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뷔
사상이나 감정을 언어로 표현한 예술을 '문학'이라고 사전은 정의합니다.
그리고 시와 소설, 희곡, 수필, 그리고 평론 등을 문학작품이라고 부르죠.
시대적, 정치적, 문화적 배경에 따라 작가가 보여주고자 하는 내용이 달라
질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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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십 년 동안 분단됐던, 그래서 서로 다른 환경 속에서 살아야 했던 남한과
북한의 문학을 우리는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요. 탈북 작가 도명학 선생님과
함께 북한출신 작가는 남한 문학작품을 어떻게 느끼고, 이해하는지 이야기
나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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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C: 오늘은 남한 문학 작품을 함께 살펴볼까 하는데요. 어떤 작품을 소개
해 주시겠습니까?
도 명학: 네, 오늘은 소설가 박 완서의 단편소설 '도둑맞은 가난'이란 작품을
갖고 나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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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C: 작품을 보기 전에 먼저 박 완서라는 작가가 누군지 궁금해서 제가 좀
찾아 봤습니다. 여성 소설가인 박 완서 작가는 1931년에 태어나 2011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경기도 개풍군 출신인데, 40살 되던 해에 '여성동아'라는
잡지가 마련한 장편소설 공모전에 '나목'이란 작품을 출품해 당선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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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단했습니다. 등단한 이후 소설과 산문을 꾸준히 썼는데 주로 전쟁의 비극,
중산층의 삶, 그리고 여성문제를 다뤘습니다. 1950년 서울 대 국문학과에
입학했지만 6.25 한국전쟁 발발로 학업을 중단했습니다. 하지만 1남 4녀의
전업주부였음에도 불구하고 꾸준하게 작품 활동을 해 오다 2011년 담낭
암으로 숨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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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C: 그런데, 선생님께서는 이 작품을 어떻게 접하게 되셨는지요?
도 명학: 누군가가 박 완서라는 여성작가의 소설이 너무 좋더라는 얘기를 하는
것을 듣고 찾아보게 되었습니다. 남한에 처음 왔을 때니까 어느 작가가 유명한
지, 어느 작품이 어떤지 하는 것을 몰랐기 때문이죠. 그때는 아직 인터넷 검색
도 할 줄 몰라 서점에 가서 직원에게 물어서 소설집을 구입했습니다.
이젠 꽤 오래전인데 그때 그 책을 밤을 꼬박 밝히며 단숨에 다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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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C: 작품을 처음 접하셨을 때 느낌, 그러니까 첫 인상이라고나 할까요,
어떠셨나요?
도 명학: 아! 이런 것이 제대로 된 소설이구나 하는 경탄이 절로 나왔습니다.
소설 작품 하나하나가 얼마나 진솔하고 구수하고 재미있고 통속적이면서도
깊은 의미가 느껴지는지 홀딱 반해버렸습니다. 진실하게 쓸 수 없고 현실을
억지로 미화한 북한 소설과는 완전 딴 판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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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박 완서 소설을 읽으면서 나도 시를 그만두고 소설을 써볼까 하는 생각
이 들며 왠지 쓰면 잘 쓸 것 같은 자신감이 느껴졌습니다. 물론 정말로 소설을
쓰기 시작한 것은 시간이 몇 년 더 지난 후지만 박 완서 소설이 소설가로
변신할 결심을 하는데 영향이 컸다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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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문열 소설 등 다른 작품들을 읽으면서도 그런 의욕을 거듭 느꼈지만
아무튼 박 완서 소설이 저를 소설가의 길로 처음 떠밀게 된 매개체였던 것
같습니다.
MC: 좀 전에 작가를 소개하는 가운데, 박완서 작가의 작품은 주로 '전쟁의
비극과 중산층의 삶, 그리고 여성문제' 등을 주로 다뤘다고 말씀드렸는데요.
이 '도둑맞은 가난'도 그런 내용을 담고 있나요?
도 명학: 글쎄요. “도둑맞은 가난”은 전쟁의 비극과는 무관하고 중산층의 삶이
나 여성문제 범주에 들어가는 것 같긴 한데 꼭 그렇지도 않습니다. 가난한자와
부유한 자 간의 문제라고 보는 것이 더 적합할 것 같아 보입니다.
MC: 선생님, 전체적인 줄거리 좀 소개해 주시죠.
도명학: 네. 소설 ‘도둑맞은 가난’은 20페지 분량 정도밖에 안되는 아주 짤막한
단편소설인데 줄거리는 대략 이렇습니다. 공장에서 일하는 여성 주인공 ‘나’는
상훈이라는 남자와 동거를 합니다. 동거를 하면 연탄도 반장이나 아낄 수 있고
방값도 아낄 수 있다는 데 그건 변명이고 사실 속으로는 상훈이를 무척 좋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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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어느 날 상훈이가 아픈 공장 동류를 돕는 일에 둘이 함께 돈을 모아 놓은
통장에 든 돈을 몽땅 써버린 것 때문에 여주인공은 화를 내고 남자는 갑자기
사라집니다. 여자는 사라진 남자가 혹시라도 돌아오지 않을까 무척 속을 태웁니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상훈이가 돌아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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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좋은 옷을 입은 말끔한 모습이고 대학생이라고 말합니다. 여자는 어디
가서 도둑질이라도 한줄 알고 따집니다. 그러나 남자가 하는 소리가 더 희한합니다.
사실 자기는 부잣집 도련님인데 아버지가 좀 별난 성품이어서 아들이 너무 고생
모르고 자라는 걸 늘 걱정하셔서 방학동안에 어디 가서 고생 좀 실컷 하고, 돈
귀한 줄도 좀 알고 오라고 무일푼으로 내쫓았다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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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훈은 그저 가난을 체험해보고 싶었던 부자였던 것입니다. 이에 격분한 여자는
그를 내쫓습니다. 가난은 나에게 있어 소명이라는 자기변명을 위안삼고 살았는데
그 가난마저 빼앗겨버렸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남자가 쫓겨나고 나서
집을 둘러본 여자는 더 이상 자신에게 가난이 소명으로 보이지 않고 수치로
느껴집니다. 여자는 화려한 경력과, 학력, 재부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가난까지
훔치려 욕심을 쓰는 부자들을 괘씸하게 여기게 되는데, 대략 이런 줄거리로 되어
있는, 참 의미 있는 문제작입니다.
MC: 여자 주인공이 참 어려운 삶을 살아온 것 같습니다. 안타깝기 그지 없는데요.
이 여자 주인공의 삶만을 놓고 보면 북한에서 할 말이 많을 것 같은데요. 가족의
경제적인 몰락과 그로인한 자살 같은 게 남한 또는 자본주의의 부정적인 면을
부각시키기에 좋은 소재꺼리가 될 것 같은데 말이죠. 선생님께서는 어떻게 보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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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명학: 물론 이 작품을 북한사람들이 읽게 되면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을 하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자본주의 사회가 그렇다는 것은 이미 교육을 통해
알고 있기 때문에 이 소설로 인해 더욱 자본주의 사회를 나쁘게 생각할 것 같진
않습니다. 오히려 남조선의 부자들이 도대체 어떤 수준으로 부유하게 살기에 가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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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지 체험해보려 하는 것일까 하고 신기하게 생각할 것입니다. 또 자신들의 처지와
비교해 보기도 할 것입니다. 그래도 남한에는 노동을 해서 적은 돈이나마 벌어 통장
에 모을 수 있는데 자신들이 살고 있는 북한은 사회주의 사회라면서도 오히려 소설
속 주인공보다 더 가난하고 일을 해서 돈을 벌 곳도 없으니 자본주의 사회에 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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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다 더 비참하다는 생각도 들것입니다. 저 역시 북한에 있을 때 그런 생각을 종종
했으니까요. 좀 지나친 말 같지만 가난을 못 견뎌 자살하는 경우에도 북한 사람들에
비하면 호사라고 생각합니다. 북한은 자살하면 온 가족이 반역자로 취급됩니다.
그래서 죽고 싶어도 자살할 자유가 없습니다. 갑자기 ‘자살의 자유’라는 제목으로
소설이나 시를 쓰고 싶은 생각이 드네요.
MC: 이렇게 어려운 처지의 경우는 전체 남한사회의 일부분일 뿐인데도 북한은 이것을
남한사회의 전체인양 문제점을 부풀려 선전선동에 이용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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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명학: 그런 선전이라면 굳이 이 작품을 선정하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면 북한당국도
남한에 대한 선전방향이 바뀐지 오랩니다. 남조선을 가난하고 낙후한 모습으로만 묘사
하던 것을 그만두라고 한지 오랩니다. 아무리 가난한 면을 부각시켜봐야 북한이 더
한심한 처지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고, 주민들도 자본주의 사회는 거지도 쌀밥을 먹고
텔레비전 정도는 다 가지고 있다는 식으로 생각한지 오랩니다.
MC: 작가(박완서)는 이 작품을 통해 무엇을 말하려 했던 걸까요?
도명학: 빈부격차에 의한 사회적 갈등의 심각함을 말하려 한 것 같습니다. 실지로
정치인들이나 부자들이 옥탑방 살아보기, 기초생활수급자의 하루 생활 체험해보기 같은
것을 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저는 이 소설을 읽은 까닭에 그런 것을 볼 때마다 그들이
가난을 훔치러 다니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곤 합니다. 물론 제 느낌이 그렇다는 것이지
그들이 정말로 그런 목적으로 다니는 건 아니지만요.
MC: 여자 주인공이 울부짖었던 말 "이제 부자들이 가난마저 훔쳐간다'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도명학: 찢어지게 가난한 자의 설음을 반어법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봅니다. 가난을
훔치기야 어떻게 훔칩니까. 물건도 아니고, 또 부자들에겐 잘난 척 하지 말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좀 기부도 하고 도우라고 하는 항변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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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인천에서도 가장 오래된 빈민촌인 만석동 달동네를 무대로 쓴 작품 ‘괭이부리말
아이들’이 널리 읽히자, 관할 기초지자체가 ‘쪽방촌 체험관’을 지었습니다. 그런데
“어린이 날 마을을 찾은 관광객들이 자녀들에게 ‘너희도 공부 못하면 이렇게 살게 된다.
그러니까 공부 열심히 해라’고 말하며 돌아다녔습니다. 그런 소리를 들은 마을 노인들
이나 아이들의 기분이 어땠을지 생각하면 참담하지 않을 수 없죠. 결국 빗발치는 반대
여론에 밀려 쪽방촌체험관은 철회됐지만요.
MC: 이 작품에 대한 총평을 부탁드립니다.
도명학: 제가 평론가는 아니어서 총평을 하기 엔 무리라고 생각됩니다만, 개인적인
소견을 말씀 드린다면 아이디어가 기발하고 작품의 짜임새가 잘 되어 있고 간결하게
잘 쓴 소설이라고 봅니다. 가난을 소재로 한 소설들은 많고 많습니다. 하지만 가난을
도둑 맞힌다는 발상은 참 기가 막힌 착상입니다. 작가가 어디서 직접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을 본 적이 있는 건지 아니면 본인 머리에서 갑자기 그런 영감이 떠오른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참 대단한 천재작가라고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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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거리 요약
공장에서 일하는 여주인공이 있습니다. 어느날 배가 고파 풀빵으로 점심을 대신하던
중, 풀빵을 고상하게 먹는 한 남자가 그렇게 허겁지겁 먹지 말라고 말을 건 걸 시작
으로 그녀는 같은 공장의 그 남자가 점점 좋아졌죠. 우리 어머니께서도 60년대 풀방
장사를 하셨고 장씨 이모부를 동생 이정에게 소개팅을 해주었다고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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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 다 없는 형편에 따로 자취하고 있었는데, 여자가 그럴 바에 우리 연탄 값도 절약할
겸 같이 동거하자고 했죠. 그래서 동거를 시작했고요.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 남자
는 원래 부잣집 대학생 아들이었던 거죠. (그 공장 사장 아들이었던가? 하여튼...) 그
남자의 아버지는 아들에게 가난이 무엇인가를 가르쳐 주려고 일부러 방학 동안 그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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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을 경험하게 했다는 거죠. 그 남자는 그 여자의 접근을 자신을 사랑해서가 아니라
연탄값을 아끼려는 행위로 보고, 자기집에서 식모를 하라고 연탄 하나 때문에 그렇게
살면 안 된다고 점잖게 타이릅니다. 결국 자신을 사랑해서 결혼한 거라기 보다는 가난을
배우려고 사랑을 가장한 거라는 사실을 알게 된 여주인공이 마지막으로 하는 말...
인용
"나는 우리 집안의 몰락의 과정을 통해 부자들이 얼마나 탐욕스러운가를 알고 있는 터였다.
그러나 부자들이 가난을 탐내리라고는 꿈에도 못 생각해 본 일이었다. 그들의 빛나는
학력, 경력만 갖고는 성이 안 차 가난까지를 훔쳐다가 그들의 다채로운 삶을 한층 다채롭게
할 에피소드로 삼고 싶어한다는 건 미처 몰랐다. 나는 우리가 부자한테 모든 것을 빼앗겼을
때도 느껴보지 못한 깜깜한 절망을 가난을 도둑맞고 나서 비로소 느꼈다."
제발 우리대로 가난하게 살게 놔두시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