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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07
#형상
구약에 종종 등장하는,여호와와 동급인 여호와의 사자는 보이지 않는 존재가 아니라 볼수있는 사람의형체로 나타난다.그리고 여호와의 사자를 목격한 구약의 인물들은 자신들의 눈에 보이는 사람의 모습을 한 여호와의 사자에게 절을 하거나 제물을 바치기도 하였다.만약에 여호와의 사자의 사람의 형체가 임시적 일회적 용도의 피조물이었다면,그에게 절하고 제물을 바치는것은 우상숭배가 될것이다. 그렇다고 그들의 경배와 제사가 사람의 형상 너머의 여호와 하나님께 드려진 것이라고 한다면 이는 교황주의자들의 성상/성인숭배 논리와 다르지않다.따라서 그들이 경배와 제사를 드린대상은 여호와의 사자의 사람의 형체이면서도 우상숭배가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께 드린것으로 여겨졌으므로,그 사람의 형상 자체가 여호와 하나님이시라 할 수 있다.그러므로 그 사람의 형상은 피조물이 아니라 여호와와 함께 영원한 존재여야만 한다.사람의 형상을 가지고서 여호와 하나님이라 칭함받으실 수 있는 분은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밖에는 없으시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은 성육신전 구약시대에도 계셨었고, 더나아가 영원전부터 하나님의 독생자로서 존재하셨었다고 보아야한다.
#작정 #의지
죄로인해 타락하고 부패한 인간의 지성의 사고체계는 상호배타적이므로,그리스도의 영원전 작정과 인간의 자유의지는 어떻게 설명하려한들 상충할수밖에 없다.그래서 믿음이 없는자는 그리스도를 죄의 조성자로 하거나 그리스도의 작정을 부정하고,믿음이 연약한자는 그리스도의 작정은 인정하되 인간의 자유의지를 축소한다.그러나 믿음이 강건한 성도는 자신의 지성의 불완전함을 인정하고 비록 이해되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그리스도의 영원 전 작정하심과 인간의 의지가 그리스도께는완벽히 조화될수 있다는것을 겸허히 받아들인다.
#20220107
#사사기 #Judges 6:33-40 #기드온
33 그 때에 미디안과 아말렉과 동방 사람들이 다 함께 모여 요단 강을 건너와서 이스르엘 골짜기에 진을 친지라
미디안과 아말렉과 동방 족속들은 그동안 호시탐탐 이스라엘을 침략할 기회를 엿보다가 기드온이 바알 제단과 아세라 상을 부수고 여호와의 제단을 쌓고 제사를 지낸 것을 가지고 꼬투리를 잡아 동맹을 맺어 쳐들어 온 것 같다. 기드온을 제외한 거의 대부분의 이스라엘은 미디안 연합군이 대군을 이끌고 오자 겁에 질린 나머지 자기들의 죄악을 돌이키기보다는 이 일을 초래한 기드온에 대한 불만이 극에 달해 있었을 것이다. 아합과 이스라엘은 자기들의 죄악으로 극심한 가뭄이 왔음에도 불구하고 도리어 선지자 엘리야더러 이스라엘을 괴롭히는 자라는 누명을 씌웠다. 우상숭배에 찌들어버린 유다 백성들은 우상숭배를 그치자마자 가뭄과 기근이 왔다며 다시 하늘의 일월성신을 숭배하게 되었다. 말세에 천사들이 하늘에서 재앙을 쏟아부을 때 악인들은 그 재앙들이 자기들의 죄악으로 말미암은 것임에도 불구하고 재앙을 내리신 하나님 그리스도를 향해 저주를 퍼붓는다. 오늘날 교회에서도 진리를 따라 선을 행하다가 극심한 어려움을 만나게 되면 교회를 위해 선을 행하는 성도들에게 그 책임을 뒤집어 씌우기도 한다.
34 여호와의 영이 기드온에게 임하시니 기드온이 나팔을 불매 아비에셀이 그의 뒤를 따라 부름을 받으니라
기드온은 비록 여호와 그리스도의 명을 따라 순종하여 바알 제단과 아세라 상을 부수고 여호와 그리스도의 규례를 따라 제단을 세우고 제사를 지내어 순종하였지만 그 일로 인해 미디안이 대군을 이끌고 오는 것을 보자 마음이 물과 같이 녹아 큰 두려움에 떨고 자기로 인해 이스라엘 전체가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지게 된 것 같아 몸둘바를 몰라했을 것이다. 그렇게 무너져버린 기드온의 심령을 여호와 그리스도께서 가만히 두지 않으시고 당신의 성령을 보내셔서 기드온이 자력으로는 다잡을 수 없는 강하고 담대한 마음을 주시고 미디안과 전쟁을 벌이게 하신다. 기드온의 뒤를 따른 아비에셀이란 사람에 대해서는 이름만 언급될 뿐 그의 삶과 행적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다. 아비에셀이 부름을 받았다는 것은 아마도 단지 인간적인 사명감에 의해 기드온과 함께 하기로 했다기보다는 그 또한 기드온과 같이 기드온을 돕기 위해 여호와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영을 임하게 하신 선택받은 인물이었을 가능성이 더 큰 것 같다.
35 기드온이 또 사자들을 온 므낫세에 두루 보내매 그들도 모여서 그를 따르고 또 사자들을 아셀과 스불론과 납달리에 보내매 그 무리도 올라와 그를 영접하더라
여호와 그리스도의 영으로 말미암아 담대해진 기드온은 정신을 차리고 자기가 속한 므낫세 지파 전 지역에 미디안과 싸울 용사를 모집하고자 사자들을 보내었고 므낫세에 인접한 이웃 지파들에게도 지원군을 요청하고자 그리하였다. 아마도 에브라임 지파에도 사자들을 보냈을 것인데 에브라임은 므낫세의 형제 중의 형제 지파임에도 불구하고 처음부터 므낫세를 돕기 위해 군사를 보내지 않다가 기드온이 미디안을 쳐부수고 승기를 잡게 되자 그제서야 미디안 방백인 오렙과 스엡을 잡는데 일조하고 일찌감치 자기들을 부르지 않았다며 도리어 기드온에게 성질을 내는 파렴치한 모습을 보인다.
36 기드온이 하나님께 여쭈되 주께서 이미 말씀하심 같이 내 손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려거든
37 보소서 내가 양털 한 뭉치를 타작 마당에 두리니 만일 이슬이 양털에만 있고 주변 땅은 마르면 주께서 이미 말씀하심 같이 내 손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줄을 내가 알겠나이다 하였더니
38 그대로 된지라 이튿날 기드온이 일찍이 일어나서 양털을 가져다가 그 양털에서 이슬을 짜니 물이 그릇에 가득하더라
39 기드온이 또 하나님께 여쭈되 주여 내게 노하지 마옵소서 내가 이번만 말하리이다 구하옵나니 내게 이번만 양털로 시험하게 하소서 원하건대 양털만 마르고 그 주변 땅에는 다 이슬이 있게 하옵소서 하였더니
40 그 밤에 하나님이 그대로 행하시니 곧 양털만 마르고 그 주변 땅에는 다 이슬이 있었더라
기드온은 이미 여호와 그리스도의 성령이 임하신 상태였기 때문에 양털과 이슬로 두 번이나 겹쳐 표징을 구한 것은 불신앙이나 나약함에 의한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아마도 그는 자신과 함께 할 군사들을 불러모았기 때문에 그들에게 이 전쟁이 사람의 뜻이 아니라 여호와 그리스도의 뜻이고 자신이 그분의 큰 용사와 사사로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을 입증하고 확신시켜줄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또한 율법에도 두 증인 이상의 증언이 효력을 발휘한다고 기록된 바와 같이 여호와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표징도 한번으로는 우연으로 치부될수도 있었기 때문에 두번을 겹쳐 보임으로써 부인할 수 없도록 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요셉이 풀이한 바로의 꿈에서도 동일한 사건을 위해 두번의 꿈이 겹쳐진 것이었다. 그럼에도 기드온은 그렇게 여호와 그리스도의 표징을 두번이나 간구하는 것이 자칫 범죄하는 것이 되지않을까 싶어서 여호와 그리스도의 자비와 긍휼도 함께 간구한다. 오늘날 교회와 교인들이 감히 예수님을 자기 친구라며 어깨동무라도 할것처럼 맞먹으려 하고 버릇없는 자식들이 마냥 부모에게 이것저것 당당하게 요구하듯이 하나님께도 뻔뻔하게 나오는 것은 믿음이 아니라 단지 방자한 짓일 뿐이다.
#20210107
#민수기 #Numbers 22:31-41 #발람
31 그 때에 여호와께서 발람의 눈을 밝히시매 여호와의 사자가 손에 칼을 빼들고 길에 선 것을 그가 보고 머리를 숙이고 엎드리니
32 여호와의 사자가 그에게 이르되 너는 어찌하여 네 나귀를 이같이 세 번 때렸느냐 보라 내 앞에서 네 길이 사악하므로 내가 너를 막으려고 나왔더니
33 나귀가 나를 보고 이같이 세 번을 돌이켜 내 앞에서 피하였느니라 나귀가 만일 돌이켜 나를 피하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벌써 너를 죽이고 나귀는 살렸으리라
34 발람이 여호와의 사자에게 말하되 내가 범죄하였나이다 당신이 나를 막으려고 길에 서신 줄을 내가 알지 못하였나이다 당신이 이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면 나는 돌아가겠나이다
35 여호와의 사자가 발람에게 이르되 그 사람들과 함께 가라 내가 네게 이르는 말만 말할지니라 발람이 발락의 고관들과 함께 가니라
여호와께서는 나귀의 이상행동으로도, 나귀가 말을 하게 하신 것으로도 발람이 여전히 자기 잘못을 깨닫지 못하자 급기야 발람의 눈을 밝히셔서 칼을 들고 서 계신 여호와의 사자를 보여주신다. 자기를 죽이시려고 칼을 들고 흉흉하게 서 계신 여호와의 사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직접 목도한 발람은 그제서야 나귀와의 어처구니 없는 대화를 그치고 황급하게 머리를 숙이고 엎드려 조아린다. 여기서 내가 여호와의 사자를 여호와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보는 이유는, 그가 발람이 절하는 것을 제지하지 않은데다가 발람을 책망할 때 스스로 자기 앞에서 발람의 길이 사악하다고 언급했기 때문이다. 성경에서 여호와의 사자가 피조물인 천사일 때는 절대로 사람의 경배를 자기가 받지 않는데다가, 여호와의 말씀을 대언하면서 자기 스스로 여호와라거나 하나님이라 칭하지도 않는다. 천사 가브리엘은 다니엘에게나 마리아에게 나타났을 때 자기 이름을 분명하게 밝혔다. 사도 요한이 밧모 섬에서 환상 중에 한 천사를 보고 엎드렸을 때, 그 천사는 자기에게 경배하려던 요한을 단호히 저지하였다. 반면에 여호와의 사자가 여호와 당신이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이실 때는 당신을 드러내신 사람에게서 경배와 예물과 제물을 받으셨다. 아브라함의 접대를 받고 그와 소돔의 멸망에 대해 논하신 천사가 그렇고, 기드온에게서 예물을 직접 받은 천사가 그러했으며, 삼손의 부모에게서 예물을 받고 스스로 기묘자라 칭한 천사가 모두 하나님의 영원하신 독생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주의할 것은 여호와의 사자로 나타나신 분은 성부 하나님도 아니시고 성령 하나님도 아니시고 오로지 영원 전부터 영광의 육신을 입고 성부로부터 나신, 성자이신 예수 그리스돗시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성부 하나님께서는 아무에게도 보내심을 받지 않으시기 때문이고, 성령 하나님께서는 보이지 않는 영으로서 아무에게도 눈에 볼 수 있는 모습으로 보내심을 받지는 않으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부로부터 전권을 받으신, 육체를 가지신 성자 예수 그리스도만이 여호와의 사자로서 보내심을 받으실 수 있으셨다.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토록 직접 여호와의 사자로서 발람 앞에 나타나셔서 몇번이나 경고를 주신 것은 그만큼 발람의 탐욕과 죄악이 여호와 보시기에 얼마나 사악했는지와 더불어, 한편으로는 여호와께서 얼마나 그만큼 발람을 아끼셨는지를 알려주신다고 할 수 있다. 만약에 여호와께서 발람을 아끼지 않으셨다면 그가 이스라엘을 저주하러 모압으로 가건말건 상관하지 않으셨을 것이다. 그러나 여호와께서는 꿈으로도 나타나셨고 현상으로도 나타나셔서 발람이 돌이키기를 바라셨던 것이다. 여호와의 사자가 비록 나귀는 살리고 발람은 죽였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지만 이는 하나의 가정법일 뿐, 실제로는 나귀의 영혼을 깨우셔서 당신의 모습을 보게 하시고 세 번이나 피하도록 섭리하심으로써 발람을 살리신 것이었다.
발람은 그렇게 여호와의 사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한낱 나귀보다 못하다며 심한 질책을 듣고 나서야 정신이 번쩍 들어서 자기 죄를 고백하고 다시 집으로 돌아가겠다고 한다. 그런데 여기서도 여전히 발람이 한가닥 미련의 끈을 놓지 못한 것을 볼 수 있는데, 그것은 여호와께서 원하지 않으신다면 하고 조건부 단서를 단 것이었다. 이미 여호와께서 그 길을 금지하신 것을 여러번 드러내셨는데도 불구하고, 발람은 혹시나 하는 마음을 아직도 버리지 못한듯이 보인다. 이에 여호와의 사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모압 귀족들과 함께 가라고 하시며 당신의 말씀만 할 것을 신신당부 하시는데, 아마도 이번 명령은 내버려두심으로서가 아니라 모압 왕 발락의 계략을 발람을 통해 뒤집으시려는 여호와의 계획을 이루시려는데 있는 것으로 보인다.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에게 복을 주시려고 그들을 향한 발람의 저주를 축복으로 바꾸셨고, 아들에게 반역을 당한 다윗 왕을 다시 세우시려고 압살롬의 책사인 아히도벨의 계략을 물리치게 하셔서 아히도벨로 자살하게 하신다. 사도 바울은 우리의 우둔함과 아리석음, 그리고 악인들의 흉계 까지도 하나님과 그리스도께서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역사하신다고 하였다.
발락이 발람을 대접하다
36 발락은 발람이 온다 함을 듣고 모압 변경의 끝 아르논 가에 있는 성읍까지 가서 그를 영접하고
37 발락은 발람에게 이르되 내가 특별히 사람을 보내어 그대를 부르지 아니하였느냐 그대가 어찌 내게 오지 아니하였느냐 내가 어찌 그대를 높여 존귀하게 하지 못하겠느냐
38 발람이 발락에게 이르되 내가 오기는 하였으나 무엇을 말할 능력이 있으리이까 하나님이 내 입에 주시는 말씀 그것을 말할 뿐이니이다
39 발람이 발락과 동행하여 기럇후솟에 이르러서는
40 발락이 소와 양을 잡아 발람과 그와 함께 한 고관들을 대접하였더라
발람의 첫번째 예언
41 아침에 발락이 발람과 함께 하고 그를 인도하여 바알의 산당에 오르매 발람이 거기서 이스라엘 백성의 진 끝까지 보니라
만약에 발람이 가는 도중에 여호와의 사자를 뵙지 않았다면 모압으로 가는 길과 발락의 환대와 융숭한 대접에 마음껏 즐기며 기뻐했을 것이다. 그러나 중간에 여호와의 사자를 뵙고 그분으로부터 호된 질책과 엄중한 명령을 받았기 때문에 가는 길과 발락의 환대가 매우 불편하고 거슬렸을 것이다. 발락이 발람을 바알의 산당에 오르게 한 것은, 자기들이 섬기는 신으로써 감히 여호와를 이겨보려함이었던 것이다.
#20200107
#성경묵상 #창세기 #Genesis 18장. #아브라함 #사라
9 그들이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네 아내 사라가 어디 있느냐 대답하되 장막에 있나이다
10 그가 이르시되 내년 이맘때 내가 반드시 네게로 돌아오리니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시니 사라가 그 뒤 장막 문에서 들었더라
11 아브라함과 사라는 나이가 많아 늙었고 사라에게는 여성의 생리가 끊어졌는지라
12 사라가 속으로 웃고 이르되 내가 노쇠하였고 내 주인도 늙었으니 내게 무슨 즐거움이 있으리요
13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사라가 왜 웃으며 이르기를 내가 늙었거늘 어떻게 아들을 낳으리요 하느냐
14 여호와께 능하지 못한 일이 있겠느냐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네게로 돌아오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15 사라가 두려워서 부인하여 이르되 내가 웃지 아니하였나이다 이르시되 아니라 네가 웃었느니라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뿐만 아니라 사라에게도 하나님 당신의 언약을 확증하시기를 원하셔서 사라를 찾으셨다. 그러나 아마도 사라는 주인으로 모시는 남편과 그 남편이 주인처럼 모시는 사람들과의 대화를 방해하지 않기 위해서 장막에 머물렀던 것 같다. 사라는 담대한 심성의 소유자였어도 자기 남편을 무시하지 않고 도리어 아내로서 순종하는 모범을 보인다. 하나님께서는 사라가 장막에서 이야기를 듣고 있을 줄 아시고 그녀에게 하실 말씀을 남편인 아브라함에게 대신 하신다. 당시 아브라함의 나이는 99세이고 사라의 나이는 89세였으므로 자연적인 신체 상황은 둘 다 전혀 임신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때문에 아브라함도 처음에는 이스마엘이나 살기를 구하였고 사라도 마찬가지로 마음 속으로 어떻게 그런 즐거움을 맛볼 수 있겠느냐며 부정한다. 하나님을 믿는다 하면서도 정작 그 언약이 나 자신에게 해당되는 것이먼 우리는 쉽사리 그 언약의 신실함을 믿지 못하는 것이 죄로 인해 부패한 인간의 모습이다. 이는 우리가 여전히 이 세상에 얽매여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 믿음으로 자기 친족을 떠났고 사라 역시 남편을 신뢰하고 순종함으로 따라 나섰어도 그 믿음의 실질적 열매에 대해서는 자기 육신의 후패함이 먼저 보였기 때문에 쉽게 받아들이지를 못한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사라가 하나님을 믿어 찾기 이전에 그들을 복의 근원과 많은 민족의 부모가 되도록 선택하셨기 때문에 그들의 연약해진 믿음과는 상관없이 하나님 당신의 권세와 신실하심을 가르쳐주신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신자라고 해서 모든 이들이 아브라함과 사라와 똑같은 수준의 복을 받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신자 각각에게 알맞는 은사와 복과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지정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자기에게 맡겨진 달란트와 십자가를 가지고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이다. 우리에게 확실한 하나님의 언약은 오로지 우리에게 주신 성경을 통해서만 알 수 있을 뿐이며 이 성경의 말씀을 각자의 삶에서 믿음으로 실찬하머 살아가다가 하나님의 일하심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 삶에서 종종 내 상황으로는 전혀 불가능해 보이는 일일지라도 그것이 만약 그리스도와 복음을 위해 내게 맡겨진 일이라는 확신이 있다면 아브라함과 사라처럼 의혹은 있을지 몰라도 하나님께서는 그 일을 반드시 나를 통해 이루어 가신다. 그래서 도저히 거룩한 교회를 차지한 멸망의 가증한 목사가 물러날 가능성이 없어 보여도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탐욕을 이용하시어 그가 다른 교회와 불륜을 저질러 스스로 교회를 저버리게 하심으로써 교회의 악을 제거하시기도 하신다. 베드로 사도가 잡혀 옥에 갇혔을 때 성도들을 그의 안전을 위해 열심히 기도했어도 그가 막상 천사의 도움으로 감옥을 빠져나오게 되자 그의 영혼인 줄 알고 혼란해 하기도 했다. 우리의 믿음의 수준과는 상관없이 그리스도 앞에 옳은 일이라면 말씀과 기도로 순종하며 나아가야 한다.
사라가 속으로 웃은 것은 경멸조의 비웃음이 아니라 체념에 가까운 헛웃음이었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이미 자기와 아브라함은 둘 다 생물학적으로 임신할 가능성이 전혀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이런 사라의 마음을 그냥 넘기지 않으시고 살짝 어쩌면 집요하게 책망하신 것은 그녀의 믿음을 붙들어 주시기 위한 목적인 것으로 보인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옷깃을 잡아 혈우병이 나은 여인을 굳이 군중 앞에서 찾으시며 드러내신 이유는 그 여인이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육신만 구원 받는 것이 아니라 병고침을 통해사 예수님을 참 구원자로 믿어 진정한 구원을 주시기 위함이셨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사라가 그런 불신의 상태에 머무르게 두시지 않으시고 굳이 그녀의 마음을 드러내어 추궁하신다. 물론 사라는 그런 하나님의 추궁에 두려워하여 순간적으로 부인하기는 했어도 나중에는 하나님의 언약을 믿게 된 것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사도 바울이 히브리서 11장에서 사라의 믿음을 언급하기 때문이다.
사라와 같이 나이 먹어서도 아름답고 현숙한 여인도 첫 사람 하와의 딸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하와에게서 물려받은 부정적인 여성성이 있게 마련이다. 임신한 여종 하갈의 멸시를 받았을 때 생명을 위협할 정도로 보복하여 괴롭혔던 것과 그 책임을 자기가 아니라 남편에게 돌리려고 했던 것과 자기 속마음이 탄로나자 자기도 모르게 부정하고 심지어 하나님 앞에서 거짓말을 한 것 등이 그러하다. 이는 하와가 하나님의 심문을 받을 때 제대로 답변하지 않고 엉뚱한 대답을 함으로써 위기를 모면하려 했던 것에 기인한다. 그래서 하와의 딸인 사라 조차도 자기도 모르게 그 성향을 이어받아 거짓말로 위기를 모면하려 했던 것이다. 이런 부정적인 여성성은 특히나 남녀 관계에서도 적지않이 관찰되는데, 예를 들어 같은 잘못을 저질렀어도 남자의 경우에는 재빨리 잘못을 시인하고 사과하여 용서를 구하는 반면에 여자의 경우에는 그러기보다는 우회적으로 사과인듯 아닌듯 돌려 말하거나 남자의 애정에 의존하여 넘어가려는 경우가 많다. 여자들이 그렇게 나오면 대체로 남자들은 마음이 약해져서 여자의 잘못을 흐지부지 덮고 넘어가는게 보통이지만 하나님께서는 공의로우시므로 아무리 사랑하는 자녀라도 잘못을 시인하지 않고 거짓말을 하는 것을 그냥 두고 보지 않으시고 반드시 바로 잡으신다. 예수님께서는 마르다를 사랑하셨어도 그녀의 분주한 불평을 따끔하게 책망하셨고 사마리아 여인에게 복음을 전하시면서도 가장 민감한 남편 이야기를 아프게 꺼내셨으며 수로보니게 여인의 귀신들린 딸을 고쳐주실 것이면서도 일부러 그녀를 향해 개만도 뭇하다고 책망하셨다. 여성이 스스로를 연약한 그릇이라 내세우면서 변명과 합리화를 하는 것은 설령 남자들에게는 통할 수 있어도 그리스도 앞에서는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