저를 놓자마자 할머니의 무릎을 베고 그냥 꿈나라로 직행
하던 일은 그 무릎의 따스한 체온과 함께 하던 내리사랑으로 두고두고 잊지못할 기억이지요
양아치 짓을 하던 중고등 사춘기와 긴급조치 폭압적 시대와의 불화로 집안을 뒤집은, 우여곡절이
많았던 대학시절을 뒤로 하고 어찌 뒷걸음 운좋게 취직이 되어 떠나던 날, 할머니는 참으로 많은
자질구레한 물건들을 챙겨주었습니다
내복과 양말, 제가 쓰던 수저에 손톱깎기에 휴지까지 칼로 잘라 챙기면서 적잖은 돈도 그 아무도
몰래 꽁꽁 싸주었습니다, 그러면서 자꾸 옷소매로 눈가의 물기를 닦았습니다
여름휴가에는 꼭 오너라, 그전에도 꼭 집에 다녀가라 하셨고 저는 그렇게 하마고 약속을 했습지요
그러나 당시 시대상황상 말단쫄병으로 개인시간이 거의 없이 높은 분들 수행일을 하던 저는 여름
휴가 전에도, 여름휴가에도 집에 한번도 가지를 못했습니다
미국출장후 한참 뒤에 손꼽으며 기다리던 그리운 집에 돌아오니, 할머니는 이미 위중하셨고 저의
며칠의 휴가가 끝나기 전에 눈을 감았습니다
할머니의 장례행렬은 구봉산 아래 여섯굽이를 도는 육곡수 강 길을 따라 길게 이어졌고 저는 상복
에 두건을 쓰고 상여의 맨 앞장을 섰습니다
십리 가까운 먼 길을 걸으며 내내 아주아주 어릴 때의 기억을 더듬었습니다
요즘같은 가을이면 할머니는 밤을 까서 낡은 놋숟가락으로 가루가 되도록 자근자근 눌러 제 입에
옮겨주거나 입으로 반을 갈러 주었는데 받아먹는 그 밤이 그렇게 달콤하고 맛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는 이도 제대로 없을 때이니 몇살이었을까.. 요즘 며느리들이 보면 기겁할 사건이지만 할머니
가 씹어 입으로 넣어주던 밤보다 더 따스하고 정성어린 간식을 저의 두딸도 차마 모릅니다
장례행렬의 앞을 서서 걸으며 저는 오래도록 할머니가 놋숟가락으로 떠먹여주던 밤맛을 되씹고
있었습니다
어제는 40년전 그렇게 떠난 할머니의 기일이었는데 받은 그 많은 사랑을 보답지 못하고 이제 노년
에 든 초라한 손자는 하늘에서 내려다볼 할머니께 그저 부끄러움만 한가득입니다..
...제 기분에 주절인 잡글이 쓸데없이 길어졌습니다, 말을 닫고 지갑만 열 연식도 한참 지났건만
아둔한 인간은 여전히 어립니다, 넒으신 용서를 바라오며 잘 익는 가을들 되셔요
첫댓글
할머니 사랑의 깊은 골짜기를
아직도 품에 담고 계시어,
기일에 즈음하여
할머니가 생각 나시네요.
세상 굽이굽이 인간사에 접하며,
좋았던 일은 아내와 함께,
슬펐던 일은 할머니 생각하시는 것 아닌가요.
무지하게 덥던 그날은 가고 없고
벌써 가을이 성큼 다가 왔지요.
이런 저런 생각 접으시고,
푸른 하늘 바라보며, 좋은 생각 많이 하셔요.ㅎ
이제 적잖은 연식에도 여즉 마마보이를 벗어
나질 못하니 껍질만 어른입니다
옛날 생각은 이쯤서 접고 코에 숨이 끊어지는
그날, 제게 이 한시간도 남지않은 그 순간에
억울치않도록 오늘에 집중해야겠습니다
참 많은 추억을 다 꿰고 사시네요.
하긴 할머니의 사랑이 깊었기에 그런 거겠지요.
잘 읽고 갑니다.
한때 시대의 화두였던 '머시 중헌디'를 깨닫지
못하고 할머니가 저의 집안으로 시집올 때 온
벼락맞은 낡은 궤짝을 아직도 끌어안고 있습
니다.. 국운융성과 민족중흥의 진취적 기상은
간 곳이 없습니다ㅎ
저는 방학 때 마다 들리면 반갑게 맞아주시던 외할머니가 그렇게 오래 기억에 남던데... 태어나고 자라면서 늘 함께해주신, 아낌없이 사랑해주시던 할머님 기억은 얼마나 깊고 넓을까요...
이미 외할머니가 된 고향의 제 국민학교 동기
여생도들은 방학때 손자 외손자들이 올까 걱정
이랍디다마는 늙은 그 가스나들의 고충도 이해
는 되나.. 우리 소시적 외할매도 그런 심정이었
을까 조금 궁금하기도 합니다요ㅎ
저도 할머니 사랑 엄청 많이 받았어요.
할머니 자식이라고는 아버지 작은아버지 두 분였는데 제가 장녀였거든요.
딸이 없던 할머니는 저를 딸처럼 생각하셨구요. 저도 엄마보다 할머니를 더 좋아했어요.
구봉 님 이야기를 들으니까 할머니 생각 참
많이 나네요.
무덥기만 하던 여름도 지나갔고 이제는
천고마비의 계절이래요.
잊지않고 수필방 찾아주셔서 넘나
반가워요^^
아들과 사이가 별로인 제 친구놈은 기이하게도
손자손녀는 죽을동살동 좋아 끼는데 미친 놈아
욕하면, 니도 손자 보면 안다 이놈아라고 손자
없는 제게 약을 올립니다
새끼의 새끼, 한대를 내린 사랑은 그런것일런지요..
눈물을 흘리면서 글을 읽습니다.
할머니의 그 따뜻한 사랑이
구봉 님은 얼마나 그립겠습니까.
세파에 시달릴 때마다
생각나실 할머니.
어제가 할머니 기일이었으니
더 할머니 생각이 간절하시겠습니다.
저도 외손자를 안고 자장가를
불러 주면서 속으로 중얼대곤 합니다.
나 죽으면 영정사진은 네가 들어다오.
구봉 님, 편안한 시간 되시길 바랍니다.
단언컨대, 그 외손자는 칠십고희가 되어도 지금의
포근한 외할머니의 품을 본능적으로 기억할 겁니다
사람이 금수와 다른 게 감성과 영성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는 것이지요
아무 보상도 바라지않던 할머니의 내리사랑 덕분에
제가 이만큼이라도 세상을 살아냅니다
할머니의. 지극한 사랑을 받으셨군요. 자주찾아뵙지 못하였지만 ᆢ그 당시 열심히 일한 댓가로 우리나라가 선진국으로 올랐으니 아마도 할머니도 모두 이해하셨겠죠?
우리의 선배들이 당대에 이 민족의 밥세끼를
해결하고자 열심히 실아낸 결과가 오늘날 이
정도라도 바깥에서 대접을 받음은 여행 경험
많으신 푸른비님이 더 실감하실 것이지요
며칠전 노벨상 소식도 그 연장선상에 있고요..
구봉산이란 산이 있었군요
방바닥에 떨어진 눈물로
물 글씨를 썼다는 장면이
상상이 가고
할머니께서
자근자근거려 가루가되도록
씹어 멕여줬다 밤
글이 가을입니다 ㆍ
글 잘 쓰시는 구봉의 계절이
왔습니다
건필하십시요ㆍ
참고로
오늘 생각해 보니
어린 시절 나는
눈물 흘러본 적 없이 컸던 것같아요
남진의 가슴아프게ㅡ가
가슴으로 와 닿을 땐
30대 중반이었나 싶어요 ㅎ
읍내를 둘러싼 높낮이 가지런한 봉우리 아홉의
산인데 제 영혼의 자궁이지요, 그 아래서 고려
이후 수백년 삶을 이어온 인간이란 동물의 부스
러기 하나가 세파속의 누추한 저이고요..
실로 댓글 빙자 문후가 아니었음에 민망타는~
@윤슬하여 1980년대초 부산에 가라오케가 막
도입기쯤 출장길에 따라간 요상한 분위기에서
얼떨결에 부른 가슴 아프게가 지금껏 이 사내의
18번임에 반가워합니다
4분여의 노래 한곡이 주는 여운은 진리입니다
오ㅡ그래요!
목포의 눈물 18번하고
꼭 한 번 불러보이십더
이쁜 수님과 함께 ㅎ
아홉구비 구봉산이
영혼의 자궁이라니
이 곳
강진에 있는
음의 기운이 세다는 골짜기에
옴천사ㅡ라는 절이 있습니다
거기도
가 보입시더 ㅎ
어제 이 글 읽다가 잠이 들었습니다.
저에게는 참 빗으로 곱게 빗어 넘겨 쪽 진 머리 고우셨던 할머니가 계셨습니다.
스물이 갓 되었을 때 할머니 돌아가시고 산소에 모셔두고 오는 길에
아버지께서 저에게. "다른 아들(아이들)은 몰라도 니는 꼭 할매 산소 자주 찾아 뵈어라. 할매 아니었으면 니는 죽었다."
알고 있었어요. 워낙 약하게 태어나 다섯 살을 못 넘긴다 했었는데.
그 시절 산으로 약초 캐고 뱀. 토끼 잡는 사냥꾼에게 부탁해 잡히는 토끼는 모조리 사서 할머니꺼서 저 고아서 먹였다고,
학교 입학 전 까지 늘 할머니 등에 업혀 지냈던 기억이 있으니....
돌아가시기 전 뇌졸증으로 반신이 불편한 몸으로 앉아 계셔도 방안 티끌 하나 눈에 띌 때 마다 주우시고.
동몽선습 외우시던 곱디 고왔던 할머니.
아버지 말씀 실천 못했어~~~라며 잠들었는데.
추워지기 전에 언니와 함께 다녀와야 겠습니다.
손녀를 위해 야생 산토끼를 끌어모으신 할머니
의 정성이 이 가을날을 따스하게해줍니다
그 내리사랑의 원형을 우리는 흉내라도 낼 수
있을런지요.. 그 덕분에 오늘의 커쇼님은 누구
보다 위풍당당하심을 봅니다
방바닥에 눈물로 낙서하는 꼬마녀석이
어지간한 고집장이였나 봅니다.ㅋ
할머니와 단둘이서 많은 시간을 보내셨다니
남 이야기가 아닌듯 이입되어 읽었습니다.ㅠ
할머니 친구분들이
이쁜아이라고 하셨을텐데 하여간...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