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좁은 길 마7‘13절과 14절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는 이 말씀은 권면과 행동에의 초청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첫째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결정과 이행을 요구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에 초연한 태도를 유지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관심이 순전히 지적인 것이요 우리 삶에 영향을 주지 못하였다면 신약성경은 우리가 기독교인이 아니라고 말해줍니다.
어떤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그저 놀라운 철학쯤으로 읽어야 할 읽을거리로, 흥미거리로 보아 넘기는 데 있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이렇게 받아들여지기를 거부합니다.
복음은 본질적으로 우리의 삶을 지배하기를 요구하면서 임하는 것입니다. 복음은 흡사 주께서 걸어가실 때 마태와 같은 사람을 만나셔서 '나를 따르라'라고 말씀하시니 마태가 일어나 그분을 따라간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복음은 항상 결단을 요구하며 이행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나는 이 삶에 내 몸을 맡겼는가?
이것이 내 삶을 지배하는가?'라고 말입니다.
이것은 물론 뚜렷한 의지의 결단을 수반합니다.
흡사 군에 입대하는 사람이 자기에 대한 권리와 자기 생명의 관리를 양도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다음 단계인 둘째 원칙은 이제 이 좁은 문을 찾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습니다.'라고 하셨습니다.
어째서입니까? 찾는 이가 적기 때문입니다.
좁은 문을 찾는다는 의미는 다음과 같습니다.
즉 진리를 보고, 그것에 동의를 표시하고 나서 자신에게 '이렇게 하기 위해 나는 정확히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고 물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쉽지가 않습니다. 여러분 자신을 분석해 보고 자신에게 정직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해야 할 것을 정확히 발견하기까지 나는 이 일을 계속하겠다'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위대한 성도들의 전기를 읽어보시면, 좁은 문을 오랫동안 찾았던 사실을 발견할 것입니다.
마틴 루터를 보십시오. 그가 거기 독방에서 금식하며 땀을 흘리며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다시 조지 윗필드와 요한 웨슬리와 같은 사람들에 대해 읽어보십시오. 이 사람들은 좁은 문을 찾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무엇을 해야 할지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의 생각이 잘못되었을 경우도 있었으나 마침내, 부지런히 구함으로 그들은 그것을 찾았습니다.
이것이 '좁은 문을 들어가는 것입니다' 찾고 발견해야만 들어갈 수 있습니다.
셋째 단계는, 여러분이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로 결정하고 문을 찾아 들어 간 후에 그대로 지속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몸을 여기에 내어 맡깁니다.
기독교인은 매일 아침 깰 때마다 '나는 하나님의 자녀이다.
나는 특별한 사람이다. 나는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다.
나는 하나님의 가족의 한 사람이다. 그리스도는 나를 위해 돌아가셨고 나를 흑암의 나라에서 그의 나라로 옮겨주셨다. 나는 천국으로 가고 있다. 나는 천국에 가게 되어 있다. 나는 이 세상을 지나가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 시험과 시련이 무엇인지 안다. 나는 사탄의 간교한 꼬임이 무엇인지 안다. 그러나 나는 그의 소속이 아니다. 나는 순례자요 나그네이다. 나는 이 길로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사람이다'라는 사실을 상기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이 점을 자신들에게 상기시켜야 합니다.
그 결과 여러분은 이 좁은 길을 따라 걷고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진리를 보았을 때는 그것에 대해 어떤 조치를 취해야 합니다. 우리 자신이 진리에 대해 실제적 관계를 맺어야 하는 것입니다.
주께서는 두 가지 유형의 삶이 우리 앞에 열려있다고 말씀 합십니다. .
넓은 문을 통해 들어가는 넓은 길이 있고,
협착한 길, 내내 좁은 길을 통과해 들어가는 또 한 길이 있습니다.
넓은 길 위의 사람들이 사는 세속적인 삶을 잠깐 보십시오.
어느 신문이든 한 가지를 예로 들어보십시오. 신문들은 최상 및 최악의 세속 생활을 대표합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그토록 매력을 갖는 세속적 삶을, 그들을 매혹시키는 나머지 그것을 위해 영혼의 위험을 무릅쓸 준비가 되어 있는 그들이 영혼을 믿기라도 한다면 삶이 어떤 것인지 보십시오. 그들을 장악하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들의 삶을 살펴보고 분석해 보십시오. 그 온갖 허례와 영화와 호사와 더불어 그 속에는 궁극적으로 무엇이 있습니까?
결국 그처럼 철저히 헛된 것이 또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런 삶에 무슨 진정한 만족이 있겠습니까?
로마서 6장 말미(21절)에서 바울은 묻고 있습니다. '너희가 그때에 무슨 열매를 얻었느뇨 이제는 너희가 그 일을 부끄러워하나니 이는 그 마지막이 사망임이니라'라고 말입니다.
너희가 이제는 기독교인이 되어 과거의 삶을 돌이켜 보면 그때의 삶을 부끄럽게 여긴다. 그때에 너희는 어떤 열매를 맺었느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모든 사람, 특히 이러저리 쾌락을 추구하며 사는 사람들, 정직한 생업을 하나의 성가신 물건으로, 또는 보다 많은 쾌락을 즐기기 위해 돌아가야 하는, 돈을 벌기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 간주하는 사람들이 물어야 할 질문입니다. 그 속에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 소득이 무엇이겠습니까?
그 만족은 무엇이겠습니까?
다른 것은 그만 두고라도, 지적인 면에서 그들은 궁극적으로 가치 있는 것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되십니까?
사람의 칭찬과 찬양에 무슨 진정한 가치가 있습니까?
그런 일들을 위해 사는 사람들을 보고 그들의 삶을, 특히 그들의 목표를 분석해 보십시오. 저는 비꼬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현실이요, 얼마나 공허한 것입니까.
사도 베드로는 '망령된 행실'(벧전 1:18. 새 번역=헛된 삶)이라고 했습니다. 그 속에는 아무것도 없으며 그것은 그처럼 천박하고 공허합니다. 그 얼마나 헛된 삶입니까. 이 삶 자체를 살펴보십시오. 곧 허례와 허식과 환영과 외관의 삶을 살펴보십시오.
넓은 길은 지적으로나, 도덕적으로나, 기타 모든 점에서 공허하고 무익합니다. 이것은 그 당시마저도 입에 더러운 맛을 남기며 질투와 시기와 온갖 종류의 무가치한 것들로 인도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기독교인의 삶을 본 일이 없습니다. 그들은 이것에 눈이 멀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말씀한 대로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인 것입니다(고후 4:4).
그러나 일단 이 고귀한 부르심의 영광과 위엄과 특권을 보는 순간 다른 무엇을 소원하게 되리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서신들은 이 두 가지 삶을 상기시켜 주고 있습니다.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험악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라고 말입니다.
자기 운명을 생각해 보지 않는 사람은 바보 멍텅구리입니다.
넓은 길은 수치와 비참과 파멸로 인도함이 확실하다고 사도 바울이 얼마나 말했는지 보아 왔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 이 죽음은 고난과, 절망, 무익한 회한은 물론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는 것이요, 영적 죽음입니다.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안에 있는 영생이니라'(롬 6:23).
세상을 사랑하고 엔조이하는 사람들을 바라보고, 그들이 노년이 되어 쇠약해졌을 때의 그들을 마음속에 그려보십시오. '마지막 원수'가 그들을 만나러 오고 있는 것입니다.
갑자기 그들이 병이 듭니다. 그들은 이제 마실 수도 없고 담배를 피울 수도, 춤을 출 수도, 도박을 할 수도 없으며, 기타 그들이 의지하고 살던 것들을 할 수가 없게 됩니다.
임종 시에 그들은 무엇을 소유하고 있습니까? 아무것도 없습니다. 두려움과 공포와 고통, 파멸 이외에 기대할 만한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이것이 그런 삶의 종말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잘 알고 있는 터입니다.
이것은 항상 그러했습니다. 기독교인이 아닌 세상의 위인들, 정치가 등등의 사람들의 전기를 읽으시고, 그들이 당하는 소멸을 다시 주목해 보십시오. 그리고 그들의 종말의 기타 세목에 대해서는 우리가 알고 있지 못함을 기억하십시오. 그것이 이외의 다른 무엇으로 인도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멸망으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다른 삶은 보다 풍요한 삶으로 인도합니다.
이 삶은 새 생명과 이 삶은 계속함에 따라 점점 더 크고 더 놀라운 삶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생에서, 이 세상에서 아무리 많은 고난을 받아야 한다고 하더라고 불멸의 영광에 가기로 작정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은, 사도 베드로에 의하면, 여러분을 위해 하늘에 간수된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얻게 되어 있습니다(벧전 1:4).
주님이 사용하신 또 다른 논증은, 좁은 곳으로 들어가지 않는 것은 우리가 이미 넓은 길 위에 있음을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두 반대되는 것 사이에 중간지대는 없습니다.
기독교인은 두 길에만 직면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만일 협착하고 좁은 길 위에 있지 않다면 우리는 크고 넓은 길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몸을 맡기지 못한다든가 머뭇거린다면 좁은 길 위에 있지 않음을 의미합니다. 수동적 저항도 저항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위하지 않는다면 주님을 대항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강력한 논증입니다. 우유부단이 치명적인 것은 그것이 잘못된 결정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방도는 없습니다.
좁은 길이라든가 넓은 길이라든가 둘 중의 하나인 것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 좁은 길을 걸어가야 할 가장 큰 이유는 즉 여러분보다 먼저 가신 분이 이 길에 계십니다.
좁은 문을 통과할 때 여러분은 고립되어 외롭다고 생각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다른 길을 가고 있는 사람들만큼 많자는 않으나 그들은 매우 정선되고 단독적인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모든 사람에 앞서 그 길을 걸어가신 분,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신 분,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신 분을 보십시오.
이 길에 들어서는 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라감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그가 살으신 대로 살라는 초대장입니다.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주님을 따르며, 궁극적으로 여러분은 주님과 함께 있을 것이며, 주님의 복되신 얼굴을 보며, 영원히 주님을 즐거워하게 될 것을 자각하십시오. 주님은 이 길 위에 계십니다. 그리고 이것으로 충분한 것입니다.
즉 '주님은 여기서 일종의 중간지대가 있다고 가르치시지 않는가?
여기서 우리는 우리 앞에 넓은 문과 좁은 문이 있는 길 위에 서 있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성경은 우리가 모두 이 세상에 죄와 진노의 자식들로 태어난 것을 명백히 가르치고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아담의 후손으로서 죄책과 수치 가운데 태어나며, 죄와 부정 가운데 잉태하였으며, 날 때부터 '죄와 허물로 죽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실상 날 때부터 우리는 모두 넓은 길 위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주님은 왜 이런 표현을 사용하셨습니까?
주님은 너희는 너희가 태어난 세속적 삶에 영원히 몸을 맡기고자 하느냐? 아니면 그것을 떠나 나의 삶으로 들어 오겠느냐?라고 물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려면 우리 모두 거듭나야 하며,
새 성품이 필요하며, 우리는 모두 이 세상의 자녀요 사탄의 자녀라고 가르치는 성경의 명백한 가르침과 배치되는 교훈은 아닙니다. 우리 주님은 이것을 가르치고 계신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서의 가르침이요, 서신서들의 교훈입니다.
'육에 속한 사람(자연인)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고전 2:14).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롬 8:7). 그러므로 좁은 길과도 원수가 되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이 그에게는 어리석은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좁은 길로 들어가려고 선택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내가 '복'이 있는 것은 내가 나 자신을 '심령이 가난하게'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 아니라 내 속에 성령님의 사역의 결과로 심령이 가난해질 때 참으로 복된 것입니다.
기독교인의 삶을 살지 못하는 것은 우리가 넓은 길에 있음을 증명하는가?라고 말입니다.
우리는 협착하고 좁은 길의 성격을 고찰하면서 시간을 보낸 바 있습니다. 산상설교의 어디서나 기독교인의 삶의 모습을 분명히 보았습니다.
마지막 문제는 다음과 같습니다.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