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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미속초(狗尾續貂)
개 꼬리로 담비 꼬리를 잇는다는 뜻으로, 불필요하게 관직을 함부로 주는 것을 비유하여 이르는 말이다.
狗 : 개 구(犭/5)
尾 : 꼬리 미(尸/4)
續 : 이을 속(糸/15)
貂 : 담비 초(豸/5)
진(晉)나라를 창업한 무제(武帝) 사마염(司馬炎)은 진 왕조의 통치를 견고하게 하기 위하여 한고조(漢高祖) 유방(劉邦)이 사용했던 제도를 답습하여 일족의 자제들을 각지의 왕으로 봉했다. 사마염의 숙부인 사마륜(司馬倫)은 조왕(趙王)에 봉해졌다. 사마염이 죽자 아들 사마충(司馬衷)이 그 뒤를 이었으니 이가 바로 혜제(惠帝)이다.
사마염은 죽기 전에 황후 양씨의 아버지 양준(楊俊)에게 후사(後嗣)를 부탁했다. 이 결과 황후 양씨는 황태후가 되었고, 정치적 실권은 양준의 손으로 넘어갔다. 그러나 얼마 후에 혜제의 황후인 가황후(賈皇后)가 왕족들을 끌어들여 쿠데타를 일으켜 양준을 죽인 후, 권력을 장악해 버렸다.
가황후의 가씨 천하는 10년 동안 지속되었다. 가황후는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그의 친정 동생이 낳은 아들을 자기가 낳은 것처럼 위장해 아들로 들이고, 이 아이를 황태자로 만들기 위해 황태자 휼(遹)을 폐한 후 살해해 버렸다.
그동안 가씨 정권을 무너뜨릴 기회만 노리고 있던 조왕 사마륜은 군사를 일으켜 가씨 정권의 중심인물들을 모두 체포, 살해해 버리고 대신 손수(孫秀)와 공모하여 가황후를 폐서인하고 유폐한 후 금설주(金屑酒)를 마시고 스스로 목숨을 끊게 했다. 금설주는 금가루를 넣은 술로, 고대의 제왕들이 죄를 지은 신하들에게 자살할 것을 명하며 함께 내리는 술이다.
그리고 사마륜이 스스로 황제의 위에 오르고 혜제를 태상황으로 받들었다. 그러자 제왕(齊王) 사마경(司馬冏)은 장사왕(長沙王) 사마예(司馬乂), 성도왕(成都王) 사마영(司馬穎), 하간왕(河間王) 사마옹(司馬顒)과 연합하여 황제를 칭한 사마륜을 죽이고 다시 혜제를 황제로 세웠다.
제왕 사마경이 혜제를 보좌하고 나머지 왕들은 각자 군사를 돌려 자기 지역으로 돌아갔다. 이 내란은 무려 16년 동안 계속되다가 막을 내렸는데, 이를 팔왕(八王)의 난이라고 한다.
사마륜이 황제가 되자 그의 친척들과 친구들도 덩달아 벼슬을 하게 되었으며, 함께 모사를 꾸몄던 자들은 모두 단계를 뛰어넘는 승진을 했는데, 그 수가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그리고 심지어는 종들과 심부름꾼들까지도 작위를 주어, 조회를 할 때마다 초선관(貂蟬冠)이 자리에 가득했다. 그래서 당시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담비가 부족하니 개 꼬리로 잇는구나.”
其餘同謀者咸超階越次, 不可勝記,
至於奴卒斯役亦加以爵位.
每朝會, 貂蟬盈坐, 時人爲之諺曰;
貂不足, 狗尾續.
이 이야기는 진서(晉書) 조왕륜전(趙王倫傳)에 나오는데, 관작을 남발하다 보니 모자에 장식하는 담비가 부족하여 개 꼬리로 대신했다는 이야기에서 구미속초가 유래했다. 구미속초는 어떤 일이 앞부분은 잘되었으나 뒤가 잘못된 경우를 비유하는 데 사용되기도 한다.
한(漢)나라의 제도에 의하면 황제의 측근 신하들은 모자 측면에 담비(貂) 꼬리를 꽂고 앞에는 매미(蟬) 장식을 달아 황제의 총애와 믿음을 받고 있다는 것을 표시했는데 이를 이르러 초선관, 혹은 초선이라 한다. 이런 장식은 황제의 허가가 있어야 할 수 있었다.
구미속초(狗尾續貂)
담비 꼬리가 모자라 개 꼬리로 잇는다는 뜻으로, 좋은 것 뒤에 나쁜 것이 따른다는 말이다.
겉으로 내세운 그럴듯한 간판의 양과는 달리 실제로는 뒤떨어지는 개고기를 파는 것이 양두구육(羊頭狗肉)이다. 처음에는 용의 머리로 요란하게 시작했다가 뱀의 꼬리로 흐지부지하게 끝나는 것은 용두사미(龍頭蛇尾)다. 이처럼 처음과 끝이 한결같지 못하고 보잘 것 없는 결과가 따르는 것에 개의 꼬리(狗尾)가 담비 꼬리에 이어진다(續貂)는 이 성어도 있다.
담비는 족제비와 비슷하지만 부드럽고 광택이 나는 털은 고급 모피로, 길고 끝이 가는 꼬리는 고급 붓으로 사용되어 개와는 비교할 수도 없었다. 담비 꼬리에 개꼬리를 잇는다는 이 말이 겉보기와 실제가 다르다는 뜻 외에 자질이 부족한 사람을 높은 벼슬자리에 앉히거나 불필요하게 관직을 늘리는 것도 비유한다.
담비 꼬리와 매미 날개라는 뜻의 초선(貂蟬)이란 말이 있듯이 높은 벼슬아치의 관(冠) 장식으로 썼다. 여기에는 중국 서진(西晉)의 왕족 8명이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물고 뜯는 16년간의 내란인 팔왕(八王)의 난과 관계가 있다.
삼국시대 위(魏)나라의 군략가인 사마의(司馬懿)와 아들 사마소(司馬昭)가 기반을 닦아 손자 사마염(司馬炎)이 통일된 진(晉)을 세우고 초대 무제(武帝)가 된다. 무제는 일족들을 각지의 왕으로 봉하고 왕권을 강화하려 했으나 무능한 2대 혜제(惠帝)때 추한 용모의 악독한 가황후(賈皇后) 등 외척의 득세로 극도로 혼란해졌다.
무제의 동생 사마륜(司馬倫)이 외척을 축출하고 왕위에 오르자 다른 지역의 왕들이 힘을 합쳐 서로 몰아내는 16년간의 난리가 이어져 나라는 폐허가 되었다. 사마륜이 황제가 됐을 때 그를 도운 사람들은 벼락출세를 하게 되어 종들과 심부름꾼까지 초선관을 씌웠다.
그래서 당시 사람들은 말로 "담비 꼬리가 부족하게 되니 나중에는 개 꼬리로 대체하는구나(時人爲之諺曰 貂不足 狗尾續)"하고 비아냥거렸다. 당(唐)나라의 방현령(房玄齡) 등이 지은 진서(晉書) 조왕륜전(趙王倫傳)에 실린 내용이다.
고위공무원이 재직 중 특히 관련 있던 공기업이나 특수법인 등의 대표, 임원 등으로 임명되는 낙하산 인사는 이제 너무나 예삿일이 됐다. 야당으로 있을 때 그렇게 공격하던 이런 인사를 정권이 바뀌면 한 술 더 뜨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정권 창출에 공이 있는 사람들에게 자리를 나눠주는 것을 이해할 만도 하지만 이전에 했던 독설에 사과라도 해야 ‘내로남불‘의 뻔뻔스러움이 덜하기라도 할 터이다. 명분만 그럴듯하고 개 꼬리가 이어지는 것과 무엇이 다를까.
[참조] 팔왕(八王)의 난(亂)
진(晉)나라의 초대 황제인 무제(武帝) 사마염(司馬炎)이 죽으면서 부터 팔왕의 난이 싹트기 시작했다. 팔왕의 난의 주역으로 등장하는 여덟 사람의 황족은 무제의 아들이 3명, 조카가 1명, 숙부가 2명, 육촌이 2명이었다. 모든 내분에는 으레 여성이 개입되기 마련인데, 팔왕의 난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그러면 좀 복잡하지만 이들의 이름과 가계를 살펴보자. 무제의 아들 셋은 각각 초왕(楚王) 위(瑋), 장사왕(長沙王) 예(乂), 성도왕(成都王) 영(穎)이다. 조카 1명은 무제의 친동생 유(攸)의 아들인 제왕(齊王) 경(冏)이다. 숙부 2명은 무제의 아버지 사마소(司馬昭)의 동생인 여남왕(汝南王) 양(亮)과 조왕(趙王) 륜(倫)이다. 육촌 2명은 무제의 할아버지 사마의(司馬懿, 중달(仲達))의 두 동생의 손자인 하간왕(河間王) 옹(顒)과 동해왕(東海王) 월(越)이다.
무제는 황태자 사마충(司馬衷)이 너무 어리석었기 때문에 한때는 동생 사마유에게 양위할 것을 고려한 적이 있었는데, 애석하게도 사마유가 먼저 죽고 말았다. 사마유의 아들 사마경이 의사에 의한 모살이라고 주장하여 결국 의사가 주살당하는 소동이 있었는데, 이것이 팔왕의 난의 전주곡이었다.
무제는 황태자의 장래가 걱정스럽기만 했다. 황태자 사마충은 흉년이 들어 수많은 백성들이 굶주려 죽는다는 말을 듣고 쌀이 없으면 고기라도 먹을 일이지 왜 굶어 죽느냐고 말할 정도로 세상 물정을 도무지 알지 못했다.
황태자의 폐립 문제를 심각하게 고민하던 무제는 황태자를 시험해 보려고 신하들에게 문제를 출제하게 하여, 이를 밀봉하여 태자에게 보내 답안을 작성하도록 했다. 태자의 실력으로는 손을 댈 수조차도 없는 문제였다.
그런데 황제와 대신들이 황태자 폐립을 논의하고 있다는 것을 친정아버지 가충(賈衷)으로부터 들은 황태자비 가남풍(賈南風)이 시험 문제를 가져온 관리를 매수하여 답을 알아내 황태자에게 답안을 작성하게 했다. 무제는 황태자의 답안을 보고 매우 만족해했다. 황태자의 자리는 확실히 굳어졌다.
290년 4월, 무제가 55세의 나이로 죽었다. 그는 죽기 전에 후사를 황후 양씨의 아버지 양준(楊俊)과 황족의 원로인 여남왕 사마양(무제의 작은아버지)에게 위탁하기 위해 두 사람을 불러들였다.
그런데 예주(豫州)에 있던 사마양은 양준의 방해로 수도 낙양(洛陽)으로 올라오지 못했다. 정권을 독점하기 위한 양준의 계략이었다. 양준이 홀로 후사를 위탁받았다.
무제가 죽자 황태자 사마충이 즉위했는데, 이이가 바로 혜제(惠帝)이다. 황후 양씨는 황태후가 되었고, 정치적 실권은 황태후의 아버지 양준의 손으로 넘어갔다.
양준의 권력 장악에 대해 가장 못마땅하게 생각한 사람은 황후인 가남풍이었다. 가황후는 작고 못생겼지만 권모술수에 능한 여인이었는데, 양씨를 제거하고 가씨의 세상을 만들겠다는 야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하여 가황후는 양씨의 반대파 중신들과 더불어 쿠데타를 추진했다. 우선 여남왕 사마양에게 군사를 일으키도록 종용하였다. 하지만 사마양은 늙은 탓인지 너무 소극적이었다. 그는 전쟁의 소용돌이에 휩쓸리고 싶지 않아서 재빨리 허창(許昌)으로 떠나 버렸다.
가황후는 다시 초왕 사마위를 끌어들였다. 그는 혜제의 배다른 동생으로 용맹하고 과감한 21세의 청년이었다. 사마위는 즉시 군사를 이끌고 낙양으로 올라와 양준에게 모반죄를 뒤집어씌워 죽이고 그의 일당을 체포, 처형했다. 이로써 겨우 1년 만에 양씨의 천하는 끝이 나고 가씨의 천하가 막을 열었다.
가황후는 황족의 원로인 사마양과, 무제 때 황태자 폐립 문제로 자신을 힘들게 만들었던 72세의 노신 위관(衛瓘)을 기용했다. 누구에게도 불만을 사지 않는 이 두 사람을 중용한 것은 가황후의 고단수의 정치적 술수였다.
우선 이 원로대신들은 조야의 인망을 얻고 있었기 때문에 가씨 정권의 훌륭한 방패막이가 될 수 있었으며, 또 하나 양씨 정권 타도의 일등 공신인 초왕 사마위와 이들을 서로 견제하게 만들어 상호 갈등을 조장하기 위함이었다.
사마위는 별다른 공도 없이 중용된 두 원로대신에게 불만을 가지게 되었고, 두 원로대신은 젊은 혈기에 성격이 잔인한 데다가 군대까지 거느리고 있는 사마위를 위험인물로 분류하여 그에게서 병권을 회수하고 변방으로 보내 버릴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그러나 두 원로의 계획은 사전에 누설되어 사마위의 귀에 들어갔고, 사마위는 크게 노했다.
두 원로대신을 충분히 이용한 가황후는 이들 두 파벌 간의 불화를 이용해 이들을 제거할 음모를 꾸몄다. 그녀는 먼저 혜제를 시켜 두 원로대신에게 황태자 폐립을 모의한 죄를 씌워 삭탈관직한다는 조서를 내리게 하고, 사마위에게 군대의 출동을 명하였다.
사마위는 사마양과 위관을 체포하여 살해했다. 분풀이를 한 것이다. 가황후는 이어 사마위까지 제거한다. 대군을 거느리고 있는 잔인한 성격의 소유자 사마위의 존재는 이제 목적을 달성한 가황후에게는 큰 장애물에 지나지 않았다.
가황후는 즉시 '초왕 사마위는 사람을 죽였으니 사형에 처한다'는 조서를 내리고, 사마위를 형리에게 넘겨 목을 베게 했다. 사마위 역시 가황후에게 이용만 당하고 만 것이다. 이로써 가황후는 여남왕 사마양, 초왕 사마위, 원로대신 위관을 일거에 제거하고 실질적인 가씨 정권을 수립하는 데 성공했다. 뛰어난 정치적 수완과 가씨 일가의 튼튼한 실력을 배경으로 가황후의 천하는 무려 10년 동안 지속된다.
가황후는 아주 음란한 여성이었다고 한다. 태의령(太醫令) 정거(程據)와 사통했으며, 민간의 미소년들을 납치해서 정을 통한 후에 죽여 버렸다고 하는데, 이 세상에 예외 없는 법칙은 없더라고 간혹 마음에 드는 소년이 있으면 죽이지 않고 비싼 선물을 주어 돌려보내기도 했다고 한다.
가황후는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그의 친정 동생이 낳은 아들을 자기가 낳은 것처럼 위장해 아들로 들였다. 그리고 299년 12월, 가황후는 황태자 휼(遹)을 폐하였다.
가씨 정권을 무너뜨릴 기회만 보아 온 사마씨 일족들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가황후가 다음에 취할 행보가 그의 양자를 황태자로 세울 것이라는 것은 불을 보듯 빤한 일이었다. 조왕 사마륜과 제왕 사마경은 거사할 명분이 주어지기만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불과 몇 달 후인 다음 해 3월, 폐서인이 된 황태자 휼이 사망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가황후가 평소 사통하던 태의령 정거와 짜고 독약을 넣은 약을 휼에게 마시게 했는데, 이를 눈치 챈 휼이 마시려 하지 않자 약 찧는 절구로 쳐 죽여 버린 것이다.
기회를 노리고 있던 사마륜과 사마경은 마침내 군사를 일으켜 먼저 가씨 정권의 중심인물들을 모두 체포, 살해했다. 그리고 가황후가 쿠데타의 기미를 알아차리기 전에 조서를 가지고 가 그녀를 폐서인하여 금용성에 유폐하고, 그로부터 5일 후 금설주(金屑酒)를 마시고 스스로 목숨을 끊게 만들었다.
301년에 사마륜이 친히 황제의 위에 오르고 혜제를 태상황으로 받들었다. 그러자 사마경은 장사왕 사마예, 성도왕 사마영, 하간왕 사마옹과 연합하여 황제를 칭한 사마륜을 죽이고 다시 혜제를 황제로 세웠다. 사마경이 혜제를 보좌하게 되고, 나머지 왕들은 각자 군사를 돌려 자기 지역으로 돌아갔다.
제왕 사마경은 대사마로서 혜제를 보좌하면서 큰 토목 공사를 일으키고, 주색에 빠져 정사를 게을리 하고 인사 문제도 공정하지 못했다. 그러자 제왕과 연합하여 가씨 정권을 무너뜨렸던 장사왕, 성도왕, 하간왕이 불만을 품고 제왕의 죄를 규탄하여 군사를 이끌고 낙양으로 올라와 제왕을 살해해 버렸다.
이로부터 이들 세 왕 사이에 분쟁이 시작되었다. 하간왕과 성도왕이 연합하여 장사왕을 살해했는데, 불로 구워서 죽이는 참혹한 방법을 사용했다고 한다.
가황후가 황후의 자리에서 쫓겨나 죽자 혜제는 양헌용(羊獻容)이라는 여자를 황후로 세우고, 황태자를 책봉했다. 그러나 제왕을 대신하여 승상으로서 혜제를 보좌하게 된 성도왕 사마영은 황후와 황태자를 폐하고 자신이 황태제(皇太弟)가 되었다. 다음 황위를 노린 것이다. 그러자 동해왕 사마월과 예장왕(豫章王) 사마치(司馬熾)가 성도왕의 이런 행위에 불만을 품고 성도왕을 공격했다. 전국은 혼란에 휩싸였다.
팔왕 가운데 살아남은 것은 동해왕 사마월, 하간왕 사마옹, 성도왕 사마영뿐이었는데, 306년에 성도왕은 두 아들과 함께 죽임을 당하고, 12월에는 하간왕 역시 세 아들과 함께 죽임을 당했다. 이 사이 혜제도 48세의 나이로 불행한 생애를 마쳤다. 황태제로 있던 무제의 막내아들 사마치가 혜제의 뒤를 이어 황제가 되었는데, 이이가 바로 회제(懷帝)이다.
회제는 팔왕 가운데 유일한 생존자인 동해왕 사마월의 보좌를 받았고, 이로써 팔왕의 난은 그 막을 내렸다. 이 내란은 무려 16년에 걸쳐 계속되었는데, 이 동안에 흉년과 기근이 이어져 백성들은 도탄에 빠졌다.
그런데도 각 왕들은 한 치의 양보도 없이 싸움을 계속하였고, 나중에는 흉노족과 선비족의 군대까지 불러들였으며, 그 결과 외세의 개입을 유발했다. 그러자 흉노족이 결속을 해서 자신들의 나라를 세우고, 수도 낙양을 공격하여 서진(西晉)을 무너뜨렸다.
서진은 망했고 중국 북부와 서부에 근거지를 두고 있던 흉노(匈奴), 갈(羯), 저(氐), 강(羌), 선비(鮮卑) 등 오호(五胡)들이 다투어 중원 지역에 그들의 정권을 수립하였다. 마침내 장강 상류와 황하 유역에는 무려 16개의 정권이 할거하는 양상을 띠게 되었는데, 이를 오호십육국(五胡十六國)이라고 한다.
한편 서진의 황족인 사마예(司馬睿)는 건강(健康, 남경)에 도읍하고 동진(東晉)을 세웠다. 이때부터 오호십육국시대가 시작되어 화북(華北)은 오랫동안 오호의 지배하에 들어가게 된다.
▶ 狗(구)는 형성문자로 뜻을 나타내는 개사슴록변(犭=犬; 개)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句(구)로 이루어졌다. 용례로는 사냥하러 가서 토끼를 잡으면, 사냥하던 개는 쓸모가 없게 되어 삶아 먹는다는 토사구팽(兎死狗烹), 양 머리를 걸어놓고 개고기를 판다는 양두구육(羊頭狗肉), 서당 개 3년에 풍월을 한다는 당구풍월(堂狗風月), 닭의 울음소리를 잘 내는 사람과 개의 흉내를 잘 내는 좀도둑이라는 계명구도(鷄鳴狗盜), 개나 말이 그 주인에게 다하는 충성심이라는 구마지심(狗馬之心), 초상집의 개라는 상가지구(喪家之狗), 진탕에서 싸우는 개라는 이전투구(泥田鬪狗), 호랑이를 그리려다 개 비슷하게 된다라는 화호유구(畫虎類狗), 닭과 개와 말의 피라는 계구마지혈(鷄狗馬之血), 집에서 기르는 개가 집 안쪽을 향해 짖는다는 가구향리폐(家狗向裏吠) 등에 쓰인다.
▶ 尾(미)는 회의문자로 엉덩이를 나타내는 尸(시)와 엉덩이에 붙어 있는 毛(모; 털)로 이루어졌다. 尾(미)는 꼬리로 전(轉)하여, 뒤, 끝의 뜻으로 되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꼬리 파(巴)이고,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머리 두(頭), 머리 수(首)이다. 용례로는 제사의 제물을 진설할 때, 생선의 머리는 동쪽을 향하고 꼬리는 서쪽을 향하게 놓음을 두동미서(頭東尾西), 머리와 꼬리를 잘라 버린다는 거두절미(去頭截尾), 우직하게 약속만을 굳게 지킨다는 미생지신(尾生之信), 머리는 용이고 꼬리는 뱀이라는 용두사미(龍頭蛇尾), 머리에서 꼬리까지 통한다는 철두철미(徹頭徹尾), 처음부터 끝까지 변함없이 일을 해 나간다는 수미일관(首尾一貫), 머리는 있어도 꼬리가 없다는 유두무미(有頭無尾), 담비 꼬리가 모자라 개 꼬리로 잇는다는 구미속초(狗尾續貂), 꼬리를 진흙 속에 묻고 끈다는 예미도중(曳尾塗中), 머리는 감추었는데 꼬리는 드러나 있다는 장두노미(藏頭露尾), 처음과 나중이 없거나 밑도 끝도 없다는 무두무미(無頭無尾), 꼬리는 드러낸 채 머리만 숨긴다는 노미장두(露尾藏頭), 꼬리가 커서 흔들기 어렵다는 미대난도(尾大難掉), 잡았던 범의 꼬리를 놓기가 어렵다는 호미난방(虎尾難放), 범의 꼬리와 봄에 어는 얼음이라는 호미춘빙(虎尾春氷), 물고기는 대가리 쪽이 맛이 있고, 짐승 고기는 꼬리 쪽이 맛이 있다는 어두육미(魚頭肉尾), 버들 같은 눈썹에 개미 같은 허리라는 유미봉요(柳尾蜂腰), 서로 이어져 끊이지 않음을 수미상접(首尾相接), 남이 알게 되는 것을 꺼리고 두려워함을 외수외미(畏首畏尾), 머리와 꼬리가 서로 응한다는 수미상응(首尾相應) 등에 쓰인다.
▶ 續(속)은 형성문자로 続(속)의 본자(本字)이다. 뜻을 나타내는 실사(糸; 실타래)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글자 賣(매, 속)이 합(合)하여 이루어졌다. 賣(매)는 팔고 돌아다니는 일로, 또 育(육; 자라다), 屬(속; 붙다, 잇달다)과도 통용(通用)되어 씌어졌다. 이 말들은 계속한다는 뜻이 공통되어 있다. 실사(糸; 실타래)部는 실, 실이 계속하다, 전(轉)하여 물건이 이어짐을 일컫는다.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이을 사(嗣), 이을 접(接), 잇닿을 련/연(連), 이을 승(承), 이을 소(紹), 이을 락/낙(絡), 이을 계(繼), 이을 찬(纘),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끊을 단(斷)이다. 용례로는 끊어지지 않고 뒤를 이어 나감을 계속(繼續), 같은 상태가 오래 계속됨을 지속(持續), 오래 계속되는 것을 지속적(持續的), 끊이지 않고 죽 이음을 연속(連續), 서로 맞대어 이음을 접속(接續), 담비 꼬리가 모자라 개 꼬리로 잇는다는 구미속초(狗尾續貂), 아내를 여윈 뒤 다시 새 아내를 맞음을 속현(續絃), 쓸 만한 인격자가 없어 그만 못한 사람을 등용함을 조롱하는 속초지기(續貂之譏), 대를 이을 희망을 사속지망(嗣續之望), 죽 이어져서 끊어지지 아니함을 연속부절(連續不絶), 장남은 뒤를 계승하여 대를 잇는다는 적후사속(嫡後嗣續) 등에 쓰인다.
▶ 貂(초)는 형성문자로 鼦(초)의 본자(本字)이다. 뜻을 나타내는 갖은돼지시변(豸; 짐승, 돼지)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召(초)가 합(合)하여 이루어졌다. 용례로는 담비의 가죽으로 만든 갖옷을 초서구(貂鼠裘), 흰담비의 모피를 백초피(白貂皮), 담비의 털로 맨 붓을 초모필(貂母筆), 검은담비의 털가죽을 흑초피(黑貂皮), 훌륭한 물건에 변변치 못한 것이 뒤따름을 속초(續貂), 부채자루 끝에 달아 매어 늘어 뜨리는 장식품을 선초(扇貂), 쓸 만한 인격자가 없어 그만 못한 사람을 등용함을 조롱한다는 속초지기(續貂之譏), 담비 꼬리가 모자라 개 꼬리로 잇는다는 구미속초(狗尾續貂) 등에 쓰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