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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골산 봉서방 원문보기 글쓴이: 봉서방.
예배란 무엇인가?
Ⅰ. 이끄는 말
Ⅱ. 예배란 말의 뜻
Ⅲ. 예배에 대한 일반적인 생각
Ⅳ. 구약시대의 예배
Ⅴ. 신약시대의 예배
Ⅵ. 맺는 말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롬12:1-
Ⅰ. 이끄는 말
성도들의 생활에 있어서 예배행위는 매우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 하나님께 대한 예배는 성도의 행동으로 나타나는 외적인 자세라고 할 수가 있겠다. 그러므로 성도의 하나님께 대한 예배는 신자 스스로가 내면에 가지고 있는 하나님께 대한 신앙의 표현인 것이다.
따라서 예배는 신앙을 전제하고, 신앙은 예배를 수반한다. 그러므로 건전한 신앙은 건전한 예배 행위를 수반하며 불건전한 신앙은 불건전한 예배 행위를 수반하게 된다.
일반적인 무속종교들도 각각 제 나름대로의 예배 행위들을 가지고 있다. 섬기는 대상이 각각 다르기 때문에 예배의 형태도 모두 각각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천지와 만물을 지으신 한 하나님을 신앙한다고 하는 기독교의 예배형태도 교파마다 또는 교회마다 다양함을 볼 수 있다. 이를테면 시간과 공간, 그리고 형태 등을 거룩하게 구별하여 엄숙하고 경건한 자세로 시종일관 변조된 특유의 목소리를 가진 사회와 설교자의 진행에 의하여 예배가 진행되는가 하면, 이와는 정반대로 밤낮없이 산에서나 들에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거의 광란에 가까운 자세로 개그맨과 비슷한 사회 및 설교자의 진행에 의하여 드려지는 예배도 있다. 그런가 하면 교회 예배모범에 의한 정규 예배 시에는 전자와 같이 엄숙하고 경건하게 드리지만 정규 예배가 아닌 소위 집회 시에는 후자와 같이 광란에 가까운 자세로 예배를 드리는 경우도 있는 것이다.
이상과 같은 예배 형태의 혼란은 기독교 신앙의 혼란에서 왔으며, 신앙의 혼란은 신학의 혼란에서 기인된 것이다. 신학의 혼란은 신앙적 무지를 가져오고, 신앙적인 무지는 형식주의적 예배 행위를 낳게 된다. 그러므로 신앙적인 무지의 비례만큼 형식주의적 예배 행위가 나타나는 것이다. 하나님께 대한 예배는 신자의 내면에 이루어진 신앙의 표현이기 때문에 형식주의적 예배가 되어서는 안된다.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가 형식화 되어간다는 것은 외식적인 예배가 되어져 간다는 말이다. 신앙은 외식이 아니라 중심에 있는 실재이다.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의 내적 의미의 중요성을 상실한 채 형식화 되어 외식적인 예배가 되어 진다면, 이것은 신자 중심에 있는 신앙적 타락을 의미하는 것이다(마23:25~28).
따라서 예배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무리는 아니다. 건전한 예배 행위가 없는 신앙은 죽은 신앙과도 같은 것인데 그렇다면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예배란 무엇인가?
Ⅱ. 예배란 말의 뜻
구약이나 신약성경에서 예배라는 말의 뜻은 매우 넓은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구약성경에서는 예배라는 말이 제사라는 의미로 이해되면서 히브리어로 ‘자바’라는 용어를 쓰고 있으며 그 뜻은 ‘제사 드렸다’ 또는 ‘도살했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조금 의미를 달리 하면서 ‘아바드’라는 단어를 사용하기도 하는데 그 뜻은 ‘일했다’, ‘봉사했다’, ‘경작했다’ 등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와 비슷한 뜻을 가지고 있는 단어로는 ‘샤라트’라는 말이 있는데 그 뜻은 ‘봉사했다’, ‘섬겼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 외에도 표현상 여러 가지 용어들이 있기는 하지만 이상에서 밝힌 것들은 비교적 예배라는 말의 뜻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단어들이라 할 수 있다.
신약성경에서는 예배라는말이 매우 다양하게 표현되고 있다, 그중에 헬라어로 ‘고누페테오’라는 뜻인데, 그 뜻은 ‘무릎을 꿇다’라는 의미로 사용이 되고 있다. 그래서 하나님께 기도할 때나 주님께 복종할 때 취하는 자세로 사용되기도 하고 일반적으로 높은 자들 앞에서 낮은 자들이 취하는 자세를 나타낼 때에 사용된다.
다음은 헬라어로 ‘프로스쿠네인’이라는 말인데, 이 용어는 ‘부복하다, 경의를 표하다’라는 의미를 표현하는 것으로 ‘예배’라는 뜻과 가장 근접한 보편적 용어로 이해된다. 다른 하나는 헬라어로 ‘라트류오’라는 용어인데 이것은 조금 의미를 달리 해서 ‘봉사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물론 이 용어가 일반적으로 봉사한다는 의미로도 사용되지만 신에게 봉사한다는 종교적 의미로도 사용된다.
이상에서 살펴본 대로 구약이나 신약성경에서 예배라는 의미를 가진 단어들의 뜻을 종합적으로 분석해 보면 예배라는 말이 ‘희생과 봉사’라는 의미를 담고 있으며, 신약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로 ‘희생과 봉사’라는 뜻을 나타내어 주고 있다. 물론, 표현상의 용어들은 다양하고 서로 다르다 할지라도 그 용어들이 담고 있는 깊은 뜻은 모두가 ‘희생과 봉사’라는 포괄적인 의미 속에 담겨져 있다.
Ⅲ. 예배에 대한 일반적인 생각
일반적으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예배에 대하여 비교적 단순하게 생각하고 있다. 아주 단순하게는 예수를 믿는 신자가 주일 아침 11시에 예배당에 나아가 정해진 프로그램에 의하여 묵도하고 시편 교독을 한 후, 신앙고백을 하고 찬송과 기도, 그리고 목사님의 설교를 들은 후에 목사님의 축복 기도를 받고 헤어져 집으로 돌아오는 것이 예배라고 생각한다.
그런가 하면, 조금은 구체적으로 구약시대의 성도들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비둘기나 양, 또는 송아지를 제물로 삼아 레위 지파에서 나온 인간 제사장이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가 구약시대의 예배였다. 그런데 신약시대의 성도들은 구약시대와는 달리 예배당을 성전으로 삼고 연보를 제물로 삼아 목사가 제사장이 되어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가 신약시대의 제사(예배)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뿐만 아니라 좀더 구체적으로 예배에 대하여 생각하는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인을 구원하여 주시려고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구약의 의식법, 즉 제사법을 다 이루어 주셨기 때문에 신약시대 성도들은 새로운 방법의 예배가 있을 뿐이라고 생각한다. 신약시대 교회는 예배의 4대 요소를 말씀, 기도, 찬송, 헌금이라고 하여 말씀을 중심으로 한 기도와 찬송 및 헌금 순서가 잘 갖추어진 의식이 예배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여기에 성례 즉 세례와 성찬을 곁들여 생각하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혹자들은 예배에 대하여 생각하기를 신자가 하나님께 정성을 드리는 의식이라고 아주 단순하게 생각하기도 한다.
앞에서 언급한 여러 가지의 예배에 대한 일반적인 생각들을 종합해 본다면 대개가 예배를 의식이나 형식적인 측면에서 생각하고 이해한다는 것이 공통점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와 같은 예배에 대한 일반적인 생각은 의식화 되고 형식화 된 예배들이 만들어 낸 결과일 것이다.
신비주의자들의 예배는 또 다른 면이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이들의 예배에 대한 일반적인 생각은 예배시간이라고 하는 한정된 시간 안에서 하나님의 영, 즉 성령이 신자에게 특별히 임하여 깊은 교제를 가지는 소위 신령한 행위라고 하며 영적예배라고 하여 예언이나 방언 또는 계시와 환상 등을 강조하는 특이한 현상을 예배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혹자들은 예배란 신자가 하나님께 문안을 드리는 의식이라고 아주 단순하게 생각하는 자들도 있다. 이같은 자들은 신비주의자들과 또는 이들과 정반대의 생각을 가지는 인본주의자들이다.
이상에서 예배에 대한 여러 가지 형태의 일반적인 생각들을 살펴보았다. 결과는 예배에 대한 일반적인 생각들이 너무도 흐트러져 있다는 것이다. 예배가 하나님께 대한 신자의 신앙적 태도라고 한다면 예배에 대한 생각이 복잡하게 흐트러져서는 안되는 것이다. 하나님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일진대 신자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 역시도 하나일 수 밖에 없지 않는가?
창세 이후 인간이 창조주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제사)의 형태는 시대에 따라 많은 변천 과정을 거쳐 왔다. 그러나 비록 예배의 형태는 바뀌었다 할지라도 그 예배의 정신과 의미는 예나 오늘이나 전혀 변함없이 하나님께 드려지고 있으며, 앞으로도 드려질 것이고, 뿐만 아니라 영원토록 드려지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구약이나 신약성경에서 가르쳐주고 있는 성경적인 예배란 도대체 무엇일까?
Ⅳ. 구약시대의 예배
구약시대에 있어서는 창조주 하나님께 누가, 어디서, 무엇으로 예배(제사)를 드렸을까? 그리고 그 예배의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
구약시대에는 예배의 형태가 시대에 따라 점진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이것은 성경신학적 측면에서 본다면 계시의 점진성의 원리에 의한 결과이다. 그 시대를 분류하면, 고대 족장시대(창) 가형성시대(출~삿) 그리고 역대 왕정시대(룻~에) 등으로 나누어지는데 그 시대마다 예배의 형태가 조금씩 달라진다.
첫째는 고대 족장시대의 예배이다
고대 족장시대는 창세 이후부터 모세 이전시대까지를 말하는데, 이 시대에 많은 족장들이 하나님께 예배를 드린 기록들이 구약 창세기에 주로 소개되어 있다. 예배를 드린 이 시대의 족장들은 아담의 아들 가인과 아벨, 노아, 아브라함, 이삭, 야곱 등을 들 수 있는데 이들 족장들은 주로 돌로 제단을 쌓고 양이나 새와 같은 짐승을 잡아 제물로 드렸다. 특히 가인과 아벨의 경우는 하나님께서 가인이 자기가 농사한 곡식으로 제물을 삼아 드린 제사는 열납하지 아니하시고 아벨이 자신이 기르는 양을 잡아 드린 제사는 열납하셨다(창4:1~5). 그 이유는 제사라는 것이 희생, 즉 도살(죽이는 것)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죽이는 것, 다시 말해서 피흘림이 없는 가인의 제사는 하나님께서 열납치 아니하시고 피흘림이 있는 아벨의 제사는 하나님께서 열납하신 것이다.
노아의 경우에 있어서도 홍수심판 후에 노아가 단을 쌓고 정결한 짐승이나 새 중에서 제물을 취하여 번제로 드렸을 때에 하나님께서 그 향기를 흠향하셨다(창8:20~22).
이스라엘의 열조인 아브라함도 하나님 여호와께서 언약을 세우실 때에 삼년 된 암소와 암염소 그리고 수양과 산비둘기와 집비둘기 새끼를 취하여 그 중간을 쪼개어 제사를 하나님께 드렸다(창15:8~11). 그리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고 하셨을 때,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지시하신 곳에 단을 쌓고 이삭을 대신하여 하나님께서 준비해 놓으신 수양을 잡아 번제를 드리기도 했다(창22:1~13).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도 브엘세바에서 하나님께로부터 복을 받을 때, 그곳에 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창26:23~25)
. 이삭의 아들 야곱 역시 하나님께로부터 복을 받은 후, 돌 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전제물을 붓고 그 위에 기름을 부어 제사를 드리고 그곳 이름을 벧엘이라고 불렀다(창35:9~15).
이들 족장들의 예배(제사)는 대부분 족장 자신들이 돌로 제단을 만들고 그 위에 짐승을 잡아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린 것이 특징으로 나타난다.
둘째는 국가 형성시대의 예배이다
이스라엘 국가가 형성되는 시대는 모세시대로부터 다윗이 왕국을 세워 다스리던 시대까지를 말한다.
이 시대에는 이스라엘의 영도자 모세와 아론의 자손들을 세워 기름을 바르고 제사장을 삼아 제사하게 하셨다(민3:1~4). 기타 레위 자손들은 아론과 그 아들들에게 주어 이스라엘 자손들을 대신하여 성막에서 봉사하게 하였다.
모세는 하나님 여호와께서 명하신 대로 성막과 회막을 세우고 증거궤를 비롯한 모든 기구들을 거룩하게 한 후, 성막문 앞의 번제단에서 번제와 소제를 드렸다(출40:1~33). 모세가 드린 번제물은 소나 양이나 새이며 소제물은 고운 가루를 태워 드리는 것이었다. 이렇게 국가 형성시대에 드린 예배(제사) 가운데 하나는 모세가 성막에서 짐승을 잡아 드리는 제사였다.
물론 모세의 형 아론과 그의 아들들도 제사장이 되어 성막에서 짐승을 잡아 제사를 드리는 자들이었다(출28:1~3/대상23:13~14).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땅에 들어갔을 때에나 그 후 사사시대에도 마찬가지로 제사장들에 의하여 짐승을 잡아 성막에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시대였다. 사사시대 말기에는 언약궤가 벧엘에 있을 때에 아론의 손자 엘르아살의 아들 비느하스가 제사장이 되어 번제와 화목제를 드렸다(삿20:26~28). 엘리와 사무엘도 역시 제사장이 되어 성막에서 짐승을 잡아 제사를 드렸다. 엘리 제사장 시대에 백성들이 제사를 드리게 되면 엘리 제사장의 아들들이 제물을 먼저 억지로 취하므로 여호와의 제사를 멸시한 죄로 인하여 엘리 가문이 망했다. 사무엘도 블레셋이 이스라엘을 치러 올라왔을 때에 젖먹는 어린양을 취하여 온전한 번제를 드렸는데 여호와께서 응답하셨다(삼상7:7~9). 그런가하면 제사장도 아닌 사울왕이 블레셋과 전쟁을 할 때에 급하다는 핑계로 번제와 화목제를 드렸다가 사무엘로부터 책망과 저주를 받았다(삼상13:5~15). 그것도 제사장이 아닌 사울왕이 제사를 드렸기 때문이다. 그 후, 다윗왕 시대 역시 하나님의 언약궤가 휘장 가운데 있었고(삼하7:1~2) 제사장들은 그 곳에서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를 드렸다.
이상과 같이 모세시대로부터 다윗이 왕국을 세워 다스리던 이스라엘 국가 형성시대의 예배(제사)는 아무나 어디서나 제사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제사장만이 하나님의 언약궤가 있는 성막에서 드려야 하는 것이 이 시대의 예배의 특징으로 나타난다.
셋째는 역대 왕정시대의 예배이다
이스라엘 역대 왕정시대는 다윗의 아들 솔로몬왕 시대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삼일 후 부활하시기 이전까지를 말한다.
이 시대 초기에는 하나님 여호와께서 다윗왕에게 약속하신 대로 솔로몬왕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전을 건축하게 해서(왕상5:1~6:38) 제사장들로 하여금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하도록 하셨다. 솔로몬왕은 성전 공사를 마치고 언약궤를 옮긴 다음 많은 수의 소와 양을 제물로 삼아 제사장들로 하여금 번제와 화목제를 드려 하나님의 전의 낙성식을 행했다(대하7:1~7).
그 후 이스라엘 국가가 갈라진 다음, 남쪽 유다 왕 아비야가 북쪽 이스라엘 여로보암으로 더불어 싸우려고 군사를 예비하고서 유다 왕 아비야가 이스라엘 왕 여로보암에게 레위 사람을 쫓아내고 이방 풍속을 따라 제사장을 삼은 일을 책망했다. 그리고 남쪽 유다는 아론의 자손과 레위 사람이 제사장이 되어 조석으로 하나님 여호와께 성전에서 제사 드리는 것을 밝히면서 하나님 여호와께서 남쪽 유다와 함께 하시기 때문에 북쪽 이스라엘이 형통치 못할 것을 예고했다(대하13:1~12).
이 무렵 북쪽 이스라엘 왕 여로보암은 백성이 남쪽 유다 왕 르호보암에게 돌아가는 것을 막기 위하여 금송아지 둘을 만들어 하나는 벧엘에 두고 하나는 단에 두도록 했다. 그리고 신당을 짓고 보통 백성으로 제사장을 삼아 금송아지에게 제사하도록 한 일이 있다(왕상12:25~33). 이러한 행위의 제사는 합당하지 못한 제사 행위였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람으로부터 책망과 진노를 산 것이다(왕상13:1~10).
결국 북쪽 이스라엘은 앗수르에게 멸망을 당하게 되는데 그 무렵 남쪽 유다에는 히스기야왕이 즉위하여 성전을 수리하고 제사장들과 레위 자손들에게 명하여 제사를 회복하게 하였다. 그 결과 남쪽 유다 백성들은 히스기야왕과 더불어 기뻐했으며(대하29:1~36) 나라도 번영하게 되었다. 그 후 남쪽 유다가 바벨론에 사로잡혀 70년간 포로 생활을 마치고 파사 왕 고레스에 의하여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되었을 때에 유다 백성들이 온갖 방해 속에서도 무너진 성전을 재건하고(에스라6:1~18) 제사장들과 레위 자손들이 귀환해서 하나님 여호와께 번제를 드렸다(스8:1~36).
예수님의 경우는 십자가에 죽으심을 고비로 예배(제사)에 대한 내용이 달라진다. 예수께서 처음 출생하여 결례의 날이 되었을 때, 율법에 쓴 바대로 아기 예수를 주께 드리고 비둘기 한쌍이나 혹 어린 반구 둘로 제사하려고 예루살렘에 올라가셨다(눅2:22~24). 열두 살 되던 때에도 예수께서 부모를 따라 유월절 절기를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에 가신 일이 있다(눅2:41~43). 삼십 세가 되어 공생애에 들어섰을 때에도 절기 때마다 예루살렘에 가셔서 유월절을 잡수시기도 하셨다(눅22:14~23).
이상과 같이 솔로몬왕 시대로부터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기 전까지의 역대 왕정시대의 예배(제사)는 제사장들만이 솔로몬이 지은 성전에서 짐승을 잡아 제물로 드려야 하는 것이 특징으로 나타난다.
구약시대의 예배를 결론적으로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고대 족장시대의 예배는 짐승을 제물로 해서 족장들이 돌단을 쌓고 제사를 드렸으며, 다음, 국가 형성시대의 예배는 짐승을 제물로 해서 제사장들이 성전에서 제사를 드렸다. 알고 보면, 짐승을 제물로 드린 것은 세 시대가 다 같으나 제사를 드리는 자는 고대 족장시대만 다르고 제사를 드리는 장소는 세 시대 모두 다르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구약시대의 예배(제사) 형태는 시기에 따라 변화가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Ⅴ. 신약시대의 예배
신약시대에 있어서 누가, 어디서, 무엇으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가? 그리고 그 예배의 결과는 어떻게 되는가?
신약시대에 들어와서는 예배의 형테가 구약시대의 의식적인 예배와는 다른 것으로 나타난다. 그 중에서도 예수께서 드리신 예배(제사)와 사도들이 가르친 예배는 신약시대의 하나님께 드리는 대표적인 예배로 소개된다.
첫째는 예수께서 드리신 예배이다
구약시대의 예배는 예수께서 드리실 참되고 신령한 예배의 모형과 그림자였다. 구약시대에 드렸던 세 가지 중요한 요소가 필요했는데, 그것은 제물과 제사와 성전이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드리실 참되고 신령한 예배에도 이 세 가지의 요소가 꼭 구비되어 드려져야 한다. 그런데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께서 드리신 영원하고 참된 신령한 예배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설명해 준다. 히브리서 기자는 말하기를 그리스도께서 대제사장으로 오셔서 손으로 짓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에서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어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다(히9:11~12)고 했다. 예수께서는 스스로가 영원한 대제사장이 되셔서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자기 피로 영원한 예배(제사)를 드렸다는 뜻이다. 이와 같이 예수께서 드리신 예배(제사)에도 세 가지 중요한 요소가 다 구비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예수께서 세샂ㅇ에 오신 이유가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고 오셨다고 했다(마20:22). 세례요한도 예수께 대하여 증거하기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했다요1:29). 이것은 예수가 하나님께 드려질 제물임을 증거하는 내용이다. 그리고 예수께서 자신의 몸이 성전이 되심도 밝혀 주셨다(요2:19~21). 이에 대하여 서도 요한도 밧모섬에서 새 하늘과 새 땅을 볼 때, 어린양이 성전이 되심을 보고 증거하였다(계21:22).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께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르는 영원한 대제사장이심을 증거하였다(히6:20).
결국 예수께서 하나님께 드리신 예배는 예수 자신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제물이 되시고, 삼 일 만에 부활하심으로 성전이 되시며, 하늘로 승천하심으로 대제사장이 되셔서 영원한 제사 즉 예배로 드리신 것이다.
둘째는 사도 및 성도들의 예배이다
신약시대 사도 및 성도들의 예배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드리신 영원한 예배를 기초로 삼는다. 그것은 사도 및 성도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 지체를 이루는 교회가 예배의 주체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대로 포도나무 가지가 포도나무를 떠나서는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 같이 사도 및 성도들은 교회의 머리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것이다(요15:4~5). 따라서 사도 및 성도들의 예배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예배를 믿음으로써 그 의미를 부여 받는다. 즉 머리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에 따라 그의 지체가 되는 사도 및 성도들의 예배가 하나님께 드려진다는 뜻이다.
바울은 일찍이 그가 쓴 로마서에서 신약교회가 하나님께 드려야 할 예배를 밝혀 준 바가 있다. 그는 신약교회가 하나님께 드려야 할 예배를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고 하면서 이것을 영적 예배라고 하였다(롬12:1). 그런데 사도 바울은 산 제사로서의 영적 예배의 전제를 그 앞서 밝혀 준다. 그것은 돌감람나무 가지를 참감람나무 가지에 접붙임을 하듯이 예수께서 타락한 죄인을 구속하셔서 예수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게 하신 일이다. 바울이 이러한 사도 및 성도들의 예배의 대 전제를 밝히고 나서 산 제사로서의 영적 예배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을 언급하였다.
사도 바울이 말한 영적 예배에 대한 구체적인 세 가지 원리를 간단히 요약하면, 먼저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일이고, 다음은 믿음의 분량대로 생각하는 일이며, 그 다음은 은혜대로 받은 은사를 따라 봉사하는 삶이다(롬12:1~13). 즉 영적 예배 곧 산 제사란 예수 그리스도의 지체로서의 삶을 뜻하는데 여기에는 깊은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지체로서의 삶은 그의 죽으심과 살으심에 동참하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성도가 예수 그리스도의 지체로서 살아 간다는 뜻은 그와 함께 옛 사람 즉 육체의 소욕을 죽이고 새 사람, 즉 영의 소욕은 살리는 삶을 뜻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영적 예배 곧 제사는 옛 사람은 죽이고 새 사람은 살리는 삶, 즉 육체의 소욕은 죽이고 영의 소욕은 살리는 삶을 의미한다. 따라서 신약시대 사도 및 성도들의 예배는 그리스도의 지체로서의 삶을 말한다. 이것은 물론 넓은 의미로서의 예배를 가리키는 말이다.
바울은 영적 예배인 예수 그리스도의 지체로서의 삶에 대한 구체적인 방법을 사랑의 행위에 두라고 한다. 그리고 그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다고 하면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사랑으로 믿음이 강한 자가 믿음이 연약한 자들을 용납하고 짐을 지며 덕을 세우라고 한다. 즉 머리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지체들로서 건강한 지체가 연약한 지체를 사랑하는 것이 덕을 세우는 일이라는 것이다(롬12:9~15:4 참고).
그리고 이어서 바울은 영적 예배의 궁극적인 목적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데 둔다. 즉 영적 예배의 방법으로서 사랑의 덕을 세우는 일은 모두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함이라는 것이다(롬15:5~13).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것은 성도들의 하나님 사랑에 대한 표현이다. 따라서 영적 예배의 방법이 지체(이웃) 사랑이라면 목적은 하나님 사랑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위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자기 몸같이 사랑하는 삶 자체가 신약교회 사도 및 성도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산 제사 즉 영적 예배이다.
그렇다면 신약교회가 매 주일 아침 성도들이 예배당에 모여 목사의 사회로 진행되는 예배는 무엇인가? 그것은 좁은 의미의 예배로서 앞에서 말한 영적 예배의 세 가지 원리 가운데 하나인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는 원리를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강론하는 말씀 중심의 예배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주일 아침에 드리는 좁은 의미의 예배를 통하여 넓은 의미의 예배인 영적 예배의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즉 성도들이 목사의 성경강론을 듣고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여 그 뜻을 구하는 기도를 드리고,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며 믿음이 약한자들의 짐을 담당하기 위하여 연보하는 순서 등으로 드려지는 좁은 의미의 주일 아침 예배를 통하여 넓은 의미의 영적 예배(산 제사)로서, 위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하는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좁은 의미의 주일 아침 예배는 넓은 의미의 영적 예배에서 따로 분리되는 것이 아니라 포함이 되는 것이며 영적 예배의 한 부분인 것이다.
Ⅵ. 맺는 말
결론적으로, 예배란 천국 생활의 모형이다. 구약시대의 예배(제사)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드리신 영원한 제사의 모형과 그림자였다면, 신약교회의 사도 및 성도들의 지상에서의 영적 예배는 장차 천국에 가서 만왕의 왕 되신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영원 무궁토록 하나님께 영광과 찬송을 드릴 천국 생활(영원한 예배)의 모습이다(계19: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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