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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onardo da Vinci | |
이름 | 레오나르도 디 세르 피에로 다 빈치 (Leonardo di ser Piero da Vinci) |
출생 | 공화국 |
사망 | 왕국 앙부아제 |
직업 |
빈치 지역 출신의 세르 피에로의 아들
레오나르도라는 뜻이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Leonardo da Vinci)는
흔히 '다 빈치'라고 줄여
부르기도 하지만
전통적으로는 이름인
레오나르도로 줄여 부른다.
'다 빈치'는 성씨가 아니라
그냥 빈치(Vinci) 출신이라고 해서
붙은 칭호이다.
이탈리아가 유럽의 다른 지역에 비해
성씨가 늦게 보편화되었기 때문이다.
현대와 같은 성씨+이름 개념이
아직 확립되지 않던 당시에는
다른 사람(특히 동명이인)과
구별하기 위한
기호로써 자신의 출신 지역을
사용하는 경우가 드물지 않았다.
한 동네에 레오나르도가 세 명 산다면
그 셋을 구별하기 위해
각각 '방앗간 집 레오나르도' 와
'앞골짜기 레오나르도',
'빈치 사람 레오나르도' 식으로 불렀다.
이 점에서 보면 현대의 성처럼
'다 빈치 씨'라고 부르기에는 적절치 않지만,
기본적으로 성씨와 비슷한 구실을 한다.
로망스어 이름에서 흔히 발견되는 de 뭐시기와
독일어의 von 뭐시기들이
이런 풍습의 흔적이다.
1563년에 열린
제3차 트리엔트(트렌토) 공의회를 통해
가톨릭 교회에서
모든 이의 성명을 포함한
본적 기록부를 의무화했다.
그래서 1563년 이후 세대에서는
이탈리아에서도 모든 이들이
성씨를 가지게 되어
일반인도 보통 성씨로 줄여 부르게 되었다.
1563년 이전에는
이탈리아에서
아직 성씨를 쓰지 않는 이들이 많아서
이름으로만 부르는 경우가 보편적이었다.
그 예로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이름인 갈릴레오로 불렸거나,
레오나르도 피에로 다 빈치가
레오나르도로 불렸던 것을 들 수 있다.
한편 프란체스코 페트라르카(Petrarca)나,
조반니 보카치오(Boccaccio)처럼
성씨로 불리는 이들도 있었다.
따라서 서양권에서 그를 언급할 때는
레오나르도라고 부르는 것이 좋다.
피렌체 공화국 토스카나의
'빈치(Vinci)' 마을에서 태어났다.
레오나르도는 정식으로
결혼하지 않은 부모인
변호사 아버지 안토니오 피에로와
농민이었던 어머니 카타리나
사이에서 태어난
혼외아들이었다.
처음 태어나서는
어머니의 집에 살다
대여섯이 돼서 아버지의 집에 가서
살게 되었는데,
레오나르도를 돌봐준 것은
아버지보다는 숙부였고
숙부는 어린 레오나르도에게
자연과 세상을 조금씩 가르쳐주었다
30살이 된 1482년 다빈치는
밀라노 공국에서 활동을 시작했다.
밀라노 공이었던 루도비코 스포르차가
다빈치를 지원하면서,
다빈치는 여러 작품들을 만들어냈다.
암굴의 성모나 기마상 등이 이때 만들어졌고,
그 중 가장 유명한 건 최후의 만찬이다.
제2차 이탈리아 전쟁이 일어나면서
1499년에 프랑스의 루이 12세가
밀라노를 점령하고
루도비코는 프랑스에 투옥되며
밀라노 정세가 불안정해지면서
다빈치는 잠시 베네치아에서 일을 하다가
1500년 피렌체로 다시 돌아오게 된다.
1501년 성 모자와 성 안나
제단화를 그린 것을 시작으로
수많은 연구 스케치와 관찰을 남겼다.
헬리콥터나 인체비례도 등
잘 알려진 다 빈치의 과학자, 기술자적 면모는
이 때의 스케치로 알게 된 것.
1503년에 피렌체 시청에
벽화작업을 의뢰받아
앙기아리 전투 작업을 시작했는데,
재밌는 건 옆편 벽에서
라이벌인 미켈란젤로가
카시나 전투를 작업하고 있었다는 것.
더 재밌는 건 둘 다
결국 완성 못해버리고 튀었다.
역시 라이벌 또한 1503년에는
그 유명한 모나리자 작업을 시작해
죽을 때까지 그림을 손에 놓지 않는다.
1506년에는 루이 12세의 요청을 받고
다시 밀라노에서 작업을 하게 된다.
밀라노를 떠나는 1513년까지
다빈치는 다양한 작업과
연구를 하면서 지냈는데,
제3차 이탈리아 전쟁으로
1512년 교황이 밀라노를 공격하고
프랑스는 물러난다.
그렇게 프랑스가 떠나면서
다빈치는 교황령의 로마로 가서
교황청 작업을 주로 하게 되었지만
완성작 없이 취소되었고,
1516년 프랑수아 1세의 요청으로
프랑스 루아르 강의
앙부아즈 궁에 기거하게 되고,
여기서 모나리자가 완성된다.
1519년 4월 23일 세상을 떠난다
그의 기록은 공학, 식물학, 조경 분야 등
다방면에 이름이 남아 있다.
그러나 다빈치가 관심을 가졌던
방대한 분야에 비하면
남아 있는 작품의 숫자는 적은 편이다.
게다가 본인이 작품에
서명하지 않았던 탓에
다빈치의 작품인지 아닌지
이견이 갈리며 불확실한
작품들이 많다.
거기다가 워낙 본인이
세계적으로 유명하다보니
아무데나 다빈치가 관여했다는
소문이 붙어버리는 상황이다.
예를 들면 근거가 불확실함에도
일반적으로 우리가 먹는 긴
스파게티 면이나 포크까지
발명했다는 설이 있을 정도다.
그의 유명한 작품인 모나리자 |
안기아리 전투 그림의 페테르 파울 루벤스 모사본.
(밀라노 공국 vs 베네치아 공화국)
유명한 레오나르도의 자기소개서에선
대부분을 군사용 공격병기를
구상해 이야기하였고,
그림의 재능을 마지막에 소개했지만
오늘날 다빈치의 그림 실력은
그의 업적 중 가장 고평가되는 부분이다.
그가 남긴 그림은 모나리자,
최후의 만찬 등
이름만 들어도 알 만한 유명한 것들이다.
그는 그림 실력 그 자체로써도 출중했지만,
새로운 화법의 실험이라는 면에서
높게 평가할 만한 인물로,
자신의 그림에 새로운 시도를 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당시 이탈리아 최초로 기름을 사용한
유화를 시도한 화가들 중 하나였다.
그 결과로 모나리자에서
공기 원근법을 처음으로 구사해내는 등
좋은 결과도 여러 차례 얻어냈다.
암굴의 성모나 에르마인을 안고 있는 숙녀는
르네상스 최고의 초상화로
손꼽히는 명작들이다.
반대로 다 완성된 벽화를
제대로 말리지 못해
그대로 녹아내린 것.
(그 실패작의 이름이 '앙기아리 전투') 문제는
이 작품이 미켈란젤로와의
대결작이었다는 것이다.
미켈란젤로는 '카시나 전투'라는
작품을 그려내지만,
앙기아리 전투는
현재 라파엘로 등
다른 화가들의 스케치 모사 밖에
남아 있지 않다.
본 문서의 앙기아리 전투 그림도
루벤스가 그린 모사본이다.
최후의 만찬은
완벽주의적인 그의 성격으로
당시 유행하던
프레스코 벽화 기법이 아닌
템퍼러로 그려져
바로 퇴색이 시작되는 등
(미술사적 의의가 아니라
그 개인적으로 평가한다면)
그의 도전이 실패한 그림도 많다.
당대에 확립된
그의 천재 미술가적 이미지는
사실 그의 작품이
얼마 남아 있지 않다는 것에
기인하는 바가 매우 크다.
실제로 그가 서양사에
오래토록 남을 수 있었던 이유는
자연과학적인 사고방식으로,
금기로 여겨지던 해부를 행하는 등
여러 시도를 통해
인체의 많은 부분들을
실질적으로 관찰해냈다는 것 때문이다.
인간의 태아를
최초로 그린 사람이기도 하고
많은 해부 스케치를 남긴 바 있다.
다빈치의 스케치인
비트루비우스적 인간은
인체 비례에 대한 상징처럼
여겨질 정도로 유명하다.
다만 르네상스 시대에
교회에서는 당연히
인체 해부를 금지했지만,
실제로는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한
인체 해부쇼가 유행할 정도였으며
당시 다른 유명한 화가들도
다들 해부를 했다.
흔한 레오나르도
과대 평가 떡밥 중 하나이다.
무슨 사회적 터부를 어기면서까지
진리 탐구에 몰두하고
시대를 앞서가고 그런 건 아니란 소리.
그렇게 생전에 완성한
그림이 얼마 되지 않고,
성격이 괴팍하기는 했지만
그 그림 실력 하나만큼은 천재적으로, 그
의 스승 안드레오 델 베로키오는
그 당시에 유명한 화가였으나,
자신이 그리던 그리스도의 세례를
레오나르도가 몇 가지를 덧붙였는데,
스승 베로키오가
레오나르도의 솜씨를 보고
'다시는 물감에 손대지 않겠노라'고
맹세한 기록이 있다
이 당시의 나이가 스무 살.
하지만 실은 베로키오가
재능 치는 도제에게
더 많은 그림을 위임하고
자기는 수익성이 높은
조각상 제작에 전념하겠다는
사업상의 결정을 내렸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할 것이다.
레오나르도는
작품을 완성시키지 못한 경우가 많은데,
밀라노의 공작 루도비코 스포르차의 동상을
수년간 연구만 하다가
완성하지 못한 일도 있으며,
오스만 제국에는
젊은 시절의 그가
메흐메트 2세의 초상화를 그리다가
메흐메트 2세가
그 도무지 끝이 안 보이는
제작기간에 질려서 돌려보냈다는
식의 설화도 있을 정도였다.
이외에도 오스만 제국
보스포루스 해협에
다리를 디자인했는데
당시 기술로서는 도무지
이게 만들 수 있냐고
오스만 제국 황실에서 부정적이라
끝내 이뤄지지 못한 적이 있다.
그리고 그냥 평범하게
나무로 길쭉한 다리로 만들어진다.
요즘에는 한 작품을 완성하지 못한 상태에서
또 다른 그림에 손을 대었던 것이
성인ADHD의 증상이 아니었나 하는
해석도 있다.
물론 모두 본인의 잘못은 아니었는데,
예를 들면 체사레 보르자에게 인정받아
도시 계획의 총책임자급의 위치에
오를 수 있었지만
체사레가 몰락한 탓에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훌륭한 건축가였던 미켈란젤로나
라파엘로에 비해
다빈치는 건축 분야에서
뚜렷한 결과물을 남기지 못했다는 점도
둘과의 비교에서 상대적인 저평가 요소다.
건축면에서 큰 발전이 있었던 르
네상스 시대의 인물 답게
다빈치 역시 건축에 관심이 많았고,
이탈리아와 프랑스 등에서
건축 자문으로 활동하며
건축에 관련된 스케치를 다수 남겼지만,
다빈치 본인이 독자적인 건축가로
활동하지는 못했다.
다빈치가 프랑스의 샹보르 성의
이중 계단에 대한 아이디어를
그림으로 남겼고,
이 성의 건축가였던
도메니코 다 코르토나가
그것에 따라 설계했다는
설이 유명하지만
다빈치가 그림을 넘겼다는
확실한 근거는 없다.
2010년 6월 20일에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의 코너인
Surprise Secret에서는
그가 요리사로서도
활동한 적이 있다고 한다.
이 내용은 EBS 지식채널e 에서도 다뤘다.
상당히 개그스러운 에피소드.
5. 성격 및 일화
•멀티태스킹의 달인이기도 해서
친구가 집을 방문했을 때
한손으론 글을 쓰고
한손으로는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고 한다.
•조르조 바사리가 지은
탁월한 화가, 조각가, 건축가들의 생애의
레오나르도 전기에서
그는 "육체적 아름다움은
아무리 예찬해도 지나치지 않고,
그 행동거지에는
무한한 우아함이 있었다."라고
표현됐다.
한마디로 말해 꽃미남...
거기에 더해서
당대의 패션 유행과는
다르게 입고 다녀서
좋게 말하면 트렌드세터,
나쁘게 말하면 기인이었다고.
슬림한 옷차림들 가운데
펄럭이는 긴 옷자락의 화가라니,
멋지긴한데 당시엔 구설수가
좀 있었을 것이다.
•굉장히 특이한 필기 습관을
가지고 있었는데,
글을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좌우를 반전시켜 기록했다.
그래서 그의 글을 제대로 읽으려면
반드시 거울을 옆에서 비춰야 했다.
이 필기 양상을
'거울형 글쓰기
(mirror writing)'라고 불리는데,
현대에도 드물지만
이런 필기 양상을 보이는 사람들이
종종 있다고 한다.
다빈치코드에도 나오는 이야기인데
글을 쓸 때 본인만 알아볼 수 있게 속필로,
그것도 거꾸로 써나갔다고 한다.
양손잡이답게
오른손 왼손 가리지 않고 써서,
다빈치가 남긴 저작물은
이리저리 돌려보고
하나 하나 유추해서 봐야 한다고..
•어렸을 때도 비범해서
아버지의 친구가 방패에
무서운 그림을 그려달라는
요청을 했는데
괴물을 그리기 위해
살아있는 동물들을
산채로 해부했다는 일화도 있다.
이는 나중에 인체 비례도를 그릴 때
시체보관소에 틀어박혀
인체를 연구하는 계기가 된다.
•흔히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동성애자였다는 가설이 있다.
실제로 1476년의 법정 기록을 보면
세 명의 젊은 남성과 같이
동성애로 기소되었으나
증거 불충분으로
무죄 판결을 받은 기록이 있다.
그의 사후 제자 겸
연인으로 추측되는
멜지가 그의 작품들과
땅을 상속 받았다.
2014년 10월 26일에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
모나리자의 모델이
레오나르도의 제자이자
동성연인인 안드레아 살라이
(Andrea Salai)일 것이라는
가설을 다루었다.
레오나르도의 동성애에 대해
해석한 프로이트의 논문이 있다.
•레오나르도는
어떤 인물을 그리고자 할 때
가장 먼저 대상의 성격과
본성을 고려했다.
즉, 그 사람이 귀족이냐 평민이냐,
활기찬가 진지한가,
고민이 많은가 행복한가,
젊은가 늙은가,
성격이 급한가 침착한가,
호의적이냐 악의적이냐와 같은
것들을 생각해보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들에 대해 결심이 서면,
그는 이런 종류의 사람들을
많이 찾을 수 있는 장소로 가서
그들의 얼굴, 행동, 옷, 움직임을
면밀히 관찰했다.
그리고 필요하다 싶은 것이 눈에 띄면
벨트춤에 항상 차고 다녔던
작은 책을 꺼내 펜으로 스케치를 했다.
이것을 아주 많이, 여러 번 반복하면
아주 많은 양의 스케치들을
모으게 되었고,
따라서 그가 그리고 싶어하는
사람에 대해
충분한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다음에는 그 그림들을
정교하게 그리는 데 집중하면 되었고,
그렇게 함으로써
경이로운 성공을 해내고 마는 것이었다.
•2017년 11월,
그의 그림인 살바토르 문디가
무려 4억 5천만 달러(약 4,803억 원)에
경매로 팔리면서
인류 역사상 가장 비싼 예술품이 되었다.
•그의 36장짜리 노트가
빌 게이츠에게 340억에 낙찰되었다.
그리고 빌 게이츠는
교육목적으로
이 노트를 번역해서
주석을 달아 공개했다.
•미켈란젤로보다 한창 연장자지만
호승심 가득찬 미켈란젤로는
레오나르도를 존경하는 선배라기보다는
강력한 경쟁자로 인식했다.
비해서 그들보다 연하인 라파엘로는
명작 아테네 학당을 그리면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를
레오나르도와 미켈란젤로를
모델로 삼아 존경심을 드러냈다고 한다.
이들은 미술사에
르네상스 시기의 3
대 대표 화가로 불린다.
물론 레오나르도 다빈치 본인도
이런 존경심이나 경쟁 의식에서
초탈한 성인군자는 절대 아니고
상당히 까칠하고 유치해 보이기까지
한 독설가였다.
그래서 미켈란젤로와의 충돌도
정말 많았다.
한 예로 레오나르도가
추종자들과 대화하다가
단테 알리기에리의 작품에 대한
질문이 나오자,
레오나르도는 마침 지나가는
미켈란젤로를 가리키며
"저 친구가 더 잘 알 것이오."
이라고 말했다.
미켈란젤로를 인정해서가 아니라
'저놈이 단테에 대해 알기는 하겠냐'라는
식의 비꼬기였다.
그런데 미켈란젤로는
로렌초 데 메디치 아래에서
활동할 때부터 문학을 접하였고,
미켈란젤로가 가장 좋아하는 작가가
바로 단테였다.
그러니 이 말을 들은 미켈란젤로가
어떤 감정을 품었을지는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당연히 그 자리에서 레오나르도에게
"밀라노에서 만들던 동상도
제대로 완성시키지 못하고,
뭐든지 제대로 하는 게 없는 놈이다!
네놈에게 동상 일 맡긴 그놈은
둘도 없는 바보 멍청이고!"라며
노발대발하며 날뛰었다.
이 일화는 레오나르도와
미켈란젤로 두 사람 사이에서
일어난 일화 중에선
매우 사소한 이야기에 불과할 정도로
사사건건 충돌했다.
6. 작품 일람
•모나리자
•최후의 만찬
•에르마인을 안고 있는 숙녀
•비트루비우스적 인간
7. 기타
"진실로 인간은 동물의 왕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잔인성이
동물을 능가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다른 생명체의 죽음을 통하여
살아 가는 살아 있는 묘지이다.
나는 어렸을 때
고기를 먹지 않겠다고 결심했으며,
내가 그랬듯이
다른 사람들도 동물 살해를
살인과 똑같이 여길 날이 올 것이다."
라는 말을 남길 만큼
동물들을 사랑했고
전쟁을 경멸한 사람이었다고도 전해진다.
무기를 디자인하긴 했지만
이건 필요로 하는 물체를 연구하다보니
자연스레 한 것이었다고 한다.
그림을 그리고 마무리를
붓이 아닌 손가락으로 했기 때문에
그의 그림엔 지문이 남아 있었다고 한다.
모나리자가 도난당하고
짝퉁 속에 있어서
어느 것이 진품인지 알기 어려웠을 때
그 지문으로 진품을 찾았다는 말이 있는데
이건 사실이 아니다.
당시엔 지문 검사 방식은
존재하지도 않았다.
최후의 만찬에 관련된 음모론은
댄 브라운의 소설 다빈치 코드에서
주요 떡밥으로 쓰였으나
그 사실성에는 이래저래 말들이 많다.
일단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시온 수도회의 비밀 교주가
아니었던 것은 확실하다.
아카데미과학에서
이 사람의 발명품을 모형화하여
전개하고 있다.
장갑차, 헬리콥터, 시계, 아치다리 등등.
갤럭시 노트10 개발코드명이다.
이탈리아 왕국 해군의 잠수함
굴리엘모 마르코니급 중에서
그의 이름이 붙은 잠수함이 있다.
검술이 매우 뛰어났다 한다.
토크멘터리 전쟁사에서
임용한 박사가 말하길
당대 최고의 검객이었다 한다.
8. 대중매체에서 그의 모습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한 예술가인대다
시대를 앞서간
여러모로 기이한 면이 많아서
다양한 미디어에서
그의 이름이 등장하거나
본인을 등장시키곤 한다.
기이한 천재 이미지는
기본적으로 먹고 들어가고
예술가의 모습보다는
주로 과학자나 발명가의 모습에
비중을 둬서 등장하는 경우가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