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曲玉은 선사시대의 고인돌[支石墓]이나 돌널무덤[石棺墓]에서부터 삼국시대의 왕릉을 비롯한 고분군에 이르기까지 매우 많은 양이 출토되고 있는 귀중한 고대유물이다.
곡옥은 고분의 금관이나 목걸이와 귀걸이 등에 여러 개가 매달려 있기 때문에 고대 귀족들의 치레걸이[裝身具]의 일종으로만 알기 쉽다.
그러나 지석묘에서 동검과 함께 출토되는 예로 보아서 선사시대에는 주술적인 護符의 성격을 가진 신물로 보기도 하며(金良善, 「까분玉 源流考」, 『梅山國學散稿』, 숭전대학교박물관, 1972, 9쪽), 고분시대에 와서는 아름다운 곡옥의 용도가 장신구의 기능뿐만 아니라, 신앙, 사회적 지위, 계급, 종족 등과 관련된 表識, 상징 및 寶器的 뜻도 지닌 신물로 보기도 한다.
이러한 곡옥은 고분에서 출토되는 대표적인 유물의 하나이므로 그 기원과 형태의 상징적 의미에 대해서 그동안 수많은 궁금증이 끊임없이 제기돼 왔었다.
고대사회의 곡옥은 그 문명과 문화적인 조류와 매우 밀접한 밀접한 연관성을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곡옥은 고대의 사회적 구조와 그 철학적인 관점이나 세계관 그리고 그에 기반한 문화와 사고방식에 대한 이해의 바탕 위에서 그 기원과 조형적 상징성을 비롯한 곡옥 속에 내장돼 있는 각종 의미를 탐구해 보는 것이 가장 올바른 연구방법이라고 생각한다.
곡옥은 玉으로 된 유물이므로 옥의 사용부터 일차적으로 먼저 살펴보자.
중국은 기원전 6천 년 전부터 옥을 사용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중국 요녕성 査海 유적에서 발견된 신석기시대 玉?이 동북아시아에서 가장 이른 시기의 옥을 사용한 예증이다
(이형구, 『한국 고대문화의 비밀』, 김영사, 2004, 335쪽). 갑골문의 璞과 弄자도 몇 천 년 전의 중국인이 옥을 캐었던 지식과 경험이 있었다는 사실을 밝혀주고 있다. 한국에선 2002년 국립문화재연구소가 발굴한 강원도 고성군 죽왕면 문암리 유적에서 신석기시대 5000년경의 옥결 한 쌍이 출토된 것이 보고됐다(국립문화재연구소,「고성군 문암리 선사유적 발굴설명회 자료」).
『설문』에서 옥은 仁義智勇?의 五德을 가진 귀중한 보배로 설명했다.
그리고 『禮記』 「聘義篇」에는 옥이 가지고 있는 덕을 仁, 知, 義, 禮, 樂, 忠, 信 의 七德에 天地德을 보태어 九德을 갖춘 군자의 덕에 비유하면서 道와 같은 것이라고 했다.
고대에는 금을 天精으로, 옥을 地靈으로 여겨 精金靈玉이라 불렀다.
그러므로 옥은 최고로 존귀한 것이요, 영혼을 보호하며 권위를 상징하는 숭고한 징표로 여겨 곡옥 외에도 圭, 璋, 璜, 琮 등 의례용구에 모두 옥을 사용했다.
[그림1]에서 보듯이 금관과 드리개에 매달린 비취색의 곡옥은 단순한 아름다움을 나타내기 위한 장식물로서의 성격만이 아니라, 어떤 사회적 신분과 권위를 표지하기 위한 고유의 상징적 의미를 담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곡옥은 언제 어디에서 어떻게 시원된 것일까?
라는 기원 문제가 무엇보다 먼저 대두된다.
그러한 기원 문제가 먼저 검토된 다음이라야 곡옥의 상징적 의미를 보다 자세히 검토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곡옥은 C자형, 반원형, 콤마형, 초생달형과 같은 만곡된 형태로 인해 곱은옥, 句玉, 까분옥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그 형태상의 특이성 때문에 고고학계에선 항상 그 기원 문제가 가장 큰 관심거리였다. 지금까지 발표된 선행연구로는 모두 8가지의 기원설이 제시돼 있다.
① 맹수의 송곳니 기원설(최은주, 「한국곡옥의 연구」, <숭실사학>제4집, 1986, 46쪽 주105).
② 선사곡옥 기원설(韓炳三, 「曲玉의 起源」, <美術史學硏究>129·130, 韓國美術史學會, 1976, 222∼226쪽).
③ 태아기원설(임재해, 『신라 금관의 기원을 밝힌다』, 지식산업사, 2008, 496~504쪽).
④ 달 숭배사상 기원설(水野祐, 『句玉』, 東京學生社, 1995, 168쪽).
⑤ 태극기원설. ⑥ 생명상징 기원설(김병모, 『금관의 비밀』, 푸른역사, 1998, 34쪽).
⑦ 靈氣무늬 상징기원설(강우방, 『한국미술의 탄생』, 솔, 2007, 203쪽).
⑧ 옥룡기원설(이형구, 위의 책, 118∼122쪽) .
이들 8가지 곡옥의 기원설들은 대체로 생명이나 태아 등 여성에 관련된 기원설을 들고 있는 점이 특색이다. 곡옥이 여성들의 장신구에 주로 많이 장식돼 있기 때문에 그러한 공통적 해석이 많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용의 祖形으로 인식하는 홍산문화의 옥룡이나 옥잠에서 곡옥의 기원을 찾고자하는 부분은 김병모, 강우방, 이형구, 임재해 제씨가 공통적으로 언급하는 관점이어서 매우 중요하다고 본다.
왜냐하면 이 이론은 출토된 유물에 근거해 제기된 이론이자 고대한국 양잠의 원류를 탐색해볼 수 있는 문화전파의 루트에서 발견되고 있는 사실이란 점에서 강한 설득력을 주고 있기 때문이다.
한병삼 선생의 연구에서 보듯이 ‘주술적 護符의 성격을 지닌 神物’이라고 보는 견해가 있다.
김양선 박사의 학설과 같이 ‘장신구의 기능뿐만 아니라, 신앙, 사회적 지위, 계급, 종족 등과 관련된 表識, 상징 및 寶器的 뜻도 지닌 신물’이라는 견해도 있다.
그렇다면 그 신물이 상징하고 있는 구체적 대상은 무엇이며 어떤 의미를 표지하고 있느냐 하는 것이 제일 궁금한 사실이다.
김양동교수는 곡옥이 주로 고분시대 여성의 장신구에 많이 등장되고 있는 점과 형태상으로 누에 모습과 너무 비슷한 점을 유의해 볼 때, 곡옥은 고대 여성들의 길쌈문화와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는 어떤 상징적 표현물이 아닐까 하는 추정을 하는 경우도 있다.
즉 누에를 용의 초기형태로 인식했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는 것이고 누에는 천충답게 太陽樹이자 神木인 扶桑을 먹이로 하며 고귀한 비단을 생산하기 때문이다.
이로써 ‘農’자의 字解는 뽕밭에서 누에를 치는 것을 형상화한 글자로 재해석하는 것이다.
이것은 농업 중에서 잠업의 중요성을 깨닫게 하는 정보로서, 최초의 農도 稻作이 먼저가 아니라 잠업이 먼저였을 가능성을 제시해주는 자료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홍산문화 옥기 중에서 용의 원시형태인 猪龍, 熊龍[그림2] 등으로 중국 고고학계가 호칭하고 있는 옥룡의 원형은 그 당시 이미 발달된 동북방 잠업의 상징물인 누에, 곧 蠶龍으로 보는 것이다.
신석기시대 잠룡은 누에를 용의 원시고형으로 인식한 고대 동북방 양잠문화의 시원을 증언하는 유물중의 하나다. 따라서 한반도 곡옥의 원류는 여기에서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미뤄 짐작해볼 수 있기 때문에, 홍산문화권에서 출토된 옥잠 즉 잠룡이 한반도 곡옥의 祖形으로 추정할 개연성은 매우 크다고 할 것이다. 따라서 잠룡이 곡옥의 조형이라면 곡옥의 기원은 누에를 상징한 것이라는 논리가 형성된다.
그러나 곡옥 중에는 [그림4]처럼 구멍이 뚫린 頭部에 몇 갈래의 陰刻線이 새겨진 것이 있다.
곡옥 두부의 음각선에 대해선 그 각선들이 왜 새겨져 있으며 무엇을 상징한 것인지 지금까지 한 번도 문제가 제기된 적이 없다.
태아, 달, 태극의 모양이라면 그 각선들이 조형상 과연 필요한 것일까. 무엇 때문에 필요도 없고 이해되지도 않는 각선을 새겨놓았을까.
우리가 다만 해석을 못할 뿐이지 이유가 없는 유물의 문양은 없다. 유물의 문양은 고대인들의 사유를 반영한 생각의 지문이다.
[그림4]에서 곡옥의 刻線 모양은 蠶頭의 사실적 모습과 비슷하다. 누에의 머리와 눈(눈은 곡옥을 꿰는 구멍)은 곡옥이 누에를 상징하고 있다는 설에 강력한 설득력을 실어준다.
또한 [그림5]에서 볼 수 있듯이 모자곡옥의 몸체에 돋아 있는 돌기는 무엇을 형상화한 것인가.
물론 곡옥의 모양이 오늘날 태아의 모습과도 같은 것으로 해석가능하지만 그당시에 엑스레이가 있던 것은 아니고...
그런데 태아나 고리 누에 고치 등등의 다양한 해석을 할 수가 있지만 당시의 철학적인 사고방식을 즉 기하학적인 관점과 과학의 수준을 고려해야 한다고 했을 때의 형상과 밀접하게 관련이 있다고 할 사 있다.
회돌이 혹은 반지( 링 ), 달팽이 회호리바람, 토러스라고 하는 문양등도 고려했음직하다.
그러므로 모자곡옥의 몸체에 돋은 돌기도 누에의 몸에 돋아 있는 돌기로 해석하면 문제는 아주 쉽게 이해될 것이다.
아무튼 곡옥의 문양은 다산, 풍요, 부활, 재생 등의 상징성이 내포돼 있다고 할 수가 있다.
옥이란 고귀한 물질에 아름답게 디자인해 장신구에 귀중하게 매단 조형물이 곡옥이라고 주장하고자 한다.
옥은 신이나 영혼을 불러들이는 영통성, 사악을 물리치는 힘, 생성력과 재생력을 지닌 주술성 등을 갖춘 광물로 믿어 왔기 때문에 呪術具로 많이 사용했다.
고대의 풍속에서 옥의 장식은 이러한 주술력을 체내에 유지시킴으로써 장수를 기원하기도 했으며 사후세계의 靈力을 빌기 위해서 葬具로도 많이 사용해 왔다. 그러므로 자연의 생성과 소멸의 순환법칙을 표상하고 원시종교적 상징성도 띤 누에에 옥을 사용한 것은 고대의 관념상 매우 당연한 이치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곡옥은 이집트나 각 초고대에서 발견되는 거창한 규모의 피라미드나 탄궁전등과는 달리 아주 작은 문양이기에 백성들에게도 널리 공용되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곡공의 상징이 가지는 철학적 혹은 과학과 수학적인 의미는 어떠한 논리로 도출이된 것인가?
우리는 여기서 천부경의 경전에 대한 해석을 생각해볼 수가 있다.
결론적으로 곡옥의 의미를 천부경의 가르침에서 찾아보는 것이 가능하다고 본다.
물론 지금은 잃어버린 철학이되었지만...
아무튼 곡옥은 비단 한반도에서만 발견되는 것이 아니다.
세계의 거의 모든 문영에서 발견되기도 한다.
특히 신라의 가장 빛나는 유물중에 하나이다.
곡옥이 冠飾으로 그토록 많이 장식되고 있는 이유를 설명할 단서를 제공해주고 있다 하겠다.
“경주 황남대총 북분은 婦人帶라는 명문이 새겨진 허리띠가 출토됨으로써 女墳으로 고증되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금관은 남자가 묻힌 남분이 아니라 여자가 묻힌 북분에서 나왔다는 점이다. 물론 남분에서도 관은 나왔지만, 그것은 금관이 아니라 은제 관과 금동제 관이었다.
남자의 무덤에서는 금관이 나오지 않고, 부인의 무덤에서만 금관이 나왔다는 것은 참으로 심상치 않은 일이다.” (한국역사연구회 고대사분과,「신라 금관의 비밀」, 『한국고대사 산책』, 역사비평사, 1995, 335∼336쪽)
“북분 왕비의 금관에는 무려 80개가량의 비취곡옥이 달려 있으며 南墳 왕의 관은 이외로 금동관인데, 금동관으로서는 유일하게 곡옥을 장식했지만 그 수가 16개에 불과하다. 왕비의 금관이 더 화려한 것은 그 당시 女司祭長을 겸했을 왕비의 위상이 매우 높았음을 의미한다. 이로써 왕과 왕비의 관에는 반드시 곡옥을 장식했음을 알 수 있다. 금관총이나 천마총 출토 금관에도 60개에 가까운 곡옥이 달려 있다.”
(강우방, 『한국미술의 탄생』, 솔, 2007, 195~196쪽)
신라 곡옥 발굴 모습 「新羅 曲玉」
황남대총 북쪽 고분 발굴 , 新羅 勾玉
1921년 처음으로 발굴된 금관총 금관. 위에 3개의 나뭇가지 모양 장식과 2개의 사슴뿔 모양 장식을 붙여 세운 전형적인 신라금관이다./국립경주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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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시대 곡옥(曲玉)
옥으로 만든 장신구의 일종으로 ‘곱은 옥’이라고도 한다. 크기는 1cm 내외에서 10cm 내외까지이며, 재료는 흙·돌·뿔·뼈·비취·백옥·청옥·수정·마노(瑪瑙) 등이 있으나 옥으로 된 것이 많다. 곡옥은 중국 일부와 아시아 지역에서도 출토되고 있으나, 한반도 및 일본에서 크게 발달되었다.
< 신라의 금모곡옥- 사진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신라 귀걸이 장식 곡옥- 사진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 천마총 출토 곱은옥- 사진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금관총 출토 목걸이와 곱은옥- 사진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 경주 고분군 출토 5~6세기 곡옥들- 사진출처: 두산백과>
첫댓글 오늘날 태극의 기원이 바로 곡옥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