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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50+ 시인학교 원문보기 글쓴이: 아파트학교
2024.07.26 오전 11:
그의 시조는 흘러간 옛 노래처럼 아득하지만 그 아득함이 종종 가장 모던한 시보다도 더 새롭게 느껴질 때가 있다. 가장 오랜 방식으로 새롭게 말하고자 하는 그의 시조는 우리가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흔히들 시조를 두고 ‘K-문학’이라고 한류(韓流)식 명명을 하지만 관심은 날로 식어가는 것 같다. 그래서 이 코너의 첫 번째 시집으로 김수환 시인의 시조집을 간략하게 소개하고자 한다.
그리움을 말하는 오랜 방식
―김수환 시집 『사람이 간다』 (시인동네, 2024)
김남호(시인, 문학평론가)
진주에 사는 김수환 시인이 지난 봄에 첫 시조집 『사람이 간다』를 상재했다. 아시다시피 2021년 4월 29일 국회 본회의에서 「문학진흥법」 일부가 통과되면서 시조가 시로부터 분리되면서 법적으로 독립된 장르가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많은 독자들은 이미 한물간 장르라고 거들떠보지도 않는 시조에 그는 오로지 목을 맨다. 그의 시조는 흘러간 옛 노래처럼 아득하지만 그 아득함이 종종 가장 모던한 시보다도 더 새롭게 느껴질 때가 있다. 가장 오랜 방식으로 새롭게 말하고자 하는 그의 시조는 우리가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흔히들 시조를 두고 ‘K-문학’이라고 한류(韓流)식 명명을 하지만 관심은 날로 식어가는 것 같다. 그래서 이 코너의 첫 번째 시집으로 김수환 시인의 시조집을 간략하게 소개하고자 한다.
김수환의 시를 떠받치고 있는 두 개의 기둥은 그리움과 아픔이다. 이 두 기둥은 시조라는 전통의 형식으로 주춧돌을 삼고, 시인의 DNA에 각인된 리듬으로 칸을 짓는다. 지붕은 “줄줄 새는 밤”(「돛대도 아니 달고」)으로 엮어서 이었다. 이렇게 세운 그의 집은 ‘저녁’이라는 ‘시간성’이 측면을 비추고, ‘뒤쪽’이라는 ‘방향성’이 후광으로 받치면서 윤곽이 드러나긴 하지만 흐릿하다. 이 흐릿함으로 인해 그의 시는 모호하지만, 화선지 위에 떨어뜨린 먹물처럼 한없이 번져나가는 여운이 있다. 그래서 그의 시는 실제보다 훨씬 멀리보이는 볼록거울의 효과를 거둔다. 그의 좋은 시편들에서 종종 느끼게 되는 막막함이나 아득함은 바로 이 효과에서 기인한다. 먼저 아프면서도 그리운 시편 하나.
촉석사거리 미소약국 계단 앞에 한 여자
손으로 얼굴 가리고
미동조차 않는다
쓰다 만
노을 한 구절
원망처럼 걸어두고
가녀린 손가락과
저 굽은 손바닥으로
아무리 가려도 숨길 수 없는 생의 자국
가다 만
굽이 굽이가
땅거미로 지워진다
다섯 시,
하루가 이미 결판이 난 시간
남강의 물결은 저리도 요동치는데
도시의
사구로 밀려
좌초한 피사체 하나
- 「가린다는 것」 전문
“촉석사거리”, “미소약국 계단 앞”이라는 구체적인 장소와 “하루해가 이미 결판이 난” “다섯 시”라는 구체적인 시간, “가녀린 손가락”과 “굽은 손바닥”으로 얼굴 가리고 있는 구체적인 인물이 만들어내는 장면은 매우 극적(劇的)인 이미지다. “아무리 가려도 숨길 수 없는 생의 자국”은 거칠고, “이미 결판이 난” 하루는 절망적이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여자”는 “쓰다 만/노을 한 구절”을 “원망처럼 걸어두고” “도시의/사구로 밀려/좌초”한 채 서 있다. 이런 구체적인 장소와 시간과 인물이 등장함에도 불구하고 시는 여전히 모호하다.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복잡한 속내를 숨기려 하지만 “가녀린 손가락”과 “굽은 손바닥”이 먼저 말하고 있는 탓에 이 은폐의 몸짓은 숨기고자 하는 것을 더욱 드러나게 할 뿐이다. 이 시는 “가린다는 것”의 불가능성을 드러내면서 시의 비극성을 더욱 고조시킨다. 가림으로써 드러나게 하고, 말하지 않음으로써 말하는 기법은 단순한 시작(詩作)의 기교가 아니다. 시인이 세상을 읽는 방식이자 세계를 비의(秘意)를 말하는 방식이다. 그리고 그가 그리움을 말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
이번 시집에서 가장 아픈 뒤쪽은 아마도 시인의 아버지일 것이다. 한때는 가장 든든한 배후였을 아버지가 치매를 앓으면서 처절한 뒤쪽의 모습을 보이기 때문이다.
목욕탕, 플라스틱 팔걸이의자 앞에
팔순 아비 몸을 씻는 육순 아들 분주하다
앙상한 생의 저녁에 멈칫대는 저 손길
황소바람 숭숭 뚫는 해지고 닳은 남루
굽은 기둥 서까래들, 힘 부치는 오두막
까무룩 잠기는 어둠 몇 겹이나 깊어졌나
뉘신지 참 고맙소만, 고물거리는 검은 입
아닙니다, 아녜요 잠기고 마는 아버지
이 빈집, 불 다 꺼져도 제게는 꽃대궐입니다
- 「빈집」 전문
아들은 팔순의 아버지를 “목욕탕, 플라스틱 팔걸이의자”에 앉혀서 씻겨드리고 있다. “앙상한 생의 저녁”을 맞아 요긴한 동작들이 노구를 떠나버린 아버지는 자신을 씻기는 아들 앞에서 민망함으로 멈칫댄다. 시인은 “황소바람 숭숭 뚫는 해지고 닳은 남루” 같고, “굽은 기둥 서까래들, 힘 부치는 오두막” 같은 아버지에게서 “까무룩 잠기는” 몇 겹의 어둠을 만난다.
자식도 알아보지 못하는 아버지는 “고물거리는 검은 입”으로 “뉘신지 참 고맙소만”하고 감사를 표한다. 억장이 무너지는 자식은 “아닙니다, 아녜요” 목소리가 그예 잠기고 만다. “불 다 꺼”진 “빈집” 같은 아버지이지만 그래도 이승에 계서서 “제게는 꽃대궐”이라고 시인은 울먹였으리라.
*
이처럼 그의 시는 그리워서 아프고, 아파서 그립다. 그립고 아픈 것들은 한결같이 등을 보이며 돌아서 있거나 “하루가 이미 결판이 난”(「가린다는 것」) 저물녘의 모습을 하고 있다. 화장기 지운 세상의 맨얼굴은 거기에 있다고, 그것들이야말로 세상의 속살이라고, 그래서 그것들을 불러 모아 인사를 건네고 말을 나누고 그들의 말을 받아쓴 것들이 바로 이 시집이다.
이 시집의 시들은 대상을 정면으로 마주하는 부담이 없어서 편안하고, 가까운 이야기를 멀게 하는 탓에 아득하다. 이를테면 그는 그립다는 말조차도 대놓고 못하는 숙맥이라서 “못 잊었다”는 말을 “던져 놓으면 싹이 나고/잎이 나고 열매 맺는다”(「먹다 만 토마토」)고 말하는 식이다. 이런 오랜 형식의 화법이야말로 그리움을 말하는 가장 강력한 방식이기도 해서 높은 전압이 발생한다. 하지만 이때의 전압은 쩌릿한 전율로 독자를 긴장시키는 게 아니라, 구들이 두꺼운 아랫목처럼 은근해서 독자의 마음을 내려놓게 만든다. 시조에 대한 세간의 오해와 편견에 대해 가장 오랜 방식으로 가장 첨예하게 맞서는 시인의 뚝심은 믿음직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