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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는 지옥이다",
"개인의 불행은 예외로 보이지만 이 세상
은 어디나 불행으로 가득 차 있다",
"행복은 고통이 적은 상태만을 의미하며
그 행복조차도 곧 권태로워진다"
염세주의 철학자로 알려진 쇼펜하우어는 고통받
는 것이 아니라면 인간이 살아가는 목적을 찾아
보기 어렵다고 말합니다.
그가 보기에 산다는 건 고통이고, 오래 산다는 건
더 오래 고통받는 것뿐이었죠.
어쩌면 그의 말대로 삶을 산다는 건 고통일지도
모릅니다.
역사를 살펴보면 죽고 죽이는 참혹한 전쟁은 끊
임없이 일어나고, 온갖 질병이 창궐하고, 비극적
인 사고가 벌어져왔습니다.
우리는 평화로운 일상을 당연한 날들로 생각하지
만, 인간 문명의 역사에서 평화는 전쟁과 전쟁 그
사이에 있는 잠깐의 휴식과 같은 것처럼 보이죠.
개인의 삶 역시 고통의 연속입니다. 인간은 채워
지지 않는 욕망을 놓지 못하고 결핍과 갈망 속에
서 고통받습니다.
개개인의 속한 위치에서 적게 가진 사람들은 적
게 가진 사람들끼리, 많이 가진 사람들은 많이 가
진 사람들끼리 더 많은 걸 가져가기 위한 투쟁이
광범위하게 벌어집니다.
투쟁 속에서 패자는 모욕감과 상실감을 떠안으며
고통을 느끼고, 승자는 전리품을 몽땅 챙겨가며
잠깐의 행복을 느끼죠.
그러나 그렇게 느낀 행복은 멀지 않아 권태로움
으로 바뀌고 맙니다. 인간은 내 손에 들어와 당연
해진 것들에 대해서는 금방 싫증을 느끼니까요.
가진 것에 권태를 느끼는 순간 인간은 다시 또 욕
망을 추구하며 고통받습니다.
이렇게 얻기도 힘들고, 느끼고 있어도 금방 권태
로움으로 바뀌어버리는 행복은 우리에게 소극적
으로 작용하지만 고통은 그렇지 않습니다.
고통은 정도의 상관없이 강렬하게 우리에게 작용
합니다. 쇼펜하우어의 말대로 인간은 건강할 때
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지만 구두가 작아 발이
조금만 죄어와도 금방 고통을 느낍니다.
또 자신이 하던 일이 순탄할 때는 의식하지 못하
다가 조금이라도 틀어지면 그것에서 스트레스를
받죠.
지금까지 100억을 벌었어도 당장 내일 잃게 될 1
0억에 전부를 잃은 것 같은 고통을 느끼는 게 인
간입니다.
게다가 심각한 병에 걸리는 고통,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당하는 고통,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크나큰 고통은 우리에게 깊은 상처를 남깁니다.
금방 사라져 버리는 행복과 달리 고통은 우리에
게 적극적이고 직접적인 방식으로 작용합니다.
이렇게 본다면 수식어구를 모두 뺀, 있는 그대로
의 인간의 삶은 행복을 느끼지 못하도록 설계되
어 있다고 말해도 지나치지 않아 보일 정도입니
다.
그렇기에
"오늘은 고약하다. 앞으로 점점 더 고약해질
것이다. 마지막 날이 다가올 때까지"
[쇼펜하우어 철학적 인생론], 쇼펜하우어, 권
기철 역, 동서문화사, 2020, p.17
라고 말하며 "삶은 고통이라는 걸 인정하라"라는
쇼펜하우어의 말을 받아치기가 어렵겠다는 생각
까지 드는데요.
그렇다면 쇼펜하우어는 왜 그토록 인간의 삶을
비관적으로 보았을까요? 그리고 고통으로 가득
찬 삶 속에서 어떻게 하면 벗어날 수 있다고 말했
을까요?
오늘은 쇼펜하우어의 책 <의지와 표상으로부터
의 세계> 그리고 <철학적 인생론>, 이렇게 두 권
의 책을 바탕으로 그의 철학을 알아보겠습니다.
인간의 삶이 고통인 이유
쇼펜하우어가 인간의 삶이 고통일 수밖에 없다고
말하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그것은 인간이 '왜 욕망하는지도 모른 채 욕망하
는 것을 멈출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죠.
인간은 자신이 하는 행위의 배경이나 근본적인
이유를 모른 채 삶을 살아갑니다.
죽을 위기에 처하면 자신의 삶이 얼마만큼 불행
하든, 얼마만큼 행복하든 상관없이 모두가 살아
남기 위해 분투합니다.
"왜 살아남아야 할까?"라는 생각을 하기 이전에
살아남고자 하는 삶에 대한 의지는 이미 발동되
어 있죠.
마찬가지로 식욕을 느끼는 것에도, 성욕을 느끼
는 것에도 그 유를 알 수 없지만 인간은 그것들
을 추구하며 살아갑니다.
우리는 나의 생각과 계획대로 내 삶을 꾸려 나간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인생을 살아가며 시행착오를 거치더라도
한걸음 한걸음 미래를 향해 직접 걸어가고 있다
고 생각하죠.
하지만 쇼펜하우어가 보기에 인간은 맹목적인 삶
의 의지에 등 떠밀려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삶에 대한 의지는 모든 개인의 판단과 생각에 앞
서 있습니다.
인간은 스스로 정한 삶의 목표에 따라 산다기보
다 일단 세상에 나와 삶의 의지를 발휘해 살아가
면서 적당한 목표를 찾는다는 것이죠.
그렇기에 아무리 멋지게 포장해서 인간 삶에 의
미를 부여를 한다고 해도, 결국 모든 인간은 삶의
의지의 발동으로 맹목적으로 살아갈 뿐입니다.
그리하여 인간은 죽지 않고 존재하는 한 끊임없
이 무언가를 갈구합니다. 하지만 '채워질 수 없음'을 전제하는 욕망의 특성상 인간의 욕망은 언제나 충족되지 못하죠.
돈을 욕망하는 인간은 돈을 벌면 벌수록 더 큰돈
을 벌고자 하고, 권력을 욕망하는 인간은 힘이 세
지면 세질수록 더 큰 힘을 갈구합니다.
게다가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원하는 걸 얻
지도 못하죠. 오직 소수의 사람만이 자신이 원했
던 것을 이뤄가면서 행복을 느낍니다.
하지만 인간은 이미 가진 것에 대해선 금방 권태
를 느끼는 존재이기에 성취를 통해 찾아오는 행
복을 느끼는 순간은 잠깐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행복 역시 권태라는 고통을 향해 가는 과정일 뿐
이죠.
그렇다고 해서 이미 가진 것에 만족하는 삶도 대
안이 될 수 없습니다. 이것이야말로 권태로움을
부여잡으며 사는 삶이기 때문이죠. 권태는 채울
수 없는 욕망을 추구하는 것보다 더 고통스러울
수 있습니다.
무언가를 갈구하면서 쟁취하기 위해 열중하는 사
람은 죽음을 고려하지 않지만, 삶의 권태로움에
빠져나오지 못하는 사람은 스스로 생을 마감하기
도 하니까요.
쇼펜하우어가 보는 인간은 욕망하는 데서 오는
고통에 신음하거나, 권태로움에서 오는 고통에
신음하기를 반복하며 매 순간 고통 속에서 살아
가는 존재였습니다.
그렇기에 그는 고통받는 것이 아니라면 인간이
살아가는 목적을 찾아보기 어렵다고 말한 것이
죠.
자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삶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인간의 삶을 철저한 고통이라고 본
쇼펜하우어에게는 어떤 해결책이 있었을까요?
쇼펜하우어는 굉장히 철학자 다운 방식으로 삶의
고통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제시합니다.
삶의 고통에서 벗어나는 방법
쇼펜하우어가 말하는 삶의 고통에서 벗어나는 방
법을 논하려면 먼저 그의 세계관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쇼펜하우어는 세계를 움직이는 힘은 이유와 근원
을 알 수 없는 맹목적인 의지라고 보았습니다.
그가 말하는 의지는 모든 사물의 내적 원리이고
생명의 원리이자 에너지입니다.
종교적인 관점에서 세계가 신의 뜻에 따라 움직
인다면, 쇼펜하우어의 관점에선 신의 자리를 의
지가 대신합니다.
둘의 차이는 신은 도덕과 윤리의 근원으로 우뚝
서서 인간을 심판하는 방식으로 세계를 움직이지
만, 쇼펜하우어가 말하는 의지는 신과 같은 뜻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점이죠.
쇼펜하우어가 말하는 의지는 어떤 원인과 목적
없이 그저 맹목적으로 작용합니다. 이러한 의지
의 작용에 떠밀려 살면서 인간은 고통을 느끼죠.
세계를 움직이는 근원적인 힘이 의지라면, 그래
서 모든 인간이 의지의 작용에 떠밀려 산다면, 본
질적으로 나와 타인은 다르지 않습니다. 모든 인
간은 동일한 내적 원리에 의해서 추동하는 존재
이니까요.
그러나 인간은 각자의 타임라인에서 자신의 공간
을 점유하며 살고 있기 때문에 스스로 독자적인
정체성을 갖고 있으며 개별화되어 있다는 착각에
빠집니다.
하지만 세계를 움직이는 근본 에너지인 의지는
모든 세기의 달력과 지도를 가진 인간에게 영향
을 미칩니다. 그리고 인간이 죽는다고 해도 의지
의 작용은 변하지 않고 그대로 유지되죠.
이런 점에서 쇼펜하우어는 한 명 한 명의 인간은
그저 의지의 표상이라고 말합니다. 그는 표상의
세계에서 나와 타인이 다른 것처럼 보이지만 의
지의 세계에서 모든 사람은 동일한 존재라고 보
았죠.
이러한 세계관으로부터 쇼펜하우어는 삶의 고통
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제안합니다.
그가 제시하는 삶의 고통에서 벗어나는 주요한
방법은 개별화의 원리를 극복해 타인을 연민하고
금욕적인 삶을 사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을 윤리적인 경구로 만든다면
"이 세계가 나와 하나임을 깨닫고 만물
에 고통을 느끼며 금욕적인 삶을 살아라!"
로 축약할 수 있습니다. 이제 하나씩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인간이 고통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먼저 '나 자
신'이라는 틀에 갇힌 개별화의 원리 극복하는 데
있습니다.
인간이 삶의 의지에 의해서 맹목적으로 살아간다
는 사실을 꿰뚫지 못하는 사람은 자신을 세계의
중심에 두고 나의 욕심을 채우는 데 급급합니다.
하지만 내가 살고자 하는 이유가, 돈을 좇고자 하
는 이유가, 무언가를 탐하는 모든 행위에 대한 이
유가 맹목적인 삶의 의지에서 비롯됨을 깨닫는
순간 욕망의 헛됨을 알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모든 인간은 결국 동일한 힘, 맹목적인
의지에 떠밀려 자신의 살아갈 뿐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면, 나와 저 사람이 독립되어 있는 것처
럼 보여도 의지의 세계에서는 결국 같은 존재라
는 걸 인식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부터 동일성에 기반한 연민이 가능해집니
다. 이제 우리는 탐욕을 부리며 나의 몫을 빼앗고
자 하는 경쟁 상대조차 연민할 수 있습니다.
그 역시 의지라는 시계태엽이 감긴 인형처럼, 삶
의 의지에 떠밀려 자신이 왜 그것을 차지하려고
하는지 이유도 모른 채 에너지를 쏟고 있는 것뿐
이니까요.
또한 힘겨운 상황 속에서 꿋꿋이 버티며 살아가
는 사람을 보면서도 삶에 대한 의지로 인한 고통
을 함께 느끼며 그를 연민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모든 인간이 맹목적인 삶의 의지에 의해
고통받고 살아간다는 사실을 깨닫고 개별화의 원
리를 극복한 인간은, 자신과 남을 구분하지 않고
타인의 고통을 나의 고통으로 느낄 수 있습니다.
이로부터 만물이 곧 나 자신과 다르지 않다는 인
식에 다다라 모든 것들에 대한 연민을 느끼게 되
죠.
세상의 모든 고통을 떠안으면 자신이 추구해 왔
던 쾌락에서 역겨움을 느끼기 시작합니다. 이것
은 자발적인 포기와 체념 그리고 철저한 무관심
에 기반한 금욕에 가까워지는 첫걸음이 됩니다.
이때부턴 나에게 즐거움을 주는 것들을 애써 찾
을 필요도 없고, 애착을 느낄만한 대상을 찾을 필
요도 없습니다. 이는 곧 세상에 있는 모든 것으로
부터 초연해지는 '무의 상태'에 들어감을 의미하
죠.
이런 태도는 가진 것에 만족하는 소박한 태도와
도 다릅니다. 어떤 것도 가질 필요도, 가질 이유
도 없다고 생각하는 순간 권태를 느낄 여지도 사
라집니다.
이렇게 만물을 연민하며 금욕적인 삶을 실천하는
태도는 삶의 의지를 부정하는 것과 같습니다.
무언가를 끊임없이 갈구하게 만드는 삶의 의지를
부정할 수 있다면, 그때 인간은 비로소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쇼펜하우어가 제시하는 삶의
고통에서 벗어나는 방법이었죠.
쇼펜하우어가 말하는 삶, 실천할 수 있을까?
이 세계가 나와 하나임을 깨닫고 만물에 고통을 느끼며 금욕적인 삶을 살아라!
어떠신가요. 쇼펜하우어가 말하는 삶의 고통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실천할 수 있으신가요?
그가 말하는 방법은 마치 경지에 도달한 성인의
삶의 태도와 비슷해 보입니다. 더불어 불교철학
의 향기가 물씬 풍기죠.
실제로 쇼펜하우어는 서양철학자들 중 불교를 가
장 긍정적으로 평가했던 철학자였습니다.
그의 철학 속에는 '세상'과 '나'가 하나라는 불교
의 범아일여(梵我一如) 사상이 묻어 나옵니다.
https://brunch.co.kr/@2a9700febe424b5/72
죽지 않고 자유로워지는 길은 없을까? (참고로
쇼펜하우어는 자살은 나쁜 것이라고 했다.) 쇼펜
하우어는 그 길을 제시하고 있다. 의지를 부정하
는 것. 표상의 세계(현상계)에 의지가 존재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을 토대로 하고 있다. 의지를
부정한다면, 표상의 세계를 뒷받침하고 있는 의
지도 사라진다. 이는 곧 무(無 = 죽음)의 경험을
낳게 될 것이다.
방법은 크게 세 가지다.
첫 번째 연민, 타인의 고통에 예민해지는 것. 이
사람의 고통이 내 고통인양 상상하라고 한다. 타
인의 고통과 나의 고통을 구분하지 않는 상태. 표
상 세계의 주객 분열 상태가 사라진다. 이로 인해
의지의 부정에 준하는 결과를 얻을 수 있다. 이것
이 의지, 욕망과 무슨 관련이 있을까 생각해봤다.
결국 나의 욕망에 갇히지 않고 타인의 고통에 공
감하는 일이기 때문에 의지, 욕망하는 삶의 중단
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두 번째가 종교적 금욕이다. 불교의 금욕실천. 욕
망을 억제하는 가운데 의지의 부정에 도달할 수
있다. 이는 의지와 욕망의 관계를 이해했다면 부
연 설명이 필요하지 않으리라 본다.
세 번째가 미적 경험. 아름다운 것을 경험할 때
미적 관조를 행하게 되는데, 미적을 바라보는 ‘어
떤 태도’와 ‘상황’에 의해서 의지를 중단시킬 수
있다. 이 설명이 매우 모호한데, 복습하다가 궁금
해서 온라인 게시판에 남겨 답변들을 들었다. 아
주 긴 설명이었으나 요약하면 미적 관조를 통해
예술 작품에 몰입되어, 관조하는 주체와 대상이
되는 작품 간의 구분이 사라지는데, 이를 통해서
주체는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게 된다. 그래서 의
지의 지배를 받지 않게 되는 것이다. 이는 어떤
것에 완전히 몰입하다 보면 내가 어디에 있는지
를 잊은 상태가 되는 경험을 해본 사람이 있다면,
쉽게 이해할 것이다. 개인적으로 그런 경험을 한
적이 있어서 단박에 이해할 수 있었다. (쇼펜하우
어에 의하면 이러한 경험은 특별한 재능을 전제
로 한다. 대다수의 삶은 뛰어난 예술작품을 이해
하지 못한다고 한다. 그러나 나에게 특별한 재능
이 있어서 그런 몰입감을 경험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자유로운 사고만 있다면 누구나 경험
할 수 있는 것이다. 다만 쇼펜하우어는 이러한 재
능을 사람들이 잠재적으로 가지고 있을 뿐 실현
시키니 못한다고 말했다고 한다!)