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
요한복음 1 – 12(41)
예수님께서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이 구걸하는 것을 보시고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3)고 말씀하시고 하나님께서 그 일을 위해서 자신을 보내셨다(4)고 말씀하셨습니다.
길가에 앉아 구걸하는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은 사람이면서 사람답게 살 수 없는 불쌍한 사람입니다.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신다는 말씀은 고속사적으로 중요한 말씀입니다.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은 죄인을 상징합니다.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에게서 우리(나)를 보아야 합니다. 모든 사람은 날 때부터 죄인 된 사람입니다. 사람들은 사람이면서 사람답게 살지 못하고 죄인으로 살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날 때부터 맹인은 사람들이 ‘누구의 죄로 맹인으로 난 것이냐 자기의 죄로냐 그의 부모의 죄로냐’라고 하는 소리를 들을 때마다 그는 부모를 원망했을 것입니다. 모든 사람은 날 때부터 죄인이 되었기 때문에 우리의 조상 아담과 하와를 원망하며 삽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3)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 일을 하여야 하리라’(4)고 하시며 그 맹인의 눈을 밝게 볼 수 있도록 고쳐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날 때부터 맹인 된 그를 고쳐주시고 구원하신 것을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한 것이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란 죄인을 구원하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4,5)고 말씀하셨습니다.
‘때가 아직 낮이매 ~ 밤이 오리니’란 ‘내가 세상에 빛으로 있는 동안’을 의미하는 말로서 예수님의 공생애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4,5). 그때가 예수님께서 십자가 수난을 당하시기까지 약 6개월 정도 남았을 때였습니다.
그동안 예수님의 구속 사역을 보고 유대인들은 예수를 유대인의 왕으로 삼으려고 했는가 하면,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은 예수를 배척하여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때 이스라엘 사람들은 안식일에 맹인의 눈을 뜨게 해 준 예수를 범법자로 정죄했습니다. 그리고 ‘누구든지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시인하는 자는 출교하기로 결의’를 하였습니다(16,22). 이러한 것을 보면 당시 이스라엘 사회의 정치와 종교가 얼마나 부패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밤이 온다’는 말씀은 자신의 죽음의 때가 가까이 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4)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라고 하신 것은 예수님과 제자들이 하나의 공동체로 교회를 의미합니다. 교회는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는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교회는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나타내는 곳입니다. 교회에 속한 모든 성도는 예수님의 제자 된 공동체로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는 일을 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맹인의 눈을 고쳐주셨습니다. 날 때부터 맹인 된 그의 눈을 뜨게 하신 것은 ‘하나님이 나타내시고자 하는 일’이었던 것처럼 교회가 죄인 된 자를 구원받도록 하는 일은 곧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빛을 볼 수 없는 어두운 눈을 고쳐주심으로 예수님께서 세상이 빛이심을 증명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5).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은 빛을 보지 못하는 캄캄한 밤과 같은 흑암에서 살았습니다. 그러나 빛이신 예수님께서 그의 눈을 뜨게 해 주심으로 낮과 같은 빛의 세상을 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밤’은 지옥 형벌을 상징합니다. 날 때부터 맹인 된 그 사람은 빛을 볼 수 없는 어두운 눈으로 지옥 같은 세상을 살아야 했던 것처럼 모든 죄인은 빛이 없는 지옥에서 영원히 살아야 합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라’(요8:12)고 말씀하신 예수님께서 맹인의 눈을 뜨게 하셔서 어두움에서 빛으로 나아오게 하신 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여리고의 길가에 앉아 구걸하던 맹인 바디메오는 사람들로부터 나사렛 예수가 지나가신다는 말을 듣고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소리를 질러 예수님을 멈추게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고 물었고 ‘주여 보기를 원하나이다’라고 그는 말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그에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눅18:42)고 말씀하심으로 그는 곧바로 어두운 눈이 밝아져서 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은 예수님을 알려고도 하지 않았고 자신을 불쌍히 여겨 달라거나 눈을 뜨게 해서 보게 해 달라고도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그의 눈을 뜨게 해 주셨습니다.
여리고의 바디메오와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의 대조적인 믿음처럼 사람들에게도 적극적인 믿음과 소극적인 믿음을 볼 수 있습니다.
‘나사렛 예수’라는 말을 듣고 ‘다윗의 자손 예수’라고 소리 지른 바디메오는 적극적인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눈을 뜨게 해 주었음에도 예수님을 찾지도 않은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은 소극적인 믿음의 사람입니다.
사람들이 그에게 ‘네 눈이 어떻게 떠졌느냐’고 물었을 때 그는 ‘예수라 하는 그 사람’(11)이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라 하는 그 사람’은 당시 일반 사람들이 말했던 것과 틀리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께서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그가 하나님의 선택자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잃어버린 자를 찾아오셨습니다.
우리에게도 바디메오처럼 말씀만 듣고서도 예수님을 죄인의 구주이심을 쉽게 믿는 사람도 있습니다. 반면에 오랜 시간을 가르치고 배우고 더디 믿어 구원받는 사람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고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고 말씀하신 것은 그의 소극적인 믿음이었기 때문입니다. 소극적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예수님께서 하시는 것을 거절하지 않고 말씀대로 실로암에 가서 씻고 밝은 눈으로 왔습니다.
그리고 그는 자기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사람들은 ‘네 눈이 어떻게 떠 졌느냐’고 물었고 그는 ‘예수라 하는 그 사람이 진흙을 이겨 내 눈에 바르고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 하기에 가서 씻었더니 보게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가 안식일을 범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그가 어디 있느냐’고 물었지만, 그는 ‘알지 못한다’고 말했습니다(8-12). 그는 예수님을 찾지도 않았을 뿐 아니라 감사할 마음도 없었습니다.
“유대인들이 누구든지 예수를 그리스도로 시인하는 자는 출교하기로 결의하였으므로”(22) 그가 출교가 두려워서 예수를 찾지도 않았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바리새인들과 대화하면서 자기의 눈을 뜨게 하였으니 ‘이상하다’(13-30)고 하며 결국 ‘예수님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분이심’(30,33)을 깨달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분이라고 말함으로 그는 쫓아냈습니다(33,34). 쫓아냄은 범적으로 출교입니다. 출교는 공민권이 박탈되며 공동체로부터 추방당하는 유대인들에게는 사형 선고와도 다름없는 엄중한 처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출교를 두려워하지 않고 바리새인들 앞에서 ‘자신을 고쳐준 그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자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믿음이 성숙해졌습니다.
유대인들이 그를 쫓아냈다는 말을 들으시고 예수님께서 그를 찾아오셨습니다. 유대인들은 출교시켜 그를 쫓아냈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를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매우 중요한 것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네가 인자를 믿느냐’라고 물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예수가 ‘하나님께로부터 오셨다’는 것은 알았지만 ‘인자’라는 말은 처음 들어서 인자가 누군지 몰랐습니다.
그래서 그는 ‘주여, 그가 누구시오니이까 내가 믿고자 하나이다’라고 말했고 예수님은 자신이 인자이심을 가르쳐 주셨습니다(36,37).
‘인자’란 예수님의 칭호 중 하나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마25:31)라고 말씀하셨던 것처럼 ‘네가 인자를 믿느냐’고 물으신 것은 그에게 종말론적인 믿음을 가르쳐 주기 위해서였습니다.
오늘의 교회 안에도 ‘인자’가 최후의 날에 심판주가 되심을 모두 가 안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네가 인자를 믿느냐’고 묻습니다.
그는 ‘인자가 누구시오니이까 내가 믿고자 하나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이렇게 말한 것은 자신의 부족한 믿음을 알고 인자가 누구신가를 알고 믿고자 하는 열심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그에게 “네가 그를 보았거니와 지금 너와 말하는 자가 그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 자신이 ‘인자이심’으로 최후의 심판의 날에 심판주 되심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때 그는 “주여 내가 믿나이다”라고 말하며 절하였습니다(38). ‘절하다’는 ‘경배하다’는 의미로 예수님을 최후의 심판의 날에 대심판주로 경배함으로 완전한 믿음의 사람이 된 것입니다.
날 때부터 맹인이었던 사람은 손톱만큼의 작은 믿음도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그를 찾아오셔서 가르쳐서 구원받을 수 있는 완전한 믿음의 사람이 될 수 있었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그에게 ‘내가 심판하려 이 세상에 왔다’(39)고 말씀하시며 종말론적인 최후의 심판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아직도 불완전한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받은 자들이기 때문에 오늘도 하나님께서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에 대한 말씀을 가르쳐 주시고 구원받을 수 있는 완전한 믿음의 사람이 되도록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이것을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찾아오셔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시고 한 사람도 버리지 않고 찾아 구원하십니다.
요즘 세상 돌아가는 것을 보면 세상 종말이 머지않은 것 같습니다. 반드시 그날은 올 것입니다.
‘인자가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시고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의인과 악인으로 구분하실 것입니다(마25:31-46).
그날 우리 모두 완전한 믿음의 사람이 되어서 주님 맞이하시고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서 영생합시다.
첫댓글 💖자기를 아는 자는 남을 원망하지 않고 천명을 아는 자는 하늘을 원망하지 않습니다.
시들은 꽃은 또 피지만 한번 꺽인 꽃은 다시 피지 못합니다.
병 없는 것이 제일가는 이익이요 만족할 줄 아는 것이 제일 가는 부자입니다.
오늘도 몸도 마음도 따뜻한 기분 좋은날 되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설교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설교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