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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재유고(明齋遺稿)
명재유고 제39권 / 묘갈명(墓碣銘)
번역문
한성부 서윤(漢城府庶尹) 이공(李公) 묘갈명
공의 휘는 지웅(志雄), 자는 만부(萬夫), 본관은 성주(星州)이며, 고려 개국 공신 총언(悤言)의 후손이다. 대대로 벼슬을 하였고 우리 조선에 들어와서 휘 약동(約東)이 덕행과 청렴결백, 분수에 자족하며 물러난 것으로 이름이 났다. 소재(小宰)를 지냈고 시호는 평정(平靖)인데 곧 공의 7대조이다. 고조의 휘는 석명(碩明)인데 군수를 지냈고 병조 참판에 추증되었으며, 청렴한 절조는 집안에 대대로 전해 온 것으로 사람들이 그의 절조를 ‘맑은 물[淸水]’에 비유하였다. 증조의 휘는 희선(喜善)인데 경행(經行)이 있어서 동몽교관이 되고 좌찬성에 추증되었다. 조부의 휘는 상급(尙伋)인데 병조 참지를 지냈고 이조 판서에 추증되었는데, 형 충숙공(忠肅公) 상길(尙吉)과 함께 모두 곧은 절개로 당시에 존경을 받았다. 선고(先考)의 휘는 련(堜)인데 지조와 행실이 남보다 뛰어났고, 모친상을 당해서 애통함으로 몸이 몹시 상한 나머지 작고하였으며, 뒤에 좌승지에 추증되었다. 선비(先妣)는 가림 조씨(嘉林趙氏)와 전성 이씨(全城李氏) 두 분인데, 모두 숙부인(淑夫人)에 추증되었다. 이씨는 의빈부 도사(儀賓府都事) 구준(耈俊)의 따님이자 청강공(淸江公) 제신(濟臣)의 손녀이다. 숭정 무진년(1628, 인조6) 7월 1일에 공을 낳았다.
공은 아이 때부터 효애(孝愛)가 순박하고 독실하였다. 8세에 부친상을 당하였는데 초상 치르기를 성인처럼 하였고, 10세에 승중상(承重喪)의 상복을 입었다. 계부(季父) 승지공(承旨公)에게 수학하였는데, 아침부터 밤까지 게을리 하지 않았다. 장성해서는 시문(詩文)으로 당시에 이름이 났다. 27세에 사마 양시(司馬兩試)에 합격하였다. 31세에 선릉 참봉(宣陵參奉)에 제수되고 선공감 봉사(繕工監奉事)로 승진하였다. 그 뒤에 상서원 직장(尙瑞院直長)을 거쳐 전생서 주부(典牲署主簿)로 승진하고 형조 좌랑으로 옮겼다가 정랑으로 승진하였다. 한마디 말로 옥사를 판결하여 송사 문서가 적체되지 않으니, 여러 당상들이 너나없이 칭찬하고 감탄하였다. 이때 모부인이 나이가 많은 탓에 공은 고을 수령 자리 하나를 얻어 모부인을 봉양하겠다는 소원이 매우 간절하였다. 그러나 형조의 규례로 인하여 그 자리를 떠나지 못하고 20여 개월 재직하다가 모친상을 당하니 사람들이 모두 가슴 아파하였다. 묘소 아래에서 시묘를 살았는데 애통함으로 몸이 몹시 상한 나머지 거의 죽을 뻔하였고, 삼년상을 마친 뒤에도 묘소를 지키느라 차마 떠나지 못하였다.
기유년(1669, 현종10) 가을에 호조 정랑에 제수되었다가 곧 체직되었다. 겨울에 조지서 별제(造紙署別提)에 제수되고 사직서 영(社稷署令), 종친부 전부(宗親府典簿)로 옮겼다. 경술년(1670) 겨울에 가평 군수(加平郡守)에 제수되었는데, 이해는 흉년이 든 데다, 본군(本郡)은 기내(畿內)의 잔약한 고을이어서 평소 저축한 것이 없었다. 공은 지성으로 경영하고 상사(上司)에 곡식을 보내 주도록 청하였으며, 혹은 부유한 백성에게 곡식을 내도록 권유하고, 심지어 자신의 녹봉을 떼어서 돕기까지 하였다. 무릇 백성의 목숨을 살릴 수 있는 것이라면 마음을 다하여 행하지 않은 것이 없어서 온 경내가 이에 힘입어 보전하였다. 임기가 만료되자 고을 백성들이 묘당(廟堂)에 1년 더 잉임시켜 줄 것을 청하였고, 송덕비를 세워 덕을 칭송하고 오래도록 잊지 않았다.
정사년(1677, 숙종3)에 형조 정랑에 제수되었다. 무오년(1678)에 안성 군수(安城郡守)에 제수되었는데 곧 파직되었다. 경신년(1680)에 영천 군수(榮川郡守)에 제수되고 3년 있다가 병으로 체직되었다. 계해년(1683)에 상의원 첨정(尙衣院僉正)에 제수되고, 그해 겨울에 김제 군수(金堤郡守)에 제수되었는데 또 기근을 만나게 되자 굶주린 백성을 구휼하는 정사를, 한결같이 가평 군수 재임 시에 한 것처럼 하였다. 이에 백성들이 나무를 깎아 ‘만세토록 잊을 수 없다.[萬世難忘]’라는 글귀를 써서 온 경내에 두루 세웠다. 공은 5년 동안 재임하면서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같았고, 정묘년(1687)에 파직되어 돌아왔다.
기사년(1689) 여름에 궁궐에 변고가 있자, 공은 오공 두인(吳公斗寅)의 상소에 참여하고 이어 두문불출하였다. 갑술년(1694)에 한성부 서윤에 제수되자 마지못해 직무를 맡았고 병자년(1696, 숙종22)에 체직되었다. 무인년(1698)에 익위사 사어(翊衛司司禦)에 제수되었고, 해직되어 집에서 한가하게 지낼 때에는 오직 도서(圖書)를 보면서 스스로 즐겼다. 신사년(1701) 7월 14일에 갑자기 병도 없이 작고하여, 판서공(判書公)의 묘소 아래 해좌(亥坐)의 언덕에 장사 지냈다.
공은 천성이 어질고 자애로우며 공손하고 검소하였으며, 온화하고 근신하며 주도면밀하고 상세하여, 아무리 급작스러운 때를 만나더라도 마음이 동요된 적이 없었다. 남들에게 매우 정답고 친절하였으며 남들의 시비와 과실에 대해 말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항상 말하기를, “남을 위해서 하는 일은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반드시 내 마음을 다해야 하니, 그런 뒤에야 최선을 다했다고 할 수 있다.” 하였다. 벼슬하지 않고 집에 있을 때나 벼슬자리에 있을 때나 항상 부지런하고 조심스럽게 행동하였다.
군현(郡縣)의 수령으로 있을 때에 항상 말하기를, “수령이 된 자는 조정에서 명한 칠사(七事)를 힘써 행하며 항상 여기에 능숙하지 못한 것을 부끄러워해야 한다.” 하였다. 또 말하기를, “백성에게 논밭을 갈고 씨 뿌리는 것을 제때에 하게 하고, 유생(儒生)들에게 학업을 하는 데 일과(日課)가 있게 하며, 군사는 정해진 인원을 채우고 백성에게 규정 이외의 세금을 더 부과하지 않는다면 거의 칠사를 저버리지 않게 될 것이다.” 하였다. 또 말하기를, “응전(鷹鸇)이 난봉(鸞鳳)만 못하다.” 하였다.
어떤 사람이 자손을 위하여 생계 수단을 마련할 것을 권하니, 공이 말하기를, “청렴결백을 집안 대대로 전해 온 것은 본래 선대(先代)의 훈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자손들이 마땅히 경서의 가르침을 생업으로 삼아 열심히 공부하여 스스로 수립하는 바가 있으면 그만일 뿐이다. 내가 어찌 자손들을 위해 생계 수단을 마련할 것인가.” 하였다. 이런 말을 살펴보면 공이 지키는 바를 알 수 있다.
공은 계씨(季氏) 첨추공(僉樞公)과 우애가 매우 돈독하여 각자 멀리서 벼슬살이할 때가 아니면 만나지 않은 날이 없었으며, 형제간의 화목한 즐거움은 늙어서도 쇠하지 않았다. 벼슬하지 않아 양식이 떨어질까 걱정하는 일은 사람들이 견디기 어려운 것인데, 공은 담담히 아무렇지 않게 여겼다. 여러 조카들을 자기 자식처럼 사랑하여 질병과 우환이 있으면 몸소 자상하게 돌봐 주었고, 친척은 멀고 가까운 사이를 따지지 않고 돈독함과 화목함에 차이가 없었으니, 공의 아름다운 덕이 대개 이와 같았다.
배위(配位)는 경주 이씨(慶州李氏)로 익위사 사어 인실(仁實)의 따님이다. 단정하고 맑은 성품을 타고났고 부도(婦道)를 잘 갖추어서 일가친척들에게 칭찬을 받았다.
4남 2녀를 낳았으니, 장남은 세황(世璜)인데 통정대부(通政大夫)로 목사(牧使)를 지냈고, 차남은 세구(世球)인데 일찍 죽었으며, 삼남은 세관(世瓘)인데 또한 공보다 먼저 죽었고, 막내는 세환(世瑍)인데 문장과 덕행이 있었다. 장녀는 윤규(尹揆)에게 시집갔는데, 그는 경행(經行)으로 천거되어 참봉이 되었고, 차녀는 윤황(尹熀)에게 시집갔는데 일찍 죽었다.
세황은 1남 1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정상(挺相)이고 딸은 유급(柳級)에게 시집갔다. 서출 아들이 둘인데 정의(挺椬)와 정량(挺樑)이며, 딸 하나는 어리다. 세구는 1녀를 두었는데 김성대(金聲大)에게 시집갔다. 세관은 딸이 둘이고 아들이 없어서 아우 세환의 차남 정박(挺樸)을 후사로 삼았고, 딸은 한덕일(韓德一)과 박징빈(朴徵賓)에게 시집갔다. 세환은 2남을 두었는데 정욱(挺郁)과 정박이고, 딸 하나는 어리다. 윤규는 2남을 두었는데 장교(莊敎)와 영교(英敎)이고, 딸은 이석기(李錫祺)에게 시집갔다. 윤황은 2남을 두었는데 취만(就晩)과 최만(最晩)이고, 딸은 이잠(李潛)에게 시집갔다.
정상은 1녀를 두었고, 정욱은 1남 1녀를 두었는데, 모두 어리다.
나는 공과 대대로 사귀어 온 정의(情誼)가 깊은데, 공이 남쪽 지방에 올 때면 자주 깊은 산골짜기까지 찾아 주시어 그 자상하고 두터운 정을 항상 마음에 간직하고 있었다. 아우 추(推)가 김제(金堤)에서 돌아와 말하기를, “공이 백성들에게 남긴 은택이 있어 지금까지 그 맑은 덕을 칭송하고 있다.” 하였는데, 여기에서 공의 행의(行義)를 더욱 잘 알았다. 공의 아들 세환이 묘문(墓文)을 부탁하였는데 나는 쇠병(衰病)으로 글을 짓지 못한다고 사양했지만 끝내 사양할 수 없어서, 삼가 묘문을 편차하고 명(銘)을 짓는다.
※ 파평 윤씨 족보를 간략히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윤창세(尹昌世)의 아들이 윤황(尹煌)과 윤흡(尹熻)이다. 윤황은 윤선거(尹宣擧)를 낳았고 윤선거는 윤증(尹拯
)을 낳았다. 그리고 윤흡은 윤명거(尹溟擧)를 낳았다. 이 윤명거가 이상급(李尙伋)의 사위가 되는데 윤증에게 오촌당숙이 된다. 이런 인연으로 윤증은 이상급의 아들 이련(李堜)과 이련의 아들인 이지웅(李志雄)과 이지걸(李志傑)의 묘지명을 짓게 된다.
아름다운 자질이여 / 有美其質
타고난 기품이 돈후했고 / 稟則厚兮
성대한 문장이여 / 有蔚其文
재주가 빼어났도다 / 才則茂兮
크게 재능을 펴지 못했으니 / 而不大闡
운명이 기구하였네 / 命之畸兮
말년의 유유자적한 생활 / 棲遲末路
끝내 여기에 그쳤구려 / 竟止斯兮
오직 하늘이 내린 양심을 / 唯有天衷
유독 홀로 보전하였으니 / 獨自保兮
세상살이 부침이야 / 世間升沈
어찌 말할 것이 있겠는가 / 詎足道兮
형제간에 서로 화목하여 / 塤篪相和
늘그막까지 즐거워했는데 / 暮境樂兮
어느 날 갑자기 돌아가서 / 一日觀化
티끌세상에서 벗어났네 / 蛻塵濁兮
대대로 음덕을 쌓아서 / 世積其餘
후손에게 남겨 주었네 / 以遣後兮
비석에 비문을 새기니 / 劖之于石
오랜 후세에 징험하리라 / 可徵久兮
[주-D001] 소재(小宰) : 이조 참판의 별칭이다. 소재는 춘추 시대에는 태재(太宰)를 보좌하여 국정(國政)을 다스렸고, 명청(明淸) 시대에는 이부 시랑(吏部侍郞)을 지칭하는 말이었다. 소재(少宰)와 통용된다. 《春秋左氏傳 宣公2年》 《傳習錄 中 答羅整庵小宰書》
[주-D002] 경행(經行) : 경명행수(經明行修)의 약칭으로 경서에 밝고 행실이 바르다는 뜻이다. 과거(科擧)에 의하지 않고 학문과 덕행이 높은 이를 천용(薦用)하는 인재 등용 방법의 하나이다. 《國朝寶鑑 卷23 明宗 21年 5月》
[주-D003] 승중상(承重喪) : 아버지를 여읜 맏아들이 할아버지나 할머니의 상을 당한 경우를 말하는데, 여기서는 이지웅(李志雄)의 조부 이상급(李尙伋:1572~1637)이 강화도가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묘사(廟社)를 받들고 강화도로 들어간 형 이상길(李尙吉)을 찾아가다가, 도중에서 적병을 만나 살해된 사건을 말한다. 《인조실록》 15년(1637) 2월 2일 기사에는 이상급이 길에서 얼어 죽은 것으로 되어 있다.
[주-D004] 계부(季父) 승지공(承旨公) : 이인(李(土寅):1608~?)을 가리킨다. 《韓國系行譜 碧珍李氏》[주-D005] 기사년 …… 있자 : 숙종의 계비(繼妃) 인현왕후(仁顯王后) 민씨(閔氏)가 폐위된 사건을 말한다. 1688년(숙종14) 숙원(淑媛) 장씨(張氏)가 뒷날 경종이 된 왕자 윤(昀)을 낳았는데, 1689년 2월 송시열(宋時烈) 등 노론(老論)이 윤을 원자(元子)로 봉하는 데 반대하면서 숙종과 대립한 결과,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남인(南人)이 다시 집권하면서 장씨는 희빈(禧嬪)이 되었고, 민씨는 그해 5월 남인들의 주장으로 폐위되었다.
[주-D006] 공은 …… 참여하고 : 전(前) 사직(司直) 오두인(吳斗寅) 등 86인이 인현왕후의 폐출을 반대하는 상소를 올려 숙종의 노여움을 사게 되어 오두인, 박태보(朴泰輔) 등 몇 사람이 한밤중에 친국(親鞫)을 당하였다. 《肅宗實錄 15年 4月 25日》
[주-D007] 칠사(七事) : 수령이 고을을 다스리는 데 힘써야 할 일곱 가지 일로, 농상(農桑)을 진흥하고, 호구(戶口)를 늘리고, 학교(學校)를 일으키고, 군정(軍政)을 잘 다스리고, 부역(賦役)을 고르게 하고, 사송(詞訟)을 간결하게 하고, 간활(奸猾)이 없어지게 하는 일을 말한다. 《經國大典 吏典》
[주-D008] 응전(鷹鸇)이 난봉(鸞鳳)만 못하다 : 어진 정사가 가혹한 정사보다 낫다는 말이다. 후한(後漢) 때 고성 영(考城令) 왕환(王渙)이 엄맹(嚴猛)한 정사를 숭상하다가, 구람(仇覽)이 덕으로 사람을 교화한다는 말을 듣고 그를 주부(主簿)로 임명하고서 말하기를, “주부는 진원(陳元)의 죄과를 듣고도 처벌하지 않고 그를 교화했다 하니, 응전 같은 맹렬한 뜻이 적은 게 아닌가?” 하니, 구람이 말하기를, “응전이 난봉만 못합니다.” 하였다. 《後漢書 仇覽列傳》
[주-D009] 계씨(季氏) 첨추공(僉樞公) : 이지걸(李志傑:1632~1702)을 가리킨다. 《明齋遺稿 卷39 僉知中樞府事李公墓碣銘, 韓國文集叢刊 136輯》
[주-D010] 경행(經行) : 경명행수(經明行修)의 약칭으로 경서에 밝고 행실이 바르다는 뜻이다. 과거(科擧)에 의하지 않고 학문과 덕행이 높은 이를 천용(薦用)하는 인재 등용 방법의 하나이다. 《國朝寶鑑 卷23 明宗 21年 5月》
ⓒ 한국고전번역원 | 김기빈 (역) | 2008
원문
漢城府庶尹李公墓碣銘
公諱志雄。字萬夫。星州人。高麗開國功臣悤言之後。世襲簪組。入我 朝。有諱約東。以德行廉白恬退。著名。小宰。諡平靖。卽公之七代祖也。高祖諱碩明。郡守贈兵曹參判。廉操世其家。人比之淸水。曾祖諱喜善。有經行。童蒙敎官 贈左贊成。祖諱尙伋。兵曹參知贈吏曹判書。與兄忠肅公尙吉。俱以直節重一世。考諱埬。志行出人。丁內艱。以毀歿。後 贈左承旨。妣嘉林趙氏。全城李氏。俱 贈淑夫人。李氏儀賓都事耇俊之女。淸江公濟臣之孫。以 崇禎戊辰七月一日生公。自兒時。孝愛純篤。八歲。遭外艱。執喪如成人。十歲。服承重喪。從季父承旨公受學。夙夜不懈。及長。以詩文名一時。二十七。中司馬兩試。三十一。除 宣陵參奉。陞繕工監奉事。歷尙瑞院直長。陞典牲署主簿。移刑曹佐郞。陞正郞。片言折獄。簿牒不滯。諸堂上莫不稱歎。時母夫人年高。得一縣便養之願甚切。而以曹例。不得離。在職二十餘朔。終遭憂。人皆傷之。居廬墓下。羸毀幾滅性。外除後。猶守墓不忍去。己酉秋。拜戶曹正郞旋遞。冬。拜造紙署別提。移社稷署令,宗親府典簿。庚戌冬。除加平郡守。歲適大侵。郡以畿內殘邑。素無儲積。公至誠經營。請上司移粟。或勸諭富民出穀。至於捐廩俸以助。凡可以救活民命者。無不盡心爲之。以此闔境賴以保存。及瓜滿。邑民請廟堂加留一年。立石頌德。久而不忘焉。丁巳。拜刑曹正郞。戊午。除安城郡守。旋罷。庚申。除榮川郡守。三年以病遞。癸亥。拜尙衣院僉正。其冬。除金堤郡守。適又値荒歉賑飢之政。一如在加平時。民削木書萬世難忘字。徧一境豎之。居五年。終始如一。丁卯。罷歸。己巳夏。有 宮闈變故。公與於吳公斗寅疏。仍杜門不出。至甲戌。除漢城府庶尹。黽勉供職。丙子。遞。戊寅。除翊衛司司禦。及解職居閒。唯以圖書自娛。辛巳七月十四日。忽無疾而卒。葬於判書公墓下負亥之原。公天性仁慈恭儉。和謹周詳。雖遇急遽之時。未嘗動其心。與人款曲。不喜言人是非過失。常曰。謀人之事。雖至微細。必盡吾心。然後方可謂之忠。居家莅職。必勤必愼。居郡縣時。常曰。爲守令者。當勉行朝廷所命七事。而常媿其未能。又曰。使民耕種以時。使章甫學業有程。軍無闕額。而民不加賦。則庶幾不負於七事。又曰。鷹鸇不若鸞鳳。或勸爲子孫立產業則曰。淸白傳家。自有先訓。渠輩當菑畬經訓。以自樹立而已。吾何以產業爲哉。觀於此等言語。可以知公之所守也。公與季氏僉樞公。友愛甚篤。非各有遠宦之時。則無日不會。怡怡之樂。到老不衰。每家居艱食之患。人所難堪。而淡然不以爲意。愛諸從子女輩。無異己子。疾病憂患。躬自勤恤。親戚不問遠近。敦睦無間。公之懿德。大槩如此。配慶州李氏。翊衛司司禦仁實之女。生稟端淑。內則甚備。爲宗黨所稱。生四男二女。男長世璜。通政牧使。次世球。早歿。次世瓘。亦先公歿。次世瑍。有文行。女長適尹揆。薦經行爲參奉。次尹熀。早卒。世璜一男一女。男挺相。女適柳級。庶男二。挺植,挺樑。一女。幼。世球一女。適金聲大。世瓘二女無男。取弟世瑍次子挺樸爲後。女韓德一,朴徵賓。世瑍二男。挺郁,挺樸。一女。幼。尹揆二男。莊敎,英敎。女李錫祺。尹熀二男。就晩,最晩。女李潛。挺相一女。挺郁一男一女。俱幼。拯與公世誼不泛。公之來南中也。屢訪於窮谷。勤厚之情常在于懷。家弟推還自金堤。言公遺愛在民。至今誦其淸德。益知公之行義也。公之子世瑍。以墓文相託。衰病不能爲文字。而辭不獲。謹序次而爲銘。
有美其質。稟則厚兮。 有蔚其文。才則茂兮。 而不大闡。命之畸兮。 棲遲末路。竟止斯兮。 唯有天衷。獨自保兮。 世間升沈。詎足道兮。 塤篪相和。暮境樂兮。 一日觀化。蛻塵濁兮。 世積其餘。以遣後兮。 劖之于石。可徵久兮。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