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대형 교회 담임 목사의 욕설 파문으로
한국 교회는 또 다시 타작마당이 되었습니다.
세상이 교회를 타작하는 것은
알곡과 가라지를 구별해 내는 충정일 것입니다.
누구든 도마 위에 난도질을 당하면 견딜 수 없고
나름 성공한 충실한 삶의 인생이 타작 마당이 되면 가라지가 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성막은 블레셋에게 파괴되었고
이스라엘의 등불인 다윗으로 말미암은 솔로몬 성전은 바벨론에게 불탔습니다.
포로 귀환의 비전인 스룹바벨 성전은 헬라에게 짓밟히고
예루살렘 성전은 로마에게 파괴 되어 돌 위에 돌 하나 남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역사적 심판의 거울이 되었고
도전과 응전의 인류 역사는 전쟁과 평화의 얼룩과 그 굴레가 되었습니다.
성서지대의 폭력과 폭언은 온실 안의 화초가 아니라
성서지대의 높은 산과 낮은 산과 그 계곡을 이루는 산맥을 형성하였습니다.
성막의 파괴를 목격한 사무엘 선지자는
사울이 용납한 아말렉의 왕 아각을 찍어 쪼개어 죽였는데 다른 번역본은 난도질을 했다고 하였습니다.
사무엘에게 난도질을 당한 아각 왕의 후손으로 추정되는 아각 사람 함므다다의 아들 하만은
훗날 페르시아의 실세가 되어 유대 민족의 대학살을 꾸몄으나 에스더에 의해 나무에 달려 죽었습니다.
아합시대 거짓 선지자 시드기야는 참 선지자 미가야의 뺨을 때리며
여호와의 영이 나를 떠나 어디로 가서 네게 말씀하더냐며 갑질하였습니다.
엘리야 선지자는 갈멜산의 승리 후....
바알의 선지자 450명을 잡아 기손강에서 죽였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그 받은 계시의 말씀을 인하여
성전의 총감독 바스훌에게 폭행을 당하고 목에 씌우는 나무 고랑으로 채웠습니다.
또 거짓 선지자 하나냐는 선지 사역의 징표였던 선지자 예레미야의 목에서 멍에를 빼앗아 꺾고
예레미야의 사역을 훼방하였습니다.
북 왕국 벧엘의 제사장 아마샤는 아모스 선자자를 여로보암 왕에게 고발하였으며
아모스 선지자에게 북 왕국을 떠나 네 나라에서 가라며 말씀의 사역을 방해하였습니다.
☞ 아모스가 말하기를 여로보암은 칼에 죽겠고
이스라엘은 반드시 사로잡혀 그 땅에서 떠나겠다 하나이다
아마샤가 또 아모스에게 이르되 선견자야 너는 유다 땅으로 도망하여 가서
거기에서나 떡을 먹으며 거기에서나 예언하고
다시는 벧엘에서 예언하지 말라 이는 왕의 성소요 나라의 궁궐임이니라( 암7:11-13)
느헤미야 총독은 이스라엘 백성의 범죄를 책망하고 저주하며
그들 중 몇 사람을 때리고 그들이 머리털을 뽑았습니다.
대제사장 가야바는 예수님을 심문하고 신성 모독죄로 사형에 해당하다며
이에 예수의 얼굴에 침 뱉으며 주먹으로 치고 어떤 사람은 손바닥으로 때리며
이르되 그리스도야 우리에게 선지자 노릇을 하라 너를 친 자가 누구냐며 조롱하고 학대하였습니다.
바울은 주 예수의 복음을 전하면서
그들이 그리스도의 일꾼이냐 정신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는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 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초대 교회는 로마 10대 황제의 박해를 피해
카타콤의 무덤이 되었습니다.
중세 기독교의 이름으로 자행된 십자군 전쟁과 종교재판소의 마녀사냥은
처참한 살육의 장이 되었습니다.
칼뱅과 루터의 종교 개혁 후 산구교위 갈등으로 일어난 전쟁은
독일의 30년 전쟁을 비롯하여 프랑스의 위그노 전쟁과 슈말칼덴 전쟁과 네들란드의 독립전쟁이 일어났습니다.
이와같이 기독교의 신앙은 온실안의 평온한 삶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경륜에 참여하는 고난과 인내를 이루는 전쟁입니다.
사도 바울은 교린도 교회가 거짓 선지자와 사도를 용납한 결과.....
너희를 종으로 삼거나 잡아먹거나 빼앗거나 스스로 높이거나 뺨을 칠지라도
너희가 용납하는도다고 그 어리석음을 책망하였습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는 대형 교회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사역의 갑질이 있었고
그 사역의 갑질은 권리침해와 인권유린의 참상이 되었습니다.
한국 교회의 담임 목사와 부교역자의 관계는 바울과 디모데의 관계가 아니라
사역의 성공을 위한 담임의 갑질의 횡포가 난무하며 교회 성장과 비례하였습니다.
부교역자는 발바닥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뛰어 다녀야 했고
담임의 수족이 되어 주의 종의 종살이를 하였습니다.
교회의 머슴으로 살아야 했던 부교역자의 실상은
이것이 신앙 인격의 연단을 위한 고난의 도가니요, 그 풀무라고 믿고 참고 또 참고 인내하였습니다.
그 가슴에 멍울이 생기지 않는 부교역자가 없을 정도의 트라우마는
폭력의 되물림이 되어 우여곡적 끝에 담임이 되어 갑질로 채찍이 아닌 전갈의 모진 시집살이를 시켰습니다.
담임 목사의 폭언과 욕설은 고난의 언덕이 되었고
사역의 덫과 함정과 올무가 되어 기도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신학을 하며 부교역자로 사역을 하면서 느끼는 담임의 위력은
군대 고참의 횡포를 뛰어넘는 절대 전횡입니다.
맞아서 병원에 입원한 부교역자도 있고......
지금 논란이 되고 있는 어느 대형교회의 담임의 욕설 파문은 어제 오늘의 문제가 아닙니다.
세월의 흔적으로 남은 부교역자의 가슴에 피멍이 맺힌 시집살이는
인고의 세월,, 그 흐르는 강이 되어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몇 년 전 좌파 정권은 공관병 갑질의 혐의로 육군대장의 옷을 벗겼는데
공관병을 둔 장교들은 공관병 전수조사라는 칼날의 공포에 휩싸여 복지부동하였습니다.
부교역자 상대로 담임의 갑질을 전수조사 하면.....
대형 교회 어느 목사의 폭언과 욕설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 할 것입니다.
7,80년대 군대의 군기는 고참은 하나님의 동기동창이라는 노래가 되었고
화장실에 가서 변을 혀로 핥고 고참이 뱉은 땅바닥의 침을 혀로 핥아야 했습니다.
까라면 까야되는 시절을 겪은 베비붐 세대는
군대는 물론 조직이 있는 모든 곳의 위력이 되었습니다.
예전에 예비군 훈련을 갔을 때 중학교 친구를 만났는데
그 친구는 백령도 해병대 출신인데 해물탕을 먹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하루가 멀다하고 자살하는 동료의 시신에 붙어있는 각종 해산물을 보고
해물탕을 먹을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해병대 신고식을 하는데 파이프로 100대를 맞았고
움찔하면 옆에 있는 고참이 쇠파이프로 가슴을 찍었다고 하였습니다.
목사가 된 목사 아들 우리 동료는 군 생활 할 때 고참에게 심하게 얻어맞고
때를 기다려 야외에서 훈련할 때 고참 15명을 다 때려 눕히고 영창을 갔습니다.
또 신학을 하였던 우리 동료는 군에 간지 3개월 만에 시체가 되어 돌아왔는데
사연인즉 훈련을 마치고 목욕 후 가장 늦었다고 죽음으로 돌아왔습니다.
본인도 회식할 때 고참이 권하는 술을 먹지 않고 담배를 피우지 않는다고
소주병으로 머리를 얻어맞고 다음 날 아침 점호할 때 머리에 바게스를 씌우고
30여분 동안 개머리판을 얻어맞고 앞차기 뒤차기 돌려차기로 리치를 당하였습니다.
그 트라우마로 지금도 술을 미시고 담배를 피우는 사람을 만나지 않고
대화도 하지 않고 절연을 하였습니다.
폭행과 폭언 성폭력과 추행의 비위는 조직의 갑질, 그 위력이 되었고
부조리한 세상의 일상이 되었습나다.
아직도 우리 사회의 갑질은 횡행하고 유명인의 갑질은 그대로 줄이 되어
줄 선 사람의 을, 병, 정은 오체투지만이 살 길입니다.
각계각층에서 몸을 팔아서라도 실적을 올려야 하는 갑질의 횡포는
우리 사회에 만연한 사회악의 폐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요즘 불신자 어르신들을 만나 이야기하면 세상 살면서 가장 현명한 선택은
불교나 교회에 미쳐 등골 빨리지 않는 것이 가장 잘 한 것이라고 확신하였습니다.
그루밍 성폭력이라는 말이 있듯이
종교의 헌신이라는 미명하에 그루밍 착취는 광신의 늪에 빠진 사람들의 구원, 그 자체가 되었습니다.
참으로 욕바가지 얻어 쳐먹으면서
할렐루야 아멘 하는 광신도를 어떻하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