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자의 영화와 늙은 자의 아름다움 (잠언 20장 1절 – 30절) 20:1 포도주는 거만하게 하는 것이요 독주는 떠들게 하는 것이라 이에 미혹되는 자마다 지혜가 없느니라 2 왕의 진노는 사자의 부르짖음 같으니 그를 노하게 하는 것은 자기의 생명을 해하는 것이니라 3 다툼을 멀리 하는 것이 사람에게 영광이거늘 미련한 자마다 다툼을 일으키느니라… 5 사람의 마음에 있는 모략은 깊은 물 같으니라 그럴지라도 명철한 사람은 그것을 길어 내느니라 6 많은 사람이 각기 자기의 인자함을 자랑하나니 충성된 자를 누가 만날 수 있으랴 7 온전하게 행하는 자가 의인이라 그의 후손에게 복이 있느니라… 11 비록 아이라도 자기의 동작으로 자기 품행이 청결한 여부와 정직한 여부를 나타내느니라 12 듣는 귀와 보는 눈은 다 여호와께서 지으신 것이니라… 21 처음에 속히 잡은 산업은 마침내 복이 되지 아니하느니라 22 너는 악을 갚겠다 말하지 말고 여호와를 기다리라 그가 너를 구원하시리라 23 한결같지 않은 저울추는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는 것이요… 24 사람의 걸음은 여호와로 말미암나니 사람이 어찌 자기의 길을 알 수 있으랴… 26 지혜로운 왕은 악인들을 키질하며 타작하는 바퀴를 그들 위에 굴리느니라 27 사람의 영혼은 여호와의 등불이라 사람의 깊은 속을 살피느니라 28 왕은 인자와 진리로 스스로 보호하고 그의 왕위도 인자함으로 말미암아 견고하니라 29 젊은 자의 영화는 그의 힘이요 늙은 자의 아름다움은 백발이니라 (개역개정) 오늘의 성경 본문은,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신정왕국에서 하나님의 백성과 자녀로서 건강한 신앙인으로 살아가게 할 지혜의 교훈을 권면한 “솔로몬의 잠언”(1:1) 중에서, 솔로몬의 제2잠언 모음집(10:1-22:16)의 의로운 삶에 대하여 찬양하는 하반부(16:1-22:16)의 다섯 번째 내용입니다. 오늘 본문인 20장에서는 “젊은 자의 영화는 그의 힘이요, 늙은 자의 아름다움은 백발이니라”(20:29) 곧 “젊은이의 자랑은 힘이요, 노인의 영광은 백발이다.”(새번역)라는 말씀이 전체의 흐름을 관통한다고 보아서, “젊은 자의 영화”와 “늙은 자의 아름다움”이라는 제목으로 잡았습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우리 사회 속에 공존하는 “젊은이”와 “노인”의 관계를, 함께 할 수 없는 상극적이며 대립적인 존재로서가 아니라 서로 상호보완적인 존재로서, “노인”에게 없는 “젊은이”의 “힘”이 혈기로 표출되지 않고 패기로 표출된다면 그것이 “젊은 자의 영화” 곧 “젊은이의 자랑”으로 존중되어야 하며, “젊은이”에게 부족한 “노인”의 오랜 경륜적인 “지혜”의 표징인 “백발”을 “늙은 자의 아름다움” 곧 “노인의 영광”으로 존중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왕의 통치와 신앙인들의 사회적 책임에 관한 것으로, 자기만을 앞세워 생각이 다르다는 것 때문에 상대를 적대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존중하는 것이 하나님이 통치하는 건강한 신앙공동체와 지혜로운 사회 공동체로 함께 살아갈 수 있다는 내용입니다. 1. 다툼을 일으킵니까, 아니면 멀리합니까? 누구에게나 장점과 단점이 있고, 장점이 항상 장점인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최대의 단점이 될 수 있으며, 단점이 항상 단점인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최대의 장점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고, 서로를 존중하며 사는 것이 지혜로운 삶이며 건강한 인간관계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포도주는 거만하게 하는 것이요, 독주는 떠들게 하는 것이라. 이에 미혹되는 자마다 지혜가 없느니라.”(20:1)며, 가정과 인간관계와 사회에 “다툼”을 일으켜 평화를 깨트리는 술에 대한 경고로부터 시작합니다. 첫째로, 술은 사람을 “거만하게 하는 것”이라며, 취하면 이성이 마비되어 안하무인격으로 함부로 행동하게 된다고 경고합니다. 둘째로, 술은 사람을 “떠들게 하는 것”이라며, 취하면 주변의 평화를 깨트려 “소란스럽게”(새번역) 만들거나 또 사람들을 괴롭히는 “행패를 부린다”(공동번역)라고 경고합니다. “이에 미혹되는 자”는, 취할 때 분별력을 잃고 자신도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사람들을 무시하고 행패를 부리는 심각한 어리석은 행동을 저지르게 된다는 것으로, 이것을 자각하고 각성할 것을 요청하는 점에서 “지혜가 없느니라”고 선언합니다. 공적인 일을 행하는 한 나라의 통치자나 사회 종교 지도자들만큼은 술을 자제해야 하는 이유를, “포도주를 마시는 것이 왕들에게 마땅하지 아니하고 왕들에게 마땅하지 아니하며, 독주를 찾는 것이 주권자들에게 마땅하지 않도다. 술을 마시다가 법을 잊어버리고, 모든 곤고한 자들의 송사를 굽게 할까 두려우니라.”(31:4-5)고 경고합니다. 이처럼 술에 취해서 사는 왕의 분노가 빚어내는 두려움의 공포를, “왕의 진노는 사자의 부르짖음 같으니, 그를 노하게 하는 것은 자기의 생명을 해하는 것이니라.”(20:2)고 일깨웁니다. 한편에는 이것을 비유적으로 “왕의 진노” 곧 하나님을 “노하게 하는” 신앙인들이 되지 말라는 의미로서, “악을 행하는 것은 왕들이 미워할 바니…의로운 입술은 왕들이 기뻐하는 것이요, 정직하게 말하는 자는 그들의 사랑을 입느니라.”(16:12-13)고 일깨웁니다. 우리 믿는 자들이 순종해야 할 대상은, 세상의 “왕”보다 하나님을 우선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솔로몬은 우리에게 “다툼을 멀리 하는 것이 사람에게 영광이거늘, 미련한 자마다 다툼을 일으키느니라.”(20:3)며, 우리 각자가 하나님께 부름 받은 거룩한 백성들로서, 우리의 역할이 세상의 통치자나 관리자가 되었든 백성이 되었든 우선해야 할 중요한 자세를, “다툼을 멀리 하는 것” 곧 “화평의 일과 서로 덕을 세우는 일”(롬14:19)을 힘써야 한다고 당부합니다.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신정국가의 정체성을, 왜 솔로몬이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악을 미워하는 것이라.”(8:13)며, “나는 명철이라 내게 능력이 있으므로, 나로 말미암아 왕들이 치리하며 방백들이 공의를 세우며, 나로 말미암아 재상과 존귀한 자 곧 모든 의로운 재판관들이 다스리느니라.”(8:13-16)고 했겠습니까? 이처럼 중요한 하나님이 주시는 통찰력의 “지혜”와 분별력의 “명철”을 추구하지 않고 “다툼”만 일으키는 이들을, “게으른 자는 가을에 밭 갈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거둘 때에는 구걸할지라도 얻지 못하리라”(20:4)며, 지금 자신이 추구하고 힘써야 할 역할과 사명을 방치하는 것을 “게으른 자”라는 비유로 경고합니다. “다툼”만 야기하는 이들을 분별할 것을, “사람의 마음에 있는 모략은, 깊은 물 같으니라. 그럴지라도 명철한 사람은 그것을 길어 내느니라.”(20:5)며, 사람들과 말을 다 믿어서는 안 되는 것은, 속여서 자기 이권만을 챙기려는 악한 “모략”의 계획을 가진 이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다들 그러한 자신의 속마음을 감추기에 겉보기로는 잘 드러나지 않는 “깊은 물” 같지만, “명철한 사람” 곧 분별력을 가진 사람은 그러한 간계에 “미혹되는 자”가 아니라 그 속셈을 간파해서 대처한다는 것입니다. “미련한 자”들은 통찰력의 “지혜”와 분별력의 “명철”이 없다보니, 악한 신앙인들에게 감춰진 이러한 간계를 파악하지 못합니다. 마치 그들이 하는 말에 무조건적인 신뢰를 보내다보니, 자신의 영혼을 달콤하게 취하게 하는 “포도주”나 건전한 이성적 판단력을 마비시켜 독하도록 취하게 만드는 “독주”에 “미혹되는 자”가 될 수밖에 없다고 경고합니다(20:1). 많은 거짓된 신앙인들이 “마음에 있는 모략” 곧 자신의 실체를 감추고 행동하는 것을, “많은 사람이 각기 자기의 인자함을 자랑하나니, 충성된 자를 누가 만날 수 있으랴?”(20:6)라고 경계합니다. 겉으로는 다들 “자기의 인자함을 자랑하”며, 자신의 허물과 속셈을 감추고 거짓된 친절로 신실한 믿음의 사람인 것처럼 과시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충성된 자를 누가 만날 수 있으랴?”라며, 겉으로 떠드는 모습만으로 진심을 알 수 없다는 것과, 진실하고 충성된 사람을 만나기가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을 잘 분별하여, 이런 사람들의 달콤한 말에 쉽게 “미혹”되어 그 선동에 휩쓸리지 말고 잘 통찰하고 분별할 것을 당부합니다. 그렇기에 “온전하게 행하는 자가 의인이라. 그의 후손에게 복이 있느니라”(20:7)며, 우리가 그처럼 사람들을 “미혹”하거나 “미혹”되는 신앙인이 되지 말고, 하나님 앞에서 불의를 거부하고 정직하고 신실하게 사는 이들이 될 것을 당부하며, 그럴 때 그러한 사람들이 살아가는 가정과 사회의 “후손에게 복이 있느니라”고 축복합니다. 때문에 “심판 자리에 앉은 왕은, 그의 눈으로 모든 악을 흩어지게 하느니라”(20:8)며, 하나님의 대리자로 살아가는 한 나라의 통치자나 사회 종교 지도자들은 그 누구보다도 이러한 현실 상황을 파악하여, “모든 악”과 악한 자들을 분별하게 하여 공동체에서 척결하는 것이 맡겨진 책임적 역할과 사명임을 일깨웁니다. 그러면서도 솔로몬은 이러한 역할과 사명을 감당함에 있어서 누가 누구를 정죄할 수 있을 것인가라는 고뇌를, “내가 내 마음을 정하게 하였다, 내 죄를 깨끗하게 하였다 할 자가 누구냐?”(20:9)라는 인간의 한계성으로 토로합니다. 이것은,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기록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롬3:10)라는 것을 깨닫고 겸손한 신앙자세로, 결코 누군가를 정죄하지 않기 위해서 어느 한 편에 치우치지 말고 중심을 잃지 않는 공정한 판단이 되어야 할 것을, “한결같지 않은 저울추와 한결같지 않은 되는 다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느니라”(20:10)고 일깨웁니다. 이처럼 치우치지 않는 공정한 분별력과 통찰력을 가진 이들이 “다툼을 멀리 하는” 역할과 사명으로 화목과 화평의 분위기를 조성함으로써 “사람에게 영광”이 되게 하지만, 그렇지 못한 “미련한 자마다 다툼을 일으”켜 불화와 갈등과 혐오와 분노를 조장하고 선동하는 “미혹되는 자”가 된다고 각성시킵니다(20:3). 2. 듣는 귀와 보는 눈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종교 지도자라고 할지라도, 무조건 맹종하지 말고 그들의 실체를 분별할 것을 당부하셨습니다.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마7:15)며, 그 이유와 실체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마7:15)고 밝힙니다. 따라서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마7:18)며, 그들이 말하고 행동하는 언행을 유심히 듣고 보며 살펴서 분별할 것을, “이러므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마7:20)고 경고하셨습니다. 오늘 솔로몬도 “비록 아이라도 자기의 동작으로 자기 품행이 청결한 여부와 정직한 여부를 나타내느니라.”(20:11) 곧 “비록 아이라 하여도 자기 행위로 사람됨을 드러낸다. 그가 하는 행실을 보면…”(새번역)이라고 일깨우며, 단지 “아이”라는 이유 하나로 다 순수해서 “청결”하고 “정직”할 것이라고 보지 말고, 그 “아이”가 행동하는 “동작” 곧 “행실”을 통해 드러내는 “자기 품행이 청결한 여부와 정직한 여부”를 분별할 줄 아는 이들이 “명철한 사람”이라고 밝힙니다. 이것은 선입견만으로 누구라도 함부로 믿어서는 안 된다는 비유적인 표현으로서, 누군가를 정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과 공동체가 거짓에 “미혹되는 자”가 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고 일깨웁니다. 따라서 솔로몬이 “듣는 귀와 보는 눈은, 다 여호와께서 지으신 것이니라.”(20:12)고 선언하면서, 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듣는 귀와 보는 눈”을 주셨는지를 잘 알라고 일깨웁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주님의 법도에 따라 올바르게 행하기를 원하기에, 올바른 분별력을 가지고 행하도록 사람의 귀와 눈을 만드셨다고 증언합니다. 그러면서 “너는 잠자기를 좋아하지 말라. 네가 빈궁하게 될까 두려우니라. 네 눈을 뜨라. 그리하면 양식이 족하리라.”(20:13)며, 사람들의 행태에 대해 분별의 눈을 닫아버리는 “게으른 자”(20:4)가 되지 말고, “네 눈을 뜨라!”고 강하게 당부합니다. 솔로몬은 사람들이 가진 이중적 속성을, “물건을 사는 자가 좋지 못하다 좋지 못하다 하다가, 돌아간 후에는 자랑하느니라.”(20:14)며, 조금이라도 싼 값에 “물건”을 사려고 흠을 잡는 것이 사람들의 일반적 속성이지만, 사고 나서는 사람들에게 얼마나 싸게 샀고 얼마나 좋은 것을 샀는지를 “자랑”하는 것이 인간이라는 것입니다. 결국 사람들 대부분은 자기 입장에서 말하고 행동하지, 상대방을 배려하는 입장에서 말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는 것을 분별하라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믿음의 사람들만큼은 이처럼 자기 이익을 우선하는 사람이 되지 말고, 가급적이면 상대방을 배려하는 입장에 설 것을, “세상에 금도 있고 진주도 많거니와, 지혜로운 입술이 더욱 귀한 보배니라”(20:15)고 당부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잘못된 사람들의 편에 서서도 안 된다는 것을, “타인을 위하여 보증 선 자의 옷을 취하라. 외인들을 위하여 보증 선 자는 그의 몸을 볼모 잡을지니라”(20:16)고 경고합니다. 자신이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그 사람이 하는 말과 행동이 마치 다 옳은 것처럼 “타인을 위하여 보증 선 자”가 있다면, 그 사람의 “옷을 취하라…그의 몸을 볼모 잡을지니라”며, 무책임한 그 사람의 언행에 대해서 모든 것을 책임지게 할 것을 경계합니다. 자신의 잘못된 “보증” 때문에 잘못된 사람임을 제대로 분별하지 못하게 “미혹”함으로써, 사람들이 입게 될 피해를 책임지게 하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속이고 취한 음식물은 사람에게 맛이 좋은 듯하나, 후에는 그의 입에 모래가 가득하게 되리라.”(20:17)며, 혹시나 함께 사람들을 속인 대가를 받은 것으로 즐거워한다면 당시는 즐거울지 몰라도, 사람들을 “미혹”하는 데 “보증 선 자”의 악행에 보응하시는 하나님의 저주의 심판으로 말미암아 “후에는 그의 입에 모래가 가득하게 되리라”고 경고합니다. 이 때문에 “경영은 의논함으로 성취하나니, 지략을 베풀고 전쟁할지니라”(20:18)며, 사기꾼들의 일방적인 말에 “미혹”되거나 자신의 일방적인 생각에 갇히지 말고, “사람들의 뜻을 모아서”(새번역) 자신과 생각이 다른 사람들의 의견과도 함께 할 줄 아는 “의논”이, 자신의 “경영” 곧 “계획”(새번역)을 잘 “성취”할 수 있다고 일깨웁니다. “전쟁”은, 단지 국가 간의 싸움만이 아니라 일상생활에서 개인 간의 분쟁이나 사업이나 악과의 싸움에 대한 비유로써, “지략을 베풀고”라며 전체적인 상황과 문제를 통찰하고 분별하여 대책과 전략을 세우는 작업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당부입니다. 그렇기에 “두루 다니며 한담하는 자는 남의 비밀을 누설하나니, 입술을 벌린 자를 사귀지 말지니라.”(20:19)며, 남의 말이나 열심히 옮기는 사람들과는 멀리할 것을 교훈합니다. 3. 젊은이와 늙은 자의 자랑이 무엇입니까? 솔로몬은 “젊은 자의 영화는 그의 힘이요, 늙은 자의 아름다움은 백발이니라.”(20:29)며, “젊은 자”와 “늙은 자”를 갈등과 대립의 존재가 아니라, 그들만이 가진 장점이 무엇인가를 서로 보고 존중할 것을 당부합니다. 그렇기에 “다툼을 멀리 하는 것이 사람에게 영광이거늘, 미련한 자마다 다툼을 일으키느니라.”(20:3)며, “젊은 자의 영화” 곧 그 자랑은 “그의 힘”(20:29)으로, 이것은 패기와 열정이 젊은이의 장점이라는 의미이지, 그 “힘”을 가지고 “다툼”이나 일으키는 이들은 “미련한 자”라고 했습니다. “늙은 자의 아름다움”이 인생의 경륜을 의미하는 “백발”(20:29)인 것은, 쉽게 흥분하는 젊은이들과 달리 싸움을 중재하여 “다툼을 멀리 하는” 경험의 지혜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히려 “다툼”을 조장한다면, 늙어서까지 젊은 때의 탐욕과 야망을 버리지 못한 일개 추한 늙은이에 불과합니다. 왜 솔로몬이 “백발은 영화의 면류관이라. 공의로운 길에서 얻으리라”(16:31)고 했으며, 늙기까지 하나님 앞에서 “공의로운 길”을 변함없이 걸어간 “백발”이야말로,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 자랑스러운 “영화의 면류관”이라고 했겠습니까? “젊은 자”는 자신이 가진 “힘”을 어디에 쓰는 것이 합당한지 아는 것이 “자랑”이라고 일깨웠던 솔로몬은, “비록 아이라도 자기의 동작으로, 자기 품행이 청결한 여부와 정직한 여부를 나타내느니라. 듣는 귀와 보는 눈은, 다 여호와께서 지으신 것이니라.”(20:11-12)며, 연륜을 통해 사람들로 옳고 그름을 분별하게 도와줌으로써 하나님 앞에 자기 역할과 사명을 잘 감당하게 해주는 “백발”의 지혜를 “늙은 자의 아름다움”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옳고 그름의 분별력을 배우지 못해서 자기가 섬겨야 할 대상이 누구인가도 모르는 분별없는 패역한 사람들에 대해서, “자기의 아비나 어미를 저주하는 자는, 그의 등불이 흑암 중에 꺼짐을 당하리라”(20:20)며, 혹시나 이들이 법적인 처벌은 피할 수 있을지 몰라도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으로 완전한 멸망을 당할 것을 경고합니다. 따라서 마음만 조급해서 “처음에 속히 잡은 산업은, 마침내 복이 되지 아니하느니라”(20:21)며, 그 분야의 경험도 없이 “처음에 속히 잡은 산업” 곧 사업과 재물이나 권력과 권세에 대해, 그것은 “끝이 좋지 않다”(공동번역) 곧 “행복하게 끝을 맺지 못한다”(새번역)라고 경계합니다. 솔로몬이 이러한 충고를 하는 이유를, 첫째로 “너는 악을 갚겠다 말하지 말고, 여호와를 기다리라. 그가 너를 구원하시리라”(20:22)며, 자신이 어떤 원한을 갚으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이 하시기를 기다릴 것을 당부합니다. 모든 일에는 “다툼”과 갈등이 있게 마련인데, “처음에 속히 잡은 산업”은 이러한 문제 처리에 대한 경험이 없는 미숙함 때문에, 그러한 문제를 용납하거나 조정할 수 있는 지혜와 명철이 없다보니, 자신의 분노와 마음의 감정을 절제하지 못해서 일을 더 크게 만든다는 것을 경고합니다. 둘째로, “한결같지 않은 저울추는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는 것이요, 속이는 저울은 좋지 못한 것이니라”(20:23)며, 공정한 시각에서 문제를 직시하고 처리해야 하지만, “한결같지 않은 저울추”와 “속이는 저울”이라는 비유를 통해, 일방적이고 편협한 자기 시각에서만 문제를 처리하려는 것이 인간적 한계성이라고 일깨웁니다. 이 때문에 “너는 악을 갚겠다 말하지 말고, 여호와를 기다리라. 그가 너를 구원하시리라”(20:22)고 권면한 이유이며, 자기 생각과 판단을 우선하지 말 것을 “사람의 걸음은 여호와로 말미암나니, 사람이 어찌 자기의 길을 알 수 있으랴?”(20:24)라고 일깨우는 이유입니다. 세상만사가 우리의 계획과 의도대로 되지 않으며, 그 가운데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가 있음을 인정할 것을 당부합니다. “처음에 속히 잡은 산업”에는 “늙은 자”의 오랜 경륜의 경험과 달리 언제나 성급한 판단과 열정이 우선하게 된다는 점에서, “함부로 이 물건은 거룩하다 하여 서원하고, 그 후에 살피면 그것이 그 사람에게 덫이 되느니라”(20:25)며, 처음에야 순수한 신앙적 열정으로 어떤 “서원”을 했을지라도, 시간이 지나면서 차분히 생각하지 않고 내린 결정이었음을 후회한다면, 그것이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덫” 곧 자기 인생과 삶을 걸려 넘어지게 하리라며 신중할 것을 요청합니다. 따라서 “지혜로운 왕은 악인들을 키질하며, 타작하는 바퀴를 그들 위에 굴리느니라.”(20:26)며, 진정한 신앙의 지도자는 하나님 앞에서 “악인들을 키질”하는 곧 악한 자들을 분별해낼 줄 아는 “지혜”와, “한결같지 않은 저울추”와 “속이는 저울”로 기준 없이 잘못을 덮어주는 것이 능사가 아니라, “타작하는 바퀴를 그들 위에 굴리”는 곧 잘못에 대한 분명한 처벌과 징계를 내릴 줄 아는 “지혜”가 필요하다고 권면합니다. 왜냐하면 “사람의 영혼은 여호와의 등불이라. 사람의 깊은 속을 살피느니라”(20:27)며, 세상 모든 일과 사람의 마음속을 살피시는 하나님처럼, 사람들을 맹신하지 말고 하나님 앞에서 주님이 요구하시는 의로운 삶을 살아가는 양심의 사람이 될 것을 경계합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왜 솔로몬이 “젊은 자의 영화는 그의 힘이요, 늙은 자의 아름다움은 백발이니라.”(20:29)라고 증언했다고 생각합니까? 세상은 끊임없는 갈등과 “다툼”이라는 영적 싸움이 계속되는 삶의 현장입니다. 싸움의 문제 핵심은 감춰버리고,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한 부분만을 확산하고 키워서 혼돈에 빠트리는 사람인 것인지, 문제를 통해서 오히려 서로가 주장하는 다양한 관점을 바라보고 듣는 “듣는 귀와 보는 눈”을 키워서, 서로를 포용할 줄 아는 화평과 화목 그리고 조화와 일치를 이끌어가는 사람인 것인지를 분별하는 이들이 “지혜로운”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이 때문에 “왕은 인자와 진리로 스스로 보호하고, 그의 왕위도 인자함으로 말미암아 견고하니라”(20:28)며, 세상에서 우리의 위치와 일상을 “스스로 보호”하기 위해서는 “인자와 진리”라는 양면성을 존중할 것을 당부합니다. “인자”는 친절과 사랑의 너그러움과 용납의 의미라면, “진리”는 불의가 사회 질서를 파괴하고 혼란에 빠트린다는 것을 알고 엄격하게 법의 원칙을 적용한다는 의미입니다. “인자”만이 강조되면 무질서한 사회 혼란이 야기되며, “진리”만이 강조되면 말은 원칙론이지만 공포 사회와 독재 정치로 흐르게 된다는 것을 분별하여, 균형을 유지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그의 왕위도 인자함으로 말미암아 견고하니라”고 한 것은, “진리”라는 명분만을 강조하며 사람들을 억압하는 것이 자기 자리를 지키는 것이 아님을 깨닫고, 하나님의 말씀의 “진리” 안에서 사람들에 대한 “인자함”을 잃어버리지 않을 때 그 모든 삶이 “견고하니라”고 축복합니다. 그러면서도 오직 자기 권력과 자리를 지키려는 탐욕에서 “한결같지 않은 저울추”와 “속이는 저울”(20:23)을 적용하는 것은 “다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느니라”(20:10)는 경고를 기억하되, 악한 자들에 대한 분명한 징계와 처벌을 행할 것을 “상하게 때리는 것이 악을 없이하나니, 매는 사람 속에 깊이 들어가느니라.”(20:30)고 경계합니다. 하나님은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믿는다는 신앙인들과 종교 지도자들과 정치가들이 “미혹”된 것에 대해, “이들은 포도주로 말미암아 옆 걸음 치며 독주로 말미암아 비틀거리며, 제사장과 선지자도…포도주에 빠지며 독주로 말미암아 비틀거리며, 환상을 잘못 풀며 재판할 때에 실수하나니”(사28:7)라며, 사회가 극심한 분열과 갈등의 상황에 처하게 된 것을 “모든 상에는 토한 것, 더러운 것이 가득하고 깨끗한 곳이 없도다.…그가 누구에게 지식을 가르치며, 누구에게 도를 전하여 깨닫게 하려는가?”(사28:8-9)라고 탄식합니다. “젊은 자의 영화는 그의 힘이요, 늙은 자의 아름다움은 백발이니라.”(20:29)는 선언처럼, 서로 대립하는 상극적인 존재가 아닌, 서로 화합하며 공존하는 상호보완적 존재로 함께 살아가기를 힘쓰는 온전한 신앙인들이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