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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415 묵상글 ( 부활 팔일 축제 토요일. - 믿지 못하는 우리를 믿으시는 주님.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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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415. 부활 팔일 축제 토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믿지 못하는 우리를 믿으시는 주님
부활 8부 토요일-2013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불신과 완고한 마음을 꾸짖으셨다.
되살아난 당신을 본 이들의 말을 그들이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이어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마르코복음은 복음 전체가 그렇지만 어쩌면 가장 중요하다고 할
주님 부활의 기사도 아주 짧게 기술하고 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나신 얘기.
시골로 가는 두 제자에게 나타나신 애기.
그리고 마침내 열한 제자에게 나타나신 얘기.
이렇게 세 가지 부활 발현 사화가 마르코복음에서는 짧게 전해지는데,
여기서 열 한 제자는 막달라 마리아가 전한 주님 부활 얘기를 믿지 않고,
두 제자가 전한 부활 얘기도 믿지 않다가 주님으로부터 꾸지람을 듣습니다.
이렇게 짧은 주님 부활 발현 얘기를 제자들이 믿지 않은 얘기로 채운 다음
마르코복음은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복음 선포 사명을 주신 얘기로 끝냅니다.
그런데 이런 얘기가 참으로 이상스럽습니다.
당신의 부활을 철석같이 믿는 제자들에게 복음 선포를 맡겨도
그 사명을 잘 수행할까 말까일 텐데
주님께서는 믿지 않는 제자들에게 그 중요한 사명을 맡기십니다.
믿지 못하는 제자들을 당신도 믿지 못하면서도 맡기신 것인지,
믿지 못하는 제자들을 당신은 그래도 믿으시기에 맡기신 것인지.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저는 믿지 못하는 제자들을 믿으셨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여기에 우리와 하느님의 믿음 차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작은 믿음과 큰 믿음의 차이이지요.
작은 믿음은 큰 믿음도 불신하거나 배신하는 데 비해
큰 믿음은 작은 믿음도 믿습니다.
작은 믿음은 주님께서 더 큰 사랑 때문에 주시는 고통에도 사랑을 의심하고,
조그만 안 좋은 일이 닥쳐도 주님의 선하심을 의심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큰 믿음은 애초부터 제자들이 당신의 크신 사랑을
작은 고통 때문에 배반할 것을 알고 계시면서도 믿으시고,
유다와 베드로가 당신을 배반할 것을 아시고도
당신 제자 삼으시고 교회의 반석 삼으셨습니다.
작은 믿음은 믿음대로 금방 되지 않으면 불신과 배신으로 이어지지만
큰 믿음은 작은 믿음이 큰 믿음으로 성장할 때까지 기다려줍니다.
아니, 기다릴 뿐 아니라 성장하도록 격려해줍니다.
작은 믿음은 내가 바라는 대로 돼야지만 믿음을 지속하지만
큰 믿음은 내가 바라는 대로 되지 않아도 믿음을 지속합니다.
큰 믿음은 큰 허물도 있을 수 있다고 하며 상대를 믿어주지만
작은 믿음은 작은 허물도 용서할 수 없는 죄라고 단죄합니다.
작은 믿음은 그 보잘것없는 믿음을 가지고 생색내거나
자기 믿음이 배신당한 것에 대해 크게 상심하고 포기하지만
큰 믿음은 믿음의 배신자를 용서하고 품어줍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의 큰 믿음은 당신의 큰 믿음이 제자들의 작은 믿음 때문에 배신당해도
믿은 대로 될 때까지 믿어주고,
믿은 바대로 되도록 온갖 은총, 무엇보다도 성령을 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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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415. 부활 팔일 축제 토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라.”(마르 16,15)
오늘 <알렐루야 환호송>에서 이렇게 노래합니다.
“이날은 주님께서 마련하신 날, 이날을 기뻐하며 즐거워하세.”(시 118,24)
그렇습니다. 오늘, 이날은 제가 만든 날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마련하시고 건네주신 날입니다. 인간에게 큰 사랑이 베풀어진 날이요, 당신의 죽음으로 부활생명을 선물로 주신 날입니다. 하늘이 열리고 새로운 창조가 이루어진 날입니다. 이 날의 아름다움을 교종 프란치스코께서는 <복음의 기쁨>에서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드러난, 구원하시는 하느님 사랑의 아름다움”(36항)이라고 표현합니다.
여기에는, ‘주님의 사랑을 볼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막달레나 마리아도, 엠마우스의 두 제자들도, 모여 있던 열 한 제자들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보지는 못 하였습니다. 그 아름다움을 보지 못 하였던 것입니다. 맑고 투명한 ‘믿음의 눈’이 열리지 않은 까닭입니다. 이미 듣고 보았지만, 믿지를 않은 까닭입니다. 이를 믿게 되면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이를 우리는 요즈음 <제1독서>인 <사도행전>을 통해서 계속해서 듣고 있습니다. 부활을 믿는 이들 안에서 어떠한 어마어마한 일들이 일어나는지 말입니다.
이처럼, 부활은 ‘믿음’ 안에서 체험하게 되는 신비라 할 수 있습니다. 부활은 믿음이 삶이 될 때, 비로소 깨닫게 되고 증거 됩니다. 믿음이 삶이 될 때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당신의 몸을 매달 듯, 그렇게 자신을 내어놓고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을 말합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제자들에게 복음 선포의 사명이 주어집니다.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라.”(마르 16,15)
여기에서, 먼저 알아들어야 할 것은 우리는 온 세상에로 “가라”는 파견을 받았다는 사실입니다. 자신 안에만 머물지 말고, 타자에게로 나아가라는 말씀입니다. “향하여 나아가는 존재”, 이것은 바로 그리스도인의 신원임을 말해줍니다. 마치 당신께서 우리에게 그렇게 향하여 먼저 다가오셨듯이 말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먼저 “파견 받은 자”가 되어야 하고, 파견하신 분의 뜻을 사명으로 받아들여야 할 일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파견 받았으되, “온 세상 모든 피조물”에게 파견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곧 유다민족이나 이방민족이나. 우방이나 적국이나,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가리지 않고 모든 민족 온 인류에게로 가라는 것이요, 또한 인간뿐만이 아니라 “모든 피조물”에게로 가라는 파견이요, 그들에게 “복음”을 선포하라는 파견입니다. 모든 피조물과 더불어 이웃이 되고, 형제가 되고, 한 가족이 되라는 말씀입니다.
이는 세상에 살되 세상의 힘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힘으로 살라는 말씀이요, 땅을 딛고 걷되 하늘을 바라보며 걸으며, 동료와 손을 잡고 걷되 다름 아닌 당신과 함께 걸으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프란치스코 교종께서는 회칙 [찬미를 받으소서](2015.6.18.)에서, 우리가 더불어 사는 집인 지구가 “우리와 함께 사는 누이이며, 두 팔 벌려 우리를 품어주는 어머니”(1항)라는 사실을 상기시키면서, 피조물에 관한 책임을 성경의 전승에 비추어 설명해주고 있습니다(제2장 피조물에 관한 복음).
그렇다면 오늘, 나는 내 형제에게 모든 피조물에게,
이웃이 되고 형제가 되고 한 가족이 되어주고 있는가?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라.”(마르 16,15)
주님!
제 자신 안에만 머물러 있지 않게 하소서.
세상에로, 이웃형제들에게로, 모든 피조물들에게 나아가게 하소서.
먼저 다가가고, 먼저 사랑하게 하소서.
자국민이나 이주민이나, 부유하거나 가난하거나, 친구이거나 적이거나,
사람이거나 자연이거나, 모든 피조물과 더불어 형제가 되게 하소서
함께 걷되 손을 잡고 걷고, 땅을 딛고 걷되 하늘을 바라보게 하소서.
세상에 살되 세상의 힘이 아닌, 복음의 힘으로 살게 하소서.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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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415. 부활 팔일 축제 토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복음을 선포하여라
우리가 만나는 한 사람, 한 사람이 소중합니다. 다양한 사람이지만 그들을 인정해 주고 공감해 주며 위로해 준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할 수 있다면 참으로 행복한 일입니다. 그리고 한 사람을 기억하고 그로부터 주어진 기쁨을 간직할 수 있다는 것은 큰 보람입니다. 그러므로 일상 안에서 행복과 보람을 만들 수 있도록 노력하는 정성이 꼭 필요합니다. 지금 순간 나와 만남을 이루는 이의 행복과 구원을 위해 희생할 수 있는 은총을 누렸으면 좋겠습니다. 사랑을 받는 것도 행복이지만,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다면 더 큰 기쁨입니다.
‘금맥보다 중요한 것이 인맥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한 개인과의 관계를 얼마나 큰 정성과 사랑을 가지고 맺어야 하는가를 말해줍니다. 관계의 형성이 곧 복음의 선포입니다. 한 사람을 주님 안에 감사할 수 있도록 눈뜨게 한다면 그를 통해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주님께 인도될지는 상상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주님을 전하려면 먼저 내면이 주님으로 가득 차지 않으면, 안 됩니다. 가진 것을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마르16,15).는 사명을 주셨기에 우리는 복음을 선포해야 합니다. 그 복음은 나자렛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입니다. 또한 하느님 나라에 관한 구원의 복된 소식입니다. 그런데 복음을 선포하는 방법은 다양하고, 일상 안에서 표현되는 사랑이야말로 주님을 만나는 감동을 줍니다. 어떤 기회를 특별히 만들어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주어지는 매 순간을 마음을 다해 사랑하고 최선을 다하면, 그것이 큰 사랑이요, 복음의 선포입니다.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가 구원을 받는다는 기쁜 소식이지만, 우리 자신이 복음이 되어야 합니다. 내가 기쁘지 않은데 누가 나를 통하여 기쁜 소식을 접할 수 있겠습니까? “믿음이 없이는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릴 수 없는 것처럼 온유함 없이는 이웃을 기쁘게 하지 못합니다”(레오나르도 무리알도).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의 부활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은 그들의 마음이 굳어져 있었던 까닭입니다. 자기 것으로 가득 차 있으면 다른 어떤 것도 들어갈 수 없는 법입니다. “담기는 것은 담는 그릇의 모양에 따라 달라진다.”는 옛말이 있듯이 은총이 풍부해도 담을 그릇의 준비를 제대로 하지 않으면 담을 수 없습니다. 비어 있지 않은 그릇에 무엇을 담을 수 있겠습니까? 부활의 사실을 이미 예고해 주었고 또 그대로 이루어졌지만, 제자들은 여전히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불신과 완고한 마음을 꾸짖으시고 이르셨습니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마르16,15).
예수님께서는 듣는 사람의 반응에 상관없이 당신의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당신은 언제나 하느님의 뜻을 전하는 것이 소명이기 때문입니다. 받아들이고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자유의지를 지닌 본인의 몫입니다. 우리도 누구의 말에 구애받지 말고 주님의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자상함과 따뜻함으로 사랑을 가지고 온 정성을 다하여 그러나 사람의 눈에 들기보다 하느님의 눈에 들어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말고 전해야 합니다. 그렇지만 사람의 마음을 읽는 지혜도 필요합니다. 그들의 눈높이로 접근해야 효과 있게 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오늘도 그분을 믿고 따르는 이들에게 나타나십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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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415. 부활 팔일 축제 토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초등학교 때부터 공부에는 큰 관심이 없었습니다. 부모님도 공부를 열심히 하라고 독려하는 분이 아니었습니다. 가정 형편이 넉넉한 편도 아니었기에 그냥 학교에 다니는 것으로 만족했습니다. 중학교에 입학하면서도 큰 뜻이 없었습니다. 그저 남들이 가는대로 따라가는 편이었습니다. 고등학교는 공고에 가서 취직하려고 하였습니다. 중학교 2학년 때입니다. 10등 안에 들면 자전거를 사준다는 제안을 받았습니다. 결코 쉬운 일은 아니지만 자전거를 갖고 싶은 욕심에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성적은 17등이었습니다. 조금만 더 공부하면 자전거가 눈앞에 있었습니다. 드디어 9등을 했고, 자전거를 탈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친구들이 저를 의심하였습니다. 제가 커닝을 했다고 생각했습니다. 선생님도 믿지 못하는 것 같았습니다. 콩 심은데 콩이 나와야 하는데 팥이 나왔다고 생각하신 것 같았습니다. 저는 솔직히 서운했습니다. 그래서 더욱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커닝으로는 얻을 수 없는 성적을 받았습니다. 그제야 친구들도 저를 의심하지 않았고, 선생님도 저를 믿어 주셨습니다. 저는 성적이 오른 것도 좋았지만, 하면 된다는 자신감을 얻었습니다.
드러난 사실을 믿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첫째는 편견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나라를 선포할 때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출신을 보고 믿지 않았습니다. 나자렛에서 그런 예언자가 나올 리 없다는 편견입니다. 고향 사람들도 예수님의 표징과 말씀을 믿지 않았습니다. 자신들이 예수님을 잘 알고 있다는 편견입니다. 지금은 많이 없어졌지만 인종과 학력에 대한 편견도 많았습니다. 둘째는 진실을 가리기 위해서입니다. 손등으로 하늘을 가리려는 태도입니다. 거짓과 모함으로 진실을 덮으려 합니다. 진실이 드러날 경우 그동안 가졌던 특권과 특혜가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부정과 부패가 만연한 사회에서는 진실을 감추려합니다. 독재정치가 있는 곳에서도 진실을 감추려합니다. 대사제 가야파는 거짓된 예언으로 하느님의 아들을 죽음으로 내몰았습니다. 빌라도는 무죄한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죽게 하였습니다. 모두 진실을 덮기 위해서입니다. 셋째는 시기와 질투입니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말이 있습니다.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은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표징을 믿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베엘제블의 힘을 빌렸다고 하였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아니라 악마에게서 왔다고 모함했습니다. 어둠은 결코 빛을 이길 수 없습니다. 숨기려는 진실은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오늘 독서에서도 진실을 감추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유다의 지도자들과 원로들 그리고 율법학자들입니다. 그들은 편견이 있었습니다. 제자들이 무식하고, 평범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제자들이 한 번의 설교로 많은 사람이 세례를 받고, 늘어난 신자가 3000명이 넘었다는 사실을 믿지 못하였습니다. 그들은 진실을 감추려했습니다. 제자들이 보여준 표징을 감추려고 했습니다. 제자들을 감옥에 가두기도 했습니다. 교회의 박해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들은 시기와 질투가 있었습니다. 예수를 십자가에 매달았고, 죽음으로 내몰았으면 모든 것이 끝날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자기들이 죽인 예수님이 부활했다는 소문이 있었습니다. 그 소문의 시작은 ‘빈 무덤’이었습니다. 두려움에 떨며 숨어있던 제자들이 담대하게 복음을 선포하였습니다. 사람들이 다시금 제자들의 공동체로 모였습니다. 시기와 질투는 자신들의 권위가 무너질 수 있다는 두려움에서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을 불러서 “예수님의 이름으로는 절대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고 지시하였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당당하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여러분의 말을 듣는 것이 하느님 앞에 옳은 일인지 여러분 스스로 판단하십시오. 우리로서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제자들도 주님의 부활을 믿지 못하였습니다. 여자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보았다고 했을 때 믿지 못하였습니다. 편견 때문입니다. 다른 제자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보았다고 했을 때도 믿지 못하였습니다. 시기와 질투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그들의 불신과 완고함을 나무라셨습니다. 그들이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주님의 부활을 믿는다면 우리들 또한 부활의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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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415. 부활 팔일 축제 토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1970년 휴스턴 대학은 의과대학에 지원한 학생 중에서 먼저 필기시험을 쳐서 우수한 학생을 가려냈습니다. 그리고 필기시험 합격자 중에서 면접을 통해 최종 합격자를 선정했지요. 면접관들은 학업을 잘 감당하고 나중에 더 좋은 의사가 될 것으로 예상되는 학생들을 뽑았다고 자부했습니다. 그런데 행정착오가 있었습니다. 더 많은 인원이 배정되어 있었는데, 그보다 적은 인원을 뽑았던 것이지요. 그래서 면접에서 떨어뜨린 지원자 중 많은 학생을 합격시켜야 했습니다.
면접에서 떨어졌던 학생들은 나중에 실력이 부족한 의사가 되었을까요? 그렇지 않았습니다. 대학 생활에서도 성적의 차이는 거의 없었고, 오히려 떨어졌던 학생 중에서 능력이 특출한 의사가 많이 배출된 것입니다. 면접관의 판단이 잘못된 것일까요? 그보다는 면접에 합격한 학생들은 면접에만 더 우수한 능력을 갖추고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아무리 전문가라고 해도 무조건 정답은 아닐 수 있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코로나 팬데믹 초기에 얼마나 많은 전문가의 의견이 쏟아졌습니까? 100% 맞는 것인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 의견이 정답이 아니었습니다. 하긴 전문가들의 판단에 대한 진실 여부를 계산한 통계가 생각납니다. 겨우 54% 맞았을 뿐이라고 하더군요.
사람의 판단은 하느님이 아닌 이상 100% 맞을 수가 없음이 분명합니다. 따라서 사람의 판단에 무조건 의지하는 것이 아닌, 하느님의 판단에 의지할 수 있는 굳은 믿음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불완전한 사람의 판단에 대해서는 굳은 믿음을 보이고, 전지전능하신 하느님께 대해서는 불신의 마음을 보입니다. 제대로 살 수 없음이 분명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역시 사람의 판단만을 믿습니다. 즉, 세상의 관점을 통해서만 믿으려 합니다. 그래서 마리아 막달레나가 예수님께서 살아 계신다고 전해도 믿지 않았습니다. 또 엠마오로 가고 있던 두 제자가 자신들에게 나타나신 예수님을 알렸어도 여전히 믿지 않습니다.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날 수 없다는 세상의 판단만을 믿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일은 세상의 판단을 뛰어넘는다고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 볼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열한 제자가 식탁에 앉아 있을 때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불신과 완고한 마음을 꾸짖으십니다. 세상의 관점만을 바라보며 흔들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만을 바라보고 철저하게 의지하는 제자들이 되기를 바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이르십니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마르 16,15)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을 갖춘 사람은 주님의 이 말씀을 따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제1독서에 나오는 베드로와 요한의 말에 주목해야 할 것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여러분의 말을 듣는 것이 하느님 앞에 옳은 일인지 여러분 스스로 판단하십시오. 우리로서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사도 4,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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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모두 편견을 비난하지만 아직은 모두가 편견을 가지고 있다(H. 스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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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415. 부활 팔일 축제 토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배움의 여정
-믿음도 배우고 훈련해야 합니다-
성인들의 특징은 겸손입니다. 겸손이야말로 영성의 잣대입니다. 배움의 여정에 필수적인 것이 겸손입니다. 경청과 겸손있어야 배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배움의 여정중에 있는 우리들이요 배움에는 늘 초보자임을 깨닫습니다. 도대체 배움과 훈련에 해당되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기도도, 믿음도, 겸손도, 경청도, 순종도, 섬김도, 사랑도, 희망도 끊임없이 배우고 훈련해야 비로소 무지의 어둠에서 해방될 수 있습니다. 성 베네딕도 역시 당신의 수도공동체를 ‘주님을 섬기는 배움터’로 정의합니다. 평생 배워야 하는 섬김이요, 배우고 배워도 늘 초보자임을 깨닫는 것이 겸손이자 지혜입니다.
한국 지폐에 있는 얼굴을 아십니까? 이제 카드만을 사용하다보니 지폐의 얼굴을 보기도 힘들게 되었습니다. 천원권의 얼굴은 조선시대 최고의 성리학자 이황 퇴계, 오천원권은 이이 율곡, 만원권은 세종대왕, 오만원권은 율곡의 모친 신사임당입니다. 얼마전 퇴계 평전을 읽다가 다음 대목에서 감동했습니다.
“퇴계는 천재적 재능으로 사람들이 우러러보게 하거나 탁월한 이론이나 공적으로 사람들이 감탄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겪었던 실패담과 자신이 애써던 노력의 과정으로 누구에게나 아무런 거리감없이 결코 기가 꺾이는 일 없이 편안하게 그 앞에 다가 서게 해주는 스승이다.”
그대로 예수님을 닮은 겸손과 온유의 퇴계 스승임을 깨닫습니다. 어제 금요강론중 위대한 사막교부중 한분인 팜보압바의 임종시 남긴 일화가 긴 여운으로 남아있습니다.
“나는 하느님을 섬기는 것을 시작도 못했는데 하느님께 가는 구나!”
이런 겸허한 고백이 우리에게는 신선한 가르침이자 깨우침이 되니 오늘 지금 여기서 분발의 노력을 다해 하느님을 섬기는 일을 시작하게 합니다. 요즘 겨울 추위를 지낸 파스카의 청초한 봄꽃들이 한창입니다. 어제 써놓은 “참행복”이란 글이 생각납니다.
“청초한
파스카의 봄꽃들
하늘의 별같다
하늘을 바라보듯 땅을 바라본다
청초한
파스카의 봄꽃들
땅에서도 하늘의 별처럼 살 수 있겠다
오늘 지금 여기서”-2023.4.14.
참으로 끊임없는 회개를 통해 겸손과 지혜를 사는 믿음의 사람들이 파스카의 봄꽃들처럼, 땅에서도 하늘의 별처럼 사는 사람들이겠습니다. 사막교부들중 아르세니우스에 대한 일화도 감동적입니다.
-언젠가 아리세니우스 압바가 이집트의 농부 수도승에게 자기 생각에 대해 상의하는 모습을 본 제자가 의아해 하는 표정으로 묻습니다. “아니 스승님처럼 훌륭한 교육을 받은 분이 이런 농부에게 자신의 생각에 대해 묻습니까?” 그러자 아르세니우스 압바의 겸손한 대답입니다. “그렇다. 나는 많이 배운 사람이다. 그러나 나는 이 농부의 알파벳도 모른다.”-
배워야 할 것은 지식이나 학식보다는 겸손한 믿음에 삶의 지혜입니다. 우리는 주변에서 지식 유무와는 별개로 평범한 분들로부터 삶의 지혜를 배웁니다. 눈만 열리면 곳곳에서 발견되는 삶의 스승, 삶의 지혜입니다. 저 또한 공동체의 수도형제들의 일상으로부터 평범한 지혜를 많이 배우고 깨닫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우리는 얼마나 부활의 믿음을 지니는 것이 어려운지 배웁니다. 예수님의 부활했다는 소식에도 한결같이 믿지 못하는 제자들에게 발현하신 부활하신 주님은 제자들의 불신과 완고한 마음을 꾸짖습니다. 이어 당신 부활을 체험한 제자들에게 사명을 부여합니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복음의 골자는 십자가와 부활사건입니다. 죽고 부활하신 파스카 신비의 주님을, 파스카 기쁨의 주님을 선포하라는 것입니다. 역시 우리에게 주어지는 복음 선포의 사명입니다. 참으로 부활하신 파스카의 주님을, 파스카의 신비를, 파스카의 기쁨을, 파스카의 희망을 사는 것이 최고의 복음 선포임을 깨닫습니다.
끊임없이 파스카 주님을 체험할 수 있는 겸손한 믿음을 청해야 하겠습니다. 파스카 주님께 대한 믿음도 배움이자 훈련입니다. 믿음의 배움, 믿음의 훈련입니다. 바로 우리가 평생 매일 온힘을 다해 바치는 찬미와 감사의 시편공동성무일도와 미사공동전례기도보다 더 좋은 믿음의 배움과 훈련도 없을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과의 만남을 일상화해주는 공동전례은총이 우리의 믿음을 성장 성숙시켜 주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좋은 모범이 사도행전의 베드로와 요한입니다. 유다지도자들과 원로들, 율법학자들은 베드로와 요한의 담대함을 보고 놀라니 이들이 무식하고 평범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전문 교육을 받지 못했지만 이들은 바로 예수님과 함께 다니던 제자들이었으니 최고의 스승이자 목자인 예수님을 통해 보고 배운데다 부활하신 주님을 체험한 결과 이런 담대한 믿음이었을 것입니다.
최고 의회에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절대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 말라 지시하였지만 제자들은 이에 반발하며 담대히 확신을 토로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여러분의 말을 듣는 것이 하느님 앞에 옳은 일인지 여러분 스스로 판단하십시오. 우리로서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런 담대한 믿음의 고백은 지식이나 학식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부활하신 주님의 체험에서 나옵니다. 이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체험한 후에도 끊임없이 믿음의 배움과 훈련에 충실했을 것입니다. 죽는 그날까지, 살아있는 그날까지 배워 깨닫고 훈련해야 하는 믿음입니다.
영국의 성인 토마스 모어(1478.2.7.-1535.7.6.)가 단두대에서 처형시 일화가 생각납니다. 처형대에 올라간 그는 구경하려고 몰려든 군중을 향해 말하니 마지막 임종어입니다. “나는 왕이 좋은 신하이기 이전에 하느님의 착한 종으로 죽는다.” 말그대로 하느님의 진리에 따라 살다가 순교한 “진리의 순교자” 토마스 모어 역시 주님의 참 제자임을 깨닫습니다.
배움의 여정중에 있는 우리들이요 배움의 도상에서 영원한 초보자인 우리들입니다. 회개와 더불어 선사되는 겸손한 믿음, 지혜로운 믿음이요 이런 믿음 또한 부단히 배워고 훈련해야 합니다. 우리 모두, 믿음에, 사랑에, 겸손에 언제나 초보자라는 자각이 하루하루 날마다의 모든 수행에 최선을 다해 분발의 노력을 다하게 하며 매일 주님의 미사은총이 이에 결정적 도움을 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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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415. 부활 팔일 축제 토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우리는 오늘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신 한마디를 가슴에 간직하고 살아야 합니다. 그 말씀은 바로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입니다.
이 말씀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우리 사람들뿐만 아니라 모든 피조물을 복음 선포의 대상으로 말씀하고 계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우리가 복음을 선포해야 하는 대상은 하느님 아버지의 모든 피조물이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에 따라 우리는 사람을 사랑하고 돕습니다. 즉 헐벗고 소외된 사람을 비롯하여 우리보다 약한 사람이나 어려운 사람을 돕습니다. 물론 우리 힘과 우리 이름이 아니라 주님의 이름으로 그 일을 합니다. 또한 우리는 환경을 사랑합니다. 자연을 지키려 노력하고, 파괴된 자연을 다시 살려내려 노력합니다. 왜냐하면 자연 또한 하느님의 피조물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아닌 모든 동물을 우리는 사랑으로 대합니다. 그래서 동물 학대를 반대하고, 유기된 동물을 구조하거나 돕습니다. 이 또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라는 주님의 말씀에 합당합니다.
이뿐이겠습니까? 우리 주변의 모든 것은 주님의 피조물이고 우리는 이 모든 것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주님께서 바라시는 복음 선포는 그리 거창하거나 부담스러운 것이 아닙니다. 그저 우리 안에 있는 주님의 사랑을 우리 주변에 있는 주님의 피조물에게 전하는 것입니다. 아끼고 가꾸고 보듬어주는 것이 복음 선포입니다. 또한 보호하고 살려내고 감싸주는 것 또한 복음 선포입니다.
부활의 주님께서는 이 사명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 사랑이 점점 더 넓게 퍼져나가기를 바라십니다. 오늘의 말씀은 우리에게 복음이 한 사람에게 전해진 후 여러 제자에게 퍼져나가고 있음을 우리에게 보여 줍니다. 이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기쁜 소식, 즉 복음은 이렇게 퍼져 나간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한 사람의 사랑과 희생이 모든 사람을 구원했듯이 우리 한 사람의 따스함이 온 세상으로 퍼져나가기를 희망합니다.
오늘 뭐 하실 건가요?
백발의 어르신들이 가득한 어느 수업에서
강사가 물었습니다.
이 수업이 끝난 후 여러분은 뭐 하실 거예요?
노인들은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작은 소리로….
뭐 할 게 있나! 어제와 똑같은 하루지 뭐….
잠시 시간이 흐른 뒤 강사는 다시 물었습니다.
만약 10년 전으로 돌아간다면
여러분은 오늘 무엇을 하고 싶으세요?
질문이 끝나기가 무섭게 대답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무엇을 배우고 싶다는 대답.
어떤 것을 시작하겠다는 대답.
...
잠시 후 그 강사는 어르신들께 말했습니다.
지금 말씀하신 것을 지금 하세요.
10년 후에는 너무 늦을지 모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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