숭숭 뚫린 구멍이 집입니다
갯벌에 가면 집이 구멍입니다
길쭉한 갯지렁이 구멍 옆에 바지락 구멍
그 옆에 꼬막 구멍 그 옆에
농게 칠게 구멍
그 옆에 비틀이고둥 구멍 그 옆에 짱뚱어 구멍
그 옆에 낙지 구멍 그 옆에 또 길쭉한 허리를
오므렸다 펴는
갯지렁이 구멍
다 같이 똑같은 갯바닥 구멍 집에 살고 있습니다
옆집보다 더 높은 집을 짓고 사는 이웃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_「구멍 집」 전문
갯바닥에 늘어선 구멍들은 모양도 크기도 가지각색이지만 옆집보다 더 높은 집을 지은 이는
없습니다. 문학동네 동시집 시리즈의 51번째 구멍에 조성국 시인이 집을 지었습니다. 시인 조성국은 1990년 『창작과비평』 봄호에 「장대비」 외
6편을 발표하는 것을 시작으로 시집 『슬그머니』『둥근 진동』을 출간하였고, 『구멍 집』은 첫 동시집입니다.
글 : 조성국
그림 : 배중열
대학에서 만화예술학을 공부했고, 지금은 제주에 살면서 그림을 그린다. 개성 있는
일러스트로 다양한 분야에서 큰 사랑을 받고 있다. 에세이 『제주 담다, 제주 닮다』를 쓰고 그렸고, 그림책 『뿡 뀌고, 빵 뀌는 방귀 시합』에
그림을 그렸다.
제1부 소낙비
소낙비
12
흰둥이 14
망 16
별이 뜨는 이유 17
살구나무집 18
구멍가게 할머니 19
개 밥그릇
20
고자질 22
구멍 집 24
제2부 바람 우체부
바람 우체부 28
다람쥐와 상수리 30
지렁이
밑줄 32
벼 이삭 34
강 36
보름 37
할아버지 풀머리 38
전깃불이 나가면 39
자전거 타기
40
버릇없는 녀석 41
손빨래 42
도둑놈풀 43
제3부 얼음 뚜껑
얼음 뚜껑 46
오리털 잠바
48
저녁 49
세탁 50
해일 51
솔개 52
병아리와 싸락눈 54
오줌싸개 55
꾀 56
겨울
대밭 58
제4부 봄 손님
봄 손님 62
화살 새 63
면봉 64
손뼉 66
두릅나무
67
논물 68
부처님 머리 혹 70
반장 선거 71
헛방귀 72
어림짐작 73
똥침 74
장기자랑
75
이팝나무 76
해설 | 김진경 79
◆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 동그라미 바퀴를 달고 잘도 궁글어 가는 우리들의 시간
동시집『구멍
집』에는 순서대로 영글고 또 사위어 가는 우리들의 시간이 담겼다. “갑자기/ 방앗간 양철 지붕 위로 후다닥,” 빗줄기가 내닫기 일쑤인 한여름이
가면(「소낙비」) 뒤란 은행나무가 밑둥치께 “노란 엽서 수백 통”(「바람 우체부」)을 쏟아 놓는 가을이 성큼 오고 벼가 여문다. 벼 포기들이
“노랗게 익은 황금빛 고개를/ 가만히” 수그릴라 치면 어느새 바람이 맵고, 어느 집 마당에서 좁쌀인 양 “싸락싸락 치대는 싸락눈의/ 거짓말에”
병아리가 홀랑 속아 날개깃만 털 때(「병아리와 싸락눈」) 연못은 “딴딴한 / 뚜껑을” 꽁꽁 내 닫는다(「얼음 뚜껑」). 그리고 봄은 문득
다가온다. “엊저녁 한꺼번에/ 동네 개 짖는 소리 시끄러워서/ 누구 오나, 궁금했더니// 다음 날/ 마당가 매화나무에 꽃망울이/ 아장아장 맺혀”
있는 것을 보게 되는 것이다(「봄 손님」).
시인은 너른 시야로 땅과 푸나무와 짐승과 사람이 살아가는 공간을 하나하나 짚어 간다. 흰둥이와
아이가 나란히 먼 데 일갓집에 심부름을 가는 풍경, 상수리나무가 지난 날 만났던 다람쥐 어깨를 툭툭 치며 반가워하는 장면, 큰 눈 얹혀 팽팽해진
겨울 대밭의 모습 등이 풍부한 계절의 정취를 바탕으로 맞물려 흘러간다. 고유의 속도대로 타고난 본새대로 살아가지만, 박자는 잘도 어울린다.
◆ 순하고 곧은 시선이 다가가 머문 터
녹슨 양철 빗물받이 내려앉은
헌 집을 지나다가
딱친구와
함께 놀던 때에는
쳐다보지도 않은 살구꽃 보며
꽃 지면 노랗게
통통 잘 익은 살구나무 밑둥치를
발로 걷어차
후드득
떨어진 살구 알을
혼자 주워 먹을 생각에
입 안 가득 군침을 고이다가
딱친구도 없는 살구나무집을 쳐다보며
시금털털하고
달기도 한 친구를
한참 생각하기도 하다가
_「살구나무 집」 전문
시인은 한곳에 앉아 물끄러미 어딘가를 바라보기를 즐기는
듯하다. 녹슨 양철 빗물받이 내려앉은 옛 친구의 집을 지나다가 하는 생각은 살구나무가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을 때까지의 시간을 관통하며
시금털털하고 달기도 한 기억을 데려온다. 마당가에서 한없이 비 맞는 개 밥그릇이라든가 여우비 그치고 지렁이가 그어 놓은 밑줄, 하필이면 내
바짓가랑이에 달라붙어서 버려지는 도깨비풀, 불룩해진 잠바 안에서 삐져나와 쌩하니 휘날리는 오...◆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 동그라미 바퀴를 달고 잘도 궁글어 가는 우리들의
시간
동시집『구멍 집』에는 순서대로 영글고 또 사위어 가는 우리들의 시간이 담겼다. “갑자기/ 방앗간 양철 지붕 위로 후다닥,”
빗줄기가 내닫기 일쑤인 한여름이 가면(「소낙비」) 뒤란 은행나무가 밑둥치께 “노란 엽서 수백 통”(「바람 우체부」)을 쏟아 놓는 가을이 성큼
오고 벼가 여문다. 벼 포기들이 “노랗게 익은 황금빛 고개를/ 가만히” 수그릴라 치면 어느새 바람이 맵고, 어느 집 마당에서 좁쌀인 양
“싸락싸락 치대는 싸락눈의/ 거짓말에” 병아리가 홀랑 속아 날개깃만 털 때(「병아리와 싸락눈」) 연못은 “딴딴한 / 뚜껑을” 꽁꽁 내
닫는다(「얼음 뚜껑」). 그리고 봄은 문득 다가온다. “엊저녁 한꺼번에/ 동네 개 짖는 소리 시끄러워서/ 누구 오나, 궁금했더니// 다음 날/
마당가 매화나무에 꽃망울이/ 아장아장 맺혀” 있는 것을 보게 되는 것이다(「봄 손님」).
시인은 너른 시야로 땅과 푸나무와 짐승과 사람이
살아가는 공간을 하나하나 짚어 간다. 흰둥이와 아이가 나란히 먼 데 일갓집에 심부름을 가는 풍경, 상수리나무가 지난 날 만났던 다람쥐 어깨를
툭툭 치며 반가워하는 장면, 큰 눈 얹혀 팽팽해진 겨울 대밭의 모습 등이 풍부한 계절의 정취를 바탕으로 맞물려 흘러간다. 고유의 속도대로 타고난
본새대로 살아가지만, 박자는 잘도 어울린다.
◆ 순하고 곧은 시선이 다가가 머문 터
녹슨 양철 빗물받이
내려앉은
헌 집을 지나다가
딱친구와 함께 놀던 때에는
쳐다보지도 않은 살구꽃 보며
꽃 지면 노랗게
통통 잘 익은
살구나무 밑둥치를
발로 걷어차
후드득 떨어진 살구 알을
혼자 주워 먹을 생각에
입 안 가득 군침을 고이다가
딱친구도
없는 살구나무집을 쳐다보며
시금털털하고 달기도 한 친구를
한참 생각하기도 하다가
_「살구나무 집」 전문
시인은
한곳에 앉아 물끄러미 어딘가를 바라보기를 즐기는 듯하다. 녹슨 양철 빗물받이 내려앉은 옛 친구의 집을 지나다가 하는 생각은 살구나무가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을 때까지의 시간을 관통하며 시금털털하고 달기도 한 기억을 데려온다. 마당가에서 한없이 비 맞는 개 밥그릇이라든가 여우비 그치고
지렁이가 그어 놓은 밑줄, 하필이면 내 바짓가랑이에 달라붙어서 버려지는 도깨비풀, 불룩해진 잠바 안에서 삐져나와 쌩하니 휘날리는 오리 깃털처럼
시인의 눈길을 붙드는 것들은 대개 남들이 쉬이 지나치는 작은 것들이다. 때로는 그저 대상과의 거리를 바라보기도 한다. 점점이 별이 뿌려진
밤하늘, 잔잔한 저수지의 수면, 물 댄 논, 봄비 그친 마당, 하늘 한복판의 햇발이 발갛게 물들기 시작하는 현장 등이다. 순하고 곧은 그 시선이
다가가 머문 공간들은 이내 스스로 자기를 열어 이야기를 꺼내 준다.
저건 분명 닭이
모이를 쪼는 자국이다
노란
서숙 알갱이같이
콕콕
별이 뜨는 건
캄캄한 하늘을
밤새 쪼아 댔던 흔적들이
남아 있어서다
새벽에 우는 닭
울음이
바로 그 증거다
_「별이 뜨는 이유」 부분
해설을 쓴 시인 김진경은 “이 시를 이야기로 푼다면 닭을
토템으로 하는 원시 부족의 별에 대한 애니미즘 신화쯤 될까. 조성국의 동시는 이 애니미즘 신화를 닮았다.”고 말한다. 애니미즘 신화는 인류가
비유의 능력을 통해 최초로 자연과 인간의 기원과 이치를 해명한 ‘이야기시’라는 것이다.
◆ 아이의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반복,
창조되는 태초의 신화
“인간의 태아는 인간의 진화 과정을 반복한다. 어린아이의 두뇌에서는 어느 순간 수만 년 전 현생인류의 뇌에서
일어났던 두뇌 혁명의 빛이 최초의 모습 그대로 반짝일 것이다. 조성국 시인의 동시는 어린아이의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이 애니미즘적 사유의 현장을
민첩하게 포착해 낸다.”
시인 김진경은 조성국의 동시에서 읽어 낸 이야기를 모든 아이들의 머릿속에서 매 순간 반복해서 태어나는 최초의
신화라고 명명한다. ‘나’가 담긴 방과 ‘타자’가 담긴 방이 연결되기 시작하면서 ‘공감’이 발생하고 ‘정서적 연대’가 생겨나고 우리들은 비로소
세상 만물을 나와 같은 존재로 느끼는 애니미즘적 사유를 체화해 간다. 이 최초의 신화는 인간과 자연의, 인간과 인간의 공감과 연대를 이야기하고
있다는 점에서 변하지 않는 진실을 담고 있다.
제주에 사는 화가 배중열의 그림은 독특한 시적 시공간을 고유의 필치로 부드럽게 물들여
주었다. 뻔하지 않은 유머와 강렬하고 조화로운 색조는 각 편의 시를 마치 처음 만나는 장면처럼 독자에게 전한다.
- 출처: 예스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