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아내를 떠나보낸 지 삼 년이 되는 해였다.
관공서에서 평생을 성실하게 일하다 명예퇴직을 하고, 정년의 무게를 내려놓은 뒤 얻은 것은 홀가분함이 아니라 지독한 공허함이었다. 아내가 품고 있던 온기가 사라진 거실은 늘 서늘했고, 아침에 눈을 떠도 하루를 시작해야 할 이유를 찾기가 쉽지 않았다. 자식들은 각자의 가정을 꾸려 바쁘게 살아가고 있었기에, 늙은 아비의 쓸쓸함을 매일 채워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주말마다 찾아오는 무기력증을 견디다 못해, 나는 주말 등산 모임인 '청운산악회'에 가입했다. 산을 오르다 보면 땀과 함께 묵은 감정도 흘러내릴 것이라 기대했다. 하지만 산악회는 내가 생각했던 단순한 친목 모임 그 이상이었다. 그곳에는 거대한 거미줄처럼 얽혀 있는 사람들 간의 관계와 보이지 않는 권력 구조가 있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지화자'가 있었다.
지화자는 50대 중반의 나이가 믿기지 않을 만큼 화려한 외모와 세련된 매력을 뽐내는 여성이었다. 늘 산악회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켰고, 누구나 그녀 주변으로 모여들었다. 회원들은 농담 삼아, 그러나 진심을 담아 그녀를 '여왕개미'라 불렀다.
처음에는 나 역시 그녀를 멀리서 바라볼 뿐이었다. 하지만 사람 마음이란 참으로 간교해서, 외로움이 깊을수록 따뜻한 손길 하나에 쉽게 흔들리기 마련이다. 사건은 어느 토요일, 산행 중 우연히 발생했다. 일행보다 발걸음이 느려 뒤처진 나에게 지화자가 다가와 보조를 맞춰주었다.
"박 선생님, 오늘 힘드시죠? 앞사람 맞추느라 무리하지 마세요."
그녀의 목소리는 나지막하고 다정했다. 숨이 차오르던 내게 건넨 생수 한 병과 따뜻한 위로는 3년 동안 누구에게도 받아보지 못한 종류의 온기였다. 남은 산행 내내 우리는 나란히 걸으며 깊은 대화를 나누었다. 아내를 잃은 슬픔, 은퇴 후의 막막함, 그리고 겉으로는 평온해 보이지만 속은 텅 비어버린 내 삶의 고백들을 그녀는 단 한 번도 끊지 않고 고개를 끄덕이며 들어주었다.
그날 이후, 지화자는 내 일상에 스며들었다. 주말 등산 외에도 평일에 안부를 묻는 문자가 날아왔고, 가끔은 차를 마시거나 저녁을 먹는 만남으로 이어졌다. 그녀는 내가 살아온 세월과 인격을 존중해 주는 듯했고, 내 외로움을 정확히 꿰뚫어 보며 빈틈을 채워주었다. 내 마음의 성벽이 무너지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나 같은 늙은이에게도 이렇게 마음을 알아주는 사람이 생기는구나.' 하는 착각 속에 나는 그녀를 깊이 신뢰하게 되었다.
그러나 평화는 오래가지 않았다. 어느 날부터인가 산악회 안에서 이상한 기류가 감지되었다. 지화자와 단둘이 친밀하게 지내던 중장년 남성 회원들이 하나둘씩 모임에서 소리소문없이 사라지기 시작한 것이다. 처음에는 개인적인 사정이 있겠거니 대수롭지 않게 여겼지만, 사라진 사람이 정혜훈 씨였고, 이어 최봉준 씨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서늘한 불안감이 밀려왔다. 그들은 하나같이 사회적 지위가 있고 나름대로 은퇴 자금을 쥐고 있던 이들이었다.
'무언가 이상하다.'
직감적으로 위험을 느낀 나는 전직 공무원으로서의 촉을 세우고, 음지에 숨겨진 진실을 파헤치기 시작했다. 산악회 주변을 수소문하고 기억을 더듬어, 연락이 끊긴 전직 회원들의 지인을 통해 겨우 정혜훈 씨와 연락이 닿았다.
평일에 찾아간 작은 카페에서 만난 정혜훈 씨의 얼굴은 수척했다. 그가 들려준 이야기는 내 상상을 완전히 뛰어넘는 충격 그 자체였다.
"박 선생님, 조심하십시오. 그 여자는 악마입니다."
정 씨의 떨리는 음성이 카페 공기를 무겁게 내리눌렀다. 지화자와 깊은 친분을 쌓게 된 후, 그녀는 자연스럽게 자신의 지인이 운영하는 고수익 비상장 주식 및 단기 펀드를 소개했다고 했다. 처음에는 반신반의했지만, 지화자가 보여준 친절과 확신에 찬 태도에 속아 소액을 투자해 보았다는 것이다. 놀랍게도 불과 한 달도 안 되어 원금과 함께 쏠쏠한 배당금이 통장으로 입금되었다.
그것이 바로 그들이 파놓은 덫이었다.
눈앞에서 돈이 불어나는 것을 본 정 씨는 경계심을 완전히 풀었고, 퇴직금과 모아둔 노후 자금까지 탈탈 털어 수천만 원에 달하는 큰돈을 투자했다. 하지만 그 거액이 송금된 직후, 거짓말처럼 지화자의 태도가 돌변했다. 연락은 점차 뜸해졌고, 급기야 수신 거절 상태가 되었다. 투자처라고 알려준 곳은 페이퍼컴퍼니에 불과했고, 담당자는 잠적해 버렸다. 정 씨가 지화자에게 따지자, 그녀는 "저도 그 사람한테 속았어요! 저 역시 수억 원을 물린 피해자라고요!"라며 도리어 적반하장으로 화를 내며 연락을 끊어버렸다는 것이다.
최봉준 씨의 사정도 단테의 지옥도와 다르지 않았다. 그들은 외로움을 무기 삼아 노년층의 마지막 남은 재산을 노리는 전문 사기꾼들이었다. 산악회는 그들의 거대한 사냥터였고, 지화자는 그 무리의 매혹적인 '여왕개미'이자 미끼였던 것이다.
이야기를 듣고 나오는 길, 머리가 멍하고 등골이 오싹했다. 만약 내가 조금만 더 늦었거나, 그녀의 따뜻한 위로에 취해 통장 비밀번호나 자산 이야기를 먼저 꺼냈다면, 내 말년 역시 정 씨와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3년 동안 홀로 버텨온 세월의 무게가, 그리고 그 허전함을 채우려던 나의 어리석음이 치밀한 범죄의 표적이 되었다는 사실에 분노와 수치심이 치밀어 올랐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자식들에게 전화해서 털어놓을까도 생각했지만, 평생을 반듯하게 살아온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혼자 끙끙 앓지 마라.' 내면에서 울린 목소리와 함께, 나는 현명하게 대처하기로 마음먹었다. 사기꾼들에게 공무원 출신의 저력이 무엇인지 똑똑히 보여주어야 했다.
나는 곧바로 지인을 통해 금융 및 형사 사건에 능통한 전문 변호사를 찾아갔다. 지금까지 지화자가 나에게 보낸 문자 메시지, 함께 나눈 대화 내용, 그리고 그녀가 슬쩍 흘렸던 투자 관련 명함과 서류 쪼가리 하나까지 모두 수집해 법률 자문을 구했다. 변호사는 내 치밀한 증거 수집을 칭찬하며, 당황하거나 화를 내지 말고 차분하게 덫을 역으로 이용하라고 조언했다.
며칠 뒤, 지화자로부터 평소와 다름없는 달콤한 목소리의 전화가 걸려왔다.
"박 선생님, 주말에 산행 끝나고 지난번에 말씀드린 그 확실한 투자 건, 기회가 딱 한 구좌 남았는데 어떠세요? 이번에 들어가면 정말 후회 안 하실 거예요."
나는 속으로 이를 악물었지만, 목소리만큼은 최대한 평온하고 부드럽게 유지했다.
"그래요? 화자 씨가 그렇게까지 권유하니, 이번 주말에 만나서 자세한 서류를 보고 결정합시다. 큰돈이 움직이는 거라 직접 만나서 이야기해야지요."
전화 너머로 지화자의 목소리에 환희와 안도가 묻어났다. 그녀는 내가 완전히 넘어왔다고 확신한 모양이었다.
약속된 토요일 오후, 등산복 차림이 아닌 단정한 정장 차림으로 약속 장소인 조용한 카페에 나갔다. 지화자는 평소처럼 화사한 미소를 지으며 나를 맞이했고, 가방에서 화려한 수익률 그래프가 담긴 투자 제안서를 꺼내 내밀었다.
"자, 이거 보세요. 다른 사람들은 하고 싶어도 못 들어가는 물건이에요."
나는 그녀가 건네는 서류를 받지 않고, 가만히 그녀의 눈을 응시했다. 그리고 내 가방에서 두툼한 서류 봉투를 꺼내 탁자 위에 묵직하게 올려놓았다.
"지화자 씨, 그게 뭔지 아십니까?"
지화자는 웃음기를 거두고 의아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이 안에는 그동안 당신이 이 산악회에서 정혜훈 씨, 최봉준 씨를 비롯한 선량한 사람들에게 어떤 수법으로 접근했고, 어떻게 돈을 가로채 잠적했는지에 대한 모든 증거 자료가 들어 있습니다. 사기죄 및 유사수신행위법 위반으로 이미 변호사 검토를 마쳤고, 수사 기관에 제출하기 직전의 서류들입니다."
지화자의 얼굴에서 혈색이 순식간에 빠져나갔다. 화려한 화장이 무색하게 그녀의 입술이 미세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박, 박 선생님... 이게 무슨 말씀이세요? 오해가 있으신..."
"오해는 무슨 오해입니까."
나는 목소리를 낮추었지만, 그 속에는 평생 공직에 몸담았던 이가 지닌 서슬 퍼런 단호함이 담겨 있었다.
"당신이 외로윤 노인들의 마음을 파고들어 주머니를 털어가는 악질적인 사기꾼이라는 걸 내가 모를 줄 알았습니까? 정혜훈 씨가 지금 어떻게 지내는지 아십니까? 경찰서에서 당신 얼굴을 다시 보게 될 날이 그리 멀지 않습니다. 지금 당장 이 손을 떼지 않으면, 나는 내 남은 인생을 걸고 당신을 법의 심판대에 세울 겁니다."
더 이상 그녀의 입에서는 어떤 변명도 흘러나오지 않았다. 그녀는 창백해진 얼굴로 내 눈을 피한 채 덜덜 떨기만 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코트 단추를 채우며 마지막 경고를 남겼다.
"다시는 내 눈앞에 나타나지 마십시오. 산악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다음 번에 내 눈에 띄면, 그때는 말이 아니라 경찰서 영장이 될 겁니다."
그날 이후, 지화자는 청운산악회에 두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모임 사람들은 그녀가 갑자기 개인적인 사정으로 떠났다고 수군거렸지만, 나는 그 뒤로 침묵을 지킨 채 다른 피해자들과 함께 정식으로 수사 기관에 증인과 참고인으로 협조했다. 비록 잃어버린 돈을 전부 되찾기에는 험난한 과정이 남아 있었지만, 적어도 나 자신은 그 검은 늪에서 스스로 걸어 나올 수 있었다.
인간은 누구나 외로움을 느낀다. 특히 나처럼 황혼기에 접어든 이들에게 다가오는 따뜻한 온기는 거부하기 힘든 유혹이다. 하지만 세상에 원금이 보장되면서 무조건 높은 수익을 안겨주는 장미빛 환상은 존재하지 않는다.
집으로 돌아와 거울을 보았다. 거울 속의 나는 여전히 혼자였지만, 적어도 3년 전보다 단단해져 있었다. 허전한 마음을 채우려 타인의 친절에 쉽게 마음을 내어주었던 어리석음을 반성하며, 나는 창밖으로 멀어지는 주말의 노을을 조용히 바라보았다. 외로움은 누군가 채워주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다스려야 하는 인생의 무게임을 이제야 조금은 알 것 같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