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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11주일설교 누가복음23:1-12
본문: 누가복음23:1-12
제목: 소동케 하시는 예수님
오늘은 누가복음23:1-12의 말씀을 가지고
“소동케 하시는 예수님”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오늘 말씀 제목은 무엇입니까?
“소동케 하시는 예수님”
우리의 마음이 어떤 때는
잔잔한 호수 같기도 합니다.
하지만 어느 때는 거센 파도가 이는
바다 같을 수도 있습니다.
항상 파도는 바람의 영향이나
아니면 지진 등으로 파도가 일어나기도 합니다.
원인이 없는데 파도가 일지는 않습니다.
여러분은 무엇 때문에 마음이 움직입니까?
조금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소동이 날 정도로
여러분을 움직이게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좋지 않은 뉴스나
놀랄만한 뉴스에 소동하기도 합니다.
나를 비난하는 사람들의 소리에 소동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어떤 중요한 말씀에 마음이 흔들려
그것이 하루가 가도 이틀이 가고
한달 일년 평생을 가기도 합니다.
어떤 이들은 그 어떤 말에도
전혀 흔들리지 않는 자들도 있습니다.
무슨 말을 들어도
오직 자신의 뜻대로 행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물론 어떤 이들은 마음의 수양을 쌓아서
어떤 거센 바람과 천둥에도 바위처럼 소동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지만 흔들려야 할 것에 흔들리고
바르게 흔들려 살길과 선한 길과 복된 길로 갈 수 있다면
그것은 바람직한 모습입니다.
오늘 본문은 소동하는 무리들이 나옵니다.
무엇 때문에 그렇습니까?
누구 때문에 그렇습니까?
1.모함을 받는 예수님
무리들이 예수님을 빌라도에게 끌고 가서
고발한 죄목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들이 고발한 죄목은 예수님이
자신들을 소동케 한 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빌라도에게 끌고가 죽여 달라고 합니다.
자신들을 미혹하고 질서를 어지럽히고
그래서 소동하였다고 고발하였습니다.
그리고 가이사에게 세금 바치는 것을 금한다고 합니다.
아니 지금 그들이 누구입니까?
로마의 지배에 몸서리 치는 그들이
세금 바치는 것을 금하였으면 좋아해야지
그것을 죄목으로 고발을 했습니다.
속도 쓸개도 없는 사람들입니다.
지금 그들이 고발한 내용들은 무엇입니까?
그들의 고발한 내용들은 한 마디도 진실이 없습니다.
그저 로마 지도자들에게 예수님에 대한 반감을 일으켜
자신들의 목적을 이루려는 수단에 불가합니다.
왜 이렇게 행하는 것입니까?
사탄의 조종을 받아 행하기 때문입니다.
거짓과 중상모략은 마귀가 애용하는 두 가지 무기입니다.
예수님은 마귀에 대해서 말씀하기를
그는 처음부터 거짓말하는 자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요8:44)
마귀는 자기가 하나님의 일을 막을 수 없음을 알았을 때
그들이 하는 일은 하나님의 종들의 인격을 중상하여
그들의 증거의 가치를 파괴하려 하는 것입니다.
마귀는 이 무기를 가지고 다윗을 공격했습니다.
다윗은 “불의한 증인이 일어나서 내가 알지 못하는 일로 내게 힐문하며”(시35:11)라고 말합니다.
사단은 이 무기를 가지고 선지자들을 공격하였습니다.
“엘리야는 이스라엘을 괴롭히는 자”가 되었습니다.
(열왕기상18:17)
또 예레미야는 “백성의 평안을 구치 아니하고
해를 구하는 자”자 라고 하였습니다. (에례미야38:4)
그것은 사도들도 염병같은 존재, 천하를 어지럽게 하는
자들이라고 거짓말을 하였습니다. (행24:5, 17:6)
마귀는 이 무기를 가지고
주님의 사역 기간 내내 공격을 가했습니다.
마귀는 자신의 대행자들
사탄의 자녀들이 악한 자들을 통하여
주님을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
귀신 들린자”라고 불렀습니다. (누가복음7:34)
본문에서도 마귀는 그들의 무기를
끝까지 사용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전적으로 거짓된 고발에 의하여
빌라도 앞에서 심문을 받고 있습니다.
그러한 일을 우리에게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런 일이 있을 때 우리는 놀라서는 안됩니다.
거룩하고 흠이 없고 더렵혀지지 않은 주님이 그랬다면
우리가 어찌 피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귀신 왕 바알세불이라고 하였는데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가
그런 비슷한 일을 당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완벽하게 살아간다고 해도
거짓과 비방과 허위 진술을 막을 수는 없습니다.
아무리 흠잡을 데 없는 인격도
거짓된 혀로부터 안전하게 지켜지지 못합니다.
우리는 시련을 인내하며 견디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도 그러한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을 의지하고 결국 진리가
승리할 것을 믿으며 가만히 기다려야 합니다.
그러한 것에 흔들릴 것이 아니라
오직 주님의 말씀 안에 순종하는 길로 가야 합니다.
2.권력자들의 마음
오늘 본문은 권력자들의 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어떻게 그런 이상한 마음을 가지게 되었을까요?
빌라도가 주님을 갈릴리 분봉왕 헤롯에게 보냈을 때
“헤롯이 예수를 보고 매우 기뻐하니
이는 그의 소문을 들었으므로 보고자 한지 오래였고
또한 무엇이나 이적 행하심을 볼까 바랐던 연고러라”라는
말씀을 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주목해야 합니다.
세례 요한을 죽였던 헤롯은
감각적이고 세상 적인 사람으로서
동생의 아내와 음란한 관계를 맺으며
살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보고 싶어 합니다.
우리는 이런 사람이
예수를 보고 싶어 하리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헤롯은 불안한 양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그가 보았고 들었던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 백성들의 모습이 그의 마음을 어지럽혔습니다.
분명 예수님의 설교와 이적과 기사들이
궁전에 있던 헤롯에게도 들렸을 것입니다.
죄를 대적하는 또 하나의 증인이 일어났으며,
그는 세례 요한보다 담대하고 신실하였습니다.
왕의 권력으로도 행하지 못하는 놀라운 기사를
자기의 가르침을 가지고 확증한다는 소문이었습니다.
이러한 소문은 헤롯을
불안하게 만들고 초조하게 하였습니다.
당연히 그는 호기심이 일어나
그리스도를 보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교회의 모든 시대마다 하나님도 없고
믿음도 없이 오직 자신을 위해서 살아가는
헤롯과 같은 유명하고 부유한 자들이
많은 것은 두려운 일입니다.
그들의 일반적으로 기분으로 살며,
아첨하고 알랑거리며, 그들의 영혼에 대하여
결코 진실을 말해주지 않는 자들 사이에서
교만하고 횡포적이며 자신의 뜻만을 위하여 살아갑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람도 때로는
양심의 가책을 받으며 두려워합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죄를 대적하는 담대한 증인들을 일으켜서 그들의 증거가 그들의 귀에 들리도록 합니다.
그들은 예수의 증인 사역 주위를
마치 등불 주변의 나방처럼 배회합니다.
거기에 순종하지도 않으면서
그것을 멀리 할 수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들은 증인의 재능을 칭찬하고
그들의 능력에 대한 흠모를 공개적으로 고백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더 이상 나가지 못합니다.
헤롯처럼 그들의 양심은 그들 속에서 하나님의 증인을
보고 들으려는 병적인 호기심을 일으킵니다.
겉잡을 수 없는 감정과 정욕의 풍랑에 이리저리 부대끼다가 사는 동안 결코 평안을 얻지 못하며 양심의 온갖 투쟁 후에 결국 그들의 죄 가운데 죽습니다.
이건 아픈 역사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많은 부자들의 영혼에 관한 역사입니다.
헤롯같은 이는 권력과 부를 가지고 있었지만
불쌍한 존재라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겉은 화려하지만 내부적으로 완전히 비참한 자입니다.
그들이 권좌와 화려한 옷과 풍성한 음식이
그들을 위로해 줄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불쌍한 존재이기에
우리는 그들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그들에게도 영생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부를 부러워할 것이 아니라
그들의 불쌍히 여기고 그들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그들이 구원을 받을 수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큰 은혜 때문입니다.
”낙타가 바늘 귀로 들어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마19:24)
3.악한 자들의 연합
유류 상종, 부창부수란 말이 있습니다.
끼리끼리 논다고 합니다.
친구를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다고도 합니다.
오늘 본문은 그리스도를 싫어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의견이 일치가 되는지를 보여줍니다.
원수였던 자들이 마치 친구처럼 죽이 맞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을 처리하는 것이 골치가 아팠을 때
갈릴리 분봉왕이 헤롯이 예루살렘에 있다는 말을 듣고
예수님을 헤롯에서 보냈습니다.
실상그들은 원수였지만
마치 상부상조하는 친구처럼 행동하고 있습니다.
“헤롯과 빌라도가 전에는 원수였으나
당일에 서로 친구가 된 사실”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그들이 원수가 되었던 이유를 우리는 모릅니다.
그것은 아마도 보통 사람들 사이에서와
마찬가지로 유명한 사람들 사이에도
흔히 있는 사소한 다툼이 있었을 것입니다.
서로 등지게 된 이유가 무엇이었든지
경멸과 두려움 또는 증오의 공통적인 대상인 예수님이
그들 앞에 나타나자 적의가 사라지고 친구가 되었습니다.
그들이 무엇을 가지고 불화했든지 간에 빌라도와 헤롯은 그리스도를 핍박하고 멸시하는데 뜻을 일치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사건은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항상 찾아볼 수 있는 것들의 상태에 대한 상징입니다.
서로 가장 어울리지 않는 견해들을 가진 사람들이
반대하는 일에는 단합할 수 있습니다.
가장 반대적인 교리를 가르치는 교사들이 복음을 대적하여 싸우는 일에는 공통적인 명분을 가질 수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나사렛 예수를 죽이는 일에 힘을 합했던 사실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런 일은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현장에도 많이 있습니다.
정치나 경제 사회 현장에도 있습니다.
한가지 공통적인 협오감이 그들을 결속시키고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혐오하였습니다.
그렇기에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이 미워하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들에게 양보하고 친절해서 호감을 살수 있으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크게 속는 일입니다.
그런 일에 마음을 산란하게 가질 필요는 없습니다.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 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요15:19)
우리는 이러한 주님의 말씀을 알고 있어야 하며
그 말씀을 알기에 세상이 우리를 미워한다고 해서
낙심하거나 속상해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저 그렇구나 내가 주님께 속하였구나 하며
위안과 주님 안에 있는 나임을 기뻐해야 합니다.
헤롯은 자기가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없을 때 어떻게 했습니까?
예수님을 희롱하고 빛난 옷을 입혀 보냈습니다.
헤롯은 갈릴리의 분봉왕이라고 하면서
예수님을 고발할 죄인이라고 할
아무것도 갖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부끄럽겠습니까?
빌라도에게 자신의 능력을 보여줄 수 있었는
그러지 못하니 속상한 마음에
예수님만 조롱하여 보냈던 것입니다.
주님이 왕이라고 하니 조롱하려고
왕의 복장 비슷한 것을 입혔습니다.
주님은 이리 저리로 끌려 다니면서 조롱을 받으셨습니다.
그래서 빌라도나 헤롯은 예수님을 조롱하고
모욕하는 일에 같은 편에서 친구처럼 같이 행동했습니다.
그러한 행동은 예수님이 그들의 마음을 소동케 하였으나
예수님을 따르지 않음으로 사탄의 소리를 듣게 되어
일어난 현상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이 대제사장들과 무리들에게
고소당한 죄목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을 백성들은 자신을
소동케 하였다고 그들은 고발합니다.
맞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그들 뿐 아니라 사람들을 소동케 하는 분입니다.
그의 말씀을 들은 자들은 소동이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아니 저와 여러분들을 소동케 하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말씀을 들었기에 소동이 일어났고
그래서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고백하고
믿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여러분이 예수님을 믿는 분이라면
여러분도 소동케 하시는 분입니다.
분명 예수님은 소동케 하시는 분입니다.
누구일지라도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면
마음에는 소동이 일어납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은 우리가 어둠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진리를 떠나 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 안에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소동이 생깁니다.
어둠 안에 빛이 들어올 때
얼마나 소동이 일어나겠습니까?
지금까지 내가 가져온 생각, 살아온 길, 가기로 한 길,
원하던 목적, 꿈꾸던 미래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송두리째 흔들릴 때
어떤 일이 일어나겠습니까?
소동이 일어나지 않겠습니까?
분명 소동이 일어납니다.
예수를 믿는 것은 소동을 겪기 위해서 예수를 믿습니다.
소동을 겪지 않고서 예수를 믿을 수 없습니다.
내가 부서지는데 소동이 일어나지 않을 수 있습니까?
내가 깨져야 하는데 소동이 없을 수 있겠습니까?
내가 죽어야 하는데 소동이 없다고 하면 거짓말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는 일은 반드시 소동이 있습니다.
우리는 변화를 위해서 예수를 믿습니다.
변화는 반드시 소동을 겪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마음에 소동이 일어났는데
그것을 거부하면 사탄이 그를 소동케 합니다.
사단이 무리들을 소동케 했을 때
사단이 종교 지도자들을 소동케 했을 때
그들은 거짓과 살인을 저지르는 행동을 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으면
우리는 사단을 따르게 되어 있고
그러면 거짓과 살인을 행하는 자리에 있게 됩니다.
그러므로 소동을 싫어하여 그것을 고소하는 사람들,
그들은 변화를 거부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변화가 아니라
그냥 자기 식대로 사는 것이었습니다.
그냥 살기 위해 그들은 열심히 이 사람 저 사람
그것도 자신들보다 더 죄인인 빌라도와 헤롯을
찾아 다니며 자신들의 악함을
보장해 주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자신들의 원함을 위해서 악과 협잡하며
그래서 그가 원수일 지라도
내 원하는 것을 위해 하나가 되는
말도 안되는 행동을 하게 됩니다.
여러분 삶을 어느 쪽에 맞추고 살겠습니까?
소동을 잠재우려고 하시겠습니까?
항상 말씀 앞에서 서서
우리의 마음을 소동케 해야 합니다.
소동이 싫다고 거부하면 안됩니다.
그 소동을 잠재우면 안됩니다.
그 소동을 더 키워나가야 합니다.
그 마음에 울림, 결단, 새 출발하고자 하는 것
실천할 수 있도록 예수님께 더 가까이 나가고
그분으로부터 더욱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는 변화가 되어 십자가의 길 순교자의 삶을 살아 "내 생명 주님께 드리리"라고 고백하며
예수님이 가신 길을 따라갈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